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채이]
"궁금해요."
짧게. 명단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한 박자 쉬었다.
"그런데 전무님한테 듣고 싶진 않아요."
그의 웃음이 잠깐 멈췄다. 곧 돌아왔다. 아까보다 넓게. 고무줄 같은 웃음이다. 늘어났다 줄었다 하지만 끊어지진 않는다.
"재밌네요, 제수씨. 식장에서도 그 생각 했는데."
"……"
"걱정 마요. 언니는 잘 있어요. 아주 잘."
그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 번 두드리고 자기 차 쪽으로 걸어갔다. 구두 소리가 기둥 사이로 멀어졌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재헌 씨, 아니 강재헌 씨가 나왔다. 민혁의 뒷모습을 봤다. 걸음이 빨라졌다.
"무슨 얘기 했습니까."
"언니 어디 있는지 궁금하지 않냐고요. 궁금한데 전무님한테 듣고 싶진 않다고 했어요. 짧게."
그의 굳었던 턱이 천천히 풀렸다.
"……잘했습니다."
"근데 그 사람, 언니가 아주 잘 있대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는 대답 대신 차 문을 열었다. 차에서도 말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며 단추만 돌렸다.
나는 묻지 않았다. 서로한테 거짓말 안 하기로 했으니까, 말 안 하는 건 아직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 둘만 아는 해석이다. 법원에서는 안 통할 것이다.
[재헌]
월요일 밤. 식탁.
"금요일에 자선 갈라가 있습니다. 결혼 뒤 첫 공식 자리."
"네."
"그날은 서로 이름 부르면 안 됩니다. 부부가 풀네임으로 부르면 기자들이 씁니다. 남 같다고."
"그럼 뭐라고 불러요."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할 말을 미루는 사람의 동작이다. 알면서 했다.
"……여보."
그녀가 누룽지를 씹다 멈췄다.
"여, 보요."
"보통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까."
"보통은요."
"연습합시다."
그녀가 누룽지를 삼키고 목을 가다듬었다.
"여보."
"……식당에서 직원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쪽이 해 봐요."
숨을 들이쉬었다.
"여보."
"……결재 서류 읽는 것 같아요."
서로 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웃음이다. 내 귀가 뜨거워졌다. 이유는 조사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 휴대폰이 울렸다. 영상 통화. 소율.
"언니! 오빠 옆에 있죠? 둘 다 나오게 해 봐요. 금요일 갈라 연습하죠? 호칭 정했어요?"
"여보."
내가 대답했다. 소율이 화면 너머에서 뒤로 넘어갔다.
"오빠 방금 그거 뭐야! 국정감사야?"
"소율아."
"언니, 오빠가 그 말 할 때 눈을 봐야 돼요. 눈을 안 보니까 결재 서류가 되는 거예요. 자, 서로 눈 보고. 하나, 둘."
그녀를 봤다. 그녀도 나를 봤다. 식탁 조명 아래 그녀 눈동자가 생각보다 까맸다. 깜빡이는 속도가 빨랐다. 긴장하면 빨라지는 모양이다. 오늘 처음 안 정보다.
둘 다 입을 못 열었다.
"……왜 아무도 안 해요?"
휴대폰을 뒤집었다. 화면 너머로 소율의 비명이 새어 나왔다.
[채이]
화요일 점심. 봄빛 직원 휴게실. 은비가 도시락 뚜껑을 열다 말고 나를 봤다.
"여보를 연습해? 둘이 앉아서?"
"응."
"미쳤다. 너무 귀엽다. 그래서 몇 점."
"둘 다 빵점."
은비가 김밥을 입에 문 채 웃다가 사레가 들렸다. 준수가 물을 떠다 줬다.
"들어 봐. 나 도경 오빠랑 이 년 사귀었는데, 처음에 자기라고 부를 때 입에서 안 나왔어. 근데 한 번 튀어나온 적이 있거든. 오빠가 촬영 끝나고 사다리에서 미끄러질 뻔했을 때. 자기야 조심해! 생각도 안 하고."
