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은 후 소희가 고개 돌려 이정남을 향해 말했다."나 먼저 갈게요. 그리고 당분간 출근 못 할 거 같으니까 이 감독님에게 일이 있으면 메시지를 보내달라고 전해줘요."찔린 게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었지만 제작진에게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소희는 이 열기가 지나 팬들이 냉정해질 때까지 숨을 수밖에 없었다."그래, 내가 데려다줄게."이정남이 대답하며 소희를 밖까지 데려다주려 했다. 하지만 소희가 차분하게 컴퓨터를 가방에 챙기며 거절했다."괜찮아요, 나 혼자 갈게요. 걱정 마요. 아무리 많은 사람이 나타나도 나를 막을 수 없어요."소희에게 그럴만한 실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정남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조심하고, 일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네 핸드폰 번호도 곧 인터넷에 폭로될 수 있으니까 미리 새 번호를 준비하고, 바꾸고 나면 나에게도 새 번호를 알려줘.""네. 이현이 다음으로 정남 씨를 노릴 수 있으니 조심해요.""걱정 마."밖으로 나온 소희는 주위를 한 번 살피고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후 민첩하게 별장의 담장을 뛰어넘어 성연희가 주차한 곳에 도착했다.그리고 소희가 차에 오르자마자 성연희는 즉시 차에 시동을 걸어 그곳을 떠났다.소희를 토벌하려고 별장 대문으로 몰려든 팬들은 갈수록 많아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격동되어 심지어 스태프들한테까지 손을 댔다.장면은 놀라울 정도로 통제를 벗어났다.차를 몰고 별장 대문 쪽을 지나가다 그 장면을 목격한 성연희의 예쁜 얼굴에는 노기로 가득했다."이현 그 나쁜 여인이 팬을 이용하여 널 해치려 하더니. 정말 뻔뻔스럽네. 그렇게 죽고 싶으면 내가 직접 보내줄 수도 있는데."소희는 순간 전에 여민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이현이 블루드에서 겪었던 일들...... 보아하니 결사의 각오로 소희한테 달려든 게 분명했다."소희야, 걱정하지 마. 홍보팀이 이미 사람을 사서 언론을 공제하고, 댓글들을 삭제했어. 실검도 곧 철수될 거고."성연희의 화는 이미 극으로 달했다. 그
소희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확실히 쌤통이긴 하지, 임구택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했으니.’그리고 그러는 소희의 모습에 성연희는 마음이 아파 다시 입을 열었다."이제 이 일이 끝나게 되면 너 바로 심명 씨와 함께 강성을 떠나. 그리고 다시는 임구택 앞에 나타나지 마.""지금은 안 돼. 적어도 임구택과 이혼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해. 안 그러면 심명은 유부녀를 유괴한 죄명을 쓰게 될 거야.""이럴 때엔 농담하지 않으면 안 돼?"소희의 대답에 성연희는 화가 나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소희의 태도는 의외로 엄청 진지했다."농담 아니야.""너 임구택과 별거한 지 이미 2년이 넘었어. 이혼을 기소할 수 있다고.""임구택이 동의할 것 같아?""그놈이 대체 뭘 하려는 건데?"성연희의 화가 묻은 물음에 소희가 창밖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마 죽을 때까지 나와 엮이려는 거겠지."결국 성연희는 소희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수운로의 별장으로 데려다주었다.그리고 별장에 도착한 후, 성연희는 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산 음식들을 전부 냉장고에 집어넣었다."일은 해결될 거야. 하지만 해결되기 전 너 절대 나가지 마.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매일 사람 시켜 보내줄게."그러면서 성연희는 또 소희에게 새 핸드폰을 건네주며 정중히 당부했다."핸드폰 번호가 인터넷에 폭로되면 이 걸로 연락해. 이현의 팬들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까 절대 방심하지 말고. 네티즌이고 팬들의 폭로에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이 엄청 많아, 신변이 위험해진 사람들도 있고. 그러니 팬들을 얕보지 마.""알았어, 주의할 게.""나머지는 나에게 맡겨!"성연희의 눈빛은 진지하고 굳건했다."천하의 사람들이 너와 맞서더라도 난 영원히 너의 곁에 있을 거야."소희는 순간 마음이 따듯해 났다."난 한 번도 그 점을 의심한 적이 없었어."소희의 대답에 성연희가 입꼬리를 올려 밝게 웃으며 소희의 어깨를 껴안았다."소희야, 나 영원히 널
