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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이름의 주인

빼앗긴 이름의 주인

By:  유원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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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 정우진은 원양 화물선 선장이었고 1년 12개월 중 10개월을 바다에서 보냈다. 나는 늘 정우진을 믿었다. 다만 나에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작은 습관 하나가 있었다. 정우진의 배가 항구에 들어와 보급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일등항해사의 아내인 서지은을 불러 함께 술을 마셨다. 서지은의 남편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서지은은 정반대였다. 서지은은 말도 많았고 술도 약했다. 우리는 집안 이야기부터 배에서 있었던 일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세 번째 잔이 들어갔을 때, 서지은이 불쑥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언니 남편은 진짜 로맨틱하더라고요. 지난달에 배가 마르세유에 들어갔을 때 현지 장인한테 일부러 물결 모양 다이아몬드 세트를 맞췄대요. 목걸이에 팔찌, 귀걸이까지 한 세트로 다 하고 보급선 편에 따로 보내기까지 했다던데요? 저 진짜 부러워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러자 내가 낮게 대답했다. “그래? 난 받은 적이 없는데?” 하지만 나는 더 묻지는 않았다. 서지은도 눈치를 챘는지 곧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장부를 펼쳤다. 마르세유항 탁송 목록의 보석 항목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손이 멈췄다. 수령 주소는 우리 집 주소가 아니었다. 바다는 언제 거칠어질지 알 수 없는 법이니 이제 나도 그 배에서 내려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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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수령 주소: 해온 아파트 17동 1203호. 비고: 반드시 본인이 직접 수령할 것. 가족에게 전달 금지.]

나는 마지막 한 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가족에게 전달 금지라니...’

정우진과 결혼한 지 벌써 6년이었다. 정우진은 출항할 때마다 집 열쇠를 현관 두 번째 서랍에 넣어 두며 말했다.

“희서야, 가족들은 너한테 부탁할게.”

그 말을 믿고 나는 시부모님을 챙겼고 정우진 대신 정기 검사에 필요한 서류를 처리했으며 선원 가족 단체방에 공지를 돌리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그래서 지금껏 내가 당연히 정우진의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우진의 목록에서 ‘가족’이란, 저 다이아몬드 세트에 손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정우진에게서 온 문자였다.

[방금 수에즈 지나왔어. 신호가 안 좋아.]

나도 짧게 답했다.

[응.]

평소보다 답이 짧아 이상했던 모양인지, 2분쯤 지나 다시 문자가 왔다.

[오늘은 왜 밥 먹었냐고 안 물어봐?]

나는 보고 있던 항차 장부를 덮고 답장을 보냈다.

[밥은 먹었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먹었어.]

화면을 바라보던 나는 피식 웃었다. 신호가 안 좋다더니 이런 답장은 참 빨랐다.

다음 날 오전, 나는 해온 아파트로 향했다.

해온 아파트는 해진시에서도 손꼽히게 비싼 오션뷰 아파트 단지로, 항구까지 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경비원이 누구를 만나러 왔느냐고 묻기에 휴대폰에 저장된 탁송 목록을 보여 줬다.

“17동 1203호요. 물품 확인하러 왔어요.”

비고란을 확인한 경비원의 태도가 금세 공손해졌다.

“잠시만요. 마침 1203호 차세린 씨가 집에 계시네요.”

‘차세린...’

나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정우진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다. 정우진은 세 번이나 연달아 전화를 걸더니, 네 번째에는 문자로 물었다.

[어디야?]

나는 짧게 답했다.

[장 보러 나왔어.]

곧바로 메시지가 돌아왔다.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 내가 없으면 네가 처리 못 하는 일도 많아.]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17동 1203호의 현관문도 동시에 열렸다.

문 앞에 선 여자는 실크 소재의 홈웨어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바로 그 물결 모양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차세린은 나를 보자 무심한 얼굴로 손끝을 들어 목걸이를 매만졌다.

“누구세요?”

“한희서예요.”

순간 차세린의 미소가 멈췄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웃었다.

“아, 사모님이셨네요.”

‘사모님’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차세린에게서는 미안함도, 당황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차세린이 나를 집 안으로 들였다.

거실에는 뜯어 놓은 택배 상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프랑스 현지에서 포장한 듯한 수제 포장지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옆에는 귀걸이와 팔찌, 작은 카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카드에는 정우진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파도는 바다를 아는 사람에게 어울려.]

