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택은 심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 강성으로 돌아온 순간만큼은, 마음속의 답답함이 약간 풀렸다. 마치 산 위에 앉아 호랑이 싸움을 구경하는 기분, 묘한 쾌감이 스쳤다.규연이 심명을 짓밟든, 남자가 규연을 희롱하든 상관없었다. 그 둘이 피를 보든 웃음거리가 되든, 구택은 그저 즐거웠다.첫 번째 대결에서 심명은 이미 발을 헛디뎠다.사진 사건이 폭로되자 각종 스캔들이 퍼져 나갔으나 구택은 질투하지 않았다.왜냐하면 전날 밤, 구택은 소희와 함께였으니 애초에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그런데도 구택은 전화를 걸어 투덜거렸다.“헛발질이 따로 없군. 심명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멍청해.”소희는 피식 웃으며 받았다.“여보, 이럴 때 같은 편을 헐뜯는 건 좀 무례하지 않아?”구택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불쾌함이 묻어났다.“누가 그 사람을 내 편이라 했어? 스스로 잘난 척하다 무너졌는데, 내가 뭐라 한들 문제 있어?”소희는 태연히 응수했다.“하지만 이번 사건 덕에 강성 안에 숨어 있던 백씨 집안의 세력 일부를 드러냈잖아. 손해 본 건 아니지.”구택은 비웃듯 말했다.“그 빚은 곧바로 갚아줄 거야.”그리고 곧 기회가 왔다.유진과 은정의 약혼식.심명은 스스로 미끼가 되어 규연을 함정에 몰아넣었다. 규연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했고, 동시에 소희와 심명 사이의 스캔들도 잠잠해졌다.구택은 심명의 계획에 호응하며 남자의 체면을 살려주었고 그걸로 빚은 갚은 셈이었다.이번 일에는 소희의 의도도 담겨 있었다.규연은 끊임없이 그녀의 곁사람들을 건드렸다. 친구든, 임씨 집안 사람이든 가리지 않았다. 소희는 직접 드러나지 않았지만, 혹시 누군가 다칠까 우려했다.그래서 소희는 일부러 이번 기회를 이용해 규연의 속도를 재촉하고, 허점을 드러내게 하려 했다.그러던 중 연희가 위기를 맞이했고, 그 일로 소희의 인내심을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 이에는 소희는 더 이상 가만있지 않고, 백씨 집안 사람을 직접 치며 경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백구경은 살
소희는 구택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네 책임을 잊지 마.”구택의 책임은 단순히 임씨 집안의 후계자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남자는 말리연방의 이디야였고, 진언과 함께 삼각주의 안정을 지켜야 했다. 삼각주의 안정은 곧 자국 국경의 안보와 직결되는 일이었다.그렇기에 출산휴가 따위는 생각할 수 없자 구택은 더 답답해졌고 속으로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며칠 전 회의 자리에서 칼리가 데이터 손실 문제를 보고했을 때, 이미 진우행은 그 배후에 규연이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구택이 침묵하자 우행 역시 모른 척 넘어갔다.규연은 칼리의 남자친구를 매수해 바이러스를 심고 데이터를 파괴했다. 이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하나는 칼리를 밀어내고 구택 곁의 수석 비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임씨 집안의 보안 시스템을 시험해 훗날 침투를 준비하는 포석이었다.결국, 일은 규연이 바라는 대로 흘러갔다. 구택은 칼리를 징계했고, 규연은 수석 비서 자리에 올랐다.첫 단계가 성공하자, 규연은 곧바로 소희의 곁을 파고들기 시작했다.규연이 첫 번째로 접근한 이는 우청아였다.연희는 규연의 속셈을 알지 못한 채, 청아를 데리고 나섰다가 오히려 백구연의 덫에 걸렸다.구택은 공개적으로 규연의 음모를 밝힐 수 없어 연희에게 조용히 당부했다.“섣불리 움직이지 마요. 자칫 잘못하면 뱀의 꼬리를 밟거든요.”규연이 연희를 통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건, 곧 백씨 집안의 세력이 이미 강성 안에 깊숙이 침투했다는 의미였다. 다행히 연희는 곧 상황을 파악하고 더 큰 불상사는 막아냈다.청아를 이용할 수 없게 되자 규연은 이번엔 임유민을 노렸다.마장에서 소희가 말에 치일 뻔한 사건이 터졌을 때, 구택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그는 즉시 백호균과 규연을 제압해 버리고 싶었다.구택운 더 이상 백씨 집안의 출신이나 목적, 혹은 이디야의 정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 한 가지, 소희를 건드리는 자는 그 어떤 이유로도 용서할
