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내 남편 정우진은 원양 화물선 선장이었고 1년 12개월 중 10개월을 바다에서 보냈다. 나는 늘 정우진을 믿었다. 다만 나에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작은 습관 하나가 있었다. 정우진의 배가 항구에 들어와 보급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일등항해사의 아내인 서지은을 불러 함께 술을 마셨다. 서지은의 남편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서지은은 정반대였다. 서지은은 말도 많았고 술도 약했다. 우리는 집안 이야기부터 배에서 있었던 일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세 번째 잔이 들어갔을 때, 서지은이 불쑥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언니 남편은 진짜 로맨틱하더라고요. 지난달에 배가 마르세유에 들어갔을 때 현지 장인한테 일부러 물결 모양 다이아몬드 세트를 맞췄대요. 목걸이에 팔찌, 귀걸이까지 한 세트로 다 하고 보급선 편에 따로 보내기까지 했다던데요? 저 진짜 부러워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러자 내가 낮게 대답했다. “그래? 난 받은 적이 없는데?” 하지만 나는 더 묻지는 않았다. 서지은도 눈치를 챘는지 곧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장부를 펼쳤다. 마르세유항 탁송 목록의 보석 항목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손이 멈췄다. 수령 주소는 우리 집 주소가 아니었다. 바다는 언제 거칠어질지 알 수 없는 법이니 이제 나도 그 배에서 내려야 할 때였다.
View More서류에 최종 도장이 찍히는 순간, 정우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혼 절차를 모두 마친 뒤, 나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오래된 결혼반지를 빼냈다. 반지 안쪽에는 우리 두 사람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고 오랜 세월 탓에 글자도 조금씩 닳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정우진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그 반지는... 나한테 주면 안 돼?”그러자 나는 짧게 대답했다.“안 돼.”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반지를 귀금속 매입점에 팔았다. 큰돈은 아니었지마 난 그 돈으로 서지은에게 원피스 한 벌을 사 줬고 선물을 받은 서지은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언니, 저 이거 못 받아요.”“네 남편이 해원호 임시 선장 맡은 기념이야.”그러자 서지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남편은 정 선장님이 사고 친 틈을 타서 자기가 그 자리에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게 싫대요.”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누구 자리를 빼앗은 게 아니야. 실력을 인정받아서 맡게 된 거잖아.”얼마 지나지 않아 혜성 해운의 최종 징계 결과가 공지됐다.정우진은 수석 선장 승진 자격이 취소됐고 6개월간 승선이 정지된 채 재교육을 받은 뒤 해원호에서도 전출됐다.차세린 역시 다이아몬드 세트와 부당하게 받은 지원금, 지난 3년간 가로챈 위문품 상당액까지 모두 반환해야 했고 혜성 해운과 진행하던 항만 협력 사업도 전부 중단됐다.정우진을 통해 손에 넣었던 모든 혜택이 결국 차세린이 갚아야 할 빚으로 돌아온 셈이었다.나는 신혼집을 팔고 항구 근처에 아담한 집을 하나 마련했다. 아침이면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는데 예전의 나는 그 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정우진이 먼바다로 떠나는 날에도,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에도 뱃고동이 울릴 때마다 내 마음까지 따라 흔들렸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뱃고동은 그저 배가 오가며 울리는 소리일 뿐, 더 이상 내 마음을 붙잡아 두지 못했다.더 이상 내 기쁨도 기다림도 괴로움도 그 소리에 매달려 있지 않았다.얼마 전 서지은과 가볍게 술을 마셨는데 서지은은 여전히 주량
나는 일단 그러겠다고 했다.고작 30일이었다.그동안 정우진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한테 무언가를 보냈다. 따뜻한 죽과 꽃, 구급상자, 항구에서 산 기념품까지 가득했다. 나는 받은 그대로 전부 돌려보냈다.숙려 기간이 시작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정우진은 호텔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희서야, 그동안 내가 정말 못 할 짓을 했어.”나는 대꾸하지 않고 정우진을 지나쳤다. 그러자 정우진이 곧바로 뒤따라오며 말했다.“예전에는 내가 무사히 돌아오기만 바랐잖아. 지금 이렇게 육지에 돌아와 있는데 나 한 번만 봐 주면 안 돼?”나는 걸음을 멈췄다.“당신이 무사하길 바랐다고 해서 다시 받아 줘야 하는 건 아니야.”그 순간, 정우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정말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랑도 조금씩 닳아 없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얼마나 남았는지조차 헤아릴 수 없게 된다.차세린도 가만히 있지는 않고 자신의 SNS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차세린은 자신이 항만 홍보 협력업체 관계자일 뿐인데 선장 가족에게 악의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함께 올린 사진에는 보석이 보이지 않도록 잘라 내고 퉁퉁 부은 눈만 드러나 있었다.댓글에는 나를 비난하는 글이 이어졌다.[아내라고 마음대로 난리 쳐도 되는 건 아니죠.][협력업체 사람을 저렇게 몰아가는 건 너무하네요.][원양선 선장은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심한데 가족이 발목까지 잡으면 어떡해요.]나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대신 차세린이 내 이름으로 물건을 수령하는 영상 일부를 캡처해 혜성 해운에 보냈다.그날 바로 회사에서 공식 입장문이 올라왔다. 누구의 이름도 직접 밝히지 않았지만 내용은 명확했다.비가족 관계자가 선장 배우자의 명의를 도용해 지원금과 물품을 수령했으며 해당 협력은 중단하고 부당하게 지급된 비용을 전액 환수한다는 내용이었다.차세린이 올린 장문의 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고 곧 나한테 개인 메시지가 왔다.[한희서 씨, 꼭 저를 죽을 때까지
