LOGIN[채이]
"명단 주세요."
목요일 밤. 식탁에 볼펜과 수첩을 펴 놓고 말했다.
서재 문 앞에서 그가 멈췄다.
"무슨 명단."
"토요일 식사요. 누가 오시고 어디 앉으시고, 뭘 좋아하시고 뭘 싫어하시는지."
"……시험 봅니까."
"상견례 전엔 원래 이렇게 해요. 양가 어른 자리 잘못 앉히면 그날 다 망해요. 누가 누구랑 사이 안 좋은지, 누가 매운 거 못 드시는지. 모르고 들어가면 지뢰밭 산책이에요."
그가 맞은편 의자를 끌어 앉았다. 회의 들어가는 사람의 자세였다.
"받아 적으세요."
[재헌]
천천히 불렀다.
"할머니. 상석. 말이 느리니까 끝까지 들을 것. 잣 드시면 목이 붓습니다. 집에선 잣을 안 올립니다."
그녀가 받아 적고 밑줄을 두 번 그었다. 볼펜 누르는 소리가 경쾌했다.
"아버지는 안 오십니다. 해외 12년째. 어머니, 한서경 관장. 갤러리. 말이 짧고 정확합니다. 틀린 말 하면 바로 고치십니다. 옷 얘기를 제일 먼저 하실 겁니다."
"옷."
"사람을 옷으로 한 번 보시고, 말로 한 번 보십니다."
그녀가 동그라미를 쳤다.
"작은아버지. 강태준 부회장. 호텔을 팔자는 쪽. 식사 내내 숫자 얘기. 작은어머니, 서영주 여사. 말끝에."
단어를 골랐다.
"가시가 있습니다. 웃으면서 찌릅니다. 대꾸하면 더 찌르고, 가만있으면 계속 찌릅니다."
"그럼 어떻게 해요."
"모릅니다. 32년째 방법을 못 찾았어요."
그녀가 볼펜을 멈추고 나를 봤다. 나는 진지했다. 그녀가 웃음을 참으며 적었다. 거꾸로 읽혔다. 작은어머니 — 방법 없음.
"민혁 형. 웃습니다. 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가 낮춘 게 아니다. 알아서 낮아졌다.
"웃는 얼굴로 뭘 묻든, 대답은 짧게 하세요."
"……네."
"소율이는 당신 편입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그녀가 수첩을 덮었다. 표지에 봄빛 로고.
"그 수첩에 다른 집 상견례도 다 적혀 있습니까."
"네. 이백 집 넘게요."
"우리 집은 몇 번째입니까."
그녀가 수첩을 다시 펴서 셌다. 손가락이 빨랐다.
"이백열세 번째요."
"……제일 어려운 집일 겁니다."
"그럴 것 같아요."
둘이 동시에 조금 웃었다. 이 집 식탁에서 웃음이 난 건 처음이다. 식탁이 놀랐을 것이다.
[채이]
토요일 오후 네 시. 봄빛 신부대기실. 오늘 두 번째 예식을 끝낸 참이었다.
정장을 벗고 남색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은비가 등 뒤 지퍼를 올려 줬다. 원장님은 소파에 앉아 나를 감독했다.
"젓가락은 시어른들이 드신 다음에 들어."
"네."
"국은 소리 내지 말고."
"네."
"누가 뭐라고 찔러도 웃어. 웃으면서 할 말은 해. 너 그거 잘하잖아. 신부 어머님들 상대로."
"원장님, 저 거기 며느리로 가는 거예요. 매니저로 가는 거 아니고."
"그게 그거야. 남의 집 잔치에 들어가서 판 안 깨지게 하는 거."
원장님은 그 말을 하고 자기가 한 말에 만족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은비가 지퍼를 다 올리고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야. 너 이거 입으니까 진짜 며느리 같다."
"칭찬이야?"
"모르겠어. 반반."
여섯 시 십오 분 전.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 한 줄.
[뒷문입니다.]
은비가 창밖을 내다봤다. 쓰레기통 옆에 검은 차가 서 있었다. 운전석 옆에 그가 서 있었다. 양복. 쓰레기통. 그 조합을 봄빛 직원들은 벌써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탁 실장이 주방 창으로 손을 흔들었고, 그는 거기에 고개를 숙였다.
