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대건 그룹의 자선 행사 파티가 있던 날.
채원은 발코니에 홀로 서서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팔을 두른 채 몸을 살짝 웅크린 그녀가 맨살이 그대로 드러난 팔을 쓱쓱 문질렀다.
이렇게 오래 서 있을 줄 알았으면 위에 걸칠 재킷이라도 하나 챙겨 올 걸 그랬다. 갑자기 뚝 떨어진 밤 기온은 얼어 죽는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깨닫게 했다.
그래도 움직일 순 없었다. 오늘, 이 시간, 여기서 윤채원은 강태건을 만나야 한다.
남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외진 곳에 있는 발코니. 행사장과 가까운 것도 아니라 강태건이 몰래 쉬고 싶을 때 자주 이용한다는 곳이었다.
그래도 대체 언제까지 있어야 하나 싶던 찰나였다. 등 뒤로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던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아.”
안으로 들어오려던 발이 멈칫하더니 짧은 탄식이 들렸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채원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어느새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고개를 돌리자, 발코니 문 근처에서 멈춰 있는 태건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주변의 공기가 조용해졌다.
“…… 죄송합니다. 먼저 오신 분이 있는 줄 몰랐네요.”
침묵을 먼저 깬 건 태건이었다.
태건의 말에 채원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발을 옮겨 그에게 옆자리를 내주었다.
태건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문을 닫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두 남녀가 나란히 섰다.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침묵을 실은 바람이 지나갔다.
“…… 킁.”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작은 소리가 울렸다.
태건이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빨개진 콧등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살짝 내리니 손등도 살짝 붉어진 게 보였다.
“누구 기다리십니까?”
시선을 올린 태건이 채원을 보며 물었다. 누군가와 여기서 만나기로 한 게 아닌 이상, 홀로 추위를 감내하며 굳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태건의 물음에 채원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차마 성급하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있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추운 날씨에 홀로 발코니에 서 있었고, 만났으니까, 계획대로 진행은 되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관련되게 말해서는 안 됐다. 그는 이 계획을 모르고 있고, 또 몰라야 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아뇨.”
침묵에 비해 짧은 대답이었다.
태건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붉어진 콧등과 손끝으로 한 번씩 시선을 옮긴 그가 다시 시선을 올렸다.
눈에 보이는 상황에 비해 어울리지 않는 답변이었다.
“그럼?”
짧지만 집요한 물음이 되돌아왔다. 채원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경계심이 빛나고 있었다.
채원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여기서 흔들릴 일이 아니었다.
“그냥 바람 좀 쐬고 있었어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꽤 태연하고 그럴듯한 답변이었다.
태건은 작게 탄식을 내뱉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이 조금 답답하긴 하죠.”
태건의 말에 채원은 침묵으로 답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불필요한 대화 속 무심코 튀어나오는 단어가 계획을 망칠 수도 있었다.
다행히 태건도 그녀의 침묵에 개의치 않은 눈치였다. 그도 그저 적당한 대답을 골라 던진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얼굴은 서로 확인했고, 이제 이 발코니에서 나가는 일만 남았다.
채원은 습관처럼 손톱을 세워 손톱 옆 여린 살을 뜯었다.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의 경우의 수들을 떠올리며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때 손목시계를 슬쩍 확인한 태건이 숨을 들이켰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시간이 좀 지났네요.”
태건의 말에 채원은 그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별다른 말 없이 적당한 인사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이제 태건이 발코니를 나서고 몇 분 지나고 나면 그녀도 이 자리를 떠날 참이었다.
그때 가녀린 채원의 어깨 위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깜짝 놀란 채원이 고개를 돌리자, 재킷을 벗은 태건이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보다 더 필요해 보이시네요.”
순간 당황한 탓에 벌어진 입 사이로 말이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입만 뻐끔거리며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꼴이 우습게 보였겠지만, 태건은 별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본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미련 없이 떠나려는 모습에 채원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한 발 내디뎠다.
“저기……!”
다급한 채원의 부름에 태건의 발걸음이 멈췄다. 뒤를 돌아본 그가 무슨 용건이냐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일단 불러 세우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그녀는 자신의 어깨 위에 덮어진 그의 재킷을 꼭 쥐었다.
태건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채원이 했던 말과 같은 말이었다. 무심하지만 차가운 한마디에 채원은 벌어진 입을 꾹 다물었다.