정우진은 입술만 몇 번 달싹였다.“저는 이걸 신청하라고 한 적이 없어요.”그러자 담당자가 곧바로 대답했다.“신청 계정은 정우진 선장님의 명의고 인증 번호도 선장님의 개인 휴대폰으로 전송됐습니다.”정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정우진을 바라봤다.“그럼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해온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셈이네?”그러자 정우진이 낮게 말했다.“세린이가 그때 지낼 곳이 없다고 해서 잠깐만 도와주려고 했어.”그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내 이름으로?”정우진이 고개를 숙였다.“그냥 지원금 몇 번 받는 정도라서 아무도 확인 안 할 줄 알았어.”담당자의 표정이 굳었다.“정우진 선장님, 말씀 조심하셔야 합니다. 가족 지원금은 별도 예산에서 지급되는 돈입니다. 선장님의 개인 돈이 아닙니다.”그제야 정우진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했다.정우진은 나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희서야, 정말 너한테 피해 주려던 건 아니야.”그러자 내가 물었다.“그럼 내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은 있어?”정우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대로 대답하기에는 진실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었다.그때 회의실 문이 다시 열리고 직원과 함께 차세린이 들어왔다.차세린은 정우진을 보자마자 눈시울부터 붉혔다.“우진아, 지원금을 쓰면 안 되는 줄 몰랐어. 네가 신청해도 된다고 해서 한 거잖아.”정우진의 얼굴이 굳었다.“내가 언제 신청해도 된다고 했어?”그러자 차세린이 다급하게 받아쳤다.“한희서 씨는 이런 건 신경도 안 쓴다고 했잖아. 집에서는 네 말이면 다 듣는다고도 했잖아.”그러더니 차세린은 고개를 돌려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이제 만족해요? 결국 우진의 앞길 막고 저한테 받은 거 전부 돌려놓으라고 하려는 거잖아요.”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물건은 돌려줘야 하고 돈도 다 갚아야죠.”차세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담당자가 그 자리에서 통보했다.“차세린 씨, 부당하게 수령한 물품과 지원금은 전액 환수가 될 예정입니다. 혜성 해운과의 협력 자
“차세린이 먼저 나한테 연락한 거야.”그러자 정우진이 곧바로 받아쳤다.“세린이가 울다가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그러더라. 네가 녹음으로 협박했다고 말이야.”나는 휴대폰을 꺼내 카페에서 녹음한 내용을 틀었다.차세린의 목소리로 정우진이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정우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이어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해도 정우진의 마음을 얻었다는 대목이 나오자 정우진이 낮게 말했다.“꺼.”나는 그대로 녹음을 껐고 정우진은 소파에 앉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다시 짐을 챙겼다. 그러다가 정우진이 갑자기 물었다.“어디 가려고?”“나가려고.”“여기는 우리 집이잖아.”“곧 아니게 될 거야.”정우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한희서, 차세린은 내가 정리한다고 했잖아. 대체 뭘 더 원하는 거야?”나는 여행 가방 지퍼를 끝까지 잠갔다.“우진 씨는 차세린을 못 정리해.”“할 수 있어.”“못 해. 못 놓잖아.”그 순간 정우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마침 휴대폰까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차세린이었다.정우진은 전화를 받지 않은 채 화면만 바라봤다. 전화가 끊겼다가 다시 울렸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나는 여행 가방을 끌고 현관으로 향했고 그제야 정우진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봐. 나 전화도 안 받았잖아.”나는 현관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이미 늦었어.”그날 나는 항구 근처의 호텔로 몸을 옮겼다.혜성 해운의 조사가 시작된 지 사흘째 되는 날, 담당자가 나보고 회사로 와 달라고 연락했다.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마르세유항 현지 대리점의 회신과 보급 내역서, 물품 수령 영상까지 모두 놓여 있었다.영상 속의 차세린은 마스크를 쓴 채 물건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서명란에 적은 이름은 차세린이 아니었다.[한희서.]옆에 있던 직원이 가족 확인 도장을 건네주자 차세린은 웃으며 말했다.“정 선장님이 다 말씀해 두셨어요. 사모님도 괜찮다고 하셨대요.”담당자가 다른 서류 한 장을 넘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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