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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부재의 증명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02 08:26:23

준혁은 그날 밤,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들어오지 못했다.

지연의 메시지는 짧았지만 분명했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그 문장은 거절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지만,

준혁은 그 문장을 닫힌 문처럼 받아들였다.

그는 차 안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엔진은 꺼져 있었고, 라디오도 켜지지 않았다.

그 침묵이 집 안의 침묵보다 조금은 견딜 만했다.

준혁은 핸들을 쥔 채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잠깐이면 돼.’

그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다.

잠깐 바람을 쐬고, 잠깐 숨을 돌리고,

그러고 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그 믿음은 이미 여러 번 자기를 속여 왔지만,

그는 다른 선택지를 상상하지 않았다.

차는 자연스럽게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익숙한 길이었다.

지도 없이도 갈 수 있는 길.

그곳에는 자기를 묻지 않는 사람이 있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있었다.

문을 열자 바의 공기가 그를 감쌌다.

조명은 낮았고, 음악은 크지 않았다.

대화를 방해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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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륜해드립니다.   120. 숨

    삼겹살집 안은 늘 그렇듯 시끄러웠다.환풍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 소리와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며 튀는 소리,옆 테이블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서로를 밀어내듯 뒤섞여 있었다.사람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생활의 소음이었다.이수는 그 소음 한가운데 앉아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조용해졌다.장미 미용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의뢰인과 대화를 나누고,머릿속으로 계산을 반복하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정적이었다.“여기,”하빈이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네가 전에 자주 오던 집이잖아.”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한동안은 거의 매주 왔지.”‘한동안’이라는 말이 생각보다 쉽게 입 밖으로 나왔다.언제부터 자주 오지 않게 됐는지는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그걸 정확히 말하는 순간, 지금의 자리가 설명해야 하는 공간이 될 것 같았다.하빈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언제부터, 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는 선택이 이수에게는 고마웠다.이런 자리는 괜히 정리하려 들지 않을수록 편해진다.삼겹살이 익자 하빈은 고기를 잘라 이수 앞 접시에 올려줬다.늘 하던 동작이었다.“먹어.”“이러다 다 타.”“응.”이수는 쌈을 싸서 입에 넣었다.씹는 동안 생각이 잠시 멈췄다.고기 맛이 어떤지, 쌈장이 짠지 그런 것들이 오랜만에 중요한 감각처럼 느껴졌다.“요즘,”하빈이 불쑥 말을 꺼냈다.“너 많이 달라졌어.”이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하빈을 봤다.“어떻게.”“말수가 줄었어.”“예전엔 말 안 해도 뭔가 남아 있었거든.”“지금은?”이수가 물었다.하빈은 잠시 생각했다.“지금은… 아예 안 보여주려고 하는 느낌.”이수는 웃었다.짧고, 무심한 웃음이었다.“그게 더 편할 때도 있어.”“너만 편한 거지.”하빈이 낮게 말했다.“보는 사람은 불편해.”이수는 그 말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대신 잔을 들어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유난히 느리게 느껴졌다.그때, 유리창 너머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처음

