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최면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구현과 주용화 외에 누구도 방 안에 있을 수 없었다.그래서 윈터도 밖으로 나와야 했다.주용화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윈터가 하지율을 바라보며 눈짓하자 하지율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가세요.”그때 주용화가 하지율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율 씨,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볼게요. 정말 제가 최면을 받았으면 좋겠어요?”그러자 하지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가보세요.”주용화는 한동안 하지율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알겠어요.”그 말을 끝으로 주용화는 돌아서서 한 걸음씩 방으로 향했다.주용화의 그런 동작은 하지율의 눈에는 한없이 느리게 보였다.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자기 심장을 밟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방문은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닫히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그 순간 하지율의 머릿속도 새하얘졌다.어쩌면 잠시 뒤 다시 만났을 때, 주용화는 모든 걸 잊어버릴지도 몰랐다.두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도 그동안 겪었던 모든 아픔과 행복도 하지율을 그토록 깊이 사랑했다는 사실도 전부 잊게 될 것이다.하지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텅 빈 거실에는 시계 초침 소리만 똑딱똑딱 울렸다.그 순간, 주위는 너무 조용한 나머지 얼어붙은 심장이 뛰는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하지율은 정신이 이상하리만큼 또렷한데 머릿속은 점점 텅 비어 갔고 결국 생기 없는 조각상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누군가 자신의 앞에 서고 나서야 하지율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하지율이 천천히 기계처럼 고개를 들자 시야에는 익숙하고 잘생긴 얼굴이 들어왔다.주용화는 고개를 숙여 하지율을 바라보고 있었고 검은 눈동자는 고요한 바다처럼 깊었다.“제가 지율 씨를 잊는 걸 원하지도 않으면서 왜 꼭 최면을 받으라고 하는 겁니까?”하지율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화야 씨... 기억을 안 잃었어요?”“네.”그러자 하지율이 급히 물었다.“최면을 안 받은 거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나온 거예요?”주용화는 조용히 하지율을
주용화의 제안은 짙은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지금으로서는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었다.두 사람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팽팽하게 맞설 수만은 없었다.하지율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주용화는 하지율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최면을 받겠다고 약속했다.일주일 뒤, 하지율은 무사히 퇴원했다.입원해 있는 동안 유소린과 고지후도 병문안을 왔다.유소린은 원래부터 주용화가 잘생긴 데다 머리까지 좋으니 두 사람의 아이도 분명 예쁘고 똑똑할 거라고 했다.주씨 가문의 유전병에 대해서는 유소린도 하지율도 약속이나 한 듯 입에 올리지 않았다.앞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됐다.지금부터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혹시 아이에게는 유전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유소린은 하지율의 임신 소식을 꽤 기뻐했다.가장 복잡한 심경인 사람은 고지후였다.같은 남자인 만큼 고지후도 하지율이 이 아이를 낳는 순간, 설령 주용화가 정말 하지율을 잊는다고 해도 두 사람의 인연이 완전히 끊어질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율이 임신하자 주용화는 제멋대로 다시 하지율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하지율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그날 밤, 하지율은 곧바로 진소현에게 전화해 구현과 함께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진소현도 말했다.“지금으로서는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구현 씨가 성공해 주기만 바랄 수밖에요.”하지율이 물었다.“만약 실패하면요? 그때는 운명에 맡기고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여야죠. 애초에 최면은 성공률이 백 퍼센트가 아니에요. 주씨 가문의 사람 중에서도 실패한 사례가 적지 않고요. 결국 당장의 위기를 피하려고 미래에 한 번 걸어 보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요즘 의학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잖아요. 언젠가 완전히 치료할 방법이 나올 수도 있고요. 아무것도 해 보지 않고 바로 포기할 수는 없죠.”진소현이 이어 물었다.“그런데 최면은 어디에서 진행할 생각이에요?”하지율이 대답했다.“단 어르신의 댁에서 할게요. 우리 집에서 했다가 화야
