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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알려주지 않는 선생님

Penulis: 유월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8-13 21:52:06

그 질문을 수첩에 남긴 뒤.

며칠이 더 지났다.

도와준다는 건 대체 뭘까.

엘라는 아직 그 문장에 답을 적지 못했다.

사실.

답을 찾으려고 적은 질문도 아니었다.

그저.

언젠가 다시 생각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남겨둔 것이었다.

검은 점은 그 뒤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마다 손을 확인하고.

신성력을 조금 사용한 뒤 기록하고.

이상 반응이 있는지 살폈다.

오늘 아침 기록도 같았다.

신성력 이상 없음.

검은 점 없음.

엘라는 수첩을 덮었다.

없으니까 다행이었다.

하지만.

없다고 해서 전에 본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냥 계속 보기로 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그리고 황궁에 도착한 순간.

엘라는 알게 됐다.

오늘은 검은 점보다 훨씬 귀찮은 것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

“제가요?”

엘라는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에드먼드 교수는 아주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저 아이들을 가르칩니까?”

“정확히는 도와주는 겁니다.”

엘라의 표정이 묘해졌다.

도와준다.

며칠 전에 수첩에 적어둔 말이었다.

그런데.

“같은 말 아닙니까?”

“무엇과요?”

“가르치는 것과 도와주는 것.”

“공녀는 같다고 생각합니까?”

“…….”

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또 질문이었다.

“교수님.”

“왜요?”

“제가 물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 다시 물으십니까?”

“공녀가 먼저 생각해볼 수 있으니까요.”

“답을 모르니까 물어본 겁니다.”

“그럼 오늘 확인해보십시오.”

엘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답을 안 알려주시는군요.”

“오늘 수업과 잘 맞습니다.”

“교수님께만요.”

조금 떨어진 벤치에서 테오도르가 피식 웃었다.

“또 시작됐네.”

엘라가 그를 바라봤다.

“전하께서는 안 하십니까?”

“나는 관찰자래.”

“왜요?”

“황태자 교육의 일부.”

“그 말이면 다 됩니까?”

“요즘 꽤 편해.”

“남용하지 마십시오.”

테오도르가 웃었다.

엘라는 한숨을 쉬며 정원 쪽을 바라봤다.

황궁 동쪽 별궁의 작은 정원.

그곳에는 다섯 명의 아이가 앉아 있었다.

노아.

세드릭.

얼마 전 기사단 식당에서 인사했던 두 명의 귀족 영애.

그리고.

처음 보는 소년 하나.

은갈색 머리.

작은 안경.

아이들은 엘라를 발견하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엘라는 순간 어색해졌다.

평소에는 자신이 교수 앞에 앉아 있었다.

기사들에게 배우고.

황제에게 질문받고.

테오도르와 같이 혼나는 쪽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이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눈으로.

“앉으셔도 됩니다.”

아이들이 자리에 앉았다.

세드릭이 가장 먼저 물었다.

“오늘은 무엇을 합니까?”

엘라는 뒤를 돌아봤다.

에드먼드 교수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책을 펼쳤다.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도 아직 모릅니다.”

다섯 아이의 표정이 동시에 묘해졌다.

세드릭이 물었다.

“공녀님이 가르쳐주시는 것 아닙니까?”

“보조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르십니까?”

“네.”

테오도르가 벤치에서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조금 흔들렸다.

엘라가 쳐다봤다.

“웃으십니까?”

“아니.”

“웃고 계십니다.”

“조금.”

엘라는 무시하기로 했다.

“교수님께서는 협력 수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정원 한쪽에 놓여 있는 물건들을 바라봤다.

나무판.

긴 밧줄.

작은 통.

공 모양의 푸른 마력석.

그리고 허리 높이 정도의 원형 울타리.

아마.

저것들을 이용하는 것 같았다.

“설명서가 있을 겁니다.”

세드릭이 손을 들었다.

“저기 있습니다.”

정원 입구 작은 탁자 위.

종이 한 장.

엘라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과제.

울타리 안쪽의 마력석을 꺼낼 것.

조건.

울타리 안으로 직접 들어갈 수 없음.

마력 사용 금지.

제한 시간 삼십 분.

엘라는 종이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울타리 안의 마력석을 봤다.

단순해 보였다.

밧줄을 던져 걸고 당기면—

“밧줄로 묶어서 당기면 됩니다.”

세드릭이 곧바로 말했다.