  • 불륜해드립니다.   119. 감정은 대개 끝나기 전에 다 써버리거든요

    아침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시작됐다.지연은 눈을 뜨고도 한동안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잠을 설친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피곤한 것도 아니었는데움직여야 할 이유가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전에는 아침마다 오늘을 어떻게 버틸지를 먼저 생각했었다.지금은 그 질문이 필요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컵에 따르며 지연은 어제의 일을 머릿속에서 다시 꺼내 보았다.로비, 보안 요원의 목소리,사람들의 시선,그리고 자기 이름이 공간에 퍼지던 순간.그 모든 장면이 이미 조금 먼 일처럼 느껴졌다.감정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회사에 도착하자 관리팀에서 지연을 불렀다.회의실에는 법무팀 직원이 함께 있었고,탁자 위에는 이미 정리된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지연 씨,”담당자가 말했다.“어제 상황은 공식적으로 기록됐습니다.”“접근금지 조치와 업무 방해 관련해서 절차가 진행될 예정입니다.”지연은 서류를 하나씩 넘겨보았다.날짜, 시간, 행동 요약.어디에도 감정이라는 단어는 없었다.“확인만 해주시면 됩니다.”“추가로 하실 말씀은 없으시죠?”지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없습니다.”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점심 무렵, 이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 오후에 한 번만 들르세요.-마무리 확인만 하면 됩니다.지연은 ‘네’라고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그 짧은 대화가 이제는 이 관계의 전부였다.장미 미용실은 한산했다.지연은 안쪽 의자에 앉았고, 이수는 서류를 한 장 더 꺼내 놓았다.“이걸로,”이수가 말했다.“법적인 정리는 완료 단계에 들어갑니다.”“이후에는 연락이 오더라도 대응하실 필요 없어요.”지연은 그 말을 들으며 서류를 바라봤다.“끝이네요.”그녀가 말했다.“네.”이수는 짧게 답했다.“확실하게요.”지연은 웃지 않았다.울지도 않았다.다만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생각보다,”지연이 말했다.“아무 느낌이 없어요.”“그게 정상이에요.”이수는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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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은 유난히 조용했다.지연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았다.확인하지 않아도 무언가가 올 거라는 예감은 있었지만,그 예감이 불안을 만들지는 않았다.이제는 무슨 일이 와도 이미 한 번은 다 겪어본 일처럼 느껴졌다.출근 준비를 하며 지연은 거울 앞에 잠시 섰다.얼굴은 조금 수척했지만, 눈은 또렷했다.예전 같았으면 이쯤에서 자기 얼굴을 다독였을 것이다.‘괜찮아질 거야.’‘조금만 더 참자.’지금은 그런 말이 필요 없었다.회사에 도착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보안팀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지연 씨,”“지금 잠깐만 로비로 내려와 주실 수 있을까요.”지연은 전화기 너머의 미묘한 긴장감을 느꼈다.“무슨 일인가요.”“강준혁 씨가 현재 로비에서 지연씨를 찾습니다.”지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로 들으니 호흡이 한 박자 늦어졌다.“저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지연은 차분히 말했다.“절차대로 진행해 주세요.”보안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답했다.“알겠습니다.”“이미 출입 제한 안내는 드린 상태입니다.”지연은 자기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손이 떨리지 않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지금 이 순간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그 사실이 이제는 명확했다.잠시 후, 사내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관리팀에서 공식 공지가 올라왔다.[외부인 출입 통제 관련 안내]지연은 그 문장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읽지 않아도 의미는 충분했다.이제 이 상황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 시스템 안에 완전히 편입된 상태였다.그 시각, 로비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준혁은 경비의 제지를 받으며 목소리를 높였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내가 남편인데!”“왜 못 만나게 하는거야!”그 말은 자기 위치를 증명하려는 외침이었지만,공간은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다.보안 요원은 차분하게 말했다.“지금 이 건물에서는 출입 권한이 없습니다.”“계속 문제를 일으키시면 퇴거 조치하겠습니다

