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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이혼 후 마이 라이프
브라보! 이혼 후 마이 라이프
作者: 사월

제1화

作者: 사월
해안시 센트럴병원 응급실.

심은별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무표정한 얼굴로 간호사가 자신의 손등에 주삿바늘을 꽂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비켜주세요! 다들 비켜주세요!”

진한 피비린내와 휘발유 냄새가 뒤섞인 채, 병상에 누운 환자들이 은별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한 사람의 뒤틀린 종아리에는 아직도 자동차 조각이 박혀 있었고, 옷은 거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의사들의 목소리가 은별의 귓가에 메아리치는 가운데, 끊임없이 환자들이 응급실로 실려 들어왔다. 그리고 울부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주먹을 움켜쥔 은별의 손바닥에는 에어백이 터질 때 튄 하얀 가루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보호자분은요? 아직 안 오셨어요?”

순간 응급실 전체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마치 모두가 하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 일은 늘 그렇게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환자분, 다른 분들에 비하면 상처가 심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쇄 추돌 사고였잖아요. 그러니까 보호자분이랑 연락해서 더 정밀한 검사를 받으시는 게 좋겠어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권했다. 은별은 고개를 끄덕인 뒤,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은별의 마음은 착 가라앉았다.

[지금 대표님께서 회의 중이셔서 전화를 받기 어려우십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이준서의 비서였다.

준서는 자신들의 결혼은 절대 공개할 수 없고,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덕분에 결혼한 지 꼬박 7년이 되었지만, 비서는 언제나 은별을 사모님이 아닌 은별 씨라고 불렀다.

은별이 입을 열려는 순간, 핸드폰 너머에서 다른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 비서님, 준서 씨는 준비됐나요? 이제 출발해야 될 것 같아요, 하서가 아래서 기다리다 지쳤어요.]

[네, 리연 아가씨. 바로 대표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핸드폰을 가리고 말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리연 아가씨... 강리연?’

준서의 첫사랑이었다.

수석비서 임산하가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극명했다.

한 사람은 즉시 보고해야 하는 존재지만, 다른 한 사람은 회의 중이라는 이유로 전달조차 안 해도 되는 존재.

은별은 비꼬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준서 곁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어떻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

첫사랑이 바로 준서의 곁에 있는데, 은별은 바보처럼 준서가 나타날 거라고 아직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전화?]

[심은별 씨...]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냉랭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전해졌다.

[무슨 일인데?]

[별 일 아닌 것 같아.]

은별은 처음으로 스스로 전화를 먼저 끊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서 끊임없이 들것에 실려 들어오는 중상자들을 바라보며, 마음 한쪽이 처연해졌다.

만약 지금 응급 처치가 필요한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아무도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알레르기 체질이었기 때문에, 은별은 주사 맞는 일에 항상 남다르게 신경을 썼다.

그래서인지 가벼운 병에 걸리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된 느낌이었다.

간호사는 마음씨가 좋았다. 은별에게 곁에 있어줄 보호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바쁜 가운데도 틈틈이 은별에게 와서 알레르기 반응은 없는지 확인해 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간호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은별의 곁에 돌봐 주는 사람도 하나 없다는 등 그런 이야기였다.

그렇다. 낯선 사람조차 자신을 걱정해 주는데, 남편인 준서는 냉담함으로만 일관했다.

은별은 갑작스러운 충동에 휩싸였다.

자신이 더 심하게 다쳤더라면 어땠을까, 정말 자신이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준서의 눈길을 받을 수 있을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은별은 핸드폰을 꺼내 카카오톡을 열었다.

준서와의 대화창에서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은 것은 3년 전, 은별이 다쳐서 병원에 실려 갔을 때였다.

그 외로는 답장 하나 없는 그 메시지들을 바라보면서, 은별의 마음은 더욱 쓰라렸다.

‘3년 전에 이미 결과를 알았는데도 왜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그때는 갑자기 유리창이 하늘에서 내리 꽂혔는데, 딸 하서를 지키려는 은별의 온몸에 유리 조각이 박히도록 다쳤다.

하서는 너무 놀란 나머지 은별의 품에 파묻혀 한참을 울었었다.

그렇게 무서워하던 딸이 지금은 SNS로 강리연이 사 준 아이스크림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리연은 활짝 웃고 있었다.

리연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부드러운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서는 커다란 아이스크림을 들고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정말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배경은 도시에 새로 생긴 놀이공원이었다.

