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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사랑해서 하는 결혼. 가문을 위해 하는 결혼. 정략을 위한 결혼. 그리고. “계약 기간은 1년.” 나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황금빛 머리카락. 햇빛을 그대로 녹여 만든 듯한 눈동자. 단단한 턱선과 넓은 어깨. 검은 제복 위로도 숨길 수 없는 압도적인 체격. 제국에서 가장 강한 육식계 수인. 황금사자 일족의 수장. 레오나르드 발테리온. 그리고 오늘부터. 내 남편. ……서류상으로만. “1년 후에는 합의 이혼.” 나는 계약서의 마지막 조항을 확인하며 말했다. 레오나르드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혼 기간 동안 서로의 사생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래.” “각자의 침실을 사용하고.” “그래.”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부부 행세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말 듣고 계세요?” “듣고 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그래만 하세요?” 그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순간. 내 머리 위에 솟아 있던 붉은 귀가 움찔했다. ……젠장.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귀를 눕혔다. 여우의 귀는 쓸데없이 솔직하다. 놀라면 움직이고. 당황해도 움직이고. 기분이 좋아도 움직인다. 그렇다고 잘라버릴 수도 없고. “문제가 없으니까.” “…….” “네가 원하는 조건이 내가 원하는 조건과 같아.” “그건 다행이네요.” 나는 다시 계약서로 시선을 내렸다. 이 결혼은 철저한 거래였다. 발테리온 공작가는 후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정확히는. 후계자를 만들라는 황실과 원로원의 압박 때문에. 하지만 레오나르드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반대였다. 결혼을 해야 했다. 붉은여우 일족인 로제니아 가문은 오래전부터 상업으로 부를 쌓았다. 돈은 많았다. 아주 많았다. 문제는. 권력이 없었다. 그리고 최근. 아버지가 쓰러졌다. 친척이라는 작자들이 하나둘 가문을 뜯어먹기 위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막으려면.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발테리온. 황금사자의 이름. 레오나르드는 귀찮은 혼담을 막기 위해 아내가 필요했고. 나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이름이 필요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1년 후 깔끔하게 헤어진다. 완벽한 거래였다. 나는 펜을 들었다. “그럼 서명하죠.” 사각. 계약서 아래에 이름을 적었다. 세리아 로제니아. 오늘부터는. 세리아 발테리온이겠지만. 고작 1년뿐이었다. 레오나르드도 펜을 들었다. 사각. 그의 이름이 내 이름 옆에 적혔다. 레오나르드 발테리온. “됐네요.” 나는 계약서를 들어 올렸다. “그럼 1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공작님.”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공작님?” “네.” “결혼했는데?” “계약결혼이잖아요.” “…….” “설마 여보라고 부르길 원하세요?” 레오나르드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황금사자라고 해서 얼마나 무서운가 했더니. 놀리는 재미가 꽤 있었다. “걱정 마세요. 공식 석상에서는 제대로 불러드릴 테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어디 가지?” “제 방이요.” “아직 설명이 끝나지 않았다.” “무슨 설명이요?” “저택.”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처음 이곳에 들어왔다. “집사가 해주면 되잖아요.” “내가 한다.” “공작님이 직접요?” “내 아내가 살 곳이니까.” “…….” 내 아내. 별것 아닌 말인데. 귀가 또 움찔했다. 나는 재빨리 귀를 눕혔다. 레오나르드의 시선이 내 머리 위로 향했다. “……왜요?” “아무것도.” “지금 제 귀 봤죠?” “봤다.” “보지 마세요.” “내 앞에 있는데 어떻게 안 보지?” “…….” 말을 참자. 계약 첫날부터 싸울 필요는 없다. 나는 심호흡했다. “안내해 주세요.” 