정우진과 막 결혼했을 무렵, 정우진은 내게 항해용 시계를 하나 선물한 적이 있었다. 시곗줄이 딱딱해 오래 차고 있으면 손목이 쓸렸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벗어 놓지 않았다.

그때 정우진은 웃으며 말했다.

“선장 아내라면 배랑 관련된 물건 하나쯤은 있어야지.”

나는 그렇게 그 시계를 6년 동안 차고 다녔다.

그런 정우진이 이제는 다른 여자에게 파도를 선물하며 바다를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차세린이 물 한 잔을 따라 내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사모님, 물건 가지러 오신 거예요?”

나는 컵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정우진이 산 제 물건이 여기로 잘못 온 것 같아서요.”

차세린이 웃었다.

“사모님, 그건 저한테 물으실 게 아니라 정우진한테 물어보셔야죠. 물건이 누구 건지는 배송 주소만 봐도 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봤어요.”

나는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의 카드를 사진으로 찍었고 차세린은 곧바로 손을 뻗어 카메라 앞을 가렸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 좀 보기 안 좋네요.”

나는 휴대폰을 내리고 차세린을 똑바로 바라봤다.

“유부남한테 다이아몬드 세트를 받는 건 보기 좋고요?”

그제야 차세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정우진한테 들으셨죠? 저희는 사모님보다 훨씬 전부터 알던 사이예요.”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6년이나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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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수령 주소: 해온 아파트 17동 1203호. 비고: 반드시 본인이 직접 수령할 것. 가족에게 전달 금지.]나는 마지막 한 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가족에게 전달 금지라니...’정우진과 결혼한 지 벌써 6년이었다. 정우진은 출항할 때마다 집 열쇠를 현관 두 번째 서랍에 넣어 두며 말했다.“희서야, 가족들은 너한테 부탁할게.”그 말을 믿고 나는 시부모님을 챙겼고 정우진 대신 정기 검사에 필요한 서류를 처리했으며 선원 가족 단체방에 공지를 돌리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그래서 지금껏 내가 당연히 정우진의 가족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정우진의 목록에서 ‘가족’이란, 저 다이아몬드 세트에 손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그때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정우진에게서 온 문자였다.[방금 수에즈 지나왔어. 신호가 안 좋아.]나도 짧게 답했다.[응.]평소보다 답이 짧아 이상했던 모양인지, 2분쯤 지나 다시 문자가 왔다.[오늘은 왜 밥 먹었냐고 안 물어봐?]나는 보고 있던 항차 장부를 덮고 답장을 보냈다.[밥은 먹었어?]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먹었어.]화면을 바라보던 나는 피식 웃었다. 신호가 안 좋다더니 이런 답장은 참 빨랐다.다음 날 오전, 나는 해온 아파트로 향했다.해온 아파트는 해진시에서도 손꼽히게 비싼 오션뷰 아파트 단지로, 항구까지 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경비원이 누구를 만나러 왔느냐고 묻기에 휴대폰에 저장된 탁송 목록을 보여 줬다.“17동 1203호요. 물품 확인하러 왔어요.”비고란을 확인한 경비원의 태도가 금세 공손해졌다.“잠시만요. 마침 1203호 차세린 씨가 집에 계시네요.”‘차세린...’나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정우진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다. 정우진은 세 번이나 연달아 전화를 걸더니, 네 번째에는 문자로 물었다.[어디야?]나는 짧게 답했다.[장 보러 나왔어.]곧바로 메시지가 돌아왔다.[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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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차세린은 내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잠시 굳어 있던 차세린은 천천히 목걸이를 풀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세요.”내가 손도 대지 않자 차세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이걸 가져간다고 뭐가 달라져요? 정우진이 바다에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여전히 저인데요.”차세린의 말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혼자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감상에 빠져 떠드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담담하게 말했다.“물건은 일단 여기 두세요. 잃어버리지 말고요.”차세린이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뜻이에요?”“나중에 조사할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현관까지 갔을 때 휴대폰이 다시 울렸고 화면을 보니 정우진이었다.전화를 받자마자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한희서 네가 해온 아파트에는 왜 갔어?”나는 뒤를 돌아 차세린을 바라봤다. 