태건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몸을 홱 돌렸다.
가볍게 열린 발코니 문이 다시 닫혔다.
여전히 바람은 차가웠고, 공기는 추웠다. 손가락엔 점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고 팔엔 소름이 다 돋은 상태였다.
채원은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강태건은 윤채원이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여전히 무심하고, 여전히 차가우며, 여전히 싸가지가 없었고, 여전히 윤채원을 모르고 있었다.
손톱 아래 여린 살을 뜯어내던 그녀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곤 들고 있던 작은 미니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곧바로 문자를 보냈다.
[만났어요.]
짧은 문자를 보내고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다 자기 어깨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태건의 재킷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던 그녀가 굳은 얼굴로 거추장스러운 재킷을 벗었다. 첫 만남은 얼굴 정도만 익히는 걸로도 충분했다. 그 외에는 다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가만히 재킷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난간에 옷을 걸어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에 흔들리는 재킷을 뒤로 하고, 채원은 미련 없이 발코니를 떠났다.
* * * “…….”잠에서 깬 채원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 속에서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천천히 두어 번 정도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침대와 이불, 그 옆의 협탁과 오브제까지.
어둠 속 익숙한 방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꿈을 꿔도…….”
오랜만에 꾼 꿈이 5년 전 두 사람의 첫 만남이라니. 그리 달갑지 않은 꿈이었다.
깊은숨을 내뱉은 그녀가 고개를 숙여 제 왼손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차가운 눈으로 반지를 바라보던 그녀가 손을 들어 목 주변을 더듬거렸다. 아직도 그의 입술이 닿았던 느낌이 남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일 가족 모임 있어. 이 정도는 해야 부모님이 좀 믿으시지 않겠어?’
입술로 목덜미를 짓누르던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이 지낼 땐 언제고, 이제 와 갑자기 서로 좋아 죽는 부부 행세라도 하고 싶은 건지.
그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어루만지다 채원은 입술을 꾹 깨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잘난 얼굴을 한 번은 때려야 했다. 너무 당황한 탓에 아무것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다, 그대로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주먹을 꽉 말아쥔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침대에 풀썩 누웠다.
윤채원은 강태건을 잘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결혼도 하기 전부터 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듣고 봐왔다. 그 누구보다 강태건을 잘 아는 건 윤채원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은 강태건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혼을 거부하는 것도 모자라 충동에 가까운 스킨쉽까지 했다. 평소의 강태건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들이었다.
손톱 아래 살을 뜯으며 생각하던 그녀가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강태건이 변했든, 무슨 일이 있었든 그건 그녀의 알 바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중요한 건 계획이 틀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일단 중요한 건 내일 가족 모임이야.”
오늘 일은 오늘 일이고, 내일 일은 또 따로 있었다.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만큼 내일은 태건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날이었고, 그렇기에 오늘처럼 충동적인 행동을 할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일 일도 별 탈 없이 마무리되어야 계획이 틀어지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적어도 내일은 강태건이 이상한 행동을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가족들 앞에서는.
채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믿고 있었다. 가족 모임 자리에서 태건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채원이가 임신했어요.”
“뭐?”저마다 놀란 얼굴로 한 곳을 응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채원만이 당황한 얼굴로 태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뻔뻔한 얼굴로 태연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태건을 보며, 채원은 차마 내뱉지 못할 속마음을 머릿속에서 연신 내뱉었다.
‘드디어 미친 거야?’