레오나르드가 먼저 걸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열 걸음쯤 걸었을 때. 문득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남자. 진짜 크다. 나는 수인 중에서도 작은 편이 아니었다. 붉은여우 일족은 평균적인 체격이었다. 그런데 레오나르드 옆에 있으니 내가 유난히 작아 보였다. 어깨도 넓고. 등도 크고. 다리도 길고. “뭘 보지?” “헉.”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안 봤는데요?” “거짓말.” “……사자는 뒤에도 눈이 달렸어요?” “냄새가 달라졌다.” 내 걸음이 멈췄다. “뭐라고요?” 레오나르드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봤다. “당황하면 냄새가 달라지는군.” “…….” “재미있네.” “……공작님.” “왜.” “계약서에 조항 하나 추가할게요.” “뭔데?” “냄새 맡지 않기.” 처음으로. 레오나르드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건 불가능해.” “왜요?” “숨을 쉬지 말라는 건가?” “제 냄새에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잖아요!” 내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멀리 서 있던 하인들이 흠칫했다. 레오나르드는 태연했다. 오히려 내 머리 위를 보며 말했다. “귀.” “…….” “서 있다.” 나는 황급히 양손으로 귀를 눌렀다. “보지 마세요!” 이번에는. 확실히 봤다. 레오나르드가 웃었다. 아주 짧게. 하지만 분명히.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 결혼. 생각보다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 결혼식은 일주일 뒤 열렸다. 제국 전체가 떠들썩했다. 황금사자와 붉은여우의 결혼. 사교계에서는 세기의 결혼이라고 했다. 누구도 몰랐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 일주일 전에 계약서부터 작성했다는 사실을. “신부 입장!” 문이 열렸다. 수백 명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새하얀 드레스. 붉은 머리카락. 그 사이로 드러난 붉은 귀. 평소라면 숨겼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수인의 결혼식에서 귀와 꼬리를 숨기는 것은 상대를 배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서. 내 뒤로 풍성한 붉은 꼬리가 드레스 자락 위로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제단 앞. 레오나르드가 서 있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금빛 사자 귀. 그리고 뒤로 늘어진 굵은 황금빛 꼬리. ……처음 봤다. 나는 잠시 걸음을 늦췄다. 레오나르드가 사람들 앞에서 수인화를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계약결혼이라도 형식은 제대로 갖추겠다는 의미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나는 그의 앞에 섰다. “세리아 로제니아.” 사제가 물었다. “레오나르드 발테리온을 배우자로 받아들이겠습니까?” “네.” 레오나르드에게도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받아들인다.” 반지가 교환됐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제 부부가 되었습니다.” 박수가 터졌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끝났다. 이제 형식적인 입맞춤만 하면. “…….” 잠깐. 입맞춤? 계약서에. 이거에 대한 내용이 있었나? 나는 황급히 레오나르드를 올려다봤다. 그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적당히 해요.” “뭘.” “입맞춤이요.” “어떻게?” “그냥 닿는 척만.” “알았다.” 다행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따뜻한 손이 허리를 감쌌다. “……!” 몸이 그대로 레오나르드 쪽으로 당겨졌다. 순식간에 가슴이 그의 몸에 닿았다. 놀라 눈을 뜨려는 순간. 입술이 닿았다. 짧게. 정말 짧게.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레오나르드가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이 그대로 맞닿아 있었다. 하나. 둘. 셋. 이 인간이? 나는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그제야 레오나르드가 떨어졌다.