  • 불륜해드립니다.   117. 임계

    아침부터 지연의 하루는 조금 더 단정했다.옷을 고르는 데 시간을 쓰지 않았고, 머리를 묶는 손도 망설임이 없었다.불안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불안이 선택을 지배하지는 않았다.이제는 하루를 버티는 게 아니라 하루를 지나가게 두는 쪽에 가까워져 있었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보안팀에서 연락이 왔다.“지연 씨, 오늘 오전에 추가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지연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외부 계정으로 회사 대표 메일에 문의가 접수됐습니다.”“지연 씨 관련 건으로요.”지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공식 메일,외부 계정,대표 주소.이제는 경계를 흐리는 수준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흔들고 있었다.“조치 부탁드립니다.”지연은 차분하게 말했다.“이미 접근 차단했고, 관련 내용은 모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그 말이 이제는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그저 정상적인 절차였다.오전 내내 지연은 업무에 집중했다.집중은 현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제자리에 두는 방식이었다.중간중간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새로운 연락은 없었다.그 침묵이 이제는 잠깐의 숨 고르기처럼 느껴졌다.점심시간, 이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 회사 쪽에서 추가 접촉 있었나요.지연은 간단히 상황을 전달했다.-대표 메일로까지 연락이 갔어요. 보안팀에서 기록 남겼다고 합니다.곧 답장이 왔다.-이제 의도가 더 분명해졌습니다.오늘은 따로 움직이지 않으셔도 됩니다.지연은 그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움직이지 않는 선택이 계속해서 상황을 밀어가고 있었다.퇴근길, 지연은 일부러 평소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려 걸었다.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자기 발소리를 느꼈다.이 도시 안에서 자기가 사라지지 않고 제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이 필요했다.장미 미용실에 도착했을 때,이수는 테이블 위에 정리된 출력물을 올려두고 있었다.“오늘 기록입니다.”이수가 말했다.“통로가 대표 메일까지 갔다는 건 상당히 무리한 선택이에요.”지연은 출력물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 불륜해드립니다.   116. 피하는 게 아니라 응답하지 않는 것

    아침부터 비가 오지는 않았다.하늘은 흐렸지만, 어제와는 다른 회색이었다.지연은 창문을 열어 잠깐 바깥 공기를 들였다.서늘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이제는 날씨를 이유로 마음이 먼저 흔들리지 않았다.출근길, 휴대폰은 가방 안에서 가만히 있었다.진동도, 알림도 없었다.그 침묵이 더 이상 불길하지 않다는 사실이 지연을 놀라게 했다.‘오늘도 기록이 하나 더 쌓이겠지.’그 생각은 기대가 아니라 예측에 가까웠다.오전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 메신저에 낯선 메시지가 도착했다.외부 협력사_강○○지연은 바로 읽지 않았다.발신자를 확인하고, 시간을 확인하고, 스크린샷을 먼저 찍었다.그 다음에야메시지를 열었다.-지연 씨, 업무 관련으로 잠깐 통화 가능하실까요.업무라는 단어가 이렇게 공허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지연은 메신저를 닫았다. 답하지 않았다.점심 무렵, 관리팀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지연 씨, 외부 협력사 명의로 연락이 간 것 같아서요.”지연은 차분히 답했다.“네, 확인했습니다.”“개인적인 접촉으로 보입니다.”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해당 계정도 접근 제한 조치하겠습니다.”지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감았다.자기 설명 없이 상황이 처리되는 경험은 여전히 낯설었다.퇴근 후, 지연은 장미 미용실로 향했다.문을 열자 이수는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오셨어요.”이수가 말했다.“네.”지연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이수는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모든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이제,”이수가 말했다.“접촉 방식이 완전히 분산되고 있어요.”“분산이요?”“전화, 문자, 회사 메일, 외부 계정.”“한 가지가 막히면 다른 통로를 쓰는 건 통제 욕구가 강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패턴입니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지금 이건…”“누적입니다.”이수는 단정하게 말했다.“하나하나는 사소해 보여도, 지금은 의도가 선명해지고 있어요.”하빈은

