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고민하던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송석석은 국공부의 아씨라 전북망과 다시 혼인해주면 장군부도 체면이 설 것이다. 전에는 이방과 전북망 사이가 급작스럽게 발전한 바람에 아들을 나무랄 시간이 미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장군부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언제 농간을 당했을지 모르는 여자를 며느리로 둔 탓에 가족들 혼사도 영향을 받았다. 만약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합친다면 전북삼과 전소환의 혼사도 큰 진전이 있을 것이다.송석석이 돌아온다면 재물도 자연히 따라올 것이고, 장군부도 가난에서 벗어날 것이다. 김순희는 사실 차례를 연 이후로 약조차 사 먹을 돈이 없었다.송석석은 효심이 지극했다. 그러니 시부모님도 끔찍이 모실 것이다. 게다가 송석석이 예전에 그들에게 태후와의 친분을 자랑하지 않은 탓에 덕을 못 봤지만, 큰 공을 세운 송석석이 다시 며느리로 돌아와 주면 진성의 권세가들은 자연스레 장군부를 추앙할 것이다. 김순희는 아무리 생각해도 송석석에게 이득 본 것만 떠올랐다. “전에 그렇게 소란을 피웠는데 송석석이 다시 들어오려 할까요?”전기가 말했다. “말하지 않았소? 효심이 깊은 아이이기도 하고, 북망에 대한 애정도 있을 것이오.” 김순희가 턱을 살짝 괴었다.“그렇긴 하지만, 군공을 세워 어깨가 올랐갔을 텐데, 장군부로 들어와 우리 시중드는 게 싫다면 어쩌죠?” “당신이 시어머니이니 효심으로 잘 모셔야죠. 그리고 그 아이는 돈과 아랫사람도 있잖소. 직접 못 돌보겠으면 사람을 부려도 되는 일이잖소?”“그렇긴 하지만, 며느리는 자연히 시부모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전에도 군말 없이 잘했잖습니까.”“이방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땐, 왜 지적하지 않은 것이오?”“둘이 같은 사람입니까?” 김순희는 고분고분하게 명령에 따르던 송석석의 순한 모습이 떠올랐다. 이방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여자라면, 송석석은 효심이 지극한 여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굳게 박혔다. 이방이 시중을 들지 않는 것은 괜찮아도 송석석이 시중을 들지 않는 건
그리고 그 제안을 송석석이 동의하면 좋은 일이지만, 만약 거부한다면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한참이나 고민하던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둘째를 불러 먼저 얘기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둘째가 거부하면 그때 다시 얘기하시지요.”김순희는 도저히 송석석을 먼저 찾아갈 수 없었다. 설령 송석석이 전북망과 재회하기를 바란다고 해도 시어머니로서 체면을 잃을 것 같았다.장군부는 이방 한 명으로 충분히 곤욕을 치렀다. 송석석 때문에 또다시 입방아에 오를 수 없었다.김순희가 망상에 빠져있을 무렵, 송석석은 지안궁에서 태후를 만나고 있었다.50살도 안 된 태후는 관리가 잘 되어 눈꼬리의 주름만 빼면 여전히 젊었을 때 미모를 유지했다.흰 머리가 몇 가닥 나이긴 하지만 뚜렷하지 않았다.그녀는 매우 우아하고 화려했다. 태후가 부드러운 미소로 송석석을 바라보았다.“한마디 말도 없이 전쟁에 나가다니.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으면 내 네 모친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이냐?”태후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그녀는 송석석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린 땐, 마음 한구석이 콕콕 쑤셨다.“걱정을 끼쳐 송구하옵니다, 마마. 그럴 의도는 아니었사옵니다.”송석석이 얼른 잘못을 인정했다.“이리 오너라, 네 얼굴이 보고 싶구나.” 태후가 그녀를 자애롭게 쳐다봤다.송석석은 태후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러나 태후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렸다. “그냥 옆에 앉도록 해.”송석석은 양반집 규수의 모습을 하고 적절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살포시 앉았다.태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런, 벌거숭이가 따로 없구나. 매산에서 돌아올 때 봤던 벌거숭이랑 똑 닮았어.”태후가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진성에 돌아와 머물던 그때, 피부가 얼마나 윤기 흘렀는지 아느냐? 지금 네 꼴을 보아라, 손톱에도 때가 가득하구나.”송석석이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돌아오는 길이 긴박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환복도