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내 얼굴은 이미 뜨거워져 있었다. “적당히 하랬잖아요.”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적당히 했다.” “어디가요?” “혀는 안 썼는데.” “……!” 귀가. 확 솟았다. 레오나르드의 황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이 남자. 일부러 이러는 거다. ⸻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갔다. “미친 사자.” 귀가 아직도 뜨거웠다. 나는 침대에 엎어졌다. “계약결혼이라며.” 결혼식에서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나? 아무리 남들 앞이라고 해도. “……혀는 안 썼는데?”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으아아악!” 꼬리가 침대를 마구 두드렸다. 한참 후에야 겨우 진정했다. 그래. 오늘만 지나면 된다. 이제 각자의 생활을 하면 된다. 나는 이곳에서 로제니아 가문을 정리할 시간을 벌고. 레오나르드는 귀찮은 혼담에서 벗어나고. 1년 후. 깔끔하게 이혼. 완벽하다. 똑똑. “부인.” 문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왜?” “공작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뭘?” “……담요를.” “담요?” 문을 열었다. 시녀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황금빛 털로 만들어진 담요가 있었다. 아니. 잠깐. 이 냄새. 나는 담요에 코를 가까이 댔다. 익숙했다. 오늘 하루 종일 맡았던. 짙고 묵직한 향. “……이거.” 시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공작님의 털로 만든 담요라고 합니다.” “…….” “황금사자 일족에서는 배우자에게 자신의 털로 만든 물건을 선물하는 전통이 있다고…….” “돌려보내.” “하지만.” “당장.” 그때였다. “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복도 끝. 레오나르드가 서 있었다. 편한 검은 셔츠 차림. 목 단추가 몇 개 풀려 있었다. 결혼식 때와 달리 흐트러진 금발. 그리고. 황금빛 귀와 꼬리. 나는 담요를 가리켰다. “이거 뭐예요?” “선물.” “왜요?” “결혼했으니까.” “계약결혼이잖아요.” “그래도 결혼은 결혼이지.” “필요 없어요.” 레오나르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공작님 냄새가 너무 많이 나요.” 순간. 복도가 조용해졌다. 시녀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레오나르드의 눈빛이 변했다. “내 냄새가 싫어?” “싫다기보다…….” 나는 담요를 들어 보였다. “이 정도면 제가 공작님 몸에 파묻혀 자는 거랑 뭐가 달라요?” 정적. 시녀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떨리는 걸 보니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레오나르드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왜, 왜 와요?” “확인하려고.” “뭘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허리를 숙였다. 코끝이 내 머리카락 가까이 닿았다.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 내 귀가 바짝 섰다. 레오나르드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공작님!” 나는 그를 밀어냈다. “냄새 맡지 말라고 했죠!” “확인했다.” “뭘요!”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 냄새가 거의 안 나.” “어디서요?” “너한테.” “당연하죠!” “당연하지 않아.” 그의 황금빛 눈이 내 목덜미를 향했다. 순간. 이상하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배우자인데.” “……계약 배우자.” “다른 놈들은 모른다.” “네?” “네가 내 아내라는 걸 냄새로 알아야 하니까.” “…….”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리고 겨우 입을 열었다. “계약서.” “뭐?” “계약서 가져오세요.” “왜.” “조항 추가할 거예요.” “또?” 나는 손가락을 하나 펼쳤다. “첫째. 냄새 맡지 않기.” 두 번째. “둘째. 자기 냄새 묻히지 않기.” 세 번째. “셋째.” 나는 레오나르드를 노려봤다. “영역 표시 금지.” 레오나르드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싫은데.” “……뭐라고요?” “앞의 두 개는 노력해 보지.” 