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림은 눈빛은 밤처럼 깊고 어두웠다. 그는 눈을 살짝 좁히며, 자신이 지닌 자존심과 날카로움을 모두 숨긴 채, 목소리를 낮추었다.“서선혁이랑은 오래전에 끝난 사이 아니었어? 지금 다시 만나서 정말 괜찮을 거라 생각해?”“나랑 함께일 때도 즐거워했잖아. 그런 나를 버리고 그 사람을 선택하겠다고? 그게 현명한 판단이야?”백림은 차가운 공기를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지금이라도 기회를 줄게. 내가 출장 갔을 때 네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던 건 이해할 수 있어. 지금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시작하자.”유정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비웃듯 웃었다.“조백림, 너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사람 아니었어? 한번 정한 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고 자부했잖아.”“그런데 날 위해 예외를 두겠다고? 영광이네. 하지만 난 너처럼 계산적인 관계는 원하지 않아.”“내가 원하는 건,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하고 단단한 사랑이야. 우리, 애초에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었어.”그 말에 백림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순수한 감정? 웃기지 마. 불과 하루 전엔 내 품에 있었던 네가, 하루 만에 첫사랑과 다시 이어졌는데? 그걸 순수한 감정이라 말해?”“정말 순수했다면, 몸도 마음도 누구에게도 주지 말았어야지. 성준이든 나든 다 아니었어야지. 그래야 그 고귀한 순수함을 말할 자격이 생기지 않겠어?”“솔직히 말하면 너 걔랑 잘 때, 내 이름 부를까 봐 걱정되는데?”그 말에 유정은 얼굴이 확 붉어지며 온몸이 떨렸다. 분노와 수치심이 한꺼번에 밀려왔다.유정은 손을 들어 백림의 뺨을 후려치려 했지만, 남자는 재빨리 손목을 움켜잡았다.“이미 나한테 모든 걸 줬잖아. 넌 더 이상 네가 말하는 그 순수함을 가질 수 없어.”이에 유정의 눈에 눈물이 맺혔고, 차가운 절망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이렇게 말해도 넌 여전히 날 몰라.”유정은 힘껏 손을 빼내며 돌아서려 했다. 백림이 다시 손을 뻗자, 유정은 날카롭게 소리쳤다.“건드리지 마!”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인 눈빛
불당 안의 단향이 바람을 타고 흘러들었고, 주윤숙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어딘가 낌새가 이상했다.유정이 조씨 저택에 몇 번 왔던 걸 떠올리면, 분명히 백림을 좋아하고 있는 듯 보였다.‘설마 내가 착각한 걸까?’백림이 나간 뒤, 주윤숙은 유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머님, 요즘 제가 너무 바빠서요. 일 좀 정리되면 찾아뵐게요.]유정의 담담한 인사에, 주윤숙이 꺼내려던 백림과 집에서 한번 얼굴 보자는 말을 유정이 먼저 막아버렸다.“날이 상당히 추워졌어. 아무리 바빠도 몸은 잘 챙겨야지.”잠시 멈칫하던 유정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어머님도요.]주윤숙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백림이 그러던데,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고. 사실이니?”조금의 정적 끝에 유정이 나직이 말했다.[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면, 그렇게 생각하셔도 돼요.]주윤숙의 말투는 더 부드러워졌다.“나는 그렇게 안 보여서 그래. 유정아, 백림이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니? 왜 이렇게 마음을 닫았어?”[걔가 잘못한 건 없어요. 원래 그랬던 사람이니까요. 제가 더 이상 이 관계를 끌고 가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죄송해요, 어머님.]사실 유정이 마음에 걸리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백림이 아니라 주윤숙이었다.주윤숙은 유정의 말속에 담긴 단호함을 느끼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무슨 일이 있든, 헤어질 거면 서로 오해 없이, 원망 없이 깔끔하게 끝내길 바랄게.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집에 올 수 있길 바라고.”[그럴게요.] 유정은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이틀 후, 두 집안이 함께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식사하며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오해가 있다면 풀고, 아니더라도 감정이 돌아설 수 있기를 바라는 만남이었다.유정은 점심 무렵 서은혜에게서 전화를 받았다.[유정아, 오늘 저녁 조씨 집안 할아버지도 오셔. 아무리 결혼을 안 하게 되더라도, 사람끼리 이렇게 원수지듯 지낼 일은 아니잖니?]유정은 마음이 무거웠다. 두 집안이 정한 약