차세린은 고개를 숙인 채 이미 다른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어떻게 알았어?”정우진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세린이가 모르는 여자가 찾아와 시비를 건다고 하잖아. 듣자마자 너인 줄 알았지.”“모르는 사람 아니잖아. 당신이 다이아몬드 세트까지 사 주는 여자라면 나도 알아 둬야지.”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가 정우진이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거래처 선물이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거래처?”“세린이가 해성해운 항만 홍보를 도와주고 있어. 협력업체 쪽 사람이야.”나는 헛웃음을 흘렸다.“협력업체 사람이 당신이 ‘가족에게 전달 금지’라고 적어 둔 물건을 받고 그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고?”정우진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희서야, 내가 배에 있는 동안까지 네 감정 문제를 처리하게 만들지 마.”나는 더 들을 것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그날 저녁, 시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왔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현관에 들어서면서 신발조차 제대로 벗지 않았다.“네가 세린이를 찾아갔다며?”나는 주방에서 죽을 끓이다가 시어머니를 돌아봤다.“우진 씨가 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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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정우진이 입항한 건 닷새 뒤였다.나는 항구로 마중 나가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정우진이 돌아오기 사흘 전부터 분주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침대 시트를 새것으로 갈고 냉장고에는 정우진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 채워 놓고 차 안에는 숙취해소제까지 미리 챙겨 뒀겠지만 이번에 나는 집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현관문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마르세유항 기록이 적힌 페이지를 컴퓨터에 스캔하고 있었다.정우진은 아직 제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들어왔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장부를 발견하자마자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한희서, 지금 내 뒷조사를 하는 거야?”“왜? 조사받는 게 무서워?”정우진은 모자를 소파 위로 내던졌다.“나 방금 배에서 내렸어. 오자마자 나랑 싸우자는 거야?”“난 싸운 적이 없어.”정우진이 성큼 다가와 내 앞의 장부를 낚아챘다.“이거 어디서 났어?”“가족용 장부 사본이야. 원래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거야.”정우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나를 노려봤다.“앞으로 배와 관련된 서류는 건드리지 마.”나는 헛웃음을 흘렸다.“배에서 차린 돈으로 차세린한테 다이아몬드 세트 보낼 때는 배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 안 들었어?”정우진은 곧바로 말문이 막혔다. 한동안 침묵하던 정우진은 몇 분 뒤 말을 바꿨다.“그 다이아몬드 세트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그럼 어떤 건데?”“세린이가 예전에 나한테 도움을 준 적이 있어. 요즘 몇 년 동안 힘들게 지내기도 했고. 그냥 선물 하나 해 준 것뿐이야.”나는 정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차세린한테는 다이아몬드를 사 주고... 나한테는 뭘 사 왔는데?”그 순간, 정우진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꼭 세린이랑 너를 비교해야겠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우진은 여행 가방을 뒤적이더니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너 주려고 사 왔어.”봉투 안에는 냉장고 마그네틱 하나가 들어 있었다.항구 기념품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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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다음 날, 혜성 해운 그룹에서 정우진의 입항을 축하하는 작은 파티를 마련했다.그리고 아침부터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꼭 와야 해. 네가 안 오면 사람들이 우진이를 어떻게 보겠니?”그 말에 내가 되물었다.“차세린도 와요?”그러자 시어머니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세린이는 협력업체 쪽의 사람이니까 당연히 오지. 쓸데없이 속 좁게 굴지 마.”결국 나는 검은색 롱드레스를 입고 결혼반지는 뺀 채 파티가 열리는 진항 호텔로 향했다.룸에 들어서자 정우진의 왼쪽 자리에 앉아 있는 차세린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차세린은 목걸이부터 귀걸이까지 그 물결 모양 다이아몬드 세트를 전부 갖춰 착용하고 있었다.나를 발견한 시어머니가 곧바로 손짓했다.“희서야, 빨리 와서 저기 앉아. 문 옆이면 음식 나르기도 편하잖니.”정우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차세린이 고개를 들며 옅게 웃었다.“사모님, 오해하지 마세요. 오늘 촬영할 때 필요해서 착용한 것뿐이에요. 우진이가 당분간 저한테 맡겨 두라고 했거든요.”