규연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둘째 날, 구택은 곧장 명우에게 야지가 강성에 오기 전의 모든 행적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백호균과 구연이 요양을 명분 삼아 강성에 들어온 뒤 임씨 집안을 방문하고, 곧장 임씨그룹에 들어온 일련의 과정은 도저히 우연이라 보기 어려웠다. 특히 소희가 곧 출산을 앞둔 상황에서,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명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요한 단서를 찾아냈다. 백호균에게는 실제로 해외에 거주하는 손녀 ‘백구연’이 있었지만, 동시에 집안에는 ‘백규연’이라는 사생아가 존재했다.규연은 백씨 집안 사람들과 공개석상에 거의 나타난 적이 없었고, 이력 또한 단출했다.다만 특이한 점은 중학교 시절, 운동회에서 사격 대회 전교 1등을 한 기록뿐이었다.그 외에 더 깊은 자료는 찾기 어려웠지만, 백씨 집안이 오랫동안 군사 분야를 연구해 왔다는 사실이 있었다.그리고 최근 삼각주 지역의 긴박한 상황이 겹치며 구택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이에 구택은 이 모든 의심을 소희와 공유했다.진언이 운영하는 군수 공장은 사실 내부 배신자가 도망쳤다는 건 단순한 위장에 불과했다. 진언이 삼각주로 향한 진짜 이유는, 자국과 맞닿은 R국이 한 무기상으로부터 대량의 핵무기를 사들였다는 첩보 때문이었다. 이는 자국 국경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상황이었고, 진언의 임무는 바로 그 운송 중인 핵무기들을 가로채어 파괴하는 것이었다.하지만 무기상은 이미 소식을 입수해 경호 인력을 분산시켰고, 일부 핵폭탄을 D국과 자국 국경에 밀반입하여 두 나라 간 전쟁을 유도하려 했다.진언은 그 과정에서 무기상의 부하 한 명을 생포했고, 그로부터 핵폭발 암호기가 한 ‘신비한 인물’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소희는 그 신비한 인물이 바로 백호균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그래서 소희는 구택에게 조급해하지 말고, 진언의 작전을 돕는 동시에 두 명을 우선 지켜보자고 설득했다.다음 날 아침, 구택이 출근하자 칼리가 문서를 들고 들어왔다. 이에 구택은 서명하면서 당
연희의 얼굴에 마침내 안도의 빛이 스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구택이 옅은 웃음을 지었다.“연희 씨, 수고 많았어요.”연희는 고개를 젓고 곧바로 입꼬리를 올렸다.“연희 고생 많이 했죠. 근데 난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주먹까지 맞았잖아요. 그건 또 어쩔 거예요?”장난 섞인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는데 심명이 나선 것이다.연희는 소희의 팔짱을 끼고 재미있다는 듯 거들었다.“일이 다 끝났으니 이제 따질 건 따지자고요. 오늘이 아니면 기회 없으니까.”구택은 무표정하게 심명을 바라봤다.“그 주먹은 억울할 게 없을 것 같은데요?”이미 오래전부터 때려주고 싶었던 상대였다.“소희야!”심명이 투정 섞인 목소리로 소희를 불렀다.이에 구택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고 성큼 앞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부르지 마세요. 심명 씨한테 빚진 거야 원한다면 맞아도 가만히 있죠.”명성은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흥미로운 듯 장면을 지켜봤다.소희는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미소 지으며 말했다.“심명, 네가 진짜로 때리진 못할 거 알아.”그러나 심명은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쉽게 장담하지 마.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임구택이야.”구택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나도 마찬가지거든요.”심명이 한발 다가서자, 소희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걸 본 남자는 허탈하게 손을 내렸다.“그만두자. 너 속상하게 할 짓 내가 왜 해.”연희는 옆에서 불을 지폈다.“심명, 이번 기회 놓치면 다시없어.”이때 구택의 눈빛이 성연희로 향했다.“연극은 연극이었지만, 연희 씨가 나한테 불만 많은 건 진심이었네요.”그 말에 연희가 콧방귀를 뀌었다.“이제 알았어요? 진심 아니면 그렇게 실감 나게 연기 못하죠.”순간,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심명은 시계를 힐끗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이제 자정 넘었어. 임산부 둘은 어서 집에 들어가 쉬어.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재미난 장면을 못 보고 가네.”연희는 못내 아쉬운 듯 한
