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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밤부터 계약 위반입니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1 08:57:18

“싫은데.”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라고요?”

“영역 표시 금지.”

레오나르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건 싫다고.”

나는 입을 벌렸다.

결혼식이 끝난 지 고작 세 시간.

우리는 분명 일주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다.

서로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다.

각자의 침실을 사용한다.

필요 이상의 부부 행세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방금.

내가 새롭게 추가하려던 조항.

영역 표시 금지.

그걸 이 남자가 거절했다.

“공작님.”

“왜.”

“계약결혼의 뜻을 모르세요?”

“안다.”

“그런데 왜 영역 표시를 해요?”

“필요하니까.”

“어디에요?”

레오나르드가 나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내 목덜미를.

나는 반사적으로 손으로 목을 가렸다.

“……왜 거길 봐요?”

“아무것도.”

“방금 봤잖아요.”

“봤지.”

“그게 아무것도예요?”

“보기만 했으니까.”

정말.

말이 안 통한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저한테 공작님 냄새 묻히지 마세요.”

“이미 묻었다.”

“뭐가요?”

“내 냄새.”

“어디에!”

레오나르드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내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거기.”

“…….”

“결혼식 때 안았으니까.”

나는 황급히 붉은 머리카락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킁킁.

……젠장.

정말이다.

희미하지만 느껴졌다.

짙은 나무 향.

비가 내린 뒤의 숲처럼 묵직한 향에 아주 희미하게 섞인 따뜻한 체향.

오늘 하루 종일 가까이에 있었던 레오나르드의 냄새였다.

“씻을 거예요.”

그의 눈썹이 움직였다.

“지금?”

“네.”

“왜.”

“냄새 지우려고요.”

“…….”

왜 저런 얼굴을 하지?

나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태연하던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다.”

“또 아무것도.”

“씻어.”

“당연히 씻을 거예요.”

나는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런데.

탁.

레오나르드의 손이 문을 막았다.

“잠깐.”

“이번에는 또 뭐예요?”

“오늘 밤.”

“네.”

“문 잠그지 마.”

나는 눈을 깜빡였다.

“……왜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경비가 있잖아요.”

“그래도.”

“싫어요.”

“세리아.”

“싫다고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첫날밤부터 제 방 문을 열어두라고 하는 계약 남편이 어디 있어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럼 무슨 뜻인데요?”

레오나르드가 입을 다물었다.

말하기 곤란한 것처럼.

……수상하다.

“됐어요.”

나는 문을 잡았다.

“잘 자요, 공작님.”

“세리아.”

쾅.

문을 닫았다.

찰칵.

그리고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문까지 잠갔다.

문밖이 조용했다.

잠시 후.

“……고집은.”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누가 할 소리를.”

⸻

목욕을 마치자 살 것 같았다.

“후우.”

나는 따뜻한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았다.

레오나르드의 냄새도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깨끗하게 씻었는데.

어딘가 허전했다.

“……뭐야.”

나는 코끝을 찡그렸다.

설마.

그 냄새에 벌써 익숙해진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된다.

오늘 처음 제대로 붙어 있었는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피곤해서 그래.”

결혼식 때문에 하루 종일 긴장했다.

아침부터 드레스를 입고.

인사를 하고.

수백 명 앞에서 웃고.

그리고.

……입맞춤까지.

순간 입술에 닿았던 감촉이 떠올랐다.

“…….”

나는 손끝으로 입술을 만졌다.

따뜻했다.

생각보다.

그리고 단단했다.

아니.

잠깐.

내가 지금 뭘 생각하는 거야?

“미쳤어.”

나는 손을 내렸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는 자꾸 그 장면이 반복됐다.

허리를 감싸던 커다란 손.

순식간에 좁아졌던 거리.

코끝을 스쳤던 그의 숨결.

그리고.

‘혀는 안 썼는데.’

“……!”

나는 베개를 집어 들었다.

퍽.

침대에 던졌다.

“진짜 미친 사자.”

왜 그런 말을 해!