기자가 듣더니 되려 화를 내며 말했다."이현 씨, 이현 씨는 정말 너무 착해요! 소희 씨가 이현 씨의 용모뿐만 아니라 남자친구도 노리고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계획되었던 것이라고요!"하지만 이현은 마치 심각한 충격을 받은 사람마냥 두 어깨를 떨며 흐느끼고 있을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럼 임 대표님께서는 소희 씨와의 관계를 해석해 준 적이 있었습니까? 어떻게 해석했습니까?"기자의 계속되는 물음에 이현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억지웃음을 드러내며 대답했다."구택 씨는 이미 나에게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난 여전히 이 사이에 오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 사람을 믿기로 선택했습니다.""그럼 임 대표님께서 어떻게 해석하셨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미안하지만, 이건 나와 구택 씨 사이의 사적인 일이니 프라이버시를 지켜주시죠.""그럼 소희 씨가 제작진의 조감독 및 스태프와 썸을 탔다는 건 사실인가요?"답을 듣지 못한 기자가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물음을 제기했다.이에 이현이 이마를 찌푸린 채 한참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소희 씨가 조감독님과 많이 가깝게 다니긴 했지만, 난 두 사람이 단지 동료사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그럼 이현 씨는 조감독님과 사이가 어떤가요?""처음 합작하는 거라 별로 안 친해요."기자가 계속 물으려고 입을 여는데 이현의 조수가 다가와 이현을 감싸고 현장을 떠나려 했다. 그러면서 큰소리로 말했다."현이가 요 며칠 기분이 좋지 않아 그러는데 다들 이해해 주시고 더 이상 현이의 상처를 들춰내지 말아 주세요!""이현 씨가 기분이 좋지 않은 건 혹시 임 대표님과 소희 씨의 일 때문인가요?"이번 기회를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아 다시 몰려들어 묻는 기자의 물음에 조수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글쎄요? 약혼을 앞둔 남자친구와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누가 태연할 수 있겠어요? 아무튼 현이에게 시간을 좀 주시죠. 현이가 곧 컨디션을 회복하고 업무에 복귀해 더
제1057화진연이 듣더니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좋은 싹이 아니니 아무리 성장한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인 거야."이에 소정인이 가볍게 기침을 한 번 하고는 눈치를 주었다."소희는 우리가 낳은 아이라는 걸 잊지 마.""우리가 낳았지만 우리가 키운 게 아니잖아!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 해도 저질인 땅에 심어져 자라게 되면 결국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야. 뻔뻔스럽긴, 처신을 잘했어야지, 우리까지 연루시켜 창피하게 만들다니!"진연의 조롱에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연 소정인이 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는 소동을 보고 어눌하게 입을 다물었다.귀여운 잠옷 차림에 인형을 안고 내려온 소동이 유난히 기뻐하며 물었다."아빠, 엄마, 무슨 얘기를 하고 계셨어요?"진연은 소희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고 싶지 않아 소동의 손을 잡고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요즘 작업실 쪽은 어때?""저 마침 두 분에게 이 일을 말하려던 참이었어요!"소동이 정겹게 진연의 손을 잡고 말을 이어갔다."저희가 지금 외국의 아주 유명한 패션쇼에 참가할 계획이에요. 하지만 그 패션쇼의 문턱이 높아 어느 정도의 자금을 투자해야 하거든요."진연이 듣더니 잠깐 멍해졌다."또 돈을 투자해야 해?""엄마, 우리 작품이 패션쇼에 나타나기만 하면 반드시 대박 날 거예요. 그때가 되면 무조건 퍼부었던 돈만큼 벌어들일 수 있을 거라고요!"사실 진연은 벌써 소정인과 상의가 끝난 상태였다, 더는 소동의 작업실에 돈을 투입하지 않기로. 요 몇 년간 그들은 이미 2억 넘게 투자했지만 아무런 수익도 없었으니까.게다가 근 2년 동안 경제 위기가 날로 심각해져 소씨 가문의 장사가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 진연은 손에 돈을 조금이라도 더 남겨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고 싶었다.그러나 이번에 소희에게 갑자기 일이 생기면서 진연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소희 쪽에 기대를 걸려는 계획은 이미 물거품으로 되었으니 그녀와 소정인의 남은 생은 소동한테 맞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소동의 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전에 쓰던 핸드폰을 꺼놓은 후, 소희는 줄곧 성연희가 준 핸드폰으로 바깥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인터넷상의 일이 어느 지경까지 발효되었는지에 대해 소희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심지어 핸드폰을 거의 하지도 않았다.