채원은 언젠가는 자신도 이 방을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8살이 되어도, 시간이 더 지나도 채원은 방을 나갈 수 없었다.언젠가 채원은 왜 자신은 유연과 달리 학교에 갈 수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신도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 백재연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그날 채원은 하루 종일 방에 갇혀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채원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문 좀 열어주세요!”작은 손으로 아무리 두드리고 외쳐도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대꾸도 하지 마. 먹을 것도 주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여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쯧.”문 너머로 차가운 백재연과 남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채원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나는 욕심을 내면 안 되는 아이구나.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채원은 자신이 이 집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윤유연이라는 빛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 위한 어둠. 그게 채원의 역할이었다. 그 어둠을 나오려는 건 그녀의 욕심이었고, 주제를 모르는 짓이었다.그렇게 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채원은 어쩌면 이 문을 열고 나갈 일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건, 12살의 어느 여름이었다.* * *며칠째 집 안은 조용했다.정확히는, 채원의 방만 조용했다.복도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화벨은 밤낮없이 울렸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사들이 집을 드나들었다.늦은 밤이면 백재연이 누군가에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어떤 날은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유리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도 났다.그럴 때면 채원은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왜 요즘 들어 계속 무서운 소리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무서웠고 외로웠다.하지만 아무도 채원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지
정인 재단 이사장과 정인대병원 병원장 사이에는 완벽한 딸이 하나 있었다.신생아 시절부터 완벽한 외모를 갖췄던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출중한 외모를 뽐냈다. 길거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고, 연예기획사, 모델 에이전시, 방송사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신이 그녀를 너무 사랑했던 건지 그녀는 두뇌까지 부모를 닮아 명석했다.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으며, 예체능까지 교내외를 모두 섭렵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였다. 집안, 인맥, 재력, 외모, 성적,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부부는 그런 딸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딸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모두가 이들을 보며 부러워했고, 모두가 하나같이 ‘완벽한 가족’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그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이었다.윤채원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완벽하다고.그 가족사진에 채원은 없었다.* * *가족사진 촬영이 있던 날. 거실엔 사진작가와 보조 스태프들이 조명과 구도를 세팅하느라 분주했고, 한쪽에서는 메이크업 수정이 진행되고 있었다.촬영 준비를 모두 마친 사진작가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준비 다 되셨을까요?”사진작가의 물음에 백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작하죠. 가자, 유연아.”백재연이 옆에 있던 딸을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그녀의 부름에 메이크업 수정이 끝난 유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피부와 크고 선명한 눈, 작고 오똑한 코. 아직 10살이라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성인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사진작가의 안내에 맞춰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위치했다. 가장 가운데 자리는 유연의 자리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착석하고, 그 뒤에 백재연과 윤 원장이 나란히 섰다. 백재연은 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윤 원장은 한 손 백재연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한 손은 유연이 앉은 의자를 잡았다.고급스러운 저택 안에서 미소 짓는 세 사람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의 이상적인
“실례합니다.”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흘러들었다.채원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태건 씨?”채원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홀린 듯 태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태건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아, 아니……. 여긴 어떻게…….”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채원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백재연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방문객에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강 본부장.”금방 표정을 바꾼 재연이 온화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태건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장모님. 또 뵙네요.”“그러게. 또 보네.”백재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말투에 채원의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태건은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유롭게 채원의 등받이에 손을 올린 그가 그녀가 잘라 두었던 스테이크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불쑥 나타나서, 일어선 상태로, 타인이 쓰던 포크로 음식을 먹는다니.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채원은 태건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그러나 그녀와 달리 태건은 마치 음미라도 하듯 천천히 고기를 씹더니, 이내 꿀꺽 삼키며 감탄을 내뱉었다.“와, 이렇게 맛있는 거 사주시는 거면 저도 불러주시지.”“…….”“저한테는 커피 한 잔 안 주시더니. 저 이러면 조금 서운해집니다.”능청스럽게 말하던 태건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와인까지 한 모금 들이켰다.도무지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채원은 벙찐 얼굴로 태건을 바라봤다. 혹시 드디어 정말로 미친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백재연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강 본부장.”“네, 장모님.”“여긴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 태건은 더 능청스럽게
