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연지아는 텅 빈 자기 손을 내려다보다가 별말 없이 손을 거뒀다.그때 뒤쪽에서 박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삼촌.”연지아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제야 성민우를 발견했다.연지아는 성시하의 손을 잡고 그쪽으로 걸어갔다.“작은삼촌.”성시하가 반갑게 불렀다.성민우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봤고, 연지아와 눈이 마주치자 둘은 잠깐 웃었다.성민우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성시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성시하는 신이 나서 까르르 웃었다.성민우는 성시하를 다시 내려놓고, 연지아의 옆으로 걸어온 성유원을 바라봤다. 눈에 떠 있던 웃음기는 금세 사라지며 차분하게 불렀다.“형.”성유원은 짧게 응했다.“왔네.”만찬은 아홉 시에 끝났다.박형주와 추민정은 손님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하며 배웅했다.석혜연은 돌아가기 전에 연지아의 손을 잡고 말했다.“다음에 시간 나면 우리 따로 한번 제대로 봐요.”연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좋아요.”석진운도 성유원 일행에게 인사한 뒤 차에 올라 떠났다.성유원은 이미 곤히 잠든 성시하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놀다 보니, 조금 쉬는 동안 그대로 잠들어 버린 상태였다.성유원은 박형주 부부에게도 인사를 건넨 뒤 곧장 성시하를 안고 차에 올랐다.추민정은 연지아를 한번 바라봤다. 연지아도 그녀를 보며 말했다.“저도 먼저 갈게요.”“그래요. 가는 길 조심해요.”연지아는 성민우의 차에 올라탔다.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나서야 추민정이 남편을 보며 말했다.“근데 성유원 씨는 지금 지아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듣기로는 지아 씨가 먼저 이혼하자고 했는데, 성유원 씨는 아직도 안 했잖아.”정말 아무 관심도 없으면 진작 이혼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계속 끌고 있고, 오늘 연지아를 대하는 태도도 묘하게 부드러운 순간들이 있었다.그렇다고 아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돌아갈 때도 연지아한테 따로 한마디하지 않았다.박형주는 아내 어깨를 감싸며 안으로 걸어가다가 말했다.“성유원은 시하를 엄청 아
서안성이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방금 뭐라고 했어?”석진운이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한번 꺼냈다.서안성이 대답했다.“나도 잘 모르겠어.”아무래도 성유원은 에블린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꽤 깊은 갈등이 있는 듯했다.한 곡이 끝났다.주변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연지아는 성유원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남자는 손가락을 얽은 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성시하는 신이 나서 두 사람 쪽으로 달려왔다.“나도 에블린 이모랑 춤출래.”그제야 성유원은 연지아의 손을 놓고,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시하가 에블린 이모랑 춰.”무도회장에는 다시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연지아는 성시하의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성유원은 무도회장 밖으로 나가 자리에 앉았다. 석진운과 서안성이 다가와 웃으며 물었다.“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에요?”성유원은 직원이 건네준 레드와인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막 대답하려던 순간, 휴대폰이 진동했다.그는 곧바로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석진운은 방금 휴대폰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을 봤다. 안연청이었다.성유원이 전화를 끊고 다시 돌아오자 서안성이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방금 석진운이 궁금해하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다.“형, 에블린이랑은 대체 무슨 사이예요?”성유원은 서안성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에블린, 누구 닮지 않았어?”서안성은 순간 놀랐다.그러고는 성시하가 그렇게까지 에블린을 잘 따르는 이유가 떠올랐다. 성유원은 성시하를 자기 목숨처럼 아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성시하를 아무 외부인한테나 맡길 리 없었다.서안성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이상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설마... 그럴 리가 있나?’성유원은 서안성의 얼굴에 떠오른 충격을 보고,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한번 두드렸다. 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다.서안성은
연지아는 성시하의 작은 손을 맞잡으며 부드럽게 타일렀다.“시하야, 이모는 춤을 출 줄 몰라.”성시하의 얼굴에 금세 아쉬움이 서렸다.그때 성유원이 다가와 연지아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출 줄 모르면 내가 리드해 주지.”연지아는 멈칫하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성시하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활기를 띠며 좋아했다.“와, 좋다! 에블린 이모, 아빠가 가르쳐준대요. 빨리 가요!"아이는 양손으로 연지아의 손을 끌어당기며 무대 쪽으로 향했다.“시하야!”연지아가 불러보았지만 아이는 막무가내였다.“이모, 가요, 네?”결국 무대 근처에 다다르자 성유원이 자연스럽게 연지아의 손을 낚아챘다.깜짝 놀란 연지아가 본능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지만 남자는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연지아는 얼굴을 굳힌 채 그를 쏘아보았다.“가지.”성유원은 그녀를 이끌고 무대 안으로 들어섰다. 옆에서 성시하가 즐겁게 손뼉을 쳤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성유원, 당신 지금...”“계속 버둥거려 봐. 모든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다면.”남자의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지아는 눈을 내리깔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정말 가르쳐줘야 하나?”연지아의 발걸음은 성유원의 리듬을 따라가지 못한 채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이 많았기에 그녀 역시 여기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움직임이 조금씩 부드러워지자 남자는 손의 힘을 살짝 늦추더니 불쑥 물었다.“석진운이랑 무슨 얘기 했지?”연지아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당신이랑 상관없는 일이야.”성유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남자친구라도 사귈 생각인가?”연지아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눈매는 평소처럼 무미건조했다.“하고 싶은 말이 뭐야?”“사귀는 건 좋은데, 선은 넘지 마.”남자의 어조는 평온했으나 그 속에는 강압적인 기운이 서려 있었다.연지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내가 뭘