“물론 제가 아이를 낳으시라고 권하는 건 어디까지나 용화 씨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예요. 하지율 씨의 입장에서 보면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아이를 낳는 거니까 하지율 씨도 아이도 주변의 시선을 감수해야 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고요. 가능성은 낮겠지만 주용화 씨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거나 어떤 이유로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하지율 씨한테는 여전히 아주 어려운 선택일 거예요. 다만...”진소현은 문 쪽을 한번 바라봤다.조금 전 병문안을 왔을 때 하지율이 주용화를 밖으로 내보냈다.진소현이 다시 말했다.“지금 아이를 지우겠다고 해도 주용화 씨가 쉽게 동의하진 않을 것 같아요.”그러자 하지율이 물었다.“화야 씨는 원래 아이를 좋아해요?”진소현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래도 윤택이나 시온한테 그렇게 잘해 주는 걸 보면 아이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그러고는 하지율을 바라보며 물었다.“지율 씨가 임신한 걸 알고 많이 기뻐하던가요?”하지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소현이 말했다.“그럼 그렇겠네요. 아이를 좋아하는데 하지율 씨가 아이를 지우겠다고 하면 그게 또 큰 자극이 될 수도 있어요. 지율 씨,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해요.”하지율은 주용화가 잠깐 기억을 잃었던 일도 이야기했다.하지만 진소현은 그 말을 듣고도 매우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그건 지율 씨가 알고 있는 것뿐이에요. 주용화 씨가 숨긴 일 중에는 우리가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어요. 그건 본인만 알겠죠.”하지율은 진소현의 뜻을 알아들었다.주용화의 상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진소현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용화가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자신을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주용화를 바라보자 하지율은 마음 한구석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아팠다.“지율 씨.”주용화가 하지율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제 우리한테 아기도 생겼으
최근 주용화는 줄곧 그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율 씨가 두 사람의 아이를 가진 이상 이제 그 준비도 필요 없어졌다.고소한 죽 냄새가 은은하게 병실 안에 퍼졌다.주용화의 시선은 뜨거운 불길처럼 하지율에게 꽂혀 있었다.마치 하지율을 뚫어 버릴 듯한 강렬한 시선에 하지율도 결국 더는 자는 척할 수 없어 다시 눈을 떴다.하지율이 눈을 뜨자 주용화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벌써 깼어요? 지율 씨, 조금 더 잘래요?”하지율은 이미 잠이 다 달아난 뒤였다.“됐어요.”주용화는 탁자 위의 죽그릇을 들어 온도를 확인했다.“그럼 뭐라도 좀 먹어요.”주용화는 숟가락에 죽을 떠서 하지율의 입가로 가져갔다.하지율은 입맛이 없었지만 뱃속의 아이가 떠올라 결국 입을 벌려서 받아먹었다.하지만 입맛이 워낙 없어 3분의1 정도 먹고 나니 더는 들어가지 않았다.주용화도 억지로 먹이지 않고 대신 하지율이 남긴 죽을 그대로 마저 먹었다.그 모습을 본 하지율이 물었다.“화야 씨, 계속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네.”하지율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내려가서 뭐라도 좀 먹고 와요.”“괜찮아요.”죽그릇이 그리 크지 않기에 주용화는 금세 남은 죽을 다 먹었다.“이 정도면 됐어요.”하지율은 입술을 달싹였다.걱정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삼켰다.이번에는 주용화도 침대 곁에 앉아 계속 하지율만 바라보지는 않았다.대신 책 한 권을 가져와 소파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하지율은 다시 눈을 감았고 병실 안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오후의 햇살은 따뜻했다.하지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잠이 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창밖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고 불을 켜지 않은 병실 안도 어스름했다.오후 내내 푹 자고 나니 하지율은 한결 정신이 맑아진 듯했다.눈을 굴리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문득 어둠 속에서 깊고 검은 두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그런 시선이 얼마나 자신을 오래 쳐다보고 있었
