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무도회장은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체육관 천장에는 작은 조명이 줄처럼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색색의 빛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떠들었고,
음악은 꽤 크게 울리고 있었다.이든과 애리는 입구 쪽에 서 있었다.
이든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주변을 둘러봤다.
애리는 드레스 치마를 한 번 정리하며 체육관 안을 바라봤다.둘 다 어딘가 조금 어색했다.
그때 음악이 바뀌었다.
빠르던 리듬이 천천히 가라앉더니 부드러운 곡이 흐르기 시작했다.체육관 중앙에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커플로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웃으면서 손을 잡았고,
누군가는 장난스럽게 허리를 끌어당겼다.애리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옆을 봤다.이든도 같은 걸 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든이 말했다.
“…가자.”
애리는 웃었다.
“춤?”
“응.”
애리는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체육관 가운데로 걸어갔다.
이미 몇 쌍이 춤을 추고 있었다.이든이 천천히 애리 앞에 섰다.
그리고 망설였다.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애리가 먼저 웃었다.
“왜요.”
이든이 말했다.
“아냐.”
그리고 조심스럽게 애리 허리에 손을 올렸다.
생각보다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애리는 순간 조금 긴장했다.
몸이 살짝 굳었다.이든이 바로 눈치를 챘다.
“불편해?”
애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애리도 이든 어깨에 손을 올렸다.
둘은 천천히 음악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다.
발이 서로 살짝 부딪히기도 했다.하지만 몇 걸음 지나자 자연스럽게 리듬이 맞기 시작했다.
둘 사이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애리는 이든의 셔츠에서 은은하게 나는 향을 느꼈고,
이든은 애리 머리에서 나는 아주 약한 향기를 느끼고 있었다.둘 다 말이 없었다.
음악만 천천히 이어졌다.
애리는 괜히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고,
이든은 그런 애리를 계속 보고 있었다.애리가 말했다.
“…이든 오빠.”
이든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왜.”
“생각보다 춤 잘 추네요.”
이든이 어깨를 조금 으쓱했다.
“밴드 하면 이런 것도 해야 돼.”
애리가 웃었다.
“그래요?”
“응.”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음악은 더 느려졌다.
이든이 애리를 내려다봤다.
파란 눈이었다. 처음 음악실에서 봤던 그 색이었다.애리는 그 시선을 느끼고 눈을 피했다.
바닥을 보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둘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그 순간 음악이 아주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든이 조용히 말했다.
“애리.”
“네.”
“너 나 기다렸어?”
애리는 멈췄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눈을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이든을 봤다.
“…몰라요.”
이든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애리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애리는 눈을 크게 떴다.
둘 사이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숨이 닿을 것 같을 만큼.그리고…
이든이 멈췄다.
애리는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눈을 깜빡였다.이든이 먼저 웃었다.
“아직 안 할게.”
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요.”
이든이 말했다.
“너 도망갈 것 같아서.”
애리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도망 안가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음악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이든이 다시 애리에게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아주 짧게.
입술이 닿았다.첫 키스였다.
길지 않았다.
둘 다 조금 놀랐다.잠시 후 애리가 먼저 웃었다.
“이거 연습 아니죠?”
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이건 진짜야.”
***
다음 날 점심시간 전이었다.
학교 복도는 늘 그렇듯 시끄러웠다.
사물함 문이 열리고 닫히는 금속 소리,
누군가 웃다가 터뜨리는 고음, 운동화 바닥이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소리가 계속 뒤섞여 들렸다.점심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도 복도에는 이미 학생들이 가득했고, 공기에는 어제 누군가 뿌린 향수 냄새와 체육관 냄새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애리는 사물함 앞에 서 있었다.
가방 끈을 쥔 손끝이 괜히 차갑게 느껴졌다.
사물함 문 안쪽에는 아직도 어색하게 붙여 둔 시간표가 있었다.
익숙해지려고 몇 번이나 들여다봤는데도 오늘은 글자들이 이상하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어제 무도회가 계속 떠올랐다.
느려진 음악.
사람들의 손. 체육관 천장에 반짝이던 조명.그리고 입술.