은비가 젓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런 건 연습으로 안 돼. 급할 때 튀어나와야 진짜야."
"우린 진짜 아니잖아."
말하고 나서 도시락을 내려다봤다. 은비가 대답 대신 계란말이 하나를 얹어 줬다.
"그래. 1년짜리니까. 근데 너 방금 좀 서운한 얼굴이었다."
"안 서운해."
"알았어. 안 서운한 얼굴이었어."
수요일에 택배가 왔다. 긴 옷 상자. 보낸 곳, «갤러리 서경».
짙은 초록색 드레스. 반짝이 없이 허리선만 곱게 잡힌 옷. 쪽지 한 장.
[내 개막식 때 입던 옷이다. 네 치수로 줄여 놨다. 금요일에 입어라. — 한서경]
쪽지를 들고 한참 서 있었다. 그가 서재에서 나와 상자를 봤다. 드레스 허리선을 오래 봤다.
"……식장 영상 보셨으니까요. 어머니는 치수를 눈으로 잽니다."
"이거 좋은 뜻이죠?"
"어머니가 자기 옷을 남한테 준 건."
그가 말을 끊었다.
"처음입니다."
[재헌]
그날 밤 어머니께 전화했다. 내가 먼저 건 게 몇 년 만인지 세어 보다가 그만뒀다. 세면 숫자가 나온다. 숫자가 나오면 곤란하다.
신호가 네 번 갔다.
"무슨 일이니."
"옷, 받았습니다. 감사하다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본인이 하면 되지."
"내일 직접 드린답니다. 오늘은 제가."
어머니가 잠깐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붓 씻는 소리가 났다. 갤러리 작업실에 계신 모양이다. 어머니는 전시가 없어도 밤마다 붓을 씻는다. 아버지가 떠난 뒤로 생긴 습관이다.
"허리는 맞던?"
"입어 보는 건 못 봤습니다."
"……그래. 방이 따로라더니."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 필요한 정보만 정확하게 가지고 계신다.
"재헌아."
"네."
"너 대학 졸업식 때 준 단추. 아직 하니."
손이 멈췄다. 마침 돌리고 있었다.
"합니다. 오늘도."
"고정쇠가 약하다고 했는데. 부러지지 않았어?"
"부러졌습니다. 흰 실로 달았습니다."
"누가."
"……그 사람이요."
긴 침묵. 붓 씻는 소리도 멈췄다.
"그래."
그게 다였다.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소매를 봤다. 은색 네모 뒤의 흰 매듭. 그 매듭 하나로 어머니가 무슨 계산을 하셨는지는 모른다. 다만 어머니의 «그래»는 두 종류가 있다. 끝났다는 «그래»와 알았다는 «그래». 오늘 것은 뒤쪽이었다.
[채이]
금요일 저녁 일곱 시. 도원호텔 그랜드볼룸.
입구에서 방을 한 번 훑었다. 원형 테이블 서른 개, 무대, 현악 사중주. 버릇처럼 비상구와 음향 콘솔부터 찾았다.
"뭘 봅니까."
"비상구요. 그리고 저쪽 음향 담당 분, 마이크 선을 무대 계단에 걸쳐 놨어요. 누가 걸려 넘어지겠어요."
그가 지나가는 직원에게 한마디 했다. 삼십 초 뒤 선이 치워졌다.
"오늘은 손님입니다."
"알아요. 근데 눈이 자꾸 가요."
나는 그의 팔에 손을 얹고 테이블 사이를 돌았다. 이름을 외우고, 웃고, 짧게 대답했다. 초록 드레스를 알아본 사람이 셋. 셋 다 "한 관장 옷이네요" 하고 나를 다시 봤다. 옷이 나보다 유명했다. 괜찮다. 오늘 드레스 코드는 «시어머니 인증»이었다.
여덟 시 반. 재단 이사장 부인의 인사말 차례. 해림재단 윤선희 여사. 도원호텔 사외이사이기도 하다고 그가 귀띔했다.