엘라의 입이 멈췄다.

자신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무심코.

‘맞습니다.’

라고 할 뻔했다.

하지만.

그 순간.

며칠 전 수첩에 적어둔 질문이 떠올랐다.

도와준다는 건 대체 뭘까.

자신이 지금 답을 말하면.

이 아이들은 그 방법을 따라 할 것이다.

그게 도움이 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자신이 문제를 풀어주는 걸까.

엘라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말했다.

“해보십시오.”

세드릭의 눈이 빛났다.

“정답입니까?”

“모릅니다.”

“…….”

“세드릭 생각이잖아요.”

“네.”

“그럼 해보면 되지 않습니까?”

세드릭은 잠시 이상한 얼굴로 엘라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 밧줄을 집어 들었다.

첫 번째.

휙.

밧줄이 마력석 옆으로 떨어졌다.

두 번째.

휙.

이번에는 마력석 위를 넘어갔다.

세 번째.

밧줄 고리가 마력석 주변에 걸렸다.

“됐다!”

세드릭이 힘껏 잡아당겼다.

마력석이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쓱.

밧줄이 미끄러졌다.

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세드릭의 얼굴이 굳었다.

“다시 하면 됩니다.”

엘라가 말했다.

세드릭은 다시 던졌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점점 표정이 나빠졌다.

“이상하네.”

노아가 옆에서 말했다.

“밧줄만으로는 잡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세드릭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금만 더 하면 돼.”

“시간이 줄고 있습니다.”

“알아.”

둘 사이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엘라는 입을 열려다가 멈췄다.

말려야 하나.

조금 더 봐야 하나.

그녀는 일단 기다렸다.

세드릭은 계속 같은 방법을 반복했다.

노아는 자꾸 나무판 쪽을 바라봤다.

두 영애는 서로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 소년.

그 아이는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은 무릎 위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무언가 계산하는 것처럼.

엘라는 그 모습을 조금 더 바라봤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소년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에런입니다.”

“에런.”

“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소년의 눈이 커졌다.

“저는…….”

세드릭이 먼저 말했다.

“얘는 원래 말 안 합니다.”

엘라가 세드릭을 바라봤다.

“제가 에런에게 물었습니다.”

세드릭은 입을 다물었다.

에런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엘라가 물었다.

“생각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왜 말하지 않습니까?”

에런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틀릴까 봐…….”

작은 목소리였다.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틀리면 고치면 된다.

자신도 그런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만으로 에런이 입을 열까.

“틀리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에런이 눈을 깜빡였다.

“실패합니다.”

“지금은 성공했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밧줄로 향했다.

마력석은 여전히 울타리 중앙에 있었다.

세드릭의 얼굴이 붉어졌다.

엘라는 곧바로 덧붙였다.

“세드릭이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엘라는 에런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잠시.

“지금 틀린 생각 하나가 더 나온다고 아주 큰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테오도르가 멀리서 웃었다.

엘라가 뒤를 돌아봤다.

“왜 웃으십니까?”

“위로를 진짜 못해서.”

“지금은 위로가 아닙니다.”

“그게 더 문제야.”

에런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생겼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무판을…….”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에런은 다시 움츠러들었다.

엘라는 재촉하지 않았다.

잠시 뒤.

소년이 말을 이었다.

“나무판 두 개를 연결하면 울타리 위에 걸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드릭이 물었다.

“다리처럼?”

“응.”

“우리가 올라가면 조건 위반이잖아.”

“우리가 올라가는 게 아니라.”

에런이 마력석을 가리켰다.

“통을 밀어 넣으면 돼.”

아이들은 주변을 살폈다.

작은 나무통 하나.

노아가 가장 먼저 이해했다.

“통에 밧줄을 묶고 마력석 위로 씌우는 거야?”

에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을 뒤집어서.”

“그럼 돌이 안 미끄러지겠다.”

두 영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판은 우리가 잡을게.”

세드릭은 잠시 밧줄을 내려다봤다.

자신의 방법을 버려야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결국 에런에게 물었다.

“밧줄은 어디에 묶어?”

에런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통 손잡이에.”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무판 두 개를 연결하고.

한쪽은 울타리 위에 걸쳤다.

다른 쪽에서는 두 영애가 흔들리지 않도록 잡았다.

노아와 세드릭이 나무통에 밧줄을 묶었다.

에런은 방향을 봤다.

“조금 왼쪽.”

“이 정도?”

