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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Penulis: 당근케익
“아까 내 말투가 안 좋았던 거, 미안해. 사과할게.”

“여보, 정말 나를 게스트룸에서 자게 할 거야? 제발, 문 좀 열어줘. 당신을 안아보고 싶단 말이야.”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웠지만 임설희는 들을수록 속이 메스꺼워졌다.

방금까지 따뜻하게 박연우와 몸을 섞던 남자가 이제는 자신에게 애원한다니 진절머리가 났다.

“오늘은 피곤해. 할 말 있으면 내일 해.”

“여보, 우리 벌써 일주일째 잠자리 없었어. 나 안 보고 싶었어?”

임설희는 진심으로 토할 것 같았다.

“아까 보니까 아버님, 어머님 말씀을 그렇게 잘 듣던데, 그러니까 오늘 밤은 당신 부모님이랑 자.”

한동안 조용하던 복도에 이내 조심스레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역시, 그 성깔이 어디 가겠어...’

과거 같았으면 의견이 달라져도 임설희가 양보했고 다툼이 생기면 항상 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정말 사랑한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랑했던 그 모든 순간이 우스워질 뿐이었다.

임설희는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마치 곧 깊은 잠에 빠질 것처럼 숨결은 잔잔하고 얼굴엔 감정 하나 없이 평온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식은 또렷이 깨어 있었다.

그러다 밤이 깊어지고,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은 그때 철컥, 옷장 문이 아주 살짝 열렸다.

한참을 조용히 숨죽였던 박연우가 조심스럽게 기어 나왔다. 오랜 시간 웅크리고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렸는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비틀거리며 복도 쪽으로 걸어 나갔다.

문이 조심스레 닫히고 나서야 임설희의 눈이 천천히 떴다.

2층 복도 끝, 작은 응접실에선 이미 최현숙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절뚝이며 나온 박연우를 다급히 앉히고 애처롭게 그녀의 다리를 주물렀다.

“아이고, 우리 아기. 이렇게 고생을 시켜서야... 누가 알았겠니, 그 여자가 갑자기 돌아올 줄은.”

“어머님, 전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박연우는 얌전히 웃으며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본 최현숙이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 벌떡 일어섰다.

“우리 손주 괜찮아? 병원 갈까?”

“괜찮아요. 그냥 오래 앉아 있어서 좀 답답했던 것뿐이에요.”

“이 망할 임설희. 저년 때문에 우리 손주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가 그냥 가만 안 둘 거야!”

그때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송영석이 말을 끊었다.

“됐어. 지금은 괜히 걔를 자극하지 마.”

“하지만 지금 집에 진짜 며느리는 연우잖아요. 게다가 임신까지 했는데 언제까지 밖에서 재워야 돼요? 오히려 가짜가 안방 차지하고 있으니, 원!”

“잠깐만 참자. 금원 그룹과의 계약만 마무리되면 바로 쫓아내면 돼.”

최현숙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얼마 안 남았으니까. 좀만 더 버티자.”

박연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지만 입가엔 알 수 없는 미소가 어른거렸다. 그러고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전 괜찮아요. 저와 설희도 오랜 친구잖아요. 제가 조금 불편하다고 해서 그 친구를 함부로 몰아내고 싶진 않아요.”

“넌 그런 마음으로 대했을지 몰라도 걔는 너를 친구로 본 적 없어. 그렇지 않으면 네 프로젝트까지 빼앗으려 들겠냐?”

최현숙은 입을 앙다물고 혀를 찼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옆에 앉은 아들을 돌아보았다.

“너는 왜 가만히 있어?”

송시운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 설희를 사랑해요. 그 애를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럼 연우는? 연우야말로 네 진짜 아내잖아!”

최현숙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연우한테 미안한 짓을 했어요. 그렇다고 설희까지 저버릴 순 없어요.”

“그건, 그건 당신 잘못 아니야.”

박연우는 다급히 일어나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송시운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기다려줘. 곧 설희에게 다 말할게. 걔는 날 정말 사랑하니까, 언젠가는 너와 아이도 받아들일 거야.”

박연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읊조렸다.

“난 괜찮아. 당신이 그 설희를 사랑해도 좋아. 단지 그 사랑의 틈에서 나랑 아기에게도 조그만 자리를 허락해 주면 돼.”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 장면을 바라보는 송영석과 윤미정의 시선은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임설희에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그런 인정과 애정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대화를, 복도 한쪽에서 임설희는 경악스러운 얼굴을 한 채 다 듣고 있었다.

“지금이 21세기가 맞나? 어떻게 현대에서 대놓고 저런 조선시대 얘기를, 그것도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아니, 말만 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실행하고 있었다.

