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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eur: 당근케익
임설희가 그 낡은 집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송시운은 진심으로 화가 난 눈치였다. 돌아오는 길 내내 그는 단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고 집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얼음장 같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아들이 불쾌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본 최현숙은 곧장 임설희를 노려보았지만 임설희는 그런 시선을 무시한 채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저녁이 되어 내려왔을 때, 송영석과 송시운은 보이지 않았다. 식탁에는 최현숙만이 앉아 있었고 그녀의 자리엔 아예 수저조차 놓여 있지 않았다.

“내가 보아하니 네가 배가 별로 안 고픈 것 같아서 아줌마한테 네 밥은 따로 차리지 말라고 했어.”

“그래요?”

임설희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떨군 그때, 마침 윤미정이 주방에서 음식을 들고나오자 임설희는 여느 때처럼 다가가 접시를 받으려 손을 뻗었다.

과거엔 늘 임설희가 함께 나서서 식사를 준비했기에 가정부도 그녀가 돕겠다고 나선 줄 알고 자연스레 음식을 건넸고 그 순간 임설희는 일부러 손을 뒤로 빼며 접시를 놓쳐버렸다.

이내 접시가 그녀 손에서 미끄러져 식탁 앞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최현숙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접시 하나 제대로 못 드는 애가 우리 송씨 가문에 시집와? 아이고...”

“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임설희는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한 척하다가 바로 주방으로 달려가 새 접시를 꺼내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담아 접시에 올리더니 그대로 최현숙 앞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드세요. 아주 아까워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너 지금 나한테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먹으라고 하는 거야?”

최현숙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 푸르딩딩하게 변해가는 걸 지켜보며 임설희는 여유롭게 손을 씻고 계단을 올라갔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표정엔 실실 웃음까지 돌았다.

다음 날 회사에 도착했을 때, 문지원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성이다 그녀를 발견하고 바로 달려왔다.

“팀장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 진짜 미칠 것 같아요! 박연우 씨랑 그렇게 친하셨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팀장님 프로젝트를 가로채요? 지금 금원 그룹이랑 계약 직전이잖아요! 이건 그냥 다 된 밥에 숟가락 얹는 거라고요!”

문지원은 그녀가 직접 발탁해 끌어준 후배였다. 말하자면 그녀의 진심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임설희는 문지원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 마. 다 준비해 놓았어.”

“무슨 준비요?”

“비밀이야.”

그녀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자 문지원은 임설희의 팔에 매달려 응석을 부렸다.

“그렇지만 저 버리면 안 돼요!”

“알았어, 알았어.”

임설희는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톡 쳤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동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모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지만 그녀는 한껏 여유 있는 미소로 모두를 안심시키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설희야, 잘 왔다! 얼른 나랑 같이 회장님한테 가자.”

박연우가 말쑥한 정장을 입고 다가왔다. 다만 그녀의 발에는 플랫슈즈가 신겨져 있었고 덕분에 임설희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그녀는 임설희의 손을 붙잡고 끌어당기며 말했다.

“회장님이 갑자기 이 프로젝트를 나한테 넘기시겠다고 하셔서 정말 곤란했어. 이건 전부 네가 만든 결과물인데 내가 어떻게 가져갈 수 있겠어. 거절하려 했지만 회장님이 너무 완강하시더라고. 그래서 일단 수락했는데 너만 오시면 바로 같이 찾아뵙고 말씀드리려고.”

말투며 분위기며 하나같이 모두를 의식한 연기였다. 그녀는 친구를 배신하지 않는 착한 사람이고 이득보다 우정을 택하는 사람처럼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그 연기에 속은 동료들은 역시 그녀답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임설희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이토록 가식적인 사람이 된 건. 아니, 처음부터 저 얼굴이 진짜였을지도... 나만 몰랐던 걸까.’