‘그게 아까 전화에서 강리연이 말한, 이제 출발해야 한다는 그 장소였던 건가?’

은별은 지금 자신이 어떤 기분인지 말할 수 없었으나 놀랍도록 평온했다.

겨우 주사를 맞고 상처도 모두 처리한 뒤, 은별은 병원에서 받은 약을 가지고 마치 좀비 같은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 가정부 왕순영이 얼른 달려 나왔다.

“사모님, 돌아오셨어요.”

은별은 살짝 미소 지었다. 이 집안에서 그녀를 ‘사모님’이라 불러주는 사람은 왕순영뿐이었다.

왕순영은 은별의 손에 쥔 약봉투와 느릿느릿한 동작을 보고는 얼굴색이 변했다.

“사모님, 어떻게 된 일이에요? 다치신 거예요?”

“네, 교통사고였는데 심하진 않아요.”

“교통사고가 났는데 어떻게 심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병원에 다녀오신 거예요? 아이고, 이걸 어째...”

함께 산 지 7년이 되도록 여전히 그렇게 착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왕순영은 은별에게 잘해 주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왕순영이 정말 남편보다 은별을 어떻게 아껴야 하는지 더 잘 알고 있었다.

은별은 놀란 왕순영을 달랜 뒤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계단을 올라가려고 할 때, 아래층에서 왕순영이 전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대표님? 빨리 좀 들어오세요. 사모님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은별의 발걸음이 멈췄다. 자신이 준서에게 연락하려면 오직 업무용 핸드폰으로만 가능했다. 게다가 전화를 받는 건 대부분 비서 임산하였다.

그런데 왕순영은 준서의 개인 핸드폰으로 바로 전화를 건 것이다.

병원에서 그렇게 힘들었으면서도 은별은 그 규칙을 그대로 따랐다. 그제야 자신이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습관이라는 건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네, 겉보기에는 그렇게 심한 것 같지는 않는데, 그래도 다치신 건 맞아요...]

은별은 더 이상 듣지 않았다. 온몸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참으며 천천히 침실로 돌아갔다.

은별은 알고 싶었다. 준서가 과연 돌아올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순영이 죽을 들고 올라왔다. 걱정과 다정함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서.

“사모님, 우선 죽이라도 조금 드세요. 지금 상처가 있으니까 조심하셔야 해요.”

“대표님께는 제가 전화를 드렸어요. 곧 들어오셔서 사모님 곁에 있어 주실 거예요.”

“고마워요.”

그리고 왕순영이 말한 뒤 3시간이나 지나서 이미 날도 어둑어둑해진 시간이었다.

밖에서 차량 소리가 들리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왕순영은 현관으로 뛰어나가 맞이했다.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고, 곁에는 사랑스러운 딸이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함께 들어오면서 딸의 불평 섞인 목소리도 들렸다.

“아빠 정말이지. 순영 아주머니가 엄마 괜찮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급하게 돌아와야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 바람에 놀이공원 불꽃놀이도 제대로 못 봤잖아요. 리연 이모 실망한 표정 못 봤어요?”

복도에 서 있던 은별은 온몸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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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라보! 이혼 후 마이 라이프   제30화

    그 뒤로 그들이 또 무슨 말을 늘어놓는지, 은별은 더 이상 들을 생각도 없었다. 준서가 확고하게 리연을 선택한 순간, 그동안 자신이 품었던 모든 기대와 바람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강리연의 이름을 들었을 때,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이준서가 돌아서서 자신을 한 번쯤 돌아봐 주길 바란 걸까, 아니면 하서가 엄마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바꿔 주길 원했던 걸까?’은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쓰라린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심은별, 넌 정말 한심하구나. 저 사람들이 널 이토록 무시하고 외면하는데도, 대체 뭘 더 바라겠다는 거야?”하지만...7년이 훌쩍 넘는 감정이란, 어찌 하루아침에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비록 은별이 의식적으로 과거의 습관을 지우려 애쓰고 있었지만, 몸과 마음이 일상의 구석구석에 배어든 7년의 흔적을 완전히 떨쳐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법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은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헛된 기대를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그리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준서의 무시도, 하서의 냉담도 없는 이런 날들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은별은 마치 인형이 미소 짓는 표정을 따라 하는 사람처럼, 다소 굳은 미소를 입가에 살짝 띠웠다. 삶이 이미 충분히 고단하니, 이제는 스스로를 즐겁게 만드는 법을 찾아야 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문 여는 소리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준서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은별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두 사람 눈빛에 담긴 냉기 또한 선명해졌다.은별이 준서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 건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해,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해방감 넘치는 일이었다. 은별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준서의 얼음장처럼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차마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서 은별은 아