‘세상에, 난 대체 어떤 집안에 시집을 온 걸까. 하나같이 미친 사람들뿐이잖아.’

“근데, 연우 배가 날이 갈수록 불러오는데 설희를 언제까지 속일 순 없잖아요.”

최현숙의 걱정이 이어졌고 송영석은 짧게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러면 당분간 출장 명목으로 외지로 보내지 뭐.”

그날 밤, 임설희는 분노로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송시운이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장미를 그녀 품에 안겨주며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안더니 입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임설희는 피하며 말했다.

“어제 옷 안 갈아입었어? 땀 냄새가 나는데.”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게 어제 밤새 꽃 농장에 갔다 왔거든. 이 장미들, 오늘 아침 막 수확된 거야.”

‘거짓말도 그럴싸하게 하던가.’

꽃다발엔 꽃 가게의 상호가 그대로 붙어 있었지만 임설희는 아무 말 없이 달콤하게 웃으며 꽃을 받아들였다.

“고마워, 자기.”

“잠깐만 기다려. 나 샤워 좀 하고 올게. 그리고 너 데리고 갈 데 있어.”

“근데 나 오늘 회사 가야 하는데...”

“회사야 뭐, 당신 없어도 굴러가잖아. 우리 데이트한 지 오래됐잖아.”

“하지만 오늘은 좀...”

“기다려, 금방 씻고 내려올게.”

그는 그녀가 더 말하기도 전에 계단을 올라갔다.

그 뻔뻔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임설희는 조용히 웃었다.

‘그래, 회사 못 가게 하려나 본데... 좋아, 어디 한번 보자. 오늘은 또 어떤 연극을 보여줄 건지.’

한 시간 뒤, 송시운은 그녀를 차에 태우고 낡은 도심 외곽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말이 좋아 골목이지 불법 건축물과 쓰레기 더미가 가득한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3년 전, 그들은 바로 이곳에 살았다.

그때는 그가 누군지도 몰랐고 둘 다 그냥 같은 신입사원인 줄 알았다.

두 사람은 월급도 적었고 살림도 빠듯해서 이 오래된 동네에 단칸방을 빌려 함께 살았었다.

20만원짜리 작은 원룸. 그래도 그녀는 아침마다 손을 꼭 잡고 골목을 함께 달리던 그 순간이 아주 소중하고 따뜻했다.

정말 그랬었다.

그때 그녀는 믿었다. 두 사람이 함께 이 도시에 뿌리내리고 언젠가는 큰 집을 마련하겠지, 분명히 그렇게 되겠지 그 믿음 하나로 열심히 살았다.

차가 멈추고 송시운은 그녀 손을 잡고 예전 그 건물로 데려갔다.

엘리베이터 따윈 없었다.

계단의 손잡이는 기름때로 번들거렸고 벽은 오래전에 페인트가 벗겨져 군데군데 시멘트가 드러나 있었다.

5층에 도착하자 송시운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나 이 집 샀어. 당신 주려고.”

임설희는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이 집을 샀다고?”

“응. 이제 이 집은 당신 거야.”

그는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가 낡은 소파에 앉았다. 과거 그대로였다.

“기억나지? 당신이 저기서 밥하고, 난 여기 앉아 책 읽고. 우리는 각자 할 일 하면서도 자꾸 눈이 마주쳐서 웃곤 했잖아. 난 그게 참 좋았어.”

그 말에 임설희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차리면 그는 테이블에 앉아 받기만 했다. 밥을 먹고 그는 옷을 갈아입고 나갔고 그녀는 설거지를 하고 출근했다.

회사에선 그녀가 바쁘게 뛰었고 그는 회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편한 자리에서 커피나 마셨다. 퇴근 후 피곤한 몸으로 돌아온 그녀는 또다시 저녁을 차려야 했고 그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그는 또 그녀를 원했다. 그러다 피곤하다는 임설희의 말엔 표정이 일그러졌고 차가운 눈빛이 되돌아왔다.

‘그 모든 걸 참았던 내가 등신이지.’

그때로 돌아간다면 진심으로 자신의 뺨을 몇 대 후려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임설희에게 이 낡은 집을 ‘선물’이라며 내밀고 있었고 그녀가 원하는 게 이런 거라고 착각한 채, 혼자 뿌듯해하고 있었다.

“난 이 집 싫어. 그렇게 좋으면 당신이나 들어와서 살아.”

그녀는 무표정하게 한 마디 남기고 그대로 돌아섰다.

계단을 내려와 막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의 팀 동료, 문지원이었다.

“팀장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방금 윗선에서 통보해 왔는데 박연우가 우리 팀으로 온대요. 그리고 팀장님 업무 전부 넘겨받는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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