오직 성연희가 가끔 전화 와서는 이현이 인터뷰를 받으며 했던 말들을 전하곤 했다.그리고 임구택은 지금까지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하지만 바깥세상과는 달리 소희는 누구보다도 덤덤했다. 매일 서재에 박혀 책을 보지 않으면 디자인에만 전념을 했고, 가끔은 기분전환 할 겸 직접 밥을 지어먹기도 했다. 비록 음식을 만드는 솜씨가 여전히 진보되지 않아 맛은 늘 이상했지만 소희는 음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인생의 신조를 지켜 한 번도 남긴 적이 없었다.진석과 하영, 그리고 서인은 매일 소희에게 페이스 톡을 보내 잘 지내고 있는지를 확인했다.이현의 팬들이 가장 심하게 소희를 욕했을 때 진석은 심지어 소희가 바로 킹이라는 걸 폭로하려 했다. 킹에게도 많은 팬이 있었으니 그녀를 도와 몇 마디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하지만 소희가 바로 거절했다. 그녀는 자신을 지지하는 팬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를 수호하고 싶지 않았다. 자칫했다간 그들도 억울하게 이번 인터넷 폭력에 말려들 수도 있으니까.소희는 사건의 열기가 언젠가는 식을 거고 욕설도 끝나는 날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녀는 잘못한 게 없으니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을 거고.다만 이번 일에서 소희는 개인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네티즌들의 문화 수준도 예전보다 점점 높아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유언비어는 여전히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심리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약한 사람이 이런 인터넷 폭력을 당하게 되었더라면 진작 자신의 목숨을 끊어 억울함을 증명했을 것이다.점심에 소희는 면 끓여 먹을 생각에 물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하지만 면을 너무 많이 넣는 바람에 결국 반 냄비의 양을 끓이게 되었다.게다가 면의 양에 비해 소금을 너무
소희가 갑자기 일어나서 소리쳤다."버리지 마!""안 버려. 다시 간을 맞춰줄게."임구택이 말하면서 두 그릇의 면을 다시 솥에 부었다.소희가 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임구택 씨, 너무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이에 임구택이 고개를 돌려 장난기가 묻은 눈빛으로 소희를 보며 대답했다."키스도 할 만큼 다 한 사이에, 이제 와서 위생을 논하는 거야?"화가 치밀어 올라 따지러 온 소희가 임구택의 장난에 얼굴이 순간 빨개져서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임구택은 냉장고에서 야채를 꺼내 깨끗이 씻어 냄비에 넣고는 후춧가루와 여러 소스로 간을 다시 맞췄다.그러고는 두 그릇으로 나누어 소희에게 한 그릇 건네주었다.이정남이 했던 ‘져도 진 티를 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생각나 소희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시고 제자리에 앉아 아무렇지 않은 듯 면을 먹기 시작했다.소희의 그릇에는 임구택이 새로 부친 계란후라이도 있었다. 황금빛으로 부드럽게 잘 부쳐진 게 향기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전에 부친 후라이는 임구택의 그릇에 누워있었다.면의 맛도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적어도 간은 입에 맞았다.그래서 소희는 더욱 화가 났다. 무엇 때문에 임구택과 같은 평소에 밥도 하지 않는 사람이 뭘 해도 이렇게 맛있게 해낼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이때 임구택이 고개를 들어 웃으며 물었다."죽어가고 있는 면을 살려낸 내가 대단하지?"소희는 대답하기는커녕 덤덤하게 되물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거지?""나 배고파. 면 다 먹고, 나중에 이야기하자."임구택이 한마디 내뱉고는 면을 먹기 시작했다.그러는 그를 소희가 한참 쳐다보더니 덩달아 고개를 숙여 먹기 시작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커플마냥 마주 앉아 조용히 점심시간을 즐겼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희가 그릇을 다 비우고 고개를 들었다."이제 말해도 되지?""왜 그렇게 빨리 먹어? 너 위도 좋지 않는데, 천천히 먹어야지.""임구택!"소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임구택은 그제야