“더.”

“여기?”

“네.”

통이 나무판 위를 따라 움직였다.

툭.

울타리 안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마력석에서 조금 벗어났다.

세드릭이 말했다.

“실패했잖아.”

에런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엘라가 입을 열려던 순간.

노아가 먼저 말했다.

“옆으로 당기면 되잖아.”

그는 밧줄 반대쪽을 잡았다.

“세드릭, 같이.”

두 아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밧줄을 당겼다.

끼익.

나무통이 조금씩 움직였다.

조금.

조금 더.

그리고.

툭.

마력석 위를 덮었다.

“됐다!”

이번에는 모두가 동시에 외쳤다.

아이들은 밧줄을 당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통 자체가 움직이지 않았다.

“무거워!”

“더 당겨!”

“안 돼!”

세드릭과 노아 둘만으로는 부족했다.

엘라는 순간 앞으로 나가려 했다.

자신이 잡으면 된다.

힘을 보태면 금방 움직일 수 있다.

한 걸음.

그러다.

멈췄다.

정말 자신이 잡아야 하나.

아이들이 할 수 있는데.

자신이 빨리 끝내고 싶어서 끼어드는 건 아닐까.

엘라는 주변을 봤다.

두 영애는 아직 나무판을 붙잡고 있었다.

에런은 방향만 보고 있었다.

“세드릭.”

“네?”

“지금 밧줄 잡고 있는 사람이 몇 명입니까?”

“저랑 노아.”

“다른 사람은요?”

아이들이 주변을 바라봤다.

노아가 먼저 말했다.

“나무판 이제 안 잡아도 되지 않아?”

한 영애가 조심스럽게 손을 놓았다.

판은 그대로였다.

“안 움직여.”

두 영애가 곧장 밧줄 쪽으로 달려왔다.

이제 네 명.

“하나, 둘.”

노아가 구령을 붙였다.

“셋!”

쭉―

통이 조금 움직였다.

“다시!”

“하나, 둘, 셋!”

더 움직였다.

에런도 결국 뒤에서 밧줄을 잡았다.

다섯 명이 함께 힘을 줬다.

통이 울타리 아래 작은 틈까지 끌려왔다.

그런데.

멈췄다.

통의 크기 때문에.

울타리를 통과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여기까지 했는데!”

세드릭이 소리쳤다.

모래시계의 모래는 얼마 남지 않았다.

엘라도 통을 바라봤다.

통은 못 나온다.

그렇다면—

입을 열려다가.

또 멈췄다.

마력석만 나오면 된다.

그걸 자신이 말해야 할까.

그 순간.

노아가 말했다.

“통을 세우면?”

세드릭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밧줄 한쪽을 위로 당기면 넘어질 것 같은데.”

에런이 곧장 통을 살폈다.

“가능해.”

아이들은 다시 자리를 바꿨다.

세드릭과 노아.

두 영애.

그리고 에런.

각자 밧줄을 나눠 잡았다.

“지금!”

통이 기울었다.

데구루루.

푸른 마력석이 통 밖으로 굴러나왔다.

울타리 아래 작은 틈.

돌이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발앞에서 멈췄다.

정적.

모두가 마력석만 바라봤다.

그러다.

“됐다!”

환호성이 터졌다.

세드릭과 노아가 손을 마주쳤다.

두 영애가 에런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네 생각으로 시작했어!”

“진짜 됐어!”

에런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엘라도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테오도르가 벤치에서 박수를 쳤다.

“시간!”

에드먼드 교수가 모래시계를 확인했다.

“이십팔 분.”

제한 시간 안이었다.

아이들의 환호가 더 커졌다.

⸻

잠시 뒤.

아이들은 정원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각자의 앞에는 차가운 과일차와 작은 과자가 놓였다.

방금 전까지 협력 수업을 했지만.

마지막 딸기 과자가 하나 남자 분위기는 조금 달라졌다.

세드릭의 손.

노아의 손.

동시에 과자로 향했다.

둘의 손이 멈췄다.

잠시.

세드릭이 말했다.

“반 나눌까?”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엘라는 자기 과자를 먹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는 밧줄 하나를 두고 다퉜던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과자를 반으로 나누고 있었다.

이상했다.

사람은 한 시간 만에도 조금 달라질 수 있나.

아니면.

원래 이런 아이들이었는데 자신이 몰랐던 걸까.

그때.

에드먼드 교수가 물었다.