유지태는 머쓱하게 웃었다.전화를 끊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정에게 다시 한번 외할아버지인 서정후에게 전화를 드리라고 했다. 지금 이 시점에 경성에서 강성까지 내려오는 건 아무래도 피하는 게 좋았다.서정후는 실탄이 장전된 총기를 합법적으로 소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유정도 그걸 잘 알기에 재빨리 전화부터 걸었다.“외할아버지, 화내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어요.”[유씨 집안은 하나같이 못됐구나. 그놈의 잔머리 굴리는 소리가 경성까지 들린다고 들려!][예전에 네 엄마가 내 말 안 듣고 네 아빠한테 시집가겠다고 고집부릴 때도 그랬지. 너까지 또 속아 넘어가면 안 돼.][똑바로 생각해. 외할아버지가 있잖아. 무서워할 사람 하나도 없어!]그 말에 유정은 며칠 만에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알아요, 외할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아끼는지. 저도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진짜 내가 안 내려가도 되겠냐?]“직접 나설 필요 없어요. 이 일 정리되면 제가 경성에 가서 설 같이 보낼게요.”[하하, 조백림 그놈이랑 파혼한 게 오히려 잘된 일이야. 경성 오면 외할아버지가 더 괜찮은 남자 소개해 줄게.]이에 유정은 눈을 떨구며 나직이 말했다.“네.”서정후의 압박에 못 이긴 유지태는 결국 조철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집안의 파혼하는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조철용은 뜻밖이라는 듯 반문했다.[무슨 일이 있었나? 전에 유정이가 우리 집에 왔을 때만 해도 백림이랑 참 잘 어울려 보이던데.]유지태는 쑥스럽게 말했다.“유정이가 약혼을 꼭 깨야겠다고 해서 그래. 물론 우리는 아이들을 생각해서 좋게 이어가길 바라지만, 요즘 세상에 억지로 결혼시키는 건 무리잖아.”조철용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아마 다툰 모양이지. 우선은 시간을 좀 줘서 진정시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도 백림이한테 한번 물어보지. 또 무슨 사고를 쳐서 유정이를 화나게 한 건지.][난 유정이를 정말 마음에 들었고 진짜 손주며느리 삼고 싶
유정은 콧방귀를 뀌듯 차갑게 말했다.“그러면 계속 질투하면서 살아. 너한텐 그거밖에 없잖아.”그 말을 끝으로 차 문을 열고 올라탄 유정은 시동을 걸어 그대로 달려 나갔다.전소은은 흐느끼며 울고 있었지만, 눈에는 온통 억울함과 분함이 가득했다.소은은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고, 그 과정에서 가슴팍에 걸쳐져 있던 선글라스에 손이 닿았다.소은은 선글라스를 벗어들고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그건 고등학교 시절, 두 사람이 친구가 된 뒤 그녀가 유정에게 처음으로 선물했던 생일 선물이었다.그때는 유정이 그렇게 부잣집 딸인 줄도 몰랐고, 선글라스도 아주 평범한 물건이었다.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소은은 유정이 진작에 이 값나가지도 않는 선물은 버렸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도 유정이 그걸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유정이 그 선글라스를 돌려준 건 두 사람의 우정이 이제 완전히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소은의 눈물은 더 거세게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후회라는 감정은 전혀 없었다.이윽고 소은은 빠른 걸음으로 옆에 놓인 쓰레기통 앞으로 다가가더니,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쓰레기통에 선글라스를 처박았다.‘끝이면 끝이지.’ 소은에게 그 따위 우정은 이제 필요 없었다.한편, 유정은 차를 몰고 회사로 돌아가면서 속이 끓었다. 처음에 백림이 원인제공을 했던 건데, 결국 배신자가 된 건 본인이었기 때문이다.‘이게 말이 돼?’유정은 속에서 천불이 치솟았지만,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백림이 뭘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고, 유정은 오직 이 관계가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과정은 중요하지 않아. 결과만 내가 원하는 대로 나오면 돼.’오늘 원래 하려던 말도 못 꺼냈고, 소은의 더러운 짓에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을 뻔했다.또한 지금은 백림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여전히 산더미였다. 백림의 복수가 어디까지 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지만 유정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오는 대로