태후의 목이 살짝 메었다.송석석은 어릴 때부터 자주 어머니와 함께 궐에 들어와 놀았다. 태후는 그 시절, 황후였다.두 여인이 만나면 평생 지아비를 위해 살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곤 했었다.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태후는 한숨을 쉬며 궐에 갇힌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사실이지만 궐의 높은 담장 아래에 평생 갇혀 살아야 했다.송석석의 어머니도 당시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사는 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했다. 밖으로 나가 세상 구경을 해야 한다고 했다.이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송석석은 예닐곱 살 때 집을 떠나 매산 만종문으로 가 무공을 배웠다. 천하제일이 될 수는 없지만, 자기 목숨 정도는 지킬 수 있었다.명문가의 어떤 부모가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을 험한 무술의 세계로 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송석석의 어머니는 달랐다. 심지어 자기 딸이 언젠간 전쟁을 하러 갈 수도 있다며 송석석의 아버지에게 단호하게 말했었다.그러나 나중에 전쟁에서 지아비와 아들을 잃은 그녀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했고 생각이 바뀌었다.어쩌면 시집을 가 아이를 낳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적어도 목숨이 보장되니 말이다. 그래서 송석석에게 평범한 아녀자의 삶을 권했을 것이다.태후의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랐던 송석석은 결국 침묵했다.만종문에 있을 때, 그녀는 생기가 넘쳤고 활발했다. 벌거숭이처럼 뛰어다녔지만, 미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집안에 큰 변고가 생기며 그녀의 마음도 서서히 죽어갔다. 세상이 여인에게 바라는 모습에 따라 얌전히 살았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송석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신녀 송구스럽지만, 나중에 다시 얘기 나누면 아니되겠사옵니까.”태후는 부드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돌아가거라. 목욕하고 쉬도록 하거라. 네 냄새를 너무 맡았더니 눈이 맵구나.”태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냄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두 사람은 알고 있다
수란키는 존경할 만한 장군이었다.만약 서경의 2황자가 황위를 차지한 뒤, 태자의 죽음을 밝히고 전쟁을 선포하면 어쩔 수 없이 성릉관으로 출병해야 했다.수란키는 절대 황제가 된 2황자의 명령에 맞서지 않을 것이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기 떄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수란키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수란키는 어떻게든 2황자가 태자가 되고, 황위를 이어 받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한편, 사여묵은 송석석과 그녀의 친구들에 대해서도 황제께 전했다.황제는 뿌듯해하며 송석석에게 큰 찬사를 보냈다.황제는 사여묵을 바라보았다. “황후께도 여러 번 말했지만 송석석을 궐에 불러 비로 삼으라고 하신다.”한창 서경 황자의 난에 관해 얘기를 하던 사여묵은 황제의 제안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예, 예? 뭐라고요?”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사여묵은 술이 완전히 깼다.“폐하, 송석석을 궐에 들여 비로 삼을 생각이십니까?”“뭘 그리 흥분해?” 황제가 실눈을 뜨고 말했다. “군공을 세운 국공의 딸이다. 국공부는 그녀가 관리한다. 송 장군을 따랐던 장군들은 지금 그 딸을 따르고 있다. 여인은 사내처럼 의지가 굳세지 못하니 아비의 지나온 영광에 폐를 끼치는 것보다 궐에 들어와 궁녀가 되는 게 더 적합하다.”사여묵의 목소리가 살짝 격앙되었다.“소신, 폐하께서 이런 염려를 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송 장군은 이번에 처음 전쟁에 참여한 건 맞지만, 앞으로 이, 삼 년은 전쟁 날 일이 없습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대비해서 뭐합니까?”“미리 대비하는 게 나중에 모든 걸 잃고 대비하는 것보다 낫다.”황제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근데 어찌 이리 흥분하는 것이냐? 비록 네 휘하이긴 하나, 그녀와 넌 혼례를 할 수 없다. 짐이 후궁을 들이겠다는데 왜 네가 반대하느냐?”사여묵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직접 물으셨습니까? 궐에 들어오겠다고 하덥니까? 그런 여인이 어찌 폐하의 후궁이 되어 궐에
