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의 방앞에 도착하자 명주가 모두를 맞이했다.침대에 누운 서우는 이미 결심을 내린 뒤였다.그 어떤 모험도 하지 않고 온전히 고통을 견디기로 말이다.외가쪽 가족들까지 국공부로 와 그를 향해 걱정과 위로의 말을 건네니 서우는 그들을 향해 최대한 씩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하지만 그 모습에 어른들은 더 마음이 욱신거렸다.이제 겨우 7살인 아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징징대고 투정부릴 나이고 가족들의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나이인데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단신의가 치료를 시작하려던 그때, 사여묵 역시 국공부를 방문했다.공씨 가문 사람들은 북명왕이 서우의 목숨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언제고 시간을 내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본인이 직접 등장하니 부랴부랴 다가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이에 사여묵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우연히 마주쳐 도운 것뿐이니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마시게. 그리고 오늘은 서우가 치료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러 온 것뿐이니 다른 얘기는 차후에 천천히 나누도록 하세.”한편, 서우가 송석석과 함께 왕부에서 지낸다면 사여묵의 미움을 사지 않을까 걱정하던 공부 사람들은 서우를 걱정하는 사여묵의 얼굴을 보곤 한시름 놓는 표정이었다.사여묵이 송석석과 공씨 가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서우의 곁에는 내가 있을 테니 다들 나가보시게. 사내들끼리 나눌 얘기가 많아.”사여묵이 싱긋 웃으며 서우를 바라보았다.“그렇지 않느냐, 서우야?”서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송석석과 외조부모가 곁에 있는 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던 그였다. 아픈 와중에 괜히 걱정할까 씩씩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에 부담감이 컸지만 사여묵은 달랐다.‘왕야님은 할아버님, 아버님처럼 훌륭한 무장이시니 내게 힘을 주실 수 있을 거야.’사여묵의 깊은 뜻을 깨달은 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서우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말했다.“우리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서우야, 잘 버텨야 한다.”고개를 끄덕인 서
한편, 단신의는 방금 전 고통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던 서우의 모습을 떠올렸다.‘고통이 성대 회복에도 도움이 되나 보군... 좋은 현상이야.’접골은 홍작이 직접 해도 충분하나 서우는 보통 환자가 아니라 단신의가 직접 나섰다.접골은 그에게 숨 쉬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익숙한 일이었고 숙련된 손길로 조심스레 뼈를 맞춰가기 시작했다.고통으로 인한 식은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은 서우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사여묵의 팔목을 꽉 부여잡았다.손톱이 파고 들어가며 핏자국이 났지만 사여묵은 지금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서우임을 알기에 내색하지 않았다.진통 효능이 있는 탕약을 먹었음에도 효과는 미미했다.다친 것은 다리뿐이지만 몸 전체가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렇게 영겁같던 치료가 끝나고 단신의는 두 나무판으로 다리를 고정했다. 뼈가 완전히 붙기 전까진 누워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단신의가 직접 만든 연고는 뼈가 다시 붙는데 도움을 주는 영험한 효능이 있었고 탕약까지 꾸준히 마셔주면 열흘 안에 다시 걸을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였다.다리를 묶은 뒤 단신의는 또 탕약 한 그릇을 건넸다. 수면 작용이 있는 약초가 든 약이라 먹으면 스르륵 잠이 드는 약이었다.‘한숨 자면 많이 좋아질 테지.’한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서우의 처참한 비명에 가슴이 찢어지고 있었다.저 어린 아이가 저정도로 울부짖을 정도라면 얼마나 아플까 싶었다.송석석은 초조한 마음으로 마당을 서성대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고 공부인은 벌벌 떨며 부처님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얼마나 흘렀을까. 문이 열리고 사여묵이 먼저 방을 나섰다.다급하게 방으로 들어간 송석석은 홍작이 침대에 누운 서우에게 고통을 완화해 주는 침을 놔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단신의가 그녀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듯 쉿하고 소리를 냈다.