그가 말했다. “세 번째는 안 돼.” “왜요?” 황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 순간. 사람의 모습인데도. 거대한 사자가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본능이라.” “…….” “고칠 수가 없어서.” 나는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그리고 앞으로 1년 동안. 이 황금사자가 얼마나 뻔뻔하게 계약을 어길 것인지도. 더더욱. 몰랐다. :::“같이 다녀요.”내가 먼저.레오나르드의 손을 잡았다.그리고.황금빛 귀가.툭.나왔다.나는 웃었다.“또 나왔다.”“신경 쓰지 마.”“좋아하면서.”“그래.”이번에는.그가 부정하지 않았다.손가락이.내 손 사이로 들어왔다.천천히.깍지를 꼈다.“좋아.”심장이.따뜻해졌다.나는.잡힌 손을 바라봤다.처음에는.1년만 버티려고 했다.그런데.이제는.하루가 지날수록.다른 생각이 들었다.1년 뒤.헤어지지 않는 방법을.먼저.내가 찾게 되는 건 아닐까.그리고.그 사실이.이전만큼 무섭지는 않았다.⸻문제는.그날 밤부터였다.“……왜 따라와요?”나는 침실 문 앞에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레오나르드가 너무도 태연하게 서 있었다.“어디를.”“제 뒤요.”“같은 방 쓰잖아.”“아.”맞다.별궁에서는.같은 방.같은 침대.그리고.어젯밤.계약서는 생각하지 말자고 했고.체향 의식까지 했다.나는 괜히 헛기침했다.“그렇죠.”문을 열었다.그런데.들어가자마자.또 문제가 생겼다.침대.정확히는.침대 위에 놓인 것.“…….”나는 천천히 다가갔다.붉은 꽃잎.황금빛 리본.그리고.침대 한가운데 놓인 작은 카드.“이건 또 뭐예요?”레오나르드가 카드를 집었다.읽었다.그리고.표정이 묘해졌다.“뭔데요?”“…….”“줘봐요.”나는 카드를 빼앗았다.그리고.읽었다.신혼 의식 둘째 날.불길하다.아래.작은 글씨.부부는 서로의 체향을 온전히 받아들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밤새 같은 이불을 사용합니다.“…….”나는 카드를 뒤집었다.뒷면에도 글이 있었다.가능하다면 서로의 품 안에서 잠드십시오.“…….”나는 그대로 굳었다.레오나르드가 낮게 웃었다.“웃지 마요.”“안 웃었다.”“웃고 있잖아요.”“조금.”“이 가문은 대체 신혼부부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요?”“나도 처음 알았다.”“진짜요?”“그래.”“거짓말 아니죠?”“귀 보여줄까.”나는 그를 바라봤다.“……요즘 그거 이용
“두 분이.”엘로디아가 웃으며 말했다.“1년 뒤 헤어지기로 했다는.”정적.방 안의 공기가.완전히 식었다.나는 레오나르드를 바라봤다.그도.나를 보고 있었다.1년.그건.우리 둘만의 계약이었다.정확히는 계약서를 작성한 변호사와 극소수의 측근들만 알고 있는 내용.외부에 알려질 이유가 없었다.특히.과거 레오나르드와 혼담이 오갔던 여자가 알 이유는.더더욱.없었다.내 꼬리가.그의 다리를 더 세게 감았다.이번에는.나도 일부러 풀지 않았다.레오나르드가 아주 천천히 시선을 엘로디아에게 돌렸다.“누구에게 들었지.”목소리가 차가웠다.엘로디아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그게 중요한가요?”“중요하다.”“그냥 소문이에요.”“소문에는 시작점이 있어.”레오나르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잠깐.”그가 나를 봤다.“제가 물을게요.”“세리아.”“괜찮아요.”나는 엘로디아를 바라봤다.그리고.웃었다.“영애.”“네.”“그 소문.”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어디서 들으셨어요?”엘로디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사교계에서요.”“어느 사교계요?”“…….”“수도에 있는 귀족들이 그렇게 한가한가 봐요.”나는 부드럽게 말했다.“남의 결혼 계약 기간까지 알아낼 정도로.”엘로디아의 미소가 희미해졌다.“굳이 따지실 필요가 있을까요?”“있죠.”“왜요?”“사실이 아니니까.”말해놓고.심장이 순간 움찔했다.사실이다.정확히.1년 뒤 합의 이혼.계약서에 쓰여 있다.그런데.나는.거짓말을 했다.엘로디아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사실이 아니라고요?”“네.”나는 웃었다.“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그리고.일부러 레오나르드의 팔을 조금 더 끌어안았다.“저희 사이가 그렇게 보였나 봐요?”“…….”엘로디아의 시선이.내 손으로 향했다.그리고.내 꼬리.아직도 레오나르드의 다리에 감겨 있는 붉은 꼬리.“공작부인.”그녀가 천천히 말했다.“그럼.”웃었다.“1년