"나갈 때 문 닫는 걸 잊지 말고요, 앞으로 다시 찾아오지도 마시고요."소희는 더 이상 임구택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한마디 내뱉고는 일어나 서재로 돌아갔다.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떠나는 소희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임구택의 눈동자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한참 후, 임구택은 고개를 숙여 면을 마저 먹었다. 면은 이미 식어 불었지만 임구택은 한입도 남기지 않았다.그러다 면을 다 먹고 식탁에서 일어서려는데 소희가 식탁에 잊고 간 핸드폰이 울렸다.임구택이 수신번호를 확인하고는 받았다.그러자 성연희의 목소리가 핸드폰 맞은 편에서 전해왔다.[소희야, 점심 먹었어?]이에 임구택이 눈살을 찌푸린 채 얼음이 낀 목소리로 물었다."성연희, 앞으로 다시는 소희를 주방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해. 소희는 요리에 천부적인 재능이 없어 자칫했다간 중독될 수도 있다는 걸 몰라?"임구택의 목소리에 성연희가 잠깐 멍해지더니 곧 화를 내며 소리쳤다.[임구택? 너 왜 소희 집에 있는 거야?]임구택이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한 후 다시 물었다."내가 방금 한 말, 들었어?"[너 소희 집에서 뭘 하려는 건데? 그리고 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소희가 집에 박혀 나가지도 못하고 직접 요리해 먹을 수밖에 없는 게 누구 덕분인데? 뭘 잘했다고 내 탓을 하는 거냐고!]"소희를 설득시켜, 내가 보내준 음식을 먹도록. 그럼 너도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할 수 있어."임구택의 요구에 성연희가 콧방귀를 뀌었다.[소희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네가 보내준 걸 먹지 않을 거야.]"아니, 네가 틀렸어. 소희가 방금 내가 만든 면을 먹었거든."[임구택, 너 대체 소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어느 걸 그러는 거지?"[임구택, 너 미쳤어?]"성연희!"성연희의 노호에 임구택의 목소리가 순간 차가워졌다."너 소희에게 여전히 자폐증상이 있다는 걸 알아?"임구택의 물음에 성연희가 잠깐 멍해있더니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소희가 심리적으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들고 다시 서재로 돌아갔다.임구택은 그릇을 씻고 주방까지 깨끗이 치운 후 거실에 잠시 앉아 있었다. 그러다 한참 후 일어나 서재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나 갈게. 걱정 마, 요 며칠 사이로 다 끝날 거야."책상 앞에 앉은 소희는 문 밖의 나지막한 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곧 문밖의 발자국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집안이 다시 조용해졌다.소희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온몸의 힘이 다 빨려나간 느낌이 들었다.......다음 날, GK 측은 연예인 이현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한다고 통고를 냈다. 그러면서 오늘부로 이현은 더 이상 GK 측의 모델이 아니거니와 앞으로도 영원히 계약을 맺지 않을 거라고 의사를 똑똑히 밝혔다.GK의 결정에 이현뿐만 아니라 많은 동업자들도 어안이 벙벙해졌다.남자친구와 절친의 "배신"으로 인해 많은 팬과 네티즌의 동정, 그리고 지지를 얻어낸 이현은 지금이야말로 화제 중심의 공중파 인물로 되어 많은 브랜드, 심지어 업계 감독들이 앞다투어 가면서 이현과 합작하려 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빌려 이현 팬들의 지지를 얻으려고.그런데 GK는 오히려 이현과의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의사를 밝혔으니, 자살행위와 다름이 없었다.게다가 GK는 이현이 찍은 첫 번째 대형 광고 브랜드로 이현에게 많은 인지도와 인기를 더해주었고 또 몇 년 동안 꾸준히 작업해 왔는데 갑자기 이현이 제일 잘 나가고 있을 때 계약을 해지한다니, 다들 이해할 수가 없었다.이에 팬들은 곧 다시 GK를 인터넷 폭력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GK의 흑역사까지 파내면서 GK 측이 이유 없이 계약을 해지하고 신용을 지키지 않았다고, 인성이 바닥난 소희를 동조하고 있다고 호되게 질책했다.나중에 기자들이 GK로 몰려드는 바람에 하영은 어쩔 수 없이 기자들의 인터뷰를 받게 되었다. 하영은 전혀 찔린 곳이 없는 사람마냥 당당하게 대답했다."저희 GK 측은 이현 씨가 신용과 인성 방면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