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개인적으로 챙겨온 일이라면…….”그녀가 천천히 되물었다.“식사나 약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그렇습니다.”“그것도 제 업무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요.”“비서가 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게 내 판단입니다.”도영은 단정적으로 대답했다.연지원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그러나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알겠습니다.”예상보다 순순한 대답이었다.“본부장님께서 불편하셨다면 진작 말씀해주시지 그러셨어요.”도영의 눈썹이 미세하게 좁혀졌다.“불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연지원은 그것을 놓치지
수진이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폈다.“그래도 답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요?”창밖으로 여름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파리와는 전혀 다른 빛이었다.두 달 전 이곳을 떠날 때만 해도 돌아온 뒤의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그저 멀리 가고 싶었다.차도영이 없는 곳으로.그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매일같이 떠오르지 않는 곳으로.그러나 도망치듯 떠났던 사람은 이제 없었다.나는 돌아왔다.그에게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내 자리로.“정해진 기한까지 기다려요.”나는 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때까지도 답이 없으면 조정 신청하고요.”“대표님
내가 그랑 팔레 본사 회의실에 들어서자, 이야기를 나누던 임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열두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답지 않게 재킷의 단추는 끝까지 잠겨 있었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정히 묶어둔 상태였다.다만 화장으로도 완전히 가리지 못한 눈 밑의 그늘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가장 먼저 나를 알아본 해외사업부 마케팅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놀란 얼굴들이었다.내가 오늘 귀국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수진을 포함해 몇 명 되지 않았다. 귀국 일
오후 세 시가 되자 법무팀이 본부장실로 올라왔다.동남아 유통망 계약을 맡은 서정훈 법무팀장도 함께였다.서정훈은 도영이 노드 리테일을 세울 때부터 주요 계약을 함께 처리한 사람이었다.도영 앞에서도 듣기 좋은 말만 고르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현지 독점권 조항은 수정했습니다. 다만 최소 구매 수량은 상대 측에서 양보할 의사가 없어 보입니다.”“그 조건을 받아들이면 재고 부담이 커집니다.”“마케팅 비용 일부를 상대 측에서 부담하는 조건으로 다시 협상해보겠습니다.”“그렇게 진행하세요.”보고는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끝
비행기가 인천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은 건,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바퀴가 지면에 닿는 순간 기체가 크게 흔들렸다.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한국이었다.두 달 만에 돌아온 서울은 떠날 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였다.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자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마지막까지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휴대전화를 켰다.꺼져 있던 화면 위로 메시지가 쏟아졌다.수진이 보낸 일정 보고.유온이 남긴 도착 확인 메시지.본사 임원들의 업무 연락과 파리 법인에서 넘어
“세 시에 법무팀 보고가 있고, 다섯 시에는 광고대행사 미팅입니다.”“알고 있습니다.”“저녁 식사는...”“취소하세요.”도영의 대답은 짧았다.어쩐지 선을 긋는 듯한 말투였지만 연지원은 당황하지 않았다.“알겠습니다.”그녀는 곧바로 태블릿에 일정을 수정했다.두 달 동안 연지원은 거의 모든 자리에 도영과 함께했다.임원회의와 외부 미팅은 물론이고, 업무상 동행이 필요하지 않은 식사 자리에도 자연스럽게 나타났다.그의 커피 취향과 식사 시간, 피로할 때 먹는 약까지 먼저 챙겼다.도영은 그 모든 것을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