“공녀.”

“네.”

“오늘 무엇을 했습니까?”

엘라의 손이 멈췄다.

“제가요?”

“네.”

“아이들이 문제를 풀었습니다.”

“공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까?”

엘라는 오늘 일을 되짚었다.

세드릭에게 해보라고 했다.

에런에게 생각을 물었다.

사람이 부족할 때 주변을 보게 했다.

하지만.

마력석을 꺼낸 것은 아이들이었다.

밧줄도.

통도.

자신은 잡지 않았다.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세드릭이 곧장 말했다.

“아닙니다.”

엘라가 그를 바라봤다.

“왜요?”

“공녀님이 아니었으면.”

세드릭이 잠시 생각했다.

“저 계속 밧줄 던지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노아가 말했다.

“저도 그냥 옆에서 뭐라고만 했을 것 같습니다.”

한 영애가 덧붙였다.

“저는 아예 끼어들지 않았을 것 같아요.”

마지막.

에런.

소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

“말 안 했을 것 같습니다.”

엘라가 눈을 깜빡였다.

“왜요?”

“공녀님이 안 물어봤으면.”

에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제 생각이 틀렸을 것 같아서 그냥 있었을 것 같습니다.”

엘라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들은 자신이 없었다면 달랐을 거라고 했다.

에드먼드 교수가 물었다.

“그럼 공녀가 문제를 푼 겁니까?”

“아닙니다.”

엘라는 바로 대답했다.

“아이들이 풀었습니다.”

“그런데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그렇네요.”

“왜 그랬을까요?”

엘라의 얼굴이 굳었다.

“교수님도 모르십니까?”

“공녀 생각을 묻는 겁니다.”

“…….”

또였다.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한 것.

질문.

기다림.

조금 방향을 돌린 것.

하지만.

그게 정확히 왜 도움이 된 건지는 모르겠다.

“제가 답을 안 말해서?”

“그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도 됐습니까?”

엘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건 아니었다.

에런은 질문하지 않았다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드릭은 계속 자기 방식만 반복했을 수도 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엘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질문을 해서?”

“질문만 하면 됩니까?”

“교수님.”

“네.”

“일부러 그러시는 겁니까?”

“무엇을요?”

“제가 하나 말할 때마다 틀릴 수 있는 경우를 하나씩 더 말씀하십니다.”

“좋은 관찰입니다.”

“칭찬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웃었다.

에드먼드 교수의 입가도 아주 조금 올라갔다.

엘라는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도와준다는 게요.”

며칠 전.

수첩에 적어둔 질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직접 해봤는데도.

여전히 답은 없었다.

다만.

조금 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엘라가 말했다.

“대신 하는 것만 도움은 아닌 것 같습니다.”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제가 대신했으면.”

엘라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더 빨리 끝났을 수도 있습니다.”

“…….”

“그런데 에런의 방법은 못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에런의 눈이 조금 커졌다.

“세드릭도 다른 사람 말을 안 들었을 수 있고.”

“…….”

“노아도 자기가 본 걸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엘라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그렇다고 항상 기다리기만 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에드먼드 교수는 그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엘라가 그를 바라봤다.

“왜요?”

“공녀가 이미 다음 질문을 했으니까요.”

“…….”

“굳이 내가 하나 더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엘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조금 고맙습니다.”

테오도르가 웃었다.

⸻

수업이 끝난 뒤.

아이들은 하나둘 돌아갔다.

에런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엘라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소년은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저.”

“네.”

“오늘 제가 말한 게 정말 도움이 됐습니까?”

“네.”

엘라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시작점이 됐습니다.”

“운이 좋았던 건 아닙니까?”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에런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엘라가 곧바로 덧붙였다.

“그런데 그게 왜 문제입니까?”

에런이 눈을 깜빡였다.

“네?”

“운이 좋았든.”

엘라는 말했다.

“에런이 잘 생각했든.”

“…….”

“말하지 않았으면 아무도 몰랐잖아요.”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틀린 생각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틀렸는데도요?”

“왜 틀렸는지는 알 수 있겠죠.”

에런은 한동안 생각했다.

“그럼 다음에도 말해야 합니까?”

엘라는 바로 ‘네’라고 하려다가 멈췄다.

“그건 에런이 정해야 합니다.”

“제가요?”

“네.”

“공녀님이 말하라고 하시는 게 아니고요?”

“제가 없을 때도 있을 텐데요.”