"야. 너희 남편 쓰레기통 옆이 제일 잘 어울려."
"그것도 반반이야?"
"아니. 그건 칭찬이야."
토요일 저녁 여섯 시. 도원호텔 본관 한식당 «연경». 별실 문 앞.
왼손목 안전핀을 딸깍 열었다 닫았다. 그가 그 소리를 들었다.
"긴장합니까."
"상견례 이백열두 번 들어갔는데요, 제가 앉는 건 처음이에요."
남색 원피스를 입었다. 무릎 아래, 장식 없음. 소율이 사흘 동안 사진 스무 장을 보냈다. 그중 제일 수수한 걸 골랐다. 소율은 «언니 그건 장례식 옷이야»라고 답장했다. 나는 «상견례는 원래 반쯤 장례식이야»라고 보냈다.
"잘 어울립니다."
"진짜요?"
"거짓말 안 하기로 했잖습니까."
대답하기 전에 문이 열렸다.
할머니, 작은아버지 내외, 민혁. 왼쪽 끝에 소율. 그 옆에 회색 실크 블라우스.
한서경 관장이 나를 위에서 아래로 봤다.
"그 옷, 누가 골랐니."
옷이 먼저였다. 명단대로다. 명단은 배신하지 않는다.
"제가요. 소율 씨가 스무 벌 보여 줬는데, 그중에서요."
"왜 그걸."
"오늘은 제가 보이는 자리가 아니라 어른들 얘기 듣는 자리라서요."
관장님 눈썹이 일 밀리미터 움직였다.
"……앉아라."
소율이 식탁 밑에서 엄지를 세웠다.
"어머, 예식장에서 일한다더니."
서영주 여사가 웃었다. 진주 목걸이가 반짝였다.
"오늘은 서빙 안 해도 되니 편하겠네요. 앉아 있으려니 어색하죠?"
가시. 명단대로. 명단은 정말 배신하지 않는다.
"네, 조금요. 앉아 있으니까 음식이 어떻게 나오는지 더 잘 보여요."
"뭐가 보이는데요?"
"순서요. 이 집은 전채 다음에 죽이 나오네요. 요즘 드문데. 어른들 모시는 자리라 그런가 봐요."
여사님 웃음이 반 박자 늦게 돌아왔다. 할머니가 찻잔을 들며 나를 한 번 봤다.
전채가 나오고 죽이 나왔다. 직원 둘이 은색 쟁반에 사기그릇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할머니 앞부터.
뽀얀 죽. 위에 고명 서너 알.
그 고명을 봤다. 연회장에서 오 년 동안 수천 그릇을 내보낸 눈이다. 반달 모양, 살짝 누런 알갱이.
잣이다.
할머니 숟가락이 내려갔다.
"잠깐만요."
말이 먼저 나갔다. 방 안의 눈이 전부 나한테 왔다. 조명 받는 건 신부 입장 이후 두 번째다. 둘 다 원치 않았다.
옆에 선 직원에게 조용히 물었다.
"실례지만 이 죽 뭐예요?"
"잣죽입니다, 사모님."
"원래 메뉴도 잣죽이었어요?"
"아…… 원래 전복죽이었는데, 어제 오후에 변경 요청이 들어와서요."
"회장님 그릇만이라도 전복죽으로 바꿔 주실 수 있을까요. 없으면 흰죽이라도요."
직원이 할머니를 봤다. 할머니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릇을 한참 들여다봤다.
"……잣이구나. 나 잣 먹으면 목이 붓는다."
할머니가 식탁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봤다. 그 눈이 누구에게 오래 머무는지, 나는 안 보려고 애썼다. 안 봐도 들렸다. 진주 목걸이가 달칵거리는 소리.
"이 집에서 그걸 아는 게 재헌이랑 이 아이뿐이더냐."
"어머님, 전복이 요즘 물이 안 좋다고 해서요. 몸에 좋은 잣으로 바꾸라고 했는데, 어머님이 못 드시는 줄은 제가 깜빡."
"사십 년을 깜빡했구나."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느렸다. 그래서 무거웠다.