무대 옆 커튼 뒤에서 작은 비명이 났다.
그 소리를 안다. 신부대기실에서 백 번은 들은 소리다.
"잠깐만요."
팔에서 손을 빼고 커튼 뒤로 갔다. 윤 여사가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 얼굴이 하얬다. 비서가 발을 동동 굴렀다.
"지퍼가 터졌어요. 이 분 뒤에 올라가셔야 하는데."
"돌아서 보세요, 여사님."
파우치를 풀었다. 초록 드레스에 남색 파우치. 전혀 안 어울렸다. 그래도 빼놓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건 드레스 코드가 아니라 생존 코드다.
지퍼가 허리께에서 한 뼘 벌어져 있었다. 이가 빠졌다. 채울 수 없다.
안전핀 통을 열었다. 안쪽 주머니의 일곱 개는 건드리지 않았다. 남은 다섯 개 중 세 개를 꺼냈다.
"숨 한 번 들이쉬세요. 네. 멈추세요."
하나, 둘, 셋. 안에서 천을 겹쳐 꽂았다.
"내쉬세요."
윤 여사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움직였다. 버텼다.
"……버티네요."
"인사말 오 분은 충분해요. 계단 올라가실 때만 허리 너무 숙이지 마세요."
윤 여사가 나를 봤다. 초록 드레스와 남색 파우치를 봤다.
"그 예식장 매니저구나. 영상의. 이름 기억할게요."
오 분 동안 드레스는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커튼 밖으로 나오자 한 남자가 앞을 막았다. 방금 이름을 외운 그의 먼 친척. 술기운이 있었다.
"아, 예식장 사모님. 역시 현장 출신은 달라. 오늘도 일하러 오셨어?"
주변 몇 사람이 웃었다. 웃으려고 했다. 입꼬리가 잘 안 올라갔다. 오 년 동안 연습한 웃음이 오늘은 재고가 떨어졌다.
"여보."
등 뒤에서 목소리.
그가 다가와 내 옆에 섰다. 자연스럽게 허리 뒤에 손을 댔다. 파우치 바로 위.
"이리 와요. 윤 이사님이 찾으십니다. 고맙다고."
결재 서류가 아니었다. 직원 부르는 소리도 아니었다.
대답했다. 생각보다 입이 먼저.
"네, 여보."
둘 다 굳었다. 먼 친척이 머쓱하게 잔을 들고 물러났다. 그는 나를 데리고 몇 걸음 걸어 기둥 뒤에서 멈췄다.
"……방금."
"……네."
"연습 안 해도 되겠습니다."
그가 앞을 보며 말했다. 귀 끝이 빨갰다. 나는 드레스 자락만 매만졌다. 은비 말이 맞았다. 급할 때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치고는 집에 오는 내내 그 생각만 했다.
기둥 반대편에서 헛기침. 관장님이었다. 샴페인 잔을 들고.
"옷은 잘 맞는구나. 그건 빼고 오지 그랬니."
눈이 내 허리의 파우치에 가 있었다.
"……이게 없으면 불안해서요."
관장님이 무대 쪽을 봤다. 윤 여사가 꼿꼿한 등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그게 옷보다 쓸모 있었지."
관장님이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낮게 말했다.
"칭찬입니다."
"알아요. 이제 조금 알아들어요."
[재헌]
행사가 끝났다. 주차 요원 팁을 꺼내려고 지갑을 열었다.
카드 칸 맨 안쪽. 작은 플라스틱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하채이.
식 끝나면 돌려준다고 했다. 두 주가 지났다. 그녀는 명찰 얘기를 한 번도 안 했다. 잊었을 수도. 새 명찰을 받았을 수도.
꺼내지 않았다. 지갑을 닫았다.
다음에. 적당한 때에.
적당한 때가 언제인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게 많다.
[채이]
집에 오는 차 안.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모르는 번호.
[채이야, 나 세라야. 나 괜찮아. 미안해.]
[근데 그 사람 조심해. 웃는 사람.]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