  • 불륜해드립니다.   115. 공백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조용한 날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지연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걸 느꼈다.어제와 똑같은 풍경이었는데, 공기가 조금 달랐다.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불안이라기보다는 주의에 가까운 감각이었다.출근길, 지연은 일부러 휴대폰을 가방에 넣어두었다.화면을 들여다보는 습관은 상대를 앞서 생각하게 만든다.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었다.회사에 도착해 업무를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관리팀에서 메시지가 하나 왔다.-지연 씨, 오늘 오후에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지연은 그 문장을 읽으며 바로 답하지 않았다.무슨 용건인지 묻지도 않았다.묻는 순간, 자기가 먼저 상황을 좁히는 셈이 되니까.-네, 가능합니다.그렇게만 답장을 보냈다.오후 두 시, 관리팀 회의실에서 짧은 면담이 있었다.담당자는 말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최근에 외부인 출입과 관련해 추가로 접수된 내용이 있습니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강준혁 씨로부터,”“회사 쪽으로 몇 차례 연락이 있었습니다.”지연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어떤 내용이었나요?”“지연 씨와 직접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업무 관련 문의를 가장해 면담을 요청했습니다.”그 문장은 이미 익숙한 방식이었다.사적인 요구를 공식 언어로 포장하는 시도.“회사에서는,”담당자가 말을 이었다.“해당 요청을 모두 거절했고, 추가 접촉 시 보안 규정에 따라 조치할 예정입니다.”지연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회의실을 나서며 지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이제 자기 말이 아니라, 타인의 보고서에 그의 행동이 남고 있었다.퇴근길, 지연은 장미 미용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수는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오늘,”지연이 먼저 말했다.“회사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이수는 지연을 바라보며 의자를 권했다.“어떤 내용이었을까요.”지연은 면담 내용을 차분히 전달했다.말을 마치자, 이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

  • 불륜해드립니다.   6. 오늘은 안 돼

    비는 새벽에 그쳤다가, 아침에 다시 내렸다.내리는 방식이 비슷해서 더 지쳤다.젖는 게 새롭지 않은 날이었다.이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안쪽 공기는 눅눅했다.커피 냄새가 평소보다 무거운 건, 아마 습기 때문일 것이다.습기는 냄새를 붙잡고 오래 놓아주지 않았다.진상은 이미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오늘은 기계를 닦고 있었고, 천천히 닦는 손이 어딘가 과했다.바쁘지 않은데도 서두르는 사람처럼. 그런 날은 보통,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쉰다더니, 어떻게 왔어요?.”그가 말했다.물음이 아니라 확인이

  • 불륜해드립니다.   5. 흔들림

    아침 공기는 전날보다 무거웠다.비가 그쳤다는 사실보다, 언제든 다시 내릴 수 있다는 기척이 먼저 느껴졌다.습기는 벽에 남아 있었고, 냄새는 아직 빠지지 않았다.이수는 카페 문을 열며 잠시 멈췄다.안쪽에서 나는 소리가 어제와 달랐다.머신이 돌아가는 소리,컵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사람의 움직임이 섞여 있었다.진상은 이미 나와 있었다.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오늘은 왜이렇게 일찍 왔어요?”이수가 말했다.말끝은 가볍게 올렸지만 의미를 묻지는 않았다.“잠이 안 와서요.”그는 그렇게 답했다.변명처럼 들리지 않게,

  • 불륜해드립니다.   4. 닿은 손등

    비는 밤새 그쳤다 다시 내리기를 반복했다.아침이 되자 길 위엔 물기가 남았고, 공기는 묘하게 가벼웠다.무언가 씻겨 내려간 뒤의 냄새였다.이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그 소리에 진상이 고개를 들었다.“일찍 왔네요.”어제와 같은 말이었다.하지만 어제와는 조금 다른 눈빛이었다.말보다 먼저 인식하는 방식.그건 습관이 아니라 선택에 가까웠다.“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손이 앞치마 끈을 묶는 동안,진상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손을 따라갔다.손목, 손가락, 매듭.이수는 그 시

  • 불륜해드립니다.   3. 틈

    카페의 아침은 생각보다 빨랐다.문을 열기도 전에 커피 향이 먼저 퍼졌고,기계가 예열되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진상은 그 소리를 들으며 셔터를 올렸다.매일 같은 시간, 같은 순서였고 그래서 더 생각하지 않는 동작들이었다.이수는 그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문을 열자 종이 울렸고, 그 소리에 진상이 고개를 들었다.“일찍 왔네요.”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계는 보지 않았다.시간을 확인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네.”이수는 짧게 답했다.목소리는 낮았고, 불필요한 온도는 없었다.앞치마를 두르는 동안 그녀는 카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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