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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6화

Autor: 눈빛 속의 약속
고작 사흘 만에 조사예는 몰라보게 초췌해져 있었다.

도경진은 아직 그녀를 부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듯했다.

조사예의 뒤에는 소심이 서 있었다. 주종 두 사람이 나란히 강유영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서유야, 호칭이 틀렸잖니. 나는 이제 사예 아씨가 아니라 도 부인이라 불러야지."

조사예는 턱을 치켜들고 서유를 흘겨보았다.

"아씨, 어쩌지요? 길이 좁아 마차를 돌리기가 마땅치 않습니다."

서유는 조사예의 말은 못들은 척 무시하며, 미간을 찌푸린 채 강유영에게 작게 속삭였다.

전당포 일로 바쁜 와중에, 조사예 따위가 길을 막고 소란을 부리고 있으니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강유영, 네게 사과하러 왔어."

조사예는 앞으로 다가오며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강유영은 단칼에 거절했다.

무엇을 사과하겠다는 건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조사예가 좋은 뜻으로 왔을 리 만무했다.

"어머님께서 그러시더라. 우리 부부가 혼례를 올리던 날 손님이 너무 많아 널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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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041화

    강유영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명백한 사실 앞에서 한씨도 발뺌할 수 없을 것이다.안타깝게도 지금 한씨의 수중에는 은자가 한 푼도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은자를 뱉어내게 만들었을 것이다."틀린 말은 아니다만……."한씨는 굳어진 얼굴로 마지못해 인정했다.강유영을 집안에 남기기로 그날부터, 한씨는 그녀를 철저히 무능한 인물로 곁에 둘 생각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강유영은 철저히 한씨의 뜻대로 글을 읽지 못하고 겁 많고 나약하게 자랐다. 한씨는 이 전당포가 영원히 자신의 차지일 줄 알았다.조원철이 강유영에게 글과 장부 보는 법을 가르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온갖 수완과 사람의 마음을 읽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었다. 한씨는 속이 타들어 갔다."더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강유영은 단칼에 말을 끊었다."어머니께서 가져가신 은자가 백삼십만 냥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차용증에는 삼십 만 냥이 적혀 있지요. 어머니 수중에 있는 은자로 직접 갚으십시오."강유영은 말을 마치고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대어 한씨와 유덕전을 번갈아 보았다.과연 두 사람이 은자 때문에 서로 물어뜯고 싸울까?이 정도로 순순히 물러설 이들이 아니었다. 불을 더 지펴야 할 듯했다.유덕전은 강유영이 이런 식으로 치고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한씨를 쳐다보았다."부인 생각은 어떠시오?"애초에 한씨가 먼저 그를 찾아와 은자를 융통하는 척하며 넉넉한 대가를 약속한 일이었다. 그래서 친히 걸음을 한 것이었다. 앞으로 어찌 대처할지는 전적으로 한씨의 몫이었다. 어찌 되었든 돈줄을 쥐고 있는 쪽은 한씨였다."내 수중에는 은자가 없다. 이것은 전당포가 진 빚이니, 내가 갚을 이유가 없다."한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쏘아붙였다. 애당초 은자가 넉넉했다면 이런 번거로운 수작을 부릴 이유도 없었다."그동안 가져가신 은자는 다 어디 있습니까? 백삼십만 냥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저를 위해 쓰신 것도 아니고, 국공부 생활비는 공금으로 충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040화