진짜로 닿았던 건 잠깐이었는데,
머릿속에서는 그 장면이 자꾸 반복됐다.키스라는 게 원래 이렇게 사람 생각을 멈추게 만드는 건지, 애리는 오늘 처음 알았다.
애리는 책 한 권을 억지로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뭘 하든 손이 자꾸 헛돌았다.
사물함 문을 닫자 철컥 하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애리는 그 소리에 스스로 놀라 작게 숨을 삼켰다.“…그래서.”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뭐지.”
사귀는 건가. 아닌가.
사귀자는 말은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어제 이든은 분명 “진짜야”라고 말했고,
애리는 그 말이 거의 확정처럼 들렸는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걸렸다.확정이라는 건 원래 말로 한 번은 확인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 건지,
원래 다들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애리는 괜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때였다.
복도 저쪽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키 큰 사람은 멀리서도 티가 났다.
곱슬머리에 어깨에 걸친 가방,
익숙한 걸음걸이.그 리듬이 가까워질수록 애리 심장도 이상하게 같이 빨라졌다.
이든이었다.
애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볼 이유는 없는데,
괜히 눈이 마주치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방금 전까지 “이게 뭐지” 하고 고민하던 사람이 티를 내면 안 된다는, 이상한 자존심 같은 게 작동했다.
하지만 이든은 그런 걸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애리 앞으로 걸어왔다.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름을 불렀다.
“애리.”
그 한마디가 괜히 크게 들렸다.
애리는 숨을 한번 고르고 고개를 돌렸다.
표정을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만들려고 애썼다.
“…어.”
이든은 애리 얼굴을 한번 보더니 그대로 물었다.
“어제 재밌었어?”
애리는 잠깐 그를 바라봤다.
얼굴이 너무 멀쩡했다.
오히려 그게 더 당황스러웠다.
어제 그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어제 그 숨으로 애리 입술에 닿았는데, 지금은 꼭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애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리고 조금 늦게 덧붙였다.
“…재밌었어.”
둘 사이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뭔가 말을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는 둘 다 정확히 모르는 그런 정적이었다.애리는 그 침묵이 ‘확인’처럼 느껴졌고,
이든은 그 침묵을 '당연함'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애리와 달리,
이든 머릿속에서는 이미 결론이 끝나 있었다.어제 같이 무도회 갔다.
키스했다.그러면 사귀는 거다.
끝.
간단. 더 할 말 없음.그때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애리.”
애리와 이든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같은 학년 남학생이었다.
농구팀 주장.
키가 컸고, 웃는 얼굴이 사람 경계를 쉽게 풀게 만드는 타입이었다.
말투에도 늘 자신감이 묻어났다.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인사받는 애.
그가 자연스럽게 다가오며 말했다.
“어제 무도회 왔었지?”
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남학생은 웃으며 손을 한번 흔들었다.
“나 찾았는데.”
애리가 눈을 깜빡였다.
“…왜?”
“같이 춤추려고.”
그는 장난인지 진심인지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아주 가볍게 덧붙였다.
“다음엔 나랑 추자.”
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 이 타이밍에 이런 말을 듣는 것도 이상했고, 더 문제는 옆에 이든이 서 있다는 거였다.
애리는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어.”
정말 그 한 글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이든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표정이 크게 변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웃던 공기 위로, 얇게 ‘싫음’ 같은 게 덧씌워졌다.
이든은 말없이 농구팀 주장과 애리 사이 거리를 한번 봤다.
그리고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농구팀 주장이 먼저 웃었다.
“어.”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든.”
둘은 서로 알고 있었다.
같은 학교 안에서 모를 수가 없었다.
특히 ‘밴드 하는 애’와 ‘농구팀 주장’은 학교 안에서도 서로 다른 분위기를 대표하는 애들이라 더 그랬다.
이든이 짧게 물었다.
“왜.”
농구팀 주장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볍게 웃었다.
“애리랑 얘기 중이었어. 무도회 얘기.”
이든은 고개를 아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애리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괜히 애리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느낌이었다.
이든이 말했다.
“애리.”
애리가 고개를 들었다.
“가자.”