그러자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장난스럽게 말을 보탰다.“정 선장님은 안목이 좋으시네요. 이 물결 디자인이 차세린 씨한테 정말 잘 어울려요.”“역시 선장은 바다를 아는 사람이 알아주는 법이지.”“사모님도 질투하지 마세요. 차세린 씨야 우리 식구나 다름없잖아요.”정우진이 술잔을 들었다.“그만들 해요. 괜한 소리 하지 마세요.”말로는 말리면서도 정우진은 입가에 번진 웃음을 감추지 못했고 나는 그대로 문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잠시 뒤 직원이 내 앞에 차가운 해산물 요리를 내려놓았다. 나는 위가 좋지 않아 찬 해산물을 먹지 못했고 예전의 정우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런데 정우진은 지금 차세린의 접시에 따뜻한 음식을 직접 덜어 주고 있었다.잠시 뒤 차세린이 술잔을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사모님, 한잔 받으세요. 우진이가 늘 그러더라고요. 집에서 부모님 모시느라 사모님이 고생이 많다고요. 저도 정말 대단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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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정우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더니 곧장 손을 뻗어 종이를 빼앗으려 했다.나는 몸을 틀어 정우진의 손을 피한 뒤 천천히 서류를 펼쳤다.내 서명을 흉내 낸 글씨는 삐뚤빼뚤 어설펐고 그 옆에는 가족 확인 도장까지 찍혀 있었다. 그 도장은 내 서재 서랍에만 보관해 두던 것이었기에 정우진이 몰래 꺼내 사용한 게 분명했다.그때 시어머니가 다급히 다가와 내 팔을 붙잡았다.“빨리 우진이한테 돌려줘. 넌 배에서 돌아가는 절차도 모르잖아. 사람들 앞에서 괜히 망신당하지 마!”차세린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들었다.“사모님, 우진이도 이제 곧 수석 선장으로 승진하잖아요. 서로 한발씩 양보하세요. 괜히 앞길 막지 마시고요.”그러자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렸다. 구경하듯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적당히 넘어가라며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 편에 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정우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압박하듯 말했다.“희서야, 이런 사소한 일 하나 붙잡고 늘어지지 마. 나랑 이혼하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나는 서류를 반듯하게 접어 가방에 넣고 정우진을 바라봤다.“당신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차분히 이어 갔다.“정우진 씨, 당신은 나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어.”나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또렷하게 말했다.“우리 아버지는 해원호의 초기 투자자였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해원호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익권과 선원 가족 관련 특별 감독과 감사 권한은 전부 내 앞으로 넘어왔어.”정우진의 표정이 굳어 갔다.“나는 해원호의 모든 보급 내역과 가족 지원금 사용 내역을 확인할 권한이 있어. 누군가 내 이름을 도용해 고가의 물품을 받아 가거나 주거 지원금을 부당하게 사용했다면 내가 직접 혜성 해운에 책임 조사를 요청할 수 있어. 선장 승진 심사를 중단시키고 운항을 멈춘 채 조사에 들어가게 할 수도 있지.”내 말이 끝나자 룸 안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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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날 밤, 나는 짐을 챙겨 손님방으로 옮겼다.정우진이 문 앞에 서서 말했다.“희서야, 방까지 따로 쓰지 마.”하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고 짐을 정리했다.“당신은 1년 중 10개월 동안 바다에 있잖아. 원래도 거의 혼자 잤어.”정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다이아몬드 세트는 세린이한테 돌려받을게.”“이미 더러워졌어.”“그러면 새로 사 줄게.”“필요 없어.”정우진이 방 안으로 들어와 내 손에 들린 이불 커버를 가져가려 했지만 나는 몸을 피했다.그러자 정우진의 얼굴에 짜증이 번졌다.“대체 나한테 뭘 어쩌라는 거야? 나도 많이 양보했잖아.”나는 담담하게 말했다.“이혼해 줘.”정우진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네가 감사 권한을 갖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6년을 같이 산 부부야. 꼭 서로 이렇게까지 해야겠어?”나는 베개를 제자리에 놓았다.“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하지 마.”정우진은 내가 여전히 홧김에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코웃음을 쳤다.“현실이 이런데 네가 잠깐 화났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내 의지가 확고하다는 걸 깨달은 정우진도 더는 설득하지 않고 혼자 배로 돌아갔다.그날 연회 이후로 계속 마음에 걸렸던 모양인지 이틀 뒤 서지은이 나를 따로 만나자고 했다.술 한잔하자며 불러냈지만 이번에는 서지은은 정작 술을 마시지 않았고 대신 USB 하나를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언니, 계속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드리는 게 맞을 것 같아요.”“뭔데?”