    원칙만 지킨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너희 둘은 잠시 물러나 있거라."유덕전은 그 말에 잠시 굳어지더니 이내 한발 물러섰다.그는 다시 강유영을 살폈다.어린 계집애가 지금 자신의 기를 꺾으려 드는 건가 싶었다.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이 처자가 만만한 상대라 여긴 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신중하게 다뤄야 할 듯했다."유 점주, 들어가지."한씨는 웃으며 손을 들어 길을 내어주었다.세 사람은 함께 서재로 들어갔다."당신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서유는 강유영이 한씨와 유덕전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서재 문 앞을 가로막고 수하들의 앞길을 막아섰다.수하들은 걸음을 멈추고 유덕전을 쳐다보았다."너희는 문 앞에서 기다리거라."유덕전은 손을 휘저었다. 그는 크게 괘념치 않았다. 자신과 한씨가 버티고 있는데 어린 계집애 혼자 무슨 짓을 벌이겠는가."앉으시지요."강유영은 손을 뻗어 자리를 권하고는 명을 내렸다."서유야, 차를 내오거라.""차용증은 가지고 있겠지?"유덕전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치 제집에 온 것처럼 편안한 태도였다."그렇습니다."강유영은 소매에서 차용증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한씨는 힐끗 유덕전을 쳐다보았다.유덕전은 찻잔을 내려놓고 손을 뻗어 차용증을 집어 들었다. 가볍게 훑어본 그가 강유영을 바라보았다."빚을 졌으면 돈을 갚는 법. 이에 이의는 없겠지?""당연한 말입니다."강유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수긍하는 태도였다.한씨는 강유영의 여유로운 태도에 경계심이 일었다.강유영은 더 이상 예전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할 아이가 아니었다. 이렇게 흔쾌히 수긍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상대가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으니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다."어린 점주가 제법 시원시원하군. 그렇다면 곧장 은자를 내놓으시지."유덕전은 차용증을 내려놓고 손끝으로 종이를 톡톡 두드렸다. 축 처진 눈꼬리를 치켜뜨며 강유영을 주시했다."유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039화

    본점을 한씨 대신 관리해온 유 낭자는 콧대가 높아 두 사람을 얕보곤 했다. 그러니 그들 역시 굳이 유 낭자를 설득해 새 주인을 따르게 할 마음이 없었다."도착했습니다."탁자에 앉아 있던 한씨는 유 낭자의 말에 맞은편의 유덕전을 쳐다보았다.유덕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한씨는 안하무인인 그의 태도와 등 뒤에 버티고 선 건장한 사내들을 보며 한결 마음을 놓았다. 강유영이 제아무리 영악하다 한들 어린 처자에 불과했다. 그녀가 무슨 수로 유덕전과 같은 망나니를 상대하겠는가.마차에서 내린 강유영은 전당포 앞을 막아선 험상궂은 사내 둘을 발견했다.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곧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턱을 넘어 주위를 둘러보니 전당포 안에는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유영 아씨."점주와 일꾼들이 일제히 인사를 올렸다."격식 차릴 것 없네."강유영은 손을 들어 가볍게 웃어 보였다."어찌 이제야 오는 게냐. 한참을 기다렸다."한씨는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핀잔을 주었다.강유영은 고개를 돌려 한씨를 힐끗 보곤 입을 닫았다. 굳이 변명할 가치도 못 느꼈다.한씨는 유덕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처자가 이 전당포의 새 주인인가?"의자에 앉아 있던 유덕전이 몸을 돌려 강유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얼굴은 반반하나 한눈에 봐도 겁이 많아 큰일을 감당할 그릇이 못 되었다. 그는 쓱 훑어보곤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이번 거래는 아주 쉽게 풀릴 것 같았다."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요?"강유영은 웃음기를 거두고 상대를 살폈다.유덕전은 칙칙한 회색 옷차림에 툭 불거진 광대, 얇고 거친 피부와 가늘게 처진 눈매를 하고 있었다. 비스듬히 흘겨보는 음흉한 눈빛이 한눈에 봐도 만만치 않은 자였다.한씨가 대동한 인물에 이런 행색이니 유덕전이 분명했다. 하지만 모르는 척 물어야 했다. 그래야 이쪽도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이분이 바로 유 점주시다. 일전에 네게 넘긴 차용증의 주인이시지."한씨는 헛기침을 하며 거들먹거렸다. 유덕전이 버티고 있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038화