“나가거라. 한숨 푹 자게 내버려둬. 참 강한 아이로구나.”등 떠밀려 나간 송석석은 물론 다른 가족들도 서우를 만나는 것은 잠시 미루는 게 좋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사여묵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빠른 사여묵의 행동을 빤히 바라보았다.고개를 숙여 보이는 건 속눈썹뿐이었지만 가끔씩 살짝 움직이는 속눈썹이 미풍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느껴졌다.송석석이 이토록 부드러운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터라 사여묵의 가슴이 살짝 설레어왔다.두 바퀴나 감은 붕대를 살펴보던 사여묵이 피식 웃었다.“상처에 비해 너무 과분한 처리 아닌가?”“과분하다뇨.”고개를 든 송석석이 눈이 동그래져선 말했다.“이런 상처야말로 덧나면 큰일납니다. 전에 다친 적 있었는데 고름도 나오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제 손등 좀 보십시오.”송석석이 손등을 보여주었다.손톱 정도 되는 작은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그때 심하게 덧났었는데 사부님의 약 덕분에 나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흉터가 남고 말았죠. 이렇게 예쁜 왕야님 손에 흉터라도 남으면 곱지 않... 아니죠. 흉터가 있어도 고우십니다.”말하려다 방금 전 상처를 씻어낼 때 손에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했던 걸 떠올린 송석석이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그 모습이 재밌어 사여묵은 그녀를 놀려대기 시작했다.“사내 손이 고운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곱지 않은 것보다야 낫지요.”송석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피식 웃던 사여묵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실망이 크겠구나. 내 몸엔 온통 크고 작은 상처뿐이라서 말이야.”“그건 승리의 상징이지요.”손을 씻은 송석석이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저도 있습니다. 그런 상처.”“전에 다친 데는 다 괜찮은 것이지?”전장에서 부상을 입었던 걸 떠올린 사여묵이 물었다.“그럼요. 오히려 지금은 자연스럽습니다.”치료에 필요했던 물건을 치우라고 말하고 차를 준비하라 분부한 송석석이 말했다.“공양 오라버니도 차 마시러 오시라고 전해라.”“진백님께서 정청으로 모셨습니다. 곧 저택으로 돌아가신다 합니다. 도련님께서 한동안 주무실 거라 단신의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괜히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셨다 내일 다시 오시라 하셨습니다.”“그래.”고개를 끄덕인 송석석은
눈물이 잔뜩 묻은 얼굴로 고개를 든 송석석이 말했다.“어찌 되었든 이 은혜는 평생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 왕야님께서 제게 뭘 시키시든 양심에 위배되지만 않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이에 사여묵이 정색하며 말했다.“네가 날 위해 뭔가 할 필요는 없다. 너한테 바라는 게 있다면 그건 그저 네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그것뿐이야. 그래야 하늘에 있는 네 부모도 기뻐할 게 아니냐.”그의 말에 감동을 받은 송석석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하지만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에 곧 의아함이 담겼다.“그런데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 주시는 겁니까?”하지만 사여묵은 이토록 연약한 송석석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힘들었다.씩씩하게 전장을 누비던 모습을 떠올리다 지금 눈앞의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더 마음이 아파왔다.하지만 자신의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여묵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곧 혼인할 여인에게 잘해 주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할 사이이니 말이다.”그의 말에 분명 감동해야 하거늘, 이미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는 송석석에겐 그저 의미없는 약속처럼 느껴졌다.어쩐지 재수없는 그 모습이 다시 떠올라 송석석은 괜히 뾰로통한 말투로 말했다.“한때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죠.”굳이 이런 말을 해서 분위기를 깨지 않아도 되는데 왠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전에는 이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요즘따라 진짜 양반댁 규수들처럼 짜증도, 투정도 많아진 것이 정말 뭐에 씌였나 싶기도 했다.이에 사여묵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자와 날 비교하지 마라. 내 인생에 부인과의 이별은 사별뿐이야. 난 한 번 뱉은 말은 지키는 인간이니. 지금 못 믿는다 해도 상관없다. 내 남은 평생의 시간으로 너에게 증명할 테니.”“사별이요?”송석석의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사여묵이 대답했다.“내가 너 먼저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네가 나이 먹은