괜히 사람 신경 쓰이게!

꼬리가 침대 위에서 탁탁 움직였다.

나는 꼬리 끝을 붙잡았다.

“너도 가만히 있어.”

꼬리는 억울하다는 듯 손안에서 꿈틀거렸다.

수인의 귀와 꼬리는 감정에 솔직하다.

특히 붉은여우는 더했다.

기쁘면 꼬리가 흔들리고.

당황하면 귀가 서고.

경계하면 꼬리털이 부풀어 오른다.

그래서 사교계에서는 감정을 숨기고 싶을 때 귀와 꼬리를 감추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결혼식이라 그럴 수 없었다.

덕분에 레오나르드에게 내 반응을 실컷 들켰다.

내일부터는 무조건 숨겨야겠다.

나는 그렇게 결심하고 침대에 누웠다.

푹신한 이불.

따뜻한 방.

낯선 천장.

오늘부터 1년 동안 살게 될 곳.

발테리온 공작저.

그리고 바로 옆방에는.

내 남편이 있다.

“…….”

나는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자자.

그런데.

이상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

한 번.

뒤척.

두 번.

세 번.

“……왜 이렇게 불편하지.”

침대가 불편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로제니아 저택보다 좋았다.

방도 따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섰다.

귀가 자꾸 주변 소리를 찾았다.

바람 소리.

커튼이 흔들리는 소리.

복도를 걷는 하인의 발소리.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익숙한.

아니.

고작 하루밖에 맡지 않은.

그 냄새를.

“……설마.”

나는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돼.

나는 붉은여우다.

여우는 환경 변화에 예민하기는 해도 배우자의 체향을 찾는 습성이 있는 종족은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사자 같은 대형 육식계 수인에게서 강하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특히 짝을 맺은 직후에는—

“짝 아니거든.”

나는 혼잣말했다.

계약 남편이다.

그것도 1년짜리.

그러니까 지금 잠이 안 오는 건 단순히 낯선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누웠다.

그런데.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귀가 쫑긋 섰다.

사각.

문밖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누구세요?”

대답이 없다.

사각.

이번에는 확실했다.

문 바로 앞.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살금살금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냐고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설마.

침입자?

발테리온 저택에?

나는 근처에 있던 촛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찰칵.

“……!”

문을 연 순간.

커다란 무언가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나는 비명을 삼켰다.

황금색.

거대한 갈기.

두꺼운 앞발.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

“…….”

“…….”

나는 한참 그것을 바라봤다.

그것도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공작님?”

거대한 황금사자가 눈을 피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지금 뭐 하세요?”

사자가 대답할 리 없었다.

“설마.”

나는 문 앞을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아까 내가 돌려보낸 황금빛 담요가 놓여 있었다.

“…….”

설마.

나는 사자를 바라봤다.

“이거 가져다 놓으려고 오셨어요?”

사자가 또 시선을 피했다.

맞구나.

“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진짜 고집 세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상했다.

“근데 왜 수인화까지 했어요?”

황금사자의 귀가 움찔했다.

“…….”

“설마 인간 모습으로 오면 제가 문 안 열어줄까 봐?”

귀가 또 움직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맞죠?”

사자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기가 막혔다.

제국 최강의 수인.

전쟁터에서는 수천의 적군이 그의 포효 한 번에 얼어붙는다는 황금사자.

그 남자가.

담요 하나를 가져다주겠다고 한밤중에 사자 모습으로 내 방문 앞에 앉아 있었다.

“……푸흡.”

결국 웃음이 터졌다.

사자의 시선이 돌아왔다.

“미안해요.”

나는 입을 가렸다.

“그런데 너무…….”

웃기다.

차마 마지막 말은 하지 못했다.

황금사자의 꼬리가 바닥을 탁 쳤다.

“알았어요. 안 웃을게요.”

나는 담요를 집어 들었다.

“이거 받으면 가실 거죠?”

사자가 나를 바라봤다.

“뭐예요.”

그가 움직였다.

한 걸음.