    설마 도경진이 말해준 것일까?"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도 부인이 가장 잘 아실 텐데요."강유영은 눈매를 휘며 가볍게 웃었다.처음에는 조사예가 독수공방을 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곡을 찔린 듯한 지금의 표정을 보니 사실인 듯했다.도경진은 정말 그가 말한대로 조사예를 안지 않았다.같은 여인으로서 조사예가 혼인 후 겪는 수모와 도 부인에게 휘둘리는 처지를 생각하면 내심 씁쓸하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보니 모두 자업자득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앞날을 도모하기는커녕 달려와서 도발이나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조사예는 상대가 예전의 만만한 양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조사예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들썩였다. 단단히 분통이 터진 듯했다.도씨 가문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조사예는 자신이 입을 다물면 밖에서는 아무도 모를 테니 최소한 체면은 지킬 수 있으리라 여겼다. 어쨌든 의식주 면에서는 도경진의 간섭이 없었으니, 앞으로 점점 나아질 거라 굳게 믿었다.하지만 고작 사흘 만에 강유영은 이 내밀한 사정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이런 일까지 강유영에게 다 말했단 말인가.'"서유야, 출발하자."강유영은 휘장을 놓으며 명했다.굳이 독설을 할 생각은 없었으나, 모두 조사예가 자초한 일이었다."비키십시오."서유는 손을 뻗어 조사예를 가볍게 밀쳤다.조사예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머릿속이 새하얘져 더 이상 강유영과 실랑이를 벌일 여력조차 없었다. 그녀는 마차가 출발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참, 도 부인. 부러운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마차가 조사예 앞을 지나칠 때, 강유영은 창의 휘장을 걷고 웃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조사예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고 이를 꽉 깨문 채 상대를 노려보았다.강유영의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을 막을 방도 또한 없었다."친정에 왔는데 어머니께서 마중조차 나오지 않으시니, 귀찮은 예법을 또 덜게 되어 참으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037화

    강유영은 조사예의 말을 듣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잠시 상대를 응시하다가 그 말의 뜻을 깨닫고는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그녀가 도경진을 연모한다니. 대체 어디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무엇을 보고 저런 헛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애초에 도경진과 혼인할 마음이 있었을 때조차, 그저 성품이 온화하고 외모가 반듯하여 혼인 상대로 적합하다 여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훗날 도 부인의 드센 성정을 알게 된 후로는 그 생각마저 미련 없이 접었다.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도경진을 연모하거나 설렌 적은 없었다. 다만 그는 좋은 사람이니 평탄하게 잘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도 부인 같은 어머니에 조사예 같은 부인까지 두었으니, 앞으로의 날들이 순탄치만은 않을 듯했다."정곡을 찔려서 아무 말도 못 하겠어?"조사예는 강유영이 입을 다물자 더욱 기세등등하게 몰아붙였다.그녀는 강유영이 도경진에게 마음을 품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도경진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탐화랑 출신으로 조정에서 승진도 빨랐다. 외모 또한 큰오라버니인 조원철에게 뒤지지 않았고, 온화한 성품에 앞날이 창창한 사내였다. 일개 양녀 주제에 강유영이 어찌 그런 사내를 넘볼 수 있겠는가. 당연히 도경진에게 온 마음을 쏟았을 테고, 그러니 그동안 꾸준히 왕래가 있었던 것이다.아쉽게도 도경진은 이미 그녀와 혼인을 올렸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속이 후련해지며 며칠 동안 쌓였던 우울함이 단번에 가시는 듯했다.강유영은 끝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예, 참으로 부럽습니다."강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사예의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마차 앞에 앉아 있던 서유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아씨가 화가 나서 홧김에 내뱉은 소리인지, 어찌 저런 말에 수긍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조사예는 그 말에 턱을 치켜들며 한껏 우월감을 드러냈다.사실 지난 며칠 도씨 가문에서의 생활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도경진은 꼭두새벽에 나갔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집에 오면 서재에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036화