에런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엘라는 덧붙였다.

“다만.”

“네.”

“말하지 않고 나중에 후회할 것 같으면.”

잠시.

“그때는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에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겠습니다.”

“저도요.”

“공녀님도요?”

“저도 생각하기 전에 말해서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뒤에서 테오도르가 말했다.

“생각보다가 아니라 많이.”

엘라가 돌아봤다.

“전하께서는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아까부터.”

“엿들으셨습니까?”

“그냥 들렸어.”

“그걸 엿듣는다고 합니다.”

“황궁 정원인데?”

엘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황제 폐하와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니까.”

에런이 결국 작게 웃었다.

그리고 처음보다 조금 편안한 얼굴로 돌아갔다.

⸻

그날 오후.

엘라에게 예상하지 못한 호출이 내려왔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시종의 말에 엘라는 테오도르를 바라봤다.

“전하도요?”

시종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공녀님만입니다.”

테오도르의 눈썹이 올라갔다.

“왜?”

“저도 모릅니다.”

엘라가 말했다.

“너 또 뭐 했어?”

“오늘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어.”

“오늘은 정말입니다.”

테오도르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엘라는 시종을 따라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혼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문 앞에서 옷매무새를 한번 정리했다.

똑똑.

“들어오너라.”

문이 열렸다.

집무실 안에는 황제와 에드먼드 교수.

그리고 처음 보는 노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짙은 녹색 관복.

가슴에는 황실 교육청의 문장이 달려 있었다.

엘라는 예를 갖췄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리 오너라.”

황제는 평소보다 조금 진지한 표정이었다.

엘라는 세 사람 앞에 섰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황제의 눈썹이 올라갔다.

에드먼드 교수가 한숨을 쉬었다.

“왜 호출될 때마다 잘못부터 생각합니까?”

“보통 그럴 때 많이 부르셨습니다.”

황제가 웃었다.

“오늘은 칭찬하려고 불렀다.”

엘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정말입니까?”

“왜 그렇게 못 믿느냐?”

“갑자기 따로 부르셔서요.”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맞은편 노인을 소개했다.

“이쪽은 황실 교육청장 로렌 백작이다.”

엘라가 다시 인사했다.

로렌 백작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 수업을 지켜봤습니다.”

“어디에서요?”

“별궁 이층 창문에서.”

엘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다들 숨어서 보는 걸 좋아하십니까?”

황제가 헛기침했다.

에드먼드 교수는 고개를 돌렸다.

로렌 백작은 소리 내 웃었다.

“관찰이라고 하지요.”

“그렇군요.”

완전히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로렌이 물었다.

“오늘 아이들과 있는 것이 재미있었습니까?”

엘라는 잠시 생각했다.

“조금 어려웠습니다.”

“재미는요?”

“있었습니다.”

“어떤 점이?”

“제가 생각하지 못한 답이 나왔습니다.”

엘라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에런이 나무판을 쓰자고 한 것도.”

“…….”

“노아가 통을 옆으로 움직인 것도요.”

“그래서?”

“사람마다 보는 게 달랐습니다.”

로렌 백작은 에드먼드 교수와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공녀가 처음부터 답을 알려줬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엘라는 오늘 일을 떠올렸다.

“더 빨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나쁜 겁니까?”

“아닙니다.”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빨리 해야 하는 일이면 그게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로렌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런데 오늘은?”

“오늘은.”

엘라는 생각했다.

“아이들이 생각해보는 수업이었으니까.”

잠시.

“제가 먼저 말하지 않은 게 더 나았던 것 같습니다.”

“항상?”

“아닙니다.”

“왜?”

“에런은 제가 물어보지 않았으면 아무 말도 안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공녀 생각에는 무엇이 중요합니까?”

엘라의 얼굴이 난처해졌다.

“그걸 아직 모르겠습니다.”

로렌 백작이 눈을 깜빡였다.

엘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오늘 수업 끝나고도 생각 중입니다.”

황제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그렇군.”

엘라는 황제를 바라봤다.

“왜 웃으십니까?”

“아니다.”

“웃으셨습니다.”

“조금.”

로렌 백작이 문서 한 장을 꺼냈다.

“그래서 공녀에게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그 위에는 여러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노아.

세드릭.

에런.

오늘 함께했던 아이들.

그리고 몇 명의 낯선 이름.

“다음 달부터 황궁에서 어린 귀족들을 위한 예비교육반을 조금 확대할 예정입니다.”