그 말을 끝으로 박형주는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성유원은 잠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연지아는 무언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고 3층 테라스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거리가 멀어 그의 표정까지는 읽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의 눈길만 준 채 냉담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어느덧 저녁 만찬 시간이 다가왔다. 어둠이 짙게 내리 앉은 밤의 풍경은 낮보다 훨씬 화려하고 북적였다.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서로 손을 맞잡고 잔디밭 위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연지아는 오늘 알게 된 한 여자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석진운의 큰누나였다. 잠시 후 석진운이 다가와 연지아의 옆자리에 앉으며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술을 들이켜던 성유원의 시선은 성시하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서안성이 연지아 쪽을 힐끗거리며 입을 뗐다.“진운은 에블린 씨한테 진심인 거예요?”목소리에는 은근한 질투가 섞여 있었다. 에블린과 강현수가 이미 연인 사이인 줄 알았는데 오늘 그녀가 직접 남자친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자 다시금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하지만 연지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서안성은 성시하가 왜 저토록 에블린을 따르는지, 그리고 성유원은 왜 그 친밀함을 내버려 두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저 에블린과 성유원 사이에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 같다는 예감만 들 뿐이었다.성유원의 검은 눈동자가 연지아를 훑었다. 그녀는 석진운과 대화하며 입가에 옅은 비즈니스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든가.”그때 박형주가 추민정의 손을 잡고 중앙으로 나아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박아린은 즐거운 듯 손뼉을 쳤다. 음악의 리듬에 맞춰 사람들이 하나둘 무대로 모여들었다.성시하는 얼른 아빠와 에블린 이모를 찾았지만 두 사람이 따로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아빠에게 달려갔다. 성유원은 다가오는 딸을 보며 술잔을
성유원이 결혼을 했는지, 성시하가 혼인 중 태어난 아이인지 아니면 혼외자인지는 오직 성씨 가문과 박씨 가문 사람들만이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입을 열지 않으니 외부 사람들도 감히 깊이 파고들지 못할 뿐이었다.성유원은 석진운을 곁눈질하며 얇은 입술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부러워요?”석진운이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부럽죠! 그런데 유원 씨 같은 사람한테서 어떻게 시하 같은 천사 같은 아이가 나왔는지 모르겠네요.”석진운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성유원은 누구에게도 진심을 주지 않는 무정하고 냉혈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으니까.박형주가 어느새 성시하의 손을 잡고 멀어지는 연지아를 곁눈질하며 거들었다.“말해 뭐해, 시하가 제 엄마를 닮아 온순하고 착한 거겠지. 유원 씨를 닮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석진운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형주 형, 그럼 형이 말해봐요. 시하 엄마가 대체 누구예요?”성유원이 아이를 낳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난 몇 년간 성시하 엄마에 대한 소문이 단 한 줄도 안 날 리가 없었고 그녀가 성씨가문이나 박씨 가문의 공식 석상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을 리 없었다.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딸 성시하에게만큼은 지극정성이었다. 성유원이 누군가에게 진심을 쏟는다면 그 대상은 오직 제 딸뿐이었다.박형주가 성유원을 쳐다보며 말했다.“궁금하면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석진운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솔직히 말해봐요, 유원 씨. 유원 씨도 예전에 형주 형네 딸 부러워서 딸 갖고 싶었던 거죠?”성유원의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성시하에게 머물렀다.해맑고 예쁜 꼬마 공주님 같은 아이가 연지아가 꽃 한 송이를 꺾어 아이의 머리에 꽂아주자 햇살보다 더 찬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그 모습에 성유원의 눈매도 부드럽게 풀렸다. 그는 석진운을 보며 대꾸했다.“부러우면 진운 씨도 얼른 낳든가요.”“싱글 대디 주제에 기세등등하네요. 형주 형은 아내도 있고 아이도 있
에블린이라는 이름은 이제 금융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녀의 미모와 분위기에 대해서는 본인들이 직접 보고서야 ‘천향국색'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님을 실감했다.해성의 안씨 가문 딸조차 그녀와 비교하면 빛이 바랠 정도라는 소문이 돌았으니 다들 에블린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연지아는 예의 바르고 정중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과찬이세요.”그때 한 남자가 다가와 먼저 자기소개를 건넸다.“석진운이라고 합니다. 오늘 에블린 씨를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네요.”석씨 가문 역시 경원시의 최상위 명문가 중 하나였다.연지아는 가볍게 인사했다.“석진운 씨, 만나서 반가워요.”석진운이 농담 반 진담 반의 어조로 물었다.“에블린 씨, 혹시 남자친구 있으신가요?”옆에 있던 박형주가 거들었다.“진운아, 너무 직설적이잖아. 사람 놀라게 하지 마.”석진운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여쭤보는 거예요, 뭐. 에블린 씨가 불쾌하시다면 사과하겠습니다.”연지아가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에요. 남자친구 없습니다.”그 말에 석진운의 얼굴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그럼 에블린 씨, 연락처 좀 받아갈 수 있을까요?”“물론이죠.”박형주는 두 사람이 연락처를 교환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성유원을 슬쩍 쳐다보았다. 성유원은 처음부터 옆에 서서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어 박형주는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지아와 석진운이 연락처 교환을 마쳤을 때였다.“에블린 이모!”성시하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손에는 방금 꺾은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고 노느라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이었다.“이모, 이것 봐!”성시하가 꽃을 내밀자 연지아는 허리를 숙여 가까이 다가갔다.살랑이는 바람에 귀밑머리가 흩날렸고 뼛속까지 다정한 그 미소는 손에 든 꽃보다도 화사했다.“정말 예쁘다.”가까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석진운은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아빠!”석진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