내 쪽으로.

“잠깐.”

또 한 걸음.

“공작님?”

거대한 몸이 가까워졌다.

인간 모습일 때도 컸지만.

완전한 사자의 모습은 차원이 달랐다.

내 어깨보다 높은 몸.

커다란 머리.

황금빛 갈기.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왜, 왜 들어와요?”

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커다란 코가 내 머리카락에 닿았다.

킁.

“……!”

킁.

“공작님!”

내 귀가 솟았다.

사자가 다시 냄새를 맡았다.

목 가까이까지.

따뜻한 숨결이 피부에 닿았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너무 가까웠다.

그의 체온이 느껴질 만큼.

“잠깐만…….”

나는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러자 황금사자가 멈췄다.

황금빛 눈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냄새 맡지 말랬잖아요.”

잠시 침묵.

그리고 사자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제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우…….”

나는 목을 만졌다.

뜨거웠다.

“인간으로 돌아와요.”

잠시 후.

황금빛이 사자의 몸을 감쌌다.

거대한 몸이 줄어들었다.

갈기가 금발이 되고.

앞발이 손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나르드가 내 앞에 서 있었다.

“…….”

문제가 하나 있었다.

“옷.”

“뭐?”

“옷부터 입고 오셨어야죠!”

나는 황급히 뒤돌았다.

완전 수인화를 했다가 돌아오면 옷이 그대로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다행히 허리 아래로는 변환 마력이 희미한 천처럼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맨몸이었다.

넓은 어깨.

단단한 가슴.

허리까지 이어지는 선.

결혼식 제복 아래 감춰져 있던 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아까 한순간 본 것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왜 돌아서지?”

“왜겠어요!”

“부부인데.”

“계약 부부!”

또 그 말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이건 계약 위반이에요.”

“뭐가.”

“제 방에 들어온 거!”

“네가 문을 열었다.”

“공작님이 앞에 있었잖아요!”

“그래서?”

“……나가요.”

“담요는?”

나는 손에 들린 황금빛 담요를 내려다봤다.

“받았잖아요.”

“덮어.”

“네?”

“그거 덮고 자.”

“왜요?”

“그래야 잠들 테니까.”

나는 멈칫했다.

“……제가 잠 못 자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레오나르드가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계속 밖에 있었어요?”

침묵.

“공작님.”

“…….”

“언제부터요?”

그가 마지못해 말했다.

“네가 세 번째로 뒤척였을 때부터.”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들리니까.”

“옆방에서?”

“사자니까.”

이게 무슨.

나는 얼굴을 감쌌다.

“미치겠네.”

“그리고.”

레오나르드가 말했다.

“나도 잠이 안 와.”

나는 손을 내렸다.

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진지했다.

“왜요?”

“네 냄새가 사라져서.”

“…….”

“씻었잖아.”

“그래서요?”

“그래서 신경 쓰여.”

내 심장이 순간 이상하게 뛰었다.

“그건…… 공작님 종족 특성 아니에요?”

“아마.”

“그러면 참으세요.”

“참고 있다.”

“이게요?”

“지금 네 목을 안 물고 있잖아.”

“……!”

나는 반사적으로 목을 감쌌다.

레오나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의미 아니다.”

“그럼 그런 말을 하지 마세요!”

“사자는 배우자의 목덜미에 체향을 남기는 습성이 있다.”

“전 배우자가 아니라 계약…….”

“알아.”

그가 말을 잘랐다.

“그러니까 참고 있다고.”

“…….”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알았다.

아까부터 레오나르드가 이상했던 이유를.

그는 장난치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본능을 참고 있었다.

“……많이 힘들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오나르드가 나를 바라봤다.

“왜.”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솔직하게?”

“네.”

“꽤.”

“…….”

“특히 지금은.”

“왜 지금인데요?”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내 젖은 머리카락.

얇은 잠옷 위로 드러난 목선.

그리고 다시 얼굴.

“씻고 나와서.”

“…….”

목소리가 낮았다.

이상하게 낮았다.