사여묵은 어떻게든 송석석이 후궁이 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송석석처럼 자유로운 사람이 높은 담벼락에 갇혀 살면 안 된다.“궐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소신의 사람입니다. 억지로 빼앗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뜻은 묻지도 않으셨잖습니까.”“이유가 되지 못한다.”“겨우 혼인이라는 굴레 속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렇게 강압적으로...”황제가 사여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전쟁도 그런 식으로 하느냐? 적군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 거야? 적의 감정까지 돌보는 건가?”그러나 사여묵은 물러서지 않았다. “적군이 아닙니다.”다시 날카로운 모습을 찾은 사여묵은 송석석을 대놓고 지켰다. “송씨 가문은 참혹하게 멸문당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공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후궁이 되라고 강요할 수 있습니까?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까?”황제와 사여묵은 오랫동안 눈을 부라리며 서로 노려보았다. “솔직하게 말하마. 반역을 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다. 그건 핑계다. 진심으로 그 애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후궁으로 남겨 내 곁에 두고 싶은 거다.”“궐에 아름다운 여인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폐하의 마음에 드는 여인이 부족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여인을 평생 궐에 가두는 건 불공평합니다.”황제는 어안이 벙벙했다. “사여묵, 내가 누굴 후궁으로 삼든, 그건 내 일이다. 군공을 세웠다고 네가 내 일에 간섭할 수 있다고 여기지 말아라.”“간섭할 겁니다! 어떻게든 간섭할 겁니다!” 사여묵은 목청껏 외쳤다. 잘생긴 얼굴이 핏기가 서 얼굴이 붉어졌다.황제가 싸늘하게 말했다. “짐은 내일 당장 성지를 내리겠다.”“궐에서 한발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성지를 쓰거나 전하는 자가 있다면 소신이 나설 겁니다.”“내 직접 성지를 쓰겠다. 감히 나를 막아서겠다는 것이냐?”사여묵이 목청껏 외쳤다. “오 공공, 당장 북명왕부로 사람을 보내. 내 옷을 받아 오시게. 며칠간 어서방에
술을 깨는 탕약까지 마시고 숨을 돌린 황제는 오 공공을 데리고 제용전으로 향했다. 오 공공이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 송 장군을 후궁으로 삼으시려는 겁니까?”황제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짐이 자기 동생과 여인을 빼앗을 사람으로 보이느냐? 설령 짐이 그 애를 후궁으로 삼고 싶어도 태후께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태후 마마와 송 장군의 어머니가 친자매라고 해도 될 정도로 친했다. 태후께서 어찌 자기 딸과 같은 여인을 후궁으로 들이겠느냐?”오 공공이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왕야님을 압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송 장군이 후궁이 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왕야께서 자기 마음을 털어놓길 바라셨던 거지요?”오 공공은 슬그머니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가 한탄했다. “송회안 장군이 희생당하고 사여묵은 전쟁에 나가라는 성지를 받았다. 사여묵은 전쟁 가기 전에, 국공부를 찾아가 송씨 부인에게 간청했다. 남강을 수복하고 돌아와 송석석과 혼례를 올리겠다고. 그러나 송씨 부인은 자기 딸을 전북망에게 시집보냈다. 이 일을 사여묵에게 어찌 알려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더구나. 혹여 연모하던 여인이 다른 사내에게 시집갔다는 말에 정신이 흐트러져 전쟁에서 패배할까 봐 걱정되었으나, 시안은 사여묵에게 서신을 보내 이 소식을 알렸고, 저 멀리 남강에서 알게 된 사여묵이 매우 슬퍼했었지.” 황제는 자기 이마를 살짝 눌렀다. “전북망은 그 애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자마자 첩을 들이겠다고 내게 청하더구나. 송석석이 미련 없이 그와 헤어지겠다고 할 줄도 몰랐다만. 한순간 화가 나서 내린 결정이라고 여긴 내 생각이 짧았던 게야, 부인이라도 지아비를 무조건 사랑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송석석을 보니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짐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 내 동생에게 기회가 생긴 것 같으면서도 송석석의 과거가 신경 쓰이더구나.”오 공공이 황급히 말했다. “폐하께 낚인 걸 보니, 왕야님 마음속에 아직 송 장군이 있나 봅니다.”황제가 코웃