그런 그가 남강 전장에서 송석석을 만났을 때 그 감정이란 복잡미묘 그 자체였다.넌지시 던진 전북망에 대한 질문을 애써 피하는 걸 보고 그와의 혼인이 행복하지 않음을 깨달았고 주먹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리고 한참 뒤에야 사여묵은 송석석이 이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송석석을 아끼지 않은 전북망의 이름을 원수처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다.어찌 보면 송석석에게 치욕스러운 경험을 안겨준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자의 눈깔을 파내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분노가 가시니 곧 다른 감정이 깃들었다.어쩌면 그에게도 기회가 있는 건 아닐까라는 기대감에 몰래 기뻐하기 시작했다.그녀와 함께 싸우는 동안 애써 감정을 지우며 사여묵은 눈동자에 그 어떤 사적인 감정도 담으면 안 도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았다.3년간 남강 전장에서 사여묵은 그렇게 수많은 감정을 감내해야 했었다.진성으로 돌아온 뒤 황제의 견제가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그가 원하는 건 애초에 병권 따위가 아니라 송석석이었으니 말이다.황제의 견제가 섭섭하지도 않았다. 황가에서 태어난 형제들이란 무릇 그런 사이니 말이다. 그래도 황제와 적어도 겉으로는 화목한 모습을 연출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하지만 정말 견제와 의심이 더 심해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송석석과 서안과 함께 황제에게서 멀리 떨어진 조용한 땅에서 산다면 충분히 행복할 테니 말이다.이런 생각과 함께 고개를 든 사여묵이 마침 송석석과 시선을 마주치고 순간 심장이 콩닥대기 시작했다.한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송석석은 마음이 무거워졌다.‘내가 왕야님을 연모하게 된 건가. 하지만 저분은 이미 마음에 다른 여인을 품고 계시는데. 왜 이런 어긋난 감정이 생기는 거지? 분명 그저 좋은 반려로서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것뿐인데.’실패한 혼인을 끝낸 뒤 이렇게나 빨리 또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릴 거라고 생각지 못한 송석석은 이 상황이 꽤 당황스러웠다.이때 보주가 잔뜩 빨개진 송석석의 얼굴을 살피며 의아한 듯 물었다.“아가씨,
다음 날, 눈을 뜬 서우는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고통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다 애써 웃으며 송석석과 공씨 가문 사람들을 위로했다.어린 아이가 강한 척을 하는 모습에 모두들 가슴이 찢어졌다.다리 치료를 마친 뒤에도 목 치료는 게속되어야 했다.홍작 말로는 어제 목침을 못 맞았으니 오늘 무조건 맞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게다가 어제 치료를 통해 비명을 지으며 본의 아니게 목청이 틔었으니 이 기세를 몰아 치료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단신의의 생각이었다.독소 해독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징조이기도 했고 새목단 금단 현상도 다시 일어나지 않아 단신의도 꽤 놀라울 따름이었다.성인도 끊으려면 적어도 반년은 걸리는데 이제 7살된 아이의 의지가 이토록 단단하다니 놀라울만도 했다.“송씨 가문에는 정말 강한 사람들뿐이구나. 대단한 집안이야.”단신의가 홍작에게 말했다.홍작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서우를 보살피여 정을 쌓은 그는 어느새 서우를 아들이자, 조카로 보고 있었다.어린 나이에 고초를 겪은 서우가 안쓰러우면서도 하루라도 빨리 아이가 건강을 회복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서우의 다리를 치료하는 동안 송석석은 단 한 번도 외출하지 않았다. 국공부를 찾는 손님은 꽤 많았지만 전부 진복에게 시켜 다음으로 미루라고 말한 송석석이 만난 사람이라곤 여동생 란이와 그의 부군 량소뿐이었다.잘생긴 얼굴의 량소는 어딘가 고고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성은백부의 세자이자 군주를 부인으로 맞이했으니 그 신분이 한층 더 상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게다가 군주는 현명하고 착한 아내였으며 그를 오랫동안 흠모해 온 여인이었다. 23세의 나이에 량소는 누군가는 평생 이루지 못할 명예와 부귀를 누리게 된 것이었다.그래서일까. 량소는 송석석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물론 그녀 개인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집안 좋고 외모 좋고 무예 실력도 좋고 전공까지 세운 여인은 보기 드무니 말이다.하지만 명문가 여식 중에는 이혼을 하는 것도