나는 괜히 잠옷의 목 부분을 끌어올렸다.

“보지 마세요.”

“안 보려고 노력 중이다.”

“눈 감으면 되잖아요.”

레오나르드가 정말 눈을 감았다.

“…….”

나는 당황했다.

“진짜 감으면 어떡해요.”

“감으라며.”

“아니, 그냥…….”

그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당했다.

“공작님.”

“왜.”

“지금 웃었죠?”

“아닌데.”

“웃었잖아요.”

“안 봤으면서 어떻게 알아.”

“…….”

얄미워.

나는 담요를 침대 위에 던졌다.

“됐어요. 이제 나가세요.”

“덮고 자.”

“알았어요.”

“정말?”

“네.”

그제야 레오나르드가 눈을 떴다.

그리고 문으로 향했다.

나는 그의 등을 바라봤다.

그런데.

문 앞에서 그가 멈췄다.

“세리아.”

“왜요?”

“내일 계약서 다시 쓰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영역 표시 금지 넣으려고요?”

“아니.”

그가 돌아봤다.

“비상시에는 서로의 방에 들어갈 수 있다는 조항.”

“오늘 같은 건 비상 상황 아니거든요?”

“내 기준에는 맞아.”

“무슨 비상인데요?”

레오나르드가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아내가 잠을 못 자는 상황.”

“…….”

문이 닫혔다.

찰칵.

나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잠시 후.

귀가.

천천히.

쫑긋 섰다.

“……뭐야.”

나는 귀를 눌렀다.

“그런 말을 왜 해.”

심장이 또 빨리 뛰었다.

나는 침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까 받은 황금빛 담요를 바라봤다.

“…….”

덮지 말까.

그냥 치워버릴까.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슬쩍 끌어당겼다.

몸 위로 덮었다.

순간.

익숙한 향이 퍼졌다.

짙은 숲.

따뜻한 햇빛.

그리고 레오나르드.

“…….”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잠이 안 왔는데.

담요를 덮자.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나는 이불 안으로 몸을 웅크렸다.

꼬리가 자연스럽게 담요 안으로 들어왔다.

“진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사자 냄새 때문에 자는 거 아니야.”

누구에게 하는 변명인지 모르겠다.

“그냥 담요가 따뜻해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잠들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주 푹 잤다.

정말.

너무 푹.

그래서 눈을 뜬 순간 기분이 좋았다.

“음…….”

따뜻했다.

포근했고.

무엇보다.

좋은 냄새가 났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담요에 얼굴을 비볐다.

부드러운 털이 볼에 닿았다.

“……따뜻해.”

그리고.

문밖에서.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떴다.

열려 있는 문.

그 앞에 선 시녀.

바닥에 떨어진 찻잔.

그리고.

시녀가 내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는 황금빛 담요를.

“…….”

“…….”

잠시 후.

시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죄, 죄송합니다, 부인!”

“잠깐.”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뭘 못 봐!”

“공작님의 체향 담요를 끌어안고 주무셨다는 사실은 절대—”

“잠깐만!”

시녀가 도망쳤다.

나는 침대 위에서 굳었다.

그리고 천천히.

품 안을 내려다봤다.

담요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꼬리까지 담요에 돌돌 말려 있었다.

“…….”

망했다.

수인 사회에서.

배우자의 체향이 밴 물건을 저렇게 끌어안고 자는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나도 알고 있었다.

상대의 체향을 받아들였다는 뜻.

나는 황급히 담요를 밀어냈다.

“아니야!”

아무도 없는데 외쳤다.

“이건 오해야!”

그 순간.

열린 문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레오나르드가 서 있었다.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그리고.

웃고 있었다.

아주 조금.

하지만 확실하게.

“잘 잤나 보네.”

“…….”

“내 냄새가 싫다더니.”

“…….”

“꽤 마음에 들었나 봐.”

내 귀가.

확 솟았다.

“나가요.”

“내가 들어온 것도 아닌데.”

“그냥 나가요!”

“복도인데?”