너무 당연한 말투였다.
명령도 부탁도 아닌데, 이미 정해진 일처럼 들렸다.
애리는 눈을 깜빡였다.
“…어디?”
“점심.”
이든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나랑 먹잖아.”
순간 복도 공기가 조금 이상해졌다.
애리는 그 말이 왜 이렇게 확정처럼 들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확정이라면,
아직 그걸 만든 문장은 없었는데.하지만 이든은 애리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미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게 더 애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애리는 한번 농구팀 주장을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표정에는 분명 ‘오’ 하는 기색이 떠 있었다.
애리는 어색하게 말했다.
“…다음에 봐.”
그리고 이든 뒤를 따라 걸었다.
몇 걸음 앞서 가던 이든은 빠르지 않았다.
애리가 따라올 걸 당연하게 확신하는 사람처럼 딱 맞는 속도로 걷고 있었다.
그게 이상하게 더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애리는 결국 입을 열었다.
“근데.”
이든이 걸으면서 물었다.
“왜.”
애리는 괜히 목소리를 낮췄다.
복도니까.
“…우리.”
“사귀는 거야?”이든이 걸음을 멈췄다.
진짜로 멈췄다.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그대로 멈춰 선 채 천천히 애리를 돌아봤다.
표정은 거의 ‘이게 왜 질문이지?’에 가까웠다.
“…뭐?”
애리는 숨을 들이켰다.
“어제 키스했잖아.”
이든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애리는 잠깐 말을 고르다가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
“사귀자는 말은 없었는데.”
이든은 애리를 가만히 보더니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해야 돼?”
애리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웃으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아서 입술만 꾹 눌렀다.
“해야지.”
이든은 아주 잠깐 생각했다.
정말 짧게.
그리고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럼 하자.”
애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요?”
이든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제 키스했잖아.”
그리고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난 이미 너 내 여자친구인 줄 알았는데.”
애리는 결국 한숨처럼 웃었다.
이든이 너무 이든 같아서.
“…이든 오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왜.”
애리가 말했다.
“제대로 해.”
그제야 이든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아주 작았지만 분명한 웃음이었다.
그는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와 애리를 똑바로 바라봤다.
장난스러워 보이는데도, 파란 눈만큼은 이상하게 진지했다.
“…애리.”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랑 사귈래?”
애리는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맞았다.
기다렸는데도, 막상 들으니까 가슴이 조금 뜨거워졌다.
애리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든도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리고 너무 자연스럽게 애리 손을 잡았다.
마치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됐네.”
애리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뭐가 됐네야.”
이든이 말했다.
“이제 확정.”
애리는 그의 손을 쥔 채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이상해.”
이든이 힐끗 애리를 보며 웃었다.
“근데 좋지.”
애리는 대답 대신 손에 조금 힘을 줬다.
그게 대답이었다.
복도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애리 귀에는 그 소음이 조금 멀게 들렸다.9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애리는 예일 기숙사에 들어갔고, 본격적인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처음 며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새로운 강의실을 찾아 캠퍼스를 돌아다녔고, 수업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고등학교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이던 때와 달리 수업 사이에 몇 시간씩 비는 날도 있었고, 하루 종일 강의가 이어지는 날도 있었다.그래도 혼자는 아니었다.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제이미와 니키가 같은 기숙사에 배정되면서 셋은 자연스럽게 자주 어울리게 됐다.점심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니키가 말했다.“나 오늘 낮잠 좀 자야겠다.”제이미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너 아까 수업에서도 잤잖아.”“그건 잔 게 아니라 눈 감고 들은 거야.”애리가 웃었다.“그게 잔 거지.”세 사람은 함께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제이미와 니키의 방은 같은 층에 있었다.둘은 운 좋게 룸메이트로 배정됐다.애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너희는 좋겠다.”제이미가 물었다.“왜?”“둘이 같은 방이잖아.”“너도 룸메 있잖아.”“있지.”애리가 어깨를 으쓱했다.“근데 아직 잘 모르겠어.”니키가 웃었다.“며칠 같이 살았는데?”“마주칠 일이 별로 없어. 들어오는 시간도 다르고.”