“아카데미입니까?”

“그보다 가벼운 과정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테오도르와 함께 공부하거나 훗날 황실에서 일할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이지.”

엘라는 명단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황제의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가끔 네가 그 아이들의 보조 지도를 맡아줬으면 한다.”

엘라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요?”

“정식 교사는 아니다.”

로렌 백작이 설명했다.

“아이들과 함께 문제를 풀고.”

“…….”

“훈련을 돕고.”

“…….”

“어려워하는 부분을 관찰해 교수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입니다.”

엘라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저도 아직 배우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에드먼드 교수가 말했다.

엘라가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왜 저입니까?”

교수는 잠시 생각했다.

“공녀가 오늘 처음부터 모든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

“추천하지 않았을 겁니다.”

엘라의 눈썹이 올라갔다.

“칭찬입니까?”

“공녀가 판단하십시오.”

“교수님.”

황제가 웃었다.

“그래서 할 생각이 있느냐?”

엘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돕는 일.

오늘 한번 해봤는데도.

아직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실수할 수도 있다.

노아에게 자신의 속도를 강요했던 것처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밀어붙일 수도 있다.

“잘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엘라가 말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실수할 수도 있고요.”

“당연하다.”

“아이들이 저를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로렌 백작이 웃었다.

“그것도 그럴 수 있습니다.”

엘라는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 됐다.

“아무도 괜찮다고는 안 해주시는군요.”

황제가 말했다.

“괜찮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엘라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 대답은.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그럼.”

잠시.

“해보겠습니다.”

황제가 물었다.

“확실하냐?”

“아닙니다.”

황제의 눈썹이 올라갔다.

엘라는 태연하게 덧붙였다.

“잘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

“그래도 해보고 싶습니다.”

황제가 웃었다.

“그걸로 충분하다.”

에드먼드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문서 아래에 서명했다.

사각.

황제의 이름 아래.

새로운 기록이 적혔다.

엘라 펠리시아.

황실 예비교육반 보조 지도자.

아직 열 살.

정식 직책이라고 부르기에도 작은 자리.

엘라는 그 글자를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보조 지도자.

도와주는 사람.

그런데.

도와준다는 건 정확히 뭘까.

결국.

처음 질문은 아직 그대로였다.

⸻

집무실에서 나온 엘라는 교실로 돌아갔다.

테오도르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이야기할 것이 있었습니다.”

“혼났어?”

“아닙니다.”

“진짜?”

“왜 아무도 믿지 않습니까?”

“네가 자주 사고 치니까.”

엘라는 품속의 문서를 내밀었다.

테오도르가 받아 읽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너 선생님 됐어?”

“보조 지도자입니다.”

“그게 선생님이잖아.”

“정식은 아닙니다.”

테오도르는 문서와 엘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래서 이제 애들한테 답 알려줘?”

엘라가 피식 웃었다.

“전하도 그걸 물으십니까?”

“왜?”

“저도 오늘 하루 종일 그 생각을 했습니다.”

“답 나왔어?”

“아니요.”

테오도르가 어이없는 얼굴이 됐다.

“근데 선생님이 됐어?”

“보조 지도자라니까요.”

“그게 더 불안한데.”

엘라가 문서를 빼앗았다.

“축하 안 해주실 겁니까?”

“축하해.”

“너무 늦었습니다.”

“너도 방금 요구했잖아.”

“그래도 조금 더 성의 있게 해주십시오.”

테오도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네.”

“오늘 애들 좋아 보였어.”

엘라가 그를 바라봤다.

“무엇이요?”

“문제 풀고 나서.”

테오도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자기들이 해냈다는 얼굴이었어.”

엘라는 잠시 조용해졌다.

그건 자신도 봤다.

세드릭.

노아.

에런.

두 영애.

모두.

마력석을 꺼낸 순간 환하게 웃었다.

“전하.”

“왜?”

“제가 해줬으면.”

“응.”

“그런 얼굴은 아니었겠죠?”

테오도르는 잠시 생각했다.

“아마?”

“아마입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엘라가 피식 웃었다.

“맞습니다.”

“뭐가?”

“모르는데 아는 척하면 안 되죠.”

“너 요즘 진짜 이상해졌어.”

“좋은 뜻입니까?”

“……반반.”

엘라가 문서를 말아 테오도르의 팔을 툭 쳤다.

“아!”