잠에서 깨었을 땐 이미 다음날 정오였다.잠이 계속 쏟아졌지만, 궐에 들라는 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머리를 빗고 단장을 마친 송석석이 하품을 하며 물었다. “보주, 내 친구들은 일어났어?”“아직 주무시고 계세요.” 보주는 어젯밤 송석석의 방에 있는 부드러운 침대에서 잠을 잤다. 아씨를 지킬 수 있어 얼마나 마음이 편안했는지 몰랐다.“깨우지 말고 계속 자게 해. 사흘 밤낮을 자도 신경 쓰지 마라.” 사실 그녀도 내일까지 깨지 않고 자고 싶었다.보주는 그녀의 상투를 빗질해 주고 보석이 박힌 비녀를 골라 꽂았다. 얼굴에 있는 멍 자국을 보고 있자니, 보주는 마음 한편이 아팠다. “네, 아씨. 진복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장군님과 도련님들도 전쟁에서 돌아오면 너무 피곤해서 며칠씩 잠든다고 하셨어요.”“그래.” “궐에서 보낸 사람이 태후마마의 사람이더냐, 황제폐하의 사람이더냐?”보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황후마마의 사람입니다.”송석석이 의아한 듯 물어다. “황후마마?”그녀는 제 황후(齊皇後)와 왕래하지 않았다. 매산에서 돌아와 궐에 들 때면 태후에게 인사를 올리고 지나가던 길에 황후에게 인사를 올린 게 전부였다.그렇게 딱 한 번 인사를 올린 적 있는 황후였기에, 그녀는 황후의 얼굴로 자세히 몰랐다. 황후의 부친은 이부 상서(吏部尚書)이고, 제씨 가문(齊家)은 백 년 된 명문가이다. 조상들 대다수가 현신(賢臣)과 대학자(大儒)로 제황후는 규방(閨房)에서 유명했다.일찍이 당시의 태자, 지금이 황제와 혼사를 했기에 내각을 나가기 전부터 유명했었다. 다만 송석석은 그녀와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 이전에 매산에 있었고, 돌아온 뒤에는 어떤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았었다.그렇기에 제 황후와 친분이 없었다. 자신을 왜 궁으로 불렀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고, 궐에 들어가서 직접 대면해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한 송석석은 보주와 함께 궐로 향했다.궐에 들어서자, 제 황후를 옆에서 모시던 상궁 란
송석석과 보주는 황후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황후마마의 부름을 받고 몸종과 함께 왔사옵니다.”황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그만 일어나시오.”“황후마마, 감사하옵니다.”송석석과 보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황후는 송석석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황후는 예전에 송석석을 만난 적 있는데, 그때도 송석석이 매우 아름다워 살짝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고된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그녀의 피부는 많이 상해 있었음에도 여전히 절세미인이었다.황제가 자신에게 송석석을 불러 후궁으로 들어올 생각 있는지 물어보라는 말에 그녀는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송석석처럼 무술에 재능이 있으면서도, 절세미인이기도 한 여인이 궁에 들어오면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 것이다. 물론 신분과 지위가 황후보다 못하겠지만, 황제의 마음을 얻는 것만으로 이미 승자인 셈이다.다만 현명했던 황후는 대놓고 적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송석석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전 장군은 처자의 소중함을 몰라보고 눈앞의 새로운 것에 눈이 팔려 이리 귀한 여인을 알아보지 못했구려.”황후의 칭찬인 것 같으면서도 칭찬 같지 않은 말에 송석석은 기분이 묘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황후가 자신에게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궁금할 뿐이었다.황후가 차 한 모금을 들이키고, 손톱에 낀 금색의 호갑투(護甲套)로 찻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어루만지더니 큰 결심을 한 듯 송석석을 쳐다보았다.“그래도 명주는 명주인 법, 흙모래에 가려졌다고 해서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명주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터니.” 송석석은 자신에게 지아비를 소개해 주려는 것 같은 황후의 의미심장한 말에 불쾌했지만, 티를 내지 않은 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신녀는 지나간 일을 뒤돌아보지 않사옵니다. 사람은 앞날을 보며 살아가야 한다 생각하옵니다. 신녀를 명주에 비유한 것은 당치 않으신 말씀이시옵니다. 신녀는 그저 어릴 때부터 매산에서 무예를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