“복도에서도 나가요!”

레오나르드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날 아침.

나는 확신했다.

1년 뒤 이혼하기 전에.

내가 저 사자를 한 번은 반드시 물어버릴 거라고.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먼저 물게 되는 쪽이.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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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은 걷지 않았다.아침에 치료사가 오른쪽 종아리를 확인한 뒤 내린 결정이었다. 통증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발목도 안정적이었고, 발가락 감각에도 변화가 없었다. 전날의 세 걸음 뒤 특별한 이상 반응도 없었다.그런데 그래서 더 걸을 이유도 없었다.“오늘은 근력과 균형만 하겠습니다.”리시안은 예전처럼 곧바로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한 번 확인했다.“어제 상태가 나빠져서요?”“아닙니다.”“그럼 부하 조절입니까?”“맞습니다. 새 보행화로 네 걸음까지 확인했고, 다음 날 세 걸음으로 조절했습니다. 오늘은 보행 없이 발목과 무릎의 반응만 보겠습니다.”리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리아가 옆에서 팔짱을 끼고 말했다.“이제 오빠가 먼저 답을 거의 다 말하네.”“확인한 거야.”“그게 그거지.”“달라.”“어떻게?”리시안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내가 정한 게 아니잖아.”리아가 눈을 깜빡였다.치료사가 웃음을 참듯 입가를 움직였다.리시안은 조금 민망해져 시선을 돌렸다.오늘 걸을지 말지를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치료사가 무엇을 확인했고 왜 오늘 걷지 않는지 들었다.그 정도면 됐다.오전 재활은 예정대로 근력과 균형 훈련만 했다. 오른쪽 발목을 천천히 굽혔다 펴고,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에서 체중을 옮겼다. 보행은 없었다. 기립 횟수로 세는 훈련도 하지 않았다.기록은 짧았다.신규 보행화 9일 차.보행 없음.근력·균형 훈련 시행.우측 종아리 긴장 감소. 발목·감각 안정.리시안은 기록을 읽고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어제 세 걸음.오늘은 영 보.그런데도 이상하게 뒤로 돌아간 느낌은 들지 않았다.오히려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멈춘 것인지 알고 있으니 기다릴 수 있었다.문제는 재활실에서 나와 서재로 돌아왔을 때였다.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보자 리시안의 시선이 곧바로 가장 위의 종이에 꽂혔다.제3호 매각 협의 — 통행로 현장 실측 결과.어제 자신이 요청했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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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아침, 리시안은 다섯 번째 걸음을 묻지 않았다.치료사가 먼저 새 보행화를 벗겨 오른쪽 발목을 확인했다. 복사뼈 주변에 눌린 자국은 없었고, 발가락 감각도 전날과 같았다. 무릎을 굽혔다 펴는 동안 통증도 없었다. 다만 종아리 뒤쪽을 눌렀을 때 전날보다 아주 조금 단단한 부분이 있었다.“아픕니까?”“아니요.”“당기는 느낌은요?”리시안이 발목을 천천히 움직여봤다.“조금 있습니다.”치료사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세 걸음 하겠습니다.”리아가 이제는 놀라지도 않고 말했다.“어제 네 걸음 했으니까 오늘 세 걸음.”치료사가 웃었다.“꼭 그것만으로 정하는 건 아닙니다.”“그래도 맞았잖아요.”“오늘은 맞았습니다.”리시안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신발을 다시 신었다. 오른쪽 신발의 지지대를 조절한 뒤 천천히 일어섰다.오늘 기립은 다섯 번이었다.첫 번째에는 체중이 왼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두 번째부터 바로잡았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안정적이었다. 다섯 번째에는 일어난 상태로 열을 셀 동안 오른쪽 다리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조절했다.잠깐 쉬고 걷기를 시작했다.첫 번째.두 번째.세 번째.어제 네 번째를 밟았던 자리보다 한 발 앞에서 멈췄다.“끝.”치료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리시안은 돌아와 앉았다.이번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전날보다 덜했다. 네 걸음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매일 네 걸음을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치료사는 오른쪽 종아리를 다시 확인한 뒤 기록했다.신규 보행화 8일 차.기립 5회.3보 1회. 추가 보행 없음.전일 4보 반복 수행 후 부하 조절. 우측 종아리 경미한 긴장. 보행 후 증가 없음. 발목·감각 안정.리아가 기록을 보다가 말했다.“이제 오빠도 익숙해졌지?”“뭐가.”“어제보다 적게 했다고 뒤로 간 게 아니라는 거.”리시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치료사가 신발을 벗기는 동안 오른쪽 발을 내려다봤다.“조금.”“조금?”“알기는 아는데. 기분까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이제는 제가 결정할 차례입니다