  • 브라보! 이혼 후 마이 라이프   제29화

    “우리 이씨 가문 돈으로 먹고 살면서, 감히 나한테 버릇없이 굴어? 이번에 제대로 혼내 주지 않으면, 내일 당장 엄마한테 기어오를지도 몰라요.”남주는 영리했다. 단순히 자신의 불만만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안미선까지 슬쩍 끌어들였다.이 말에 안미선의 부드러운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꼬리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가며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동생이 하는 소리, 다 들었니?”남자는 소파 한구석에 기대앉아 있었다. 거실의 따뜻한 조명과 준서가 내뿜는 냉기 어린 그림자가 묘하게 뒤섞여, 윤곽이 흐릿하게 일그러진 듯했다. 마치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듯했다.그림자 속에서도 유독 선명한 눈동자는, 은별을 혼내 주겠다는 모녀의 말에 미동조차 없었다. 시종일관 무심하고 차가울 뿐이었다.“알겠어.” 준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 정지시켜 놓을게.”어차피 집에만 있는 은별은 먹고 마시는 데 부족함이 없으니, 돈이 전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정작 준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수년간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은별이 도맡아 왔다는 사실을. 신선한 식자재와 몸에 좋은 음료, 좋은 옷들. 이런 것들 중에 돈이 안 드는 게 어디 있을까?오늘 카드를 정지시킨다면, 내일 당장 두 사람은 낡거나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하서의 알레르기를 유발할지도 모를 음식을 입에 넣게 될 터였다.물론,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하서의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는 음식도 있긴 하다. 하지만 과연 하서의 입에 맞을까?단지 그 한 그릇의 죽에도, 은별의 심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른다. 그냥 물에 불려서 끓인 하얀 죽이 그렇게 맛있을 리가 있나?이 모든 것을 2층 난간 너머로 듣고 있던 은별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남자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녀의 요구를 받아들인 그 순간, 현기증이 일면서 난간을 꽉 쥐지 않았다면 그대로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지도 몰랐다.이혼을 결심한 마당이었지만, 7년간 쏟은 정성은 결코 거짓이

  • 브라보! 이혼 후 마이 라이프   제28화

    하서가 죽을 먹겠다고 보채던 날, 은별은 팔뚝에 뜨거운 죽을 쏟고도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서둘러 그릇을 내밀었다. 아이가 다 먹을 때까지 정성껏 먹여준 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돌볼 틈이 생겼다. 그 탓에 화상 자국은 피부에 깊게 패어 영원한 흉터로 남았다. 아무리 값비싼 흉터 제거 크림을 발라 봤자 색만 옅어질 뿐,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지금, 하서는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은 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은별의 가슴은 예전처럼 아프지도, 죄책감에 짓눌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서를 달래줄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SNS에는 매일같이 ‘새엄마’가 등장했다. 10마디 중 8마디는 리연에 관한 이야기였다. 반면 ‘친엄마’는 필요할 때만 간신히 생각나는 존재일 뿐이었다.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은별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하서를 비켜서서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준서는 오늘 밤 돌아오지 않을 테니, 드디어 홀로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계획은 완벽해 보였지만, 하서의 고집은 은별의 거절에 불붙은 듯 더 거세졌다.“싫어요! 동화 읽어달라고요! 엄마, 동화 읽어주세요!”하서는 동화책을 쥔 채 침대까지 달려가 은별의 팔을 마구 흔들었다. 날카로운 아이 목소리가 귀를 찌를 듯했다. “싫어요, 싫어요. 동화 꼭 들을 거예요!”“하서야.”은별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하서를 불렀다. 목소리가 쉬면서 말투까지 무거워진 탓인지, 하서는 잠시 멈칫했다.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며 소리쳤다. “엄마 싫어요!”“다시는 엄마라고 안 부를 거예요! 난 리연 이모가 내 엄마였으면 좋겠어요!”이 말에 은별은 멍하니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창백해진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문자에는 말투가 담겨 있지 않아서, 하서의 SNS에서 본 ‘새엄마’에 대한 글들은 은별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직접 듣는 말 한마디는 훨씬 더 큰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 브라보! 이혼 후 마이 라이프   제27화