오 분 뒤 전복죽이 들어왔다. 할머니가 한 숟가락 뜨고 나를 봤다.
"맛있다. 네 덕이다."
고개를 숙였다. 식탁 밑에서 손이 떨렸다. 안전핀을 찾아 열려는데, 옆에서 누가 그 손목을 가만히 감쌌다.
그였다. 앞을 보고 밥 먹는 척. 식탁 밑의 손만 내 손목 위에. 엄지로 안전핀 위를 한 번 쓸었다.
열지 않아도 된다는 뜻 같았다. 오 년 동안 신부들 손목을 잡아 준 적은 많았다. 누가 내 손목을 잡아 준 건 처음이었다.
손을 빼지 않았다. 빼는 법을 잠깐 잊었다.
식사는 조용히 흘렀다. 작은아버지가 객실 점유율 얘기를 십오 분 했다.
"요즘 누가 호텔에서 연회를 합니까. 다들 작게 하지. 그랜드볼룸 주말 절반이 비어요. 그 땅이면 차라리."
"태준아."
할머니가 이름만 불렀다. 작은아버지가 말을 삼켰다.
속으로 수첩을 폈다. 주말 절반이 빈다. 다들 작게 한다. 봄빛에서 매주 듣는 얘기다. 요즘 신부들은 이백 명보다 오십 명을, 큰 홀보다 밥 맛있는 홀을 찾는다. 남의 호텔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직업병은 쉬는 날이 없다.
소율의 문자가 식탁 밑에서 계속 울렸다.
[새언니 방금 레전드]
[작은엄마 얼굴 봤어요?]
[저 오늘부터 언니 팬클럽 회장]
디저트로 약과가 나왔다. 관장님이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그 영상. 봤다. 무전 녹음. 떡 많이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관장님은 약과를 반으로 잘랐다.
"사람 배가 부르면 덜 궁금해한다. 맞는 말이더구나. 우리 갤러리 개막식에 써먹어야겠어."
관장님은 웃지 않았다. 그런데 옆에서 그가 숨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나중에 들었다. 어머니가 남의 말을 써먹겠다고 한 건 처음이라고.
[재헌]
할머니 팔을 잡고 회전문을 지났다. 할머니 차가 불을 켜고 기다렸다.
"재헌아. 네 작은어미가 잣을 몰랐을 것 같으냐."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도 대답을 바란 게 아니었다.
"모를 리가 없지. 그래도 오늘은 그냥 둔다. 내가 소리 높이면 저 아이가 불편해진다. 첫날부터 시어른들 사이에 끼인 사람이 되겠지."
할머니가 나를 올려다봤다.
"잣을 보자마자 숟가락보다 말이 먼저 나가더라. 그런데 소리는 안 높였다. 직원한테 조용히 묻고, 조용히 바꿨지. 누구 탓도 안 하고."
"예식장에서 오 년 일했답니다."
"그래. 남의 잔치를 오 년 동안 살린 손이다."
할머니가 차에 올랐다. 문을 닫기 전에.
"식탁 밑에서 손 잡은 거, 나 다 봤다."
할 말이 없었다. 차가 모퉁이를 돌 때까지 서 있었다. 돌고 나서야 알았다. 단추를 쉬지 않고 돌리고 있었다.
손목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 안전핀을 쓸었던 엄지 쪽.
[채이]
지하 주차장은 서늘했다. 그의 차 옆에서 기다렸다. 소율 문자가 열두 개. 마지막은 «언니 근데 오빠가 식탁 밑에서 뭐 했어요? 오빠 귀 빨갰는데».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또 쓰다가 지웠다.
구두 소리가 울렸다. 그의 걸음이 아니었다. 더 느리고 더 가벼웠다.
"수고했어요, 제수씨."
강민혁이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웃고 있었다.
"아까 잣죽. 대단하던데요. 우리 어머니가 요즘 깜빡깜빡하셔서."
"아니에요. 제가 괜히 나섰어요."
대답은 짧게. 명단에 그렇게 적혀 있다.
그가 조금 더 웃었다. 한 걸음 다가왔다. 목소리를 낮췄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사촌 언니가 지금 어디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