“그럼 나쁜 뜻은 빼십시오.”

“폭력적인 선생님이네.”

“보조 지도자입니다.”

“그게 그거야!”

두 아이의 웃음소리가 복도 끝까지 이어졌다.

⸻

그날 밤.

엘라는 새로 받은 임명 문서를 책상 한쪽에 놓았다.

그리고.

신성력 기록 수첩을 펼쳤다.

먼저 익숙한 기록.

오늘 신성력 이상 없음.

검은 점 없음.

그 아래.

오늘의 일을 적었다.

아이들과 협력 과제 진행.

잠시.

답을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문제를 해결함.

펜이 멈췄다.

조금 생각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한 것도 아님.

엘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자신이 정확히 뭘 한 거지?

질문했다.

기다렸다.

한 번은 주변을 보라고 했다.

그 정도였다.

그래서 마지막에 적었다.

도와준다는 건 대신 하는 것과 다른 걸까?

잠시.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도 다른 걸까?

엘라는 한참 두 문장을 바라봤다.

답은 아직 없었다.

결국.

맨 아래에 작게 적었다.

조금 더 해볼 것.

그 정도면 됐다.

지금은.

⸻

같은 시각.

황제의 집무실.

모두가 돌아간 뒤에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

황제의 앞에는 두 장의 문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오늘 작성된 황실 교육청의 문서.

엘라 펠리시아.

보조 지도자 임명.

그리고.

다른 하나.

북부에서 막 도착한 비밀 보고서.

황제의 손이 천천히 두 번째 문서를 펼쳤다.

제7방어선 마력석 오염 확산.

파견 신관 두 명 정화 실패.

그리고 마지막.

발테르 대공, 외부 치료 거부.

황제의 표정이 굳었다.

“고집 센 놈.”

그는 이마를 짚었다.

며칠 전 자신이 보낸 편지는 도착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네 판단만 믿지 마라.

그런데.

대답은 없었다.

대신 올라온 것은.

치료 거부 보고서였다.

황제는 서랍을 열었다.

오래된 편지 한 장.

발테르가 아직 소년이던 시절.

황궁에서 교육받으며 쓴 글이었다.

삐뚤지만 단단한 글씨.

남에게 도움받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황제는 그 문장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때부터 잘못 배웠군.”

그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손이 멈췄다.

잘못 배웠다.

정말 그뿐일까.

왜 저 아이는.

그때부터 도움받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

황제는 어린 시절의 단테를 떠올리려 했다.

말수가 적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아이.

시키지 않아도 자기 일은 끝냈다.

아파도 말하지 않았다.

그때는.

‘강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자신들이 보지 못한 것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황제는 편지를 다시 접었다.

아직.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너무 빨리 답을 정하지 않기로 했다.

책상 한쪽.

엘라의 교육 보고서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아이들과 문제를 풀었다는 간단한 기록.

황제는 두 문서를 번갈아 봤다.

황궁에는.

누군가를 도와보는 법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아이가 있었다.

북부에는.

도움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을 연결할 이유는 아직 없었다.

너무 멀었다.

시간도.

거리도.

무엇보다.

엘라는 겨우 열 살이었다.

황제는 북부 보고서 위에 짧게 적었다.

다른 접근 방법 검토.

그리고 잠시 뒤.

그 아래.

본인의 상태와 판단 이유도 확인할 것.

펜을 내려놓았다.

무엇이 필요한지는.

아직 몰랐다.

그러니.

조금 더 봐야 했다.

⸻

황궁의 작은 방.

엘라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수첩이 펼쳐져 있었다.

마지막 두 줄.

도와준다는 건 대신 하는 것과 다른 걸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도 다른 걸까?

그리고.

아주 멀리 떨어진 북부에서는.

단테가 치료사의 방문을 거절한 채.

혼자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아직.

둘 중 누구도.

상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답도 없었다.

그저.

한쪽에는 질문이 하나 더 생겼고.