지금 이 손을 잡고 같아 송영석을 찾아간다면 송영석은 단호하게 그녀를 프로젝트에서 제외하고 박연우에게 이 일을 맡기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내가 문제여서 쫓겨난 거라고 믿게 될 테고 박연우는 억지로 떠맡은 피해자처럼 보이게 되겠지.’

‘가족이란 이름 아래 완벽한 합이구나, 정말.’

“어휴, 회사가 사람 이용해 먹고 버리려 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너처럼 좋은 친구가 프로젝트를 이어받는다면 그나마 위안이야.”

임설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박연우의 손을 꽉 잡았다.

“결국 내공이 너한테 가지만 그래도 친구니까 내 수고를 기억해 줄 거라 믿어.”

그 말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회사는 능력 있는 직원조차 상황에 따라 언제든 잘라낼 수 있다는 현실을 드러냈고 이 프로젝트는 철저히 그녀 임설희의 노력으로 일군 성과라는 걸 확실히 각인시켰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직원들 모두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박연우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는 단순히 ‘공로를 대신 받은 사람’이 아닌 ‘남이 준비한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박연우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고 눈동자는 미묘하게 흔들렸다.

“나, 이 프로젝트 못 맡아.”

“그럼 사직하려고?”

“나...”

“그래. 그건 좀 힘들겠지...”

임설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는 날카롭게 그녀를 찔렀다.

결국 혼자 회장실로 들어간 임설희를 맞은 건, 이미 계획을 짜둔 송영석이었다.

“설희야, 너도 알잖니. 내가 늘 널 얼마나 신뢰했는지. 언젠가 내가 물러나고 시운이 회사를 맡게 되면 넌 틀림없이 그의 현명한 조력자이자 아내가 될 거야. 그러니 지금 내가 있는 동안 너에게 더 넓은 세상을 맡기고 싶은 거다. 경험은 곧 자산이야.”

어느새 대학 갓 졸업한 새내기 직원을 세뇌하려는 멘토처럼 너무나 교묘하고 감언이설이 섞인 말투였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순진한 신입이 아니었다.

“말씀 잘 들었어요. 근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

“해성 쪽에 새 프로젝트가 있어. 그쪽 현장에 네가 가줬으면 좋겠어. 널 믿으니까 보내는 거다.”

결국 그녀를 외지로 쫓아내고 그 사이 박연우를 집안으로 들이겠다는 계획이었다.

송씨 일가의 깔끔한 계산에 임설희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해성이든 뭐든, 전 안 갑니다. 금원 프로젝트요? 넘길 수 있어요. 대신, 전에 얘기했던 성대한 결혼식을 해주세요.”

송영석의 얼굴이 굳었다.

“이렇게 좋게 말로 하는 것도 네가 내 며느리라서 그래. 안 그러면...”

“안 그러면요?”

“널 바로 해고할 수도 있어.”

“하하. 해고 좋죠.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결혼식은 시운 씨한테 직접 받아내면 되니까요.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성과금은 꼭 주세요. 안 주시면 인수인계 안 합니다.”

송영석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희야, 네가 이렇게 이기적인 줄은 몰랐다. 정말 실망이다.”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노력한 만큼 받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죠.”

결국 그는 인수인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 재무팀에 즉시 그녀의 성과금을 이체하도록 지시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고 송영석의 얼굴엔 짙은 불쾌함이 드리워졌지만 그가 찌푸릴수록 임설희의 얼굴엔 더욱 밝은 미소가 피어났다.

회장실을 나와 옥상으로 향한 그녀는, 금원 그룹 측 프로젝트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회장님께서 말씀하셨죠?”

“예, 회장님께서 앞으로 이 프로젝트는 전적으로 임설희 씨 의견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부서도 모두 그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내일, 진우 그룹 사람들이 계약서 들고 찾아갈 거예요.”

“계약서는 이미 완성됐습니다.”

“찢어버리세요.”

“네?”

“진우 그룹의 설계안, 마음에 안 들어요. 사소한 부분 몇 개 지적해서 수정하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며 임설희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래. 사람 갖고 노는 거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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