    다음 날에도 다섯 번째 걸음은 없었다.치료사가 재활실에 들어오자마자 전날 기록을 펼쳤다.신규 보행화 4일 차.기립 4회.4보 1회. 추가 보행 없음.우측 발목 지지 및 감각 안정. 4보 후 이상 반응 없음.밤사이 통증과 저림은 없었다. 붓기도 없었다. 다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른쪽 종아리가 조금 당겼다가 움직이고 나니 풀렸다. 치료사는 그 사실까지 기록한 뒤 발목과 종아리를 눌러보고, 발가락 감각과 무릎 움직임을 차례로 확인했다. 새 신발을 신긴 뒤에도 곧바로 걷게 하지는 않았다.“오늘은 세 걸음입니다.”리아가 먼저 눈을 크게 떴다.“어제 네 걸음 했는데요?”“그래서 오늘은 세 걸음입니다.”리시안도 치료사를 바라봤다.“상태는 괜찮은데도요?”“괜찮습니다. 하지만 어제 네 걸음을 한 번 걸었다는 것과 네 걸음이 이제 안정적인 훈련량이 되었다는 건 다릅니다.”치료사는 기록지를 리시안 쪽으로 조금 돌렸다.“한 번 가능했던 것을 곧바로 다음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리시안의 시선이 어제 기록에 머물렀다. 분명 네 걸음을 걸었다. 걸은 뒤에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네 걸음은 당연히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어쩌면 다섯 번째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그럼 다섯 걸음은요?”“네 걸음이 반복해서 안정적이라는 걸 확인한 다음입니다.”기립은 다섯 번이었다. 네 번째에 오른쪽 무릎이 아주 조금 안쪽으로 기울었지만 스스로 바로잡았고, 다섯 번째에는 일어난 상태에서 열을 셀 동안 자세를 유지했다.그다음 걷기.첫 번째.두 번째.세 번째.리시안은 세 번째 발을 완전히 디딘 뒤 멈췄다. 어제 네 번째 걸음을 내디뎠던 자리가 바로 앞에 있었다.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한 발만 더 옮기면 된다는 것도 알았다. 발목이 아픈 것도 아니었고 무릎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었다.그래도 가지 않았다.“끝.”치료사가 말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네. 돌아가겠습니다.”자리로 돌아와 신발을 벗긴 뒤에도 발목과 감각에는 이상이 없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팔 수 있는 집이라고 아무렇게나 팔 수는 없습니다