백림은 차갑게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말했다.“다 조사했어. 서선혁, 네 고등학교 동창이자, 예전에 사귀던 사이더라고.”“유정, 네 첫사랑은 성준이 아니라 서선혁이지? 그렇잖아?”백림은 냉소적으로 웃었다.“왜 내가 출장을 단 이틀 다녀왔을 뿐인데, 돌아와 보니 네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나 했더니.”“결국 첫사랑이 다시 나타나니까 옛 감정이 되살아난 거였잖아. 말 한마디 없이 나를 차버린 이유가 그거였어?”“유정, 네 눈엔 내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도 되는 사람이야?”유정은 사진을 꽉 쥐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이에 백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굳었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 유정에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설명해! 지금 당장 설명해!”그러나 유정은 힘껏 백림의 손을 뿌리쳤다. 그 동작엔 분명한 혐오가 묻어 있었고, 눈빛 또한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네 말대로야. 나, 서선혁 좋아해.”“그래서 뭐? 우리 계약서에도 있었잖아. 누군가 좋아지는 사람이 생기면 바로 이야기하고 정리하면 된다고.”“우린 애초에 연애한 적도 없어. 난 널 좋아한 적도 없고. 대체 뭐가 배신이라는 거야? 그리고 넌 날 질책할 자격도 없잖아.”백림은 유정의 손목을 다시 움켜쥐며,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감정을 억누르기 힘든 듯 떨렸다.“유정, 너,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 이건 너무 잔인하잖아.”유정의 눈가에 옅은 물기가 맺혔다. 하지만 여자는 고개를 돌려 백림의 손을 힘껏 떨쳐내고, 단호하게 등을 돌려 떠났다.전소은은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때 유정에게서 전화가 왔다.[퇴근했어?]소은은 순간 당황해 대답을 망설였으나, 표정을 가다듬고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곧 퇴근할 거야. 왜?”[너희 회사 앞에 있어. 잠깐 얼굴 좀 보자.]유정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소은은 결국 대답했다.“그래. 곧 내려갈게.
조백림은 해성에 일주일 더 머문 뒤, 다시 강성으로 돌아왔다.그리고 곧장 유씨 집안과 관련된 모든 사업 계약을 종료했고, 진행 중이던 협력 프로젝트도 전부 취소해 버렸다.그날 오전, 유정의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조씨 그룹의 갑작스러운 계약 취소로 인해, 유씨 집안은 막대한 손실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유지태와 유정의 작은 아버지 유준탁도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백림에게 당장 사과하라고, 며칠 전 유정이 했던 말을 철회하라고 다그쳤다. 두 집안의 혼약은 취소될 수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유정의 입장은 단호했다. 회사가 망하더라도, 그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다.이 말은 백림의 귀에도 곧바로 전해지자, 그 뒤로 남자의 보복은 더욱 노골적으로 이어졌다.조씨 그룹은 단순히 계약을 끊는 데 그치지 않고, 조씨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던 다른 기업들까지 유씨 집안과의 거래를 끊도록 압박했다.유정 회사에서 진행 중이던 굵직한 프로젝트들이 줄줄이 중단되었고, 그동안 투입된 비용은 사실상 회수 불가 상태가 되었다.유통망마저 끊기면서 자금 흐름에 큰 구멍이 생겼고, 회사 전체가 벼랑 끝에 몰렸다.유정과 장기 협력 관계를 맺고 있던 몇몇 그룹들 역시 조씨 그룹의 견제를 받아, 끊임없이 유정에게 전화를 걸어왔다.통화 내용의 요지는 대개 비슷했다.유정의 회사와 관계를 끊고 싶진 않지만, 백림의 태도로 봐선 유정과 계속 손잡는 것은 곧 조씨 그룹과의 전면전을 의미했다는 뜻이었다.그중 한 명은 유정에게 조용히 충고했다.[조백림 사장님과 한 번 만나서 이야기 좀 해봐요.]유정은 백림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지만 더 많은 이들이 피해 보는 걸 바라지도 않았다.결국, 유정은 직접 백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반 번호로 네다섯 번 걸었지만, 전부 남자의 비서가 받았다.이에 유정은 백림의 개인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벨소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마침내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백림의 목소리는 냉담했다.[무슨 일이야?]유정은 담담하게 말했다.“직접 만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