다른 한쪽에는 닫힌 문이 하나 더 생겼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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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기에 잠식된 대공   빌리지 않아도 되는 힘

    백은샘의 흐름을 본떠 만든 세척 구조는 다음 날 아침부터 다섯 번의 반복 시험에 들어갔다. 전날 한 번 성공했다고 해서 바로 현장 설계에 넣지 않기로 한 결정 때문이었다. 아르센은 같은 크기의 일반 마력석 세 개를 새로 준비했고, 에른은 각각 다른 산지에서 가져온 돌을 섞었다. 하나는 북부에서 흔히 쓰는 회색 마력석, 하나는 황실 기술단이 수도에서 가져온 표준석, 마지막 하나는 품질이 조금 떨어져 보조 장치에나 쓰던 갈색 마력석이었다.단테가 실험대 위 세 돌을 보고 물었다.“일부러 다른 걸 쓴 거야?”“네. 좋은 돌에서만 되는 구조면 북부 전체에 쓰기 어렵습니다.”아르센이 갈색 돌을 들어 보였다.“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실제 방어선에는 항상 최상급 마력석만 들어가지 않으니까요. 전쟁이 길어지거나 보급이 끊기면 이런 돌도 써야 합니다.”단테는 잠시 돌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재료가 있을 때만 안전한 체계는 결국 물자가 부족해지는 순간 누군가의 몸으로 부족분을 메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북부가 몇 번이나 그래왔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엘라는 안전선 밖에서 자료판을 받아들며 물었다.“오늘도 백은샘에서 가져오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거죠?”에른이 답했다.“없습니다. 어제 기록한 흐름 비율만 사용합니다. 7 대 3, 4 대 6, 5 대 5로 순차 변환하고 합류점에서 압력을 한번 낮춥니다.”“그 비율이 꼭 저 숫자여야 합니까?”아르센이 웃었다.“그걸 확인하는 게 오늘 시험 중 하나입니다.”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성공한 모양을 그대로 신앙처럼 반복하는 순간, 또 다른 고정된 답이 된다. 정말 중요한 건 백은샘을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잔류 마기를 움직이게 했는지 찾는 일이었다.⸻첫 번째 반복 시험은 전날과 거의 같은 조건이었다.손상률 14퍼센트의 폐기 예정 전달석 안에 남은 오염을 3.6퍼센트까지 맞춘 뒤, 일반 마력을 세 갈래 흐름으로 흘렸다. 백은샘의 실제 마력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신성력을

  • 마기에 잠식된 대공   흐름을 가져오지 않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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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오염 마기를 사용하는 첫 현장 시험은 설화초가 완전히 핀 날 오전 열 시에 시작됐다.대공성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단테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리아에게 상태를 확인했고, 전날보다 잠을 조금 덜 잤다는 사실까지 먼저 알렸다. 두통과 감각 이상은 없었고 마기 유입량 역시 최근 평균 범위 안이었다. 엘라는 그 옆에서 듣기만 했다. 이제 단테가 자기 상태를 말할 때마다 의미를 붙이거나 변화라고 짚어줄 필요는 없었다. 말을 하는 것도, 필요하면 멈추는 것도 어느새 현장 준비의 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오늘 사용하는 오염 마기는 제9방어선에서 회수된 마력석에서 추출한 극소량이었다. 이전에 오염도 78퍼센트였던 돌을 제3감시탑의 기존 순환에 잠깐 연결해 31퍼센트까지 낮췄던 것과는 방식부터 달랐다. 그때는 이미 살아 있는 고대 흐름에 작은 돌 하나를 맡겨보는 시험이었다면, 오늘은 자신들이 새로 만든 네 개의 전달석과 두 개의 교대선을 거쳐 실제 오염 마기가 움직일 수 있는지를 처음 확인하는 자리였다.그래서 사람들은 어제보다 훨씬 말이 적었다.회백 능선 초입에는 길이 120미터의 시험 구간이 이미 준비돼 있었다. 눈을 걷어낸 암반 사이로 네 개의 전달석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설되어 있었고, 각 전달석 사이에는 두 줄의 얇은 마력선이 번갈아 주선 역할을 맡도록 연결돼 있었다. 그 끝에는 방출 장치 대신 밀폐형 회수석이 놓였다. 오늘은 환경으로 마기를 내보내지 않는다. 전달만 확인한 뒤 마지막에 다시 회수한다. 실제 분산 방출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아르센이 마지막 봉인을 확인하며 말했다.“오늘 목표는 세 개뿐입니다. 실제 오염 마기가 전달 패턴을 따라 움직이는지, 이동 과정에서 전달석에 얼마나 남는지, 한쪽 선을 중간에 끊었을 때 보조선으로 전환되는지. 그 이상은 보지 않습니다.”단테가 물었다.“끝까지 안정적이어도?”“끝냅니다.”이번에는 아르센이 먼저 분명하게 잘라 말했다.단테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에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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