    제3호 협의에 필요한 추가 자료는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목교 회의를 마친 다음 날 오전이었다. 리시안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재활실로 가기 전에 서재에 들렀다가 책상 오른쪽에 놓인 두꺼운 봉투를 발견했다.상속권자 직접 협의 요청 제3호.그 아래에는 자신이 붙여둔 표찰이 있었다.자료 확인 중.봉투 위에는 황실 재산관리국의 추가 표시가 하나 붙어 있었다.요청 자료 1차 취합 완료.리아가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벌써 왔어?”“그러게.”“읽고 재활 갈 거야?”리시안은 시계를 봤다. 재활까지 삼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 손은 이미 봉투 쪽으로 갔다. 봉인 끝에 손가락까지 걸렸다가 멈췄다.삼십 분이면 첫 장 몇 장은 읽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한 장을 읽으면 다음 장을 펼칠 것이고, 이상한 숫자가 있으면 이유를 찾을 것이고, 확인할 것이 생기면 관련 자료까지 꺼낼 것이다. 그러다 재활 시간이 가까워지면 중간에서 끊든지, 재활실에 가서도 읽던 내용을 계속 생각하게 될 게 뻔했다.어제 목교 회의를 앞두고 치료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할 수 있는 만큼과 오늘 해도 되는 만큼은 다릅니다.당시에는 다리 이야기였다.리시안은 봉투에서 손을 뗐다.“아니.”리아가 눈을 깜빡였다.“안 읽어?”“재활 끝나고.”“삼십 분이나 있는데.”“읽을 수는 있어.”리시안은 봉투를 다시 책상 가운데에 놓았다.“그런데 끝까지는 못 볼 것 같아.”“조금만 보면 되잖아.”“그러면 나머지가 계속 신경 쓰일걸.”리아가 잠시 오빠를 바라봤다. 리시안은 표찰 아래에 작은 메모를 끼웠다.재활 후 확인.“지금은 재활부터 할래.”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요즘 진짜 잘 멈추네.”“그게 이상해?”“조금.”“너 자꾸 내가 이상하다고 하지 마.”“좋은 뜻이야.”“좋은 뜻으로도 하지 마.”리아가 웃으며 먼저 문을 나섰다.리시안은 책상 위의 봉투를 한 번 더 봤다.읽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읽지 않기로 했다.그리고 재활실로 갔다.⸻새 신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제 이름 위의 빈칸을 채웠습니다

    다음 날 아침, 리시안은 어젯밤 뜯지 않았던 봉투부터 확인했다.상속권자 직접 협의 요청 제3호.봉투를 열기 전에 시계를 봤다.아침 여덟 시 십 분.식사도 끝냈다.치료사가 새 신발을 확인하기로 한 시간까지는 충분했다.리시안은 어젯밤 자신이 적어둔 내일 오전 확인이라는 메모를 떼어 옆에 놓고 봉인을 잘랐다.제3호 협의는 남동쪽 작업장 인근의 주택과 부속 토지 매입 요청이었다.오래 임차해 살던 가족이 자신들이 거주 중인 주택을 사들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임차 기간은 십일 년. 지붕과 외벽 일부를 거주자가 자기 비용으로 고쳤고, 뒤뜰 우물로 이어지는 통로 일부를 이웃 두 가구가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매각을 검토하려면 감정가뿐 아니라 거주자가 부담한 수선비를 어디까지 인정할지, 공동 통행로와 우물 이용권을 어떻게 남길지, 인접 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까지 확인해야 했다.리아가 맞은편에서 첫 장을 읽었다.“이것도 복잡하네.”“응.”“이것도 회의할 거야?”리시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먼저 마지막 장을 봤다.긴급성: 없음.현재 임대 계약은 일곱 달 남아 있었다.거주자 역시 즉시 매입을 요구하지 않았다.희망 사항: 계약 갱신 시점 전까지 매입 가능 여부를 알고 싶음.리시안은 펜을 들었다.이번에는 사람 이름부터 적지 않았다.첫 장 오른쪽 위에 썼다.긴급 집행 없음.그 아래.현 임대 조건 유지.그리고 별도의 요청란에 적었다.감정가 산정 근거.거주자 자비 수선 내역 및 증빙.공동 통행로·우물 이용 현황.인접 두 가구 의견.매각 시 통행권 유지 가능 방식.리아가 물었다.“그럼 이것도 자료부터?”“응.”“직접 회의는?”“자료 보고.”리시안은 제3호 협의를 새 받침에 넣었다.표찰에는 아직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잠시 생각하다 적었다.자료 확인 중.리아가 그걸 보다가 웃었다.“두 번째랑 다르네.”“다른 일이잖아.”“어제는 사람부터 불렀는데.”“어제 건은 서류에 적힌 말의 뜻을 모르겠어서 불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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