    “근데 엄마는 그림 그릴 줄 모르실 텐데...”하서는 은별이가 디자인 원고를 그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하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문 주얼리 디자이너인 남주가 왜 은별한테 원고를 그려달라고 하는지, 게다가 들킨 뒤에는 엄마와 그림 그리기로 약속한 척까지 하고 말이다.“우리 엄마는 식탁 닦고 밥 하고 동화 읽어주는 것밖에 못 해요. 고모가 정말 도움이 급하면 리연 이모한테 부탁해 보는 게 어때요?”리연의 이름이 나오자 하서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고모, 리연 이모 아세요? 이름은 강리연인데, 진짜 대단한 디자이너예요.” “지난번에 아빠랑 놀러 갔을 때 이모가 디자인한 목걸이 봤는데, 진짜 예뻤어요. 저도 커서 꼭 리연 이모처럼 될 거예요. 절대 엄마처럼 되진 않을...”하서는 자랑하느라 신이 난 나머지, 은별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말았다. 그리고 허겁지겁 작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천진난만하고 맑은 하서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고요한 복도 안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남주는 은별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눈빛 속의 분노가 거의 넘쳐흐를 듯이 은별을 탓하고 있었다.“그래, 두고 봐. 내가 엄마한테 말할 테니까!”말을 마치자마자 준서에게 인사할 새도 없이 화가 난 채 계단으로 내려갔다. 급하고 무거운 발소리는 가슴속 불 같은 화를 고스란히 말해주는 듯했다.은별은 남주의 협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오든 간에, 돕지 않겠다고 한 그녀의 결정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이씨 가문 식구들이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이참에 더 밉보인들 잃을 것도 없었다.자신의 등장에 무심하게 등을 돌리고 가버리는 준서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수년간 반복된 일과에 은별은 이미 무뎌져 있었다.은별은 볼을 툭 내민 하서를 내려다보며, 아이의 서운한 기색은 애써 외면한 채 덤덤하게 말했다. “하서야, 시간이 늦었어. 이제 자야 할 시간이야.”“근데 엄마가 동화 안 읽어줬잖아요

  • 브라보! 이혼 후 마이 라이프   제26화

    이준택은 오늘따라 유독 말이 많았다. 준서 어릴 적 에피소드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더니, 은별과 준서의 성격이 얼마나 잘 맞는지를 거듭 강조했다. 은별은 끝까지 참을성 있게 들으며, 때때로 다정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쳐주고 조용히 위로했다. 하지만 그 태도는 내내 담담하기만 했다.이준택 역시 그 미묘한 거리감을 눈치챘는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이쯤 되면 하서도 엄마 찾겠다고 난리 피울 시간이겠지. 이만 가 보거라.”시계를 확인한 은별은 이준택도 쉬어야 할 시간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방을 나섰다.서재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은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몸을 돌리자, 마치 그림자처럼 복도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남주와 마주쳤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남주의 눈빛에는 은별을 향한 알 수 없는 우월감과 적대감이 가득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은별은 남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계단으로 향했다.부부의 침실은 3층에 있었다. 복도에 들어서고 이준택의 귀에 닿지 않을 만큼 거리가 멀어지자, 남주가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와 은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거의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이 다가섰다. 목소리는 낮췄지만, 오만한 말투는 여전했다.“심은별, 내가 한 말 다 까먹은 거야? 디자인 원고는 도대체 언제 완성되는 거지?”인내심이 바닥난 남주의 모습을 보며 은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은별은 반 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며, 물 흐르듯 잔잔한 목소리로 답했다.“이미 말했잖아. 시간 없어서 안 된다고. 다른 사람 찾아봐.”“아니, 너 제정신이야? 내가 대체 어디서 사람을 구해 와?” 남주가 화가 치밀어 발을 동동 굴렀다.그런 인맥이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 설령 사람을 구한다 해도 이 일이 무슨 자랑할 일이겠는가? 게다가 몇 년째 은별의 디자인 원고를 가로채 자신의 작품인 양 내놓아 온 터였다. 갑자기 작가를 바꾸면 디자인 스타일이 달라져 발각될 수도 있었다. 대리 작가를 썼다는 사실

  • 브라보! 이혼 후 마이 라이프   제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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