“그럼 내가 돈을 더 준다고 하면 나랑 일할래요?”유건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지훈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이건 진심인가, 혹은 실험인가. 회장님도 아시는 건가, 아니면 독단적인 행동인가. 짧은 시간 동안 지훈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상황을 파악하고 계산을 해야 하지만 절대 오래 걸려서는 안 됐다.최대한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켜 계산을 마친 그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아뇨.”간결하고 단호한 대답에 유건은 못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왜요~ 내가 동생이라서?”투정 부리듯 묻는 유건에 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만한 돈이 없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지훈의 대답에 유건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지훈을 바라봤다.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다. 잠시 이어진 침묵은 이내 유건의 웃음소리에 깨졌다.“푸하하하!”호탕한 웃음소리에, 레스토랑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를 바라봤다. 지훈은 흘깃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의식했지만, 유건의 웃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한참을 웃고 나서야 그는 여운이 가득 남은 얼굴로 하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아아, 진짜……. 장 비서님 유머 감각은 정말 최고예요.”“칭찬 감사합니다.”별로 감사한 마음은 없지만 지훈은 무심하게 말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그런 지훈을 보며 유건은 여운이 가득 느껴지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잠시 내려놨던 포크를 집어 들고, 웃으며 지훈에게 식사를 마저 권했다.결국 하는 수 없이 지훈도 멈췄던 식사를 다시 이어갔지만, 불편한 식사 자리에서 먹는 샐러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 *파랗던 하늘이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채원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6시까지 여기로 와.]핸드폰에는 메시지와 함께 레스토랑 위치가 함께 찍혀 있
정신없는 오전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점심을 향해 가고 있었다.“그래서 관련 미팅은 모레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 점심은 어떻게 하실까요?”업무 브리핑을 마무리하고 시간을 확인한 지훈이 태건을 보며 물었다.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태건은 잠시 고민하다 그를 바라봤다.“간단하게 먹죠. 별로 입맛이 없네요.”태건의 대답에 지훈은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려 주변 식당을 생각했다. “그러면 근처에 샌드위치 가게가 새로 생겼는데, 샌드위치로 준비할까요?”“네, 좋네요. 장 비서님은 나가서 식사하고 오세요.”무심하게 말하고 태건의 시선은 다시 서류로 향했다.지훈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일이 늘어났다고 해도 굳이 식사까지 대충 챙기면서 몰두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이내 깊게 관여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지훈이 본부장실을 나오자, 앞에 있던 여직원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식사하러 가시나요?”그녀가 아까부터 쳐다보던 거울을 몰래 옆으로 슬쩍 치우며 물었다.“네. 식사 안 하십니까?”“아, 저는 도시락이요. 늘 챙겨 오거든요.”“아아, 네에.”별로 궁금하진 않았는지 대답하는 목소리에 성의는 없었지만, 여직원은 수줍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본부장님이랑 같이 안 하시나요?”“본부장님은 샌드위치만 드시겠다고 해서요. 그거 챙기고 나서 밥 먹어야죠.”“그럼 제가 갔다 올까요?”여직원의 말에 지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말은 없었지만 그녀를 보는 표정에 괜찮겠냐는 말이 묻어 있었다.“뭐, 그래 주면 나야 고마운데…….”굳이? 지훈이 조금 떨떠름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여직원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제가 다녀올게요. 장 비서님 요즘에 밥도 잘 못 챙겨 드셨잖아요.”“……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주문은 제가 해놓을게요.”“네! 맡겨만 주세요!”여직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지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
“흠흠~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네요~”콧노래와 함께 웃음기 가득한 유건의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직원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수많은 소문을 안고 대건그룹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2주. 그 2주 동안 유건은 이틀에 한 번은 꼭 전략기획실을 찾았다.그의 목적은 딱 하나였다. 전략기획본부장 강태건을 만나겠다는 것. 하지만 귀신같이 유건이 찾아올 때면 꼭 태건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미팅이 있거나 외근이 있거나, 혹은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거나.그렇게 매번 빈손으로 돌아갔음에도, 유건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안녕하세요~”오늘도 역시나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오는 유건에 여직원은 사회생활용 미소를 장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녕하세요. 오늘도 본부장님 만나러 오셨을까요?”“네! 오늘은 안에 있을까요?”유건이 굳게 닫힌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은 제발 열리길 바라는 그의 기대와 다르게 여직원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뇨. 안 계십니다.”“에엥? 아니, 이 사람은 맨날 일 안 하고 어딜 그렇게 다녀요?”여직원의 말에 유건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러는 너야말로 일은 안 하고 왜 이렇게 돌아다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여직원은 애써 미소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글쎄요. 보통 저한테는 어디 간다고 말씀을 잘 안 해주셔서요.”“맨날 장 비서님한테만 얘기하죠? 에휴, 장 비서님도 피곤하겠다.”유건의 말에 여직원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동감이었다.“아아, 오늘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뭐 다른 말도 없었어요? 진짜 하나도?”유건의 물음에 여직원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눈빛은 끈질겼다. 무슨 대답이라도 꼭 듣고 가겠다는 확고한 고집이 담긴 눈이 그녀를 계속 바라봤다.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여직원이었다. 계속 이렇게 상대하고 있어봤자 더 힘든 건 본인 쪽이었다.“장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