“마르세유항 보급품 인수인계 기록이에요. 그 수령 승인서가 제 남편의 손을 거쳤거든요. 그때 뭔가 이상해서 스캔본을 따로 남겨 뒀대요.”서지은은 컵을 꼭 쥐며 말을 이었다.“오늘 정 선장님이 제 남편을 따로 불렀대요. 배에는 쓸데없이 입이 가벼운 사람이 필요 없다고 했대요.”나는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괜히 너희까지 피해 보게 했네.”서지은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언니 때문이 아니에요. 정 선장님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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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이제 네가 해원호 전체 감사 권한을 갖고 있다는 건 알아. 이번 조사 요청은 취소하면 안 될까?”나는 정우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6년 동안 아버지가 남긴 재산에는 관심도 없더니 이제 일이 터지니까 내 권한이 무서워졌어? 너무 늦었어.”정우진이 통지서를 내려놓는 순간, 처음으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희서야, 이 조사는 계속 진행하면 안 돼.”“왜? 승진에 영향 갈까 봐?”“아니.”정우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말했다.“이러면 배 전체 직원이 모두 영향을 받아.”나는 정우진을 똑바로 바라봤다.“이제야 배에 당신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게 생각나?”정우진이 다가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이번 한 번만 내 말을 들어 줘. 세린이는 내가 알아서 정리할게. 가져간 물건도 전부 돌려받을 테니까 조사 요청은 취소해.”“취소하면? 그다음에는 또 내 도장을 찍으려고?”그 순간, 정우진의 얼굴이 잿빛으로 굳었다.“내가 잘못했어.”정우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를 상처 입힌 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내 손에 자신을 두렵게 만들 무언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며칠 뒤 차세린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장소는 또다시 해온 아파트 1층 카페였다.차세린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나 귀걸이는 하지 않았지만 손목에는 여전히 그 파도 물결 모양의 팔찌를 차고 있었다.“사모님, 생각보다 대단하시네요.”나는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했다.“차세린 씨도 생각보다 대담하네요.”차세린이 피식 웃었다.“우진 씨가 다 말했어요?”“뭘요?”차세린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우진이는 곧 수석 선장으로 승진해요. 사모님이 지금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면 망가지는 건 우진의 앞날만이 아니에요. 사모님의 인생도 같이 망가져요.”“제 인생은 이미 정우진 때문에 충분히 망가졌어요.”차세린의 표정이 굳었다.“정말 이혼할 생각이에요?”“네.”차세린은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봤다.“그러면 뭘 원하는데요? 돈? 집? 아니면 우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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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차세린이 먼저 나한테 연락한 거야.”그러자 정우진이 곧바로 받아쳤다.“세린이가 울다가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그러더라. 네가 녹음으로 협박했다고 말이야.”나는 휴대폰을 꺼내 카페에서 녹음한 내용을 틀었다.차세린의 목소리로 정우진이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정우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이어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해도 정우진의 마음을 얻었다는 대목이 나오자 정우진이 낮게 말했다.“꺼.”나는 그대로 녹음을 껐고 정우진은 소파에 앉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다시 짐을 챙겼다. 그러다가 정우진이 갑자기 물었다.“어디 가려고?”“나가려고.”“여기는 우리 집이잖아.”“곧 아니게 될 거야.”정우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한희서, 차세린은 내가 정리한다고 했잖아. 대체 뭘 더 원하는 거야?”나는 여행 가방 지퍼를 끝까지 잠갔다.“우진 씨는 차세린을 못 정리해.”“할 수 있어.”“못 해. 못 놓잖아.”그 순간 정우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마침 휴대폰까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차세린이었다.정우진은 전화를 받지 않은 채 화면만 바라봤다. 전화가 끊겼다가 다시 울렸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나는 여행 가방을 끌고 현관으로 향했고 그제야 정우진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봐. 나 전화도 안 받았잖아.”나는 현관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이미 늦었어.”그날 나는 항구 근처의 호텔로 몸을 옮겼다.혜성 해운의 조사가 시작된 지 사흘째 되는 날, 담당자가 나보고 회사로 와 달라고 연락했다.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마르세유항 현지 대리점의 회신과 보급 내역서, 물품 수령 영상까지 모두 놓여 있었다.