    고작 사흘 만에 조사예는 몰라보게 초췌해져 있었다.도경진은 아직 그녀를 부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듯했다.조사예의 뒤에는 소심이 서 있었다. 주종 두 사람이 나란히 강유영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서유야, 호칭이 틀렸잖니. 나는 이제 사예 아씨가 아니라 도 부인이라 불러야지."조사예는 턱을 치켜들고 서유를 흘겨보았다."아씨, 어쩌지요? 길이 좁아 마차를 돌리기가 마땅치 않습니다."서유는 조사예의 말은 못들은 척 무시하며, 미간을 찌푸린 채 강유영에게 작게 속삭였다.전당포 일로 바쁜 와중에, 조사예 따위가 길을 막고 소란을 부리고 있으니 불쾌하기 그지없었다."강유영, 네게 사과하러 왔어."조사예는 앞으로 다가오며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필요 없습니다."강유영은 단칼에 거절했다.무엇을 사과하겠다는 건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조사예가 좋은 뜻으로 왔을 리 만무했다."어머님께서 그러시더라. 우리 부부가 혼례를 올리던 날 손님이 너무 많아 널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고. 내게 대신 미안함을 전하라 하시며 괘념치 말라 하셨어."조사예는 미소를 띤 채 강유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묘한 우월감이 스며 있었다.강유영은 그동안 도경진과 잦은 왕래가 있었으니, 필시 그에게 마음을 품고 있었을 터.이제 도경진은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강유영 때문에 사사건건 자신을 냉대하고 있었다. 마침 친정에 왔다가 강유영을 마주쳤으니, 상대의 속도 한번 뒤집어놓을 심산이었다."괘념치 않으니, 길이나 비키십시오."강유영은 조사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화려하고 눈부신 의복으로 치장하면 그 처량하고 비참한 모습이 가려질 거라 여긴 걸까.조사예가 저런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뻔했다. 시어머니와 화목하게 지내며 어엿한 한 식구가 되었음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하지만 강유영은 도 부인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게 뭐 그리 자랑할 거리라고 저러는 건지 우스울 뿐이었다."내 말 아직 안 끝났어."조사예는 길을 비켜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4화

    한씨가 고개를 돌려 강유영을 바라봤다.곁눈질로 보니, 조원철도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했다.강유영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떡을 다시 집어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마치 돌을 씹는 것처럼 입안이 쓰고 껄끄러웠다.‘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뭘 알고 일부러 저러시는 걸까?’이유야 어찌 됐건 한씨가 이에 대해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음은 분명해졌다.조원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한씨는 손을 뻗어 아들의 목에 난 자국을 어루만지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곱게 자란 처자라면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3화

    조원철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밖은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차가운 습기가 얼굴에 닿자,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목을 움츠렸다.“세자.”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철의 측근 청운이 다가와서 우산을 건넸다.조원철은 우산을 펼치고는 강유영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강유영은 난색을 띠며 주저했다.“아씨, 세자께서 처소까지 모셔다드린답니다.”청운이 웃으며 말했다.“배려 감사해요, 오라버니.”강유영은 어차피 그와 따로 할 말도 있고 해서 공손히 예를 행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청운은 빗속을 나란히 걷고 있는 두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2화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꾸나.”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유영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정신은 아찔해져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오직 문이 열리면 둘 다 끝장이라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온몸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조원철의 어깨를 밀었다.그녀는 안간힘을 쓴 것이었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간지러울 정도였다.투명한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길게 말린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축 처진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화

    초여름의 이른 아침.경성 진국공부의 사당 주변은 아침부터 자옥한 안개로 휩싸였다.조용한 사당 안에서는 승려가 경을 읊는 소리가 이따금씩 흘러나오고, 정원 내 청동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당을 지키는 시녀와 하인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서 처마 길을 따라 뒤뜰을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퍼진 근육통 때문에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했다.좌측 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가늘고 여린 그녀의 허리를 가로챘다. 상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끌고 뒤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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