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세속적인 시선이 그를 깔보는 것은 그가 ‘인의예지신’의 어느 것을 범한 것입니까?""자네가 시집을 두 번 갔기에 그를 해쳤소.""내가 시집을 두 번 가는 것이 그와 무슨 상관입니까?"부끄러운 기색을 드러내게 하려는 량소의 생각과 달리 송석석의 목소리는 침착했다."다시 묻겠습니다. 화리 후 다시 시집을 가는 것을 율법이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풍속이 허락하지 않습니까? 민간에 두 번 시집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인의예지신에 여인이 두 번 시집갈 수 없다고 말을 했습니까? 또 묻겠습니다. 여인이 버림을 받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속세를 떠나 외로이 살아야 세속적인 시선을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까?"량소는 코웃음을 쳤다."참, 말도 교묘하게 잘하오."송석석의 말을 반박할 수 없자 그는 가소롭게 대하기로 했다.송석석의 웃음기가 진해졌다."탐화랑께서는 덕을 닦지 않고 배운 것을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의리도 없고 잘못한 것을 고치지도 않으니, 정말 걱정입니다!"량소는 순간 화를 내며 말했다."자네... 난 본디 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었는데 성인의 말로 나를 모욕하다니. 이런 친척은 왕래하지 않아도 되오!"말을 마치고 그는 벌떡 일어나 소매를 휘날렸다."가시오!"란군주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미안함이 담긴 눈빛으로 송석석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붉어진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언니, 우리 먼저 돌아갈게. 며칠 후에 다시 보러 올게."송석석이 가벼운 탄식을 하고 답했다."그래, 먼저 돌아가거라."란군주는 예를 올리고 다급히 량소의 뒤를 따라 가며 소리쳤다."부군, 기다리시오."양 마마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군주께서는 앞으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송석석은 그렇다고 대답한 뒤 말을 이었다."하지만 젊은 나이에 그렇게 고지식할 줄은 몰랐네.""어떤 사람들은 책을 너무 읽어 생각까지 잘못된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송석석은 차를 마시며 눈살을 찌푸렸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말하자니, 정말 왕가에서 혼인에 관한 얘기를 하러 왔었다는 것이 기억났다.평서백 왕표의 사촌 동생이었지만 어머니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미 지난 일이니 더 언급할 필요 없었다. 그녀와 사여묵은 두 달 후면 곧 혼인을 올릴 것이다. 지난날의 일들은 떠나보내고 앞으로의 일들을 맞이해야 했다.과거와 작별하고 다시 태어난 것이다.날이 점점 추워지자, 마당의 매화가 봉오리를 맺어 며칠 지나면 곧 필 것 같았다.올해의 매화는 일찍 피었고, 진복은 이것을 길조라 말했다.서우도 바닥에 내려갈 수 있지만, 몇 걸음만 걷고 침대에 누워 쉬어야 했다.댁에서도 긴박하게 혼사를 준비하고 있다. 혼례복은 혼사가 정해진 날 봉연각에 바느질을 맡겼다. 성안의 권세가들이 혼사를 치를 때 대부분 봉연각을 찾는다. 첫째는 그들의 바느질이 좋고 빠르기 때문이고, 둘째는 봉연각에서 바느질하는 여인들의 실력이 좋아 명성이 자자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외지의 부유한 상인과 귀인들이 천금을 들여서라도 봉연각의 혼례복을 얻으려 했다.양 마마는 봉연각에 진도를 보러 갔다가 돌아온 후 안색이 이상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또 그 말을 하기에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송석석은 상황을 보고 물었다."혼수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가?"송석석은 망토를 입고 서우를 부축하여 매화를 감상했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서우를 업을 수밖에 없었다.비록 서우는 걷고 싶었지만, 송석석은 단신의의 분부에 따라 당분간 많이 걷게 하지 않았다. 하루에 그저 두세 번 걸어 다리의 기혈이 뭉치지 않도록 활동시킬 뿐이었다.양 마마는 서우가 약을 먹은 후 그릇을 치우고 말했다."아가씨, 별일은 아니옵니다. 그저 왕가네 사람을 만났습니다.""왕가?"송석석은 순간 양 마마가 전에 하려다 그만둔 말을 떠올리며 답했다."그래. 왕가에서 혼약을 얘기하러 왔다고 알고 있네. 그러나 이젠 그 일도 얘기할 필요가 없지."그녀는 서우를 눕히고 양 마마와 밖으로 나갔다.날이 어둡고 바람이 세게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