하지율은 입술을 달싹였다.그동안 주용화에게 그렇게 모진 말을 쏟아냈으면서도 정작 지금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하지율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그 모습을 본 주용화의 눈에서 싸늘함이 사라졌다.주용화는 주위를 짓누르던 위압감도 어느새 모두 거둬들였다.주용화의 목소리는 다시 다정해졌다.“지율 씨, 아직 열이 안 내렸어요. 물을 많이 마셔야 합니다.”주용화는 물 한 잔을 따라 하지율에게 내밀었다.“조금 마셔요.”하지율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하지율은 눈을 감은 채 주용화를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잠시 후, 차갑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살며시 입술에 닿았다.동시에 미지근한 물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하지율이 번쩍 눈을 뜨자 바로 코앞에 주용화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하지율은 눈을 크게 떴고 창백했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분노가 뒤섞여 붉은 기운이 번졌다.하지율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피하자 입가로 물이 흘러내려 침대 시트 위에 떨어졌다.주용화는 하지율이 피하는데도 화내지 않았다.오히려 입가에 맺힌 물방울을 가볍게 입맞춤으로 닦아내며 말했다.“지율 씨는 아프잖아요. 따뜻한 물을 많이 마셔야 해요.”하지만 하지율은 싸늘하게 말했다.“지금 물을 먹이려는 거예요? 아니면 이 틈에 저한테 수작 부리는 거예요?”주용화는 너무도 솔직하게 대답했다.“둘 다요.”하지율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그런데 주용화가 갑자기 하지율을 끌어안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지율 씨,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뒤로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었던 적 한 번도 없잖아요. 그동안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요. 임신하면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게 당연한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지율 씨한테 화까지 냈네요. 저를 때린 것도 당연합니다.”하지율은 할 말을 잃었다.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주용화가 벌써 모든 이유를 대신 만들어 놓았다.주용화가 다시 하지율을 바라보며 물었다.“지율 씨, 아직도 화났어요? 그냥 저를
하지율이 정신을 차렸을 때, 희미하게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과로로 인한 고열입니다. 그리고 하지율 씨는 현재 임신 한 달 정도 됐습니다. 몸이 많이 약해진 데다 아직 임신 상태도 불안정해서 잠시 후 유산 방지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3달 정도는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산 위험이 높아요. 이건 멍과 상처를 가라앉히는 연고입니다.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발라 주세요.”하지율은 멍한 상태로 눈을 떴다.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심한 어지럼증이 몰려와 하마터면 그대로 다시 쓰러질 뻔했다.“지율 씨.”주용화가 빠르게 하지율의 곁으로 다가왔다.“깨어났어요?”하지율은 작게 대답한 뒤 주변을 둘러봤다.그제야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저... 왜 이래요?”주용화의 검은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열이 많이 났어요.”“열이요?”심한 어지럼증 때문에 하지율은 평소보다 반응 속도가 한참 느렸다.하지만 아무리 정신이 흐려도 기억해야 할 일들은 결국 하나씩 떠올랐다.눈앞에는 익숙하고 잘생긴 주용화의 얼굴이 보였다.그러나 어젯밤 악마처럼 변해 버린 주용화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하지율은 몸이 굳었고 숨마저 순간 멎는 듯했다.주용화는 거의 즉시 하지율의 이상을 알아차렸다.“지율 씨, 또 어디 불편해요?”하지율은 주용화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물었다.“화야 씨, 어젯밤 일이 기억 나요?”옆에 있던 의사는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병실을 나가 문까지 닫아 주었다.주용화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이성을 잃었습니다. 미안해요.”하지율은 주용화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그러면 어젯밤 저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 봐요.”주용화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자 하지율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어젯밤에 주용화의 상태는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그리고 오늘 아침 눈을 뜬 주용화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전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주용화는 더 이상 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