아침에 눈을 떴을 때.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그게.가장 큰 문제였다.“…….”바로 앞.레오나르드의 얼굴.느린 숨.흐트러진 금발.그리고.내 허리를 감싼 팔.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이제.놀랍지도 않았다.오히려.익숙했다.“……큰일 났네.”아주 작게 중얼거렸다.이 상황이.익숙해졌다는 사실이.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그런데.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자는 줄 알았는데.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레오나르드.”대답이 없다.“일어났죠?”침묵.“다 알아요.”그 순간.입꼬리가.아주 조금.올라갔다.“…….”나는 바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일어났잖아요!”황금빛 눈이 천천히 열렸다.“좋은 아침.”“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조금 전.”“거짓말.”“왜.”“웃었잖아요.”“네가 귀여워서.”“또 그 말.”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런데.팔이 아직 허리에 있었다.“손.”“싫어?”“…….”이전 같았으면.바로 놓으라고 했을 텐데.이번에는.대답이 늦었다.그것을.레오나르드도 알아챘다.“세리아.”“네.”“싫으면 놓을게.”나는 잠시 그의 팔을 바라봤다.그리고.아주 작게 말했다.“……조금만 더.”말해놓고.얼굴이 뜨거워졌다.레오나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팔에 조금 힘을 주었다.몸이.다시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나도.밀어내지 않았다.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짙은 체향.따뜻한 체온.평온했다.이상할 정도로.“레오나르드.”“응.”“우리.”“그래.”“계약결혼 맞죠?”그의 몸이.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왜 갑자기.”“그냥.”나는 그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렸다.“자꾸 잊을 것 같아서.”“…….”“이러다.”웃으려고 했는데.잘 안 됐다.“진짜 부부 같잖아요.”침묵.레오나르드가 말했다.“싫어?”“…….”또.그 질문.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의 눈을 바라봤다.“아니요.”솔직하게.
“오늘 밤.”나는 닫힌 상자를 바라봤다.“아무 일도 없기는.”시선이 옆으로 향했다.레오나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나를 바라봤다.황금빛 눈동자.조금 전까지 나와 있던 귀는 이미 감췄지만.그것만으로는 소용없었다.나는 봤다.아까.저 귀가 얼마나 바짝 서 있었는지.“…….”분명 나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상하게 심장이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나는 괜히 상자를 밀었다.“저녁부터 먹어요.”“그래.”“그리고.”“응.”“아까 그건 잊어요.”“뭘.”“귀 나온 거.”“네 귀?”“공작님 귀요!”레오나르드가 피식 웃었다.“왜.”“왜긴요.”“네 것도 나왔는데.”“저는 놀라서 그런 거고.”“나는?”“…….”말이 막혔다.그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나는 왜 나왔을까.”“모르죠.”“정말?”“네.”“냄새가 다른데.”나는 바로 코를 막았다.“그 말 금지.”“이미 나는데.”“맡지 마요.”“숨 쉬지 말라고?”“적어도 분석하지는 마요!”레오나르드가 웃었다.나는 그를 노려봤다.그러다가.결국.나도 웃고 말았다.정말.이 남자랑 있으면 자꾸 흐름이 이상해진다.⸻저녁 식사는 평소보다 조용했다.정확히는.나는 계속 음식만 봤다.레오나르드는 그런 나를 보고 있었고.“…….”또.시선이 느껴진다.나는 수프를 한 숟갈 떠먹었다.“왜 봐요?”“그냥.”“그냥 왜요.”“귀여워서.”숟가락이 멈췄다.“…….”“왜.”“그 말.”나는 그를 봤다.“자꾸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마요.”“왜.”“제가 신경 쓰이잖아요.”말해놓고.멈췄다.아.내가 지금 뭘—레오나르드도 멈췄다.“신경 쓰여?”“…….”“내가?”“그런 뜻이 아니라.”“세리아.”“밥 먹어요.”“대답.”“싫어요.”“왜.”“민망하니까.”솔직하게 말해버렸다.잠시.정적.레오나르드가 아주 조금 웃었다.“알았다.”이번에는 정말 더 묻지 않았다.……저렇게 쉽게 넘어가니까 더 신경 쓰이잖