규연의 얼굴은 이미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여자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심명을 바라봤다. 눈빛 속엔 붉은 핏물이 맺혀 있었고, 그 시선은 마지막이라도 되는 듯 매섭게 심명을 꿰뚫었다.“나 너한테 잘못한 거 없어. 그런데 왜 내 목숨을 노려?”심명은 반쯤 몸을 낮춰 앉았다. 눈가에 어른거리는 매서운 기운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내가 너를 죽이려는 게 아니야. 너희를 데리러 오는 자들은 이미 도중에 처리됐어.”“네가 강성에 끌어들인 세력도 지금 전부 소탕당하고 있어. 넌 이 집을 벗어날 수 없어.”“내가 널 소희 앞에 데려간 건 네가 죽기 전에 알아야 할 걸 알려주려 했던 거야.”“네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세상에는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려는 거고.”규연은 머리는 명석했으나 사람의 마음을 몰랐다. 감정 없는 껍데기, 결국은 그저 계산에 능한 존재일 뿐이었다.피가 한순간에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시선은 흐려졌고, 떨리는 손이 심명의 옷깃을 붙잡으려 애썼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듯,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심, 명...”심명은 손을 들어 규연의 눈을 덮었는데 목소리에는 한 치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어. 그래서 마지막 길은 내가 배웅하는 거야. 괜히 헛되이 좋아한 건 아니게 해주려로.”규연의 마지막 기억은 며칠 전 카페였다. 그날, 심명은 자기랑 같이 호주로 가자고 말했다. 그 순간, 마음이 흔들렸었다.‘임무도, 강성에서의 모든 것도, 빛을 보지 못하는 자신의 성씨마저도 버리고 그를 따라 떠날까?’심명의 마음이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단 한 번쯤은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고.규연은 수많은 가짜 이름과 신분을 살아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오직 ‘백구연’일 수 있었다. ‘만약 그날 승낙했더라면, 정말 나를 데려갔을까?’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심명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미묘한 온기는 구연이 세상에서 느낀 마지막 따스함이었다. 이윽고 몸은 점점 식어가자 심명은 무표정한
구택이 소희를 바라봤다. 소희는 잠시 생각한 뒤, 명우와 그 뒤에 선 이들에게 말했다.“보내줘요.”“네!”명우는 곧장 대답하며 사람들을 물렸다.규연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마지막으로 소희를 바라본 여자는 살짝 비웃듯 말했다.“어쩌면 우리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거야.”그 말과 함께 몸을 돌려 빠르게 사라졌다.소희는 규연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또렷하고도 차가운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니? 백규연, 우리는 영영 다시 만나지 않을 거야.”구택은 소희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조금 전의 날카로운 기운은 사라지고, 오직 따뜻한 눈빛만이 남아 있었다.“뒤에 일은 내가 처리할게. 넌 이제 잠깐 눈을 붙여.”소희는 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구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소희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내렸다.“내가 옆에 있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소희는 나직이 속삭였다.“오후 내내 잤더니 아직 졸리지 않아. 조금만 더 기다릴래. 곧 모든 게 끝날 테니까.”규연은 곧장 차를 몰아 미친 듯한 속도로 백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지금 당장이라도 할아버지를 데리고 떠나야 했다.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는데 바로 백호균이었다.[어디 있는 거냐!]백호균은 분노 섞인 목소리로 다그쳤다.규연은 차마 심명을 만나러 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심명의 얼굴이 스치자 가슴이 날카롭게 찔린 듯 저렸다. 이에 여자는 힘겹게 목소리를 눌렀다.“볼일이 좀 있어서 나갔어요. 곧 돌아갈게요.”[우릴 데리러 올 사람이 15분 안에 도착해. 당장 돌아와!]백호균의 어투는 명령조였다.“네!” 구연은 짧게 답했다. 여자는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움켜쥐었고, 얼굴에는 결연한 빛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결국 한발 늦었다.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고 규연이 곧장 서재 쪽으로 뛰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 복도엔 전등 불빛만이 드리워져 있었고, 맞은편 지붕 위에서 냉혹하게 번뜩이는 총구의 빛이 반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