영상 속의 차세린은 마스크를 쓴 채 물건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서명란에 적은 이름은 차세린이 아니었다.[한희서.]옆에 있던 직원이 가족 확인 도장을 건네주자 차세린은 웃으며 말했다.“정 선장님이 다 말씀해 두셨어요. 사모님도 괜찮다고 하셨대요.”담당자가 다른 서류 한 장을 넘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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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정우진은 입술만 몇 번 달싹였다.“저는 이걸 신청하라고 한 적이 없어요.”그러자 담당자가 곧바로 대답했다.“신청 계정은 정우진 선장님의 명의고 인증 번호도 선장님의 개인 휴대폰으로 전송됐습니다.”정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정우진을 바라봤다.“그럼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해온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셈이네?”그러자 정우진이 낮게 말했다.“세린이가 그때 지낼 곳이 없다고 해서 잠깐만 도와주려고 했어.”그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내 이름으로?”정우진이 고개를 숙였다.“그냥 지원금 몇 번 받는 정도라서 아무도 확인 안 할 줄 알았어.”담당자의 표정이 굳었다.“정우진 선장님, 말씀 조심하셔야 합니다. 가족 지원금은 별도 예산에서 지급되는 돈입니다. 선장님의 개인 돈이 아닙니다.”그제야 정우진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했다.정우진은 나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희서야, 정말 너한테 피해 주려던 건 아니야.”그러자 내가 물었다.“그럼 내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은 있어?”정우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대로 대답하기에는 진실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었다.그때 회의실 문이 다시 열리고 직원과 함께 차세린이 들어왔다.차세린은 정우진을 보자마자 눈시울부터 붉혔다.“우진아, 지원금을 쓰면 안 되는 줄 몰랐어. 네가 신청해도 된다고 해서 한 거잖아.”정우진의 얼굴이 굳었다.“내가 언제 신청해도 된다고 했어?”그러자 차세린이 다급하게 받아쳤다.“한희서 씨는 이런 건 신경도 안 쓴다고 했잖아. 집에서는 네 말이면 다 듣는다고도 했잖아.”그러더니 차세린은 고개를 돌려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이제 만족해요? 결국 우진의 앞길 막고 저한테 받은 거 전부 돌려놓으라고 하려는 거잖아요.”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물건은 돌려줘야 하고 돈도 다 갚아야죠.”차세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담당자가 그 자리에서 통보했다.“차세린 씨, 부당하게 수령한 물품과 지원금은 전액 환수가 될 예정입니다. 혜성 해운과의 협력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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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나는 일단 그러겠다고 했다.고작 30일이었다.그동안 정우진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한테 무언가를 보냈다. 따뜻한 죽과 꽃, 구급상자, 항구에서 산 기념품까지 가득했다. 나는 받은 그대로 전부 돌려보냈다.숙려 기간이 시작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정우진은 호텔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희서야, 그동안 내가 정말 못 할 짓을 했어.”나는 대꾸하지 않고 정우진을 지나쳤다. 그러자 정우진이 곧바로 뒤따라오며 말했다.“예전에는 내가 무사히 돌아오기만 바랐잖아. 지금 이렇게 육지에 돌아와 있는데 나 한 번만 봐 주면 안 돼?”나는 걸음을 멈췄다.“당신이 무사하길 바랐다고 해서 다시 받아 줘야 하는 건 아니야.”그 순간, 정우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정말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랑도 조금씩 닳아 없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얼마나 남았는지조차 헤아릴 수 없게 된다.차세린도 가만히 있지는 않고 자신의 SNS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차세린은 자신이 항만 홍보 협력업체 관계자일 뿐인데 선장 가족에게 악의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함께 올린 사진에는 보석이 보이지 않도록 잘라 내고 퉁퉁 부은 눈만 드러나 있었다.댓글에는 나를 비난하는 글이 이어졌다.[아내라고 마음대로 난리 쳐도 되는 건 아니죠.][협력업체 사람을 저렇게 몰아가는 건 너무하네요.][원양선 선장은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심한데 가족이 발목까지 잡으면 어떡해요.]나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대신 차세린이 내 이름으로 물건을 수령하는 영상 일부를 캡처해 혜성 해운에 보냈다.그날 바로 회사에서 공식 입장문이 올라왔다. 누구의 이름도 직접 밝히지 않았지만 내용은 명확했다.비가족 관계자가 선장 배우자의 명의를 도용해 지원금과 물품을 수령했으며 해당 협력은 중단하고 부당하게 지급된 비용을 전액 환수한다는 내용이었다.차세린이 올린 장문의 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고 곧 나한테 개인 메시지가 왔다.[한희서 씨, 꼭 저를 죽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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