“한 번 더 하면.”나는 그의 옷자락을 잡은 채 물었다.“계약 위반이에요?”정적.레오나르드의 황금빛 귀가 바짝 서 있었다.꼬리까지.탁.바닥을 한 번 쳤다.나는 그걸 보고 웃었다.“……기분 좋구나.”“세리아.”“귀가 다 말하는데요?”“지금 그게 중요해?”“조금?”그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웃고 있었다.그리고.나도 웃고 있었다.묘한 기분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쏜 화살 때문에 온몸이 떨렸는데.지금은.전혀 다른 이유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내 손은 여전히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놓아야 하는데.왠지.놓고 싶지 않았다.레오나르드가 그 손을 내려다봤다.그리고 다시 나를 봤다.“세리아.”“네.”“한 번 더.”낮은 목소리.“정말 하고 싶어?”“…….”이번에는.내가 선택해야 했다.그가 원하는지 아닌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저 귀만 봐도 충분했다.중요한 건.내가 원하는지.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조금 전의 입맞춤이 떠올랐다.짧고.조심스러웠다.오히려 너무 빨리 끝나서.아쉬웠다.그럼.답은 이미 정해진 것 아닐까.“……네.”아주 작게 대답했다.레오나르드의 눈빛이 짙어졌다.“확실해?”“자꾸 물어보면.”괜히 민망해져서.나는 입술을 삐죽였다.“마음 바뀔 수도 있어요.”“그건 곤란한데.”이번에는.그가 바로 다가왔다.하지만.여전히 서두르지는 않았다.한 손이 내 뺨을 감쌌다.손끝이 귀 아래를 천천히 스쳤다.그 작은 접촉만으로도.어깨가 움찔했다.“…….”레오나르드가 멈췄다.“싫어?”“아니요.”“그럼.”“그냥.”나는 시선을 피했다.“간지러워서.”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웃지 마요.”“안 웃었는데.”“웃고 있잖아요.”“조금.”“정말.”말이 끝나기도 전에.그가 몸을 숙였다.입술이 닿았다.이번에는.아까보다 조금 길었다.나는 눈을 감았다.첫 번째 입맞춤은 확인에 가까웠다면.이번에는.서로가 정말 원한다는 걸 확인하는 것 같았다.레오
“다음에는.” 낮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듣고 싶어지면 물어.” 나는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 “그때는 대답할 테니까.”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혹시 레오나르드에게 들릴까 봐. 나는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등을 돌린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검은 셔츠. 넓은 어깨. 조금 흐트러진 금발. 조금 전까지 내 손끝에 닿아 있던 황금빛 귀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 대체. 뭘 참는다는 걸까. 아니. 사실.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묻지 못했다. 나는 성인이다. 결혼까지 했다. 아무리 계약결혼이라 해도. 남녀 사이에서. 한 침대 위에서. 그런 눈으로 바라보며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레오나르드라서. 문제였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는 내게 그저 황금사자였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수인. 무뚝뚝하고. 냉정하고. 결혼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남자. 나 역시 그를 남자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계약 상대. 그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결혼한 지 며칠 만에. 이 남자의 냄새가 익숙해졌다. 품에 안기면 편했고. 귀를 만지는 것도 좋았다. 그가 다른 남자를 보고 질투하는 모습은. ……조금 귀여웠다. 그리고 오늘. “…….” 나는 내 손을 바라봤다. 아직도 손끝에. 그의 귀를 만졌던 감촉이 남은 것 같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던. “미쳤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세리아.” “……!”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 “왜요.” “안 자?” “자고 있었어요.” “말했는데.” “잠꼬대.” “대답도 했는데.” “저 원래 잠꼬대 잘해요.” “처음 듣는데.” “오늘부터 아시면 돼요.” 잠시 침묵. 그리고. 레오나르드가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왜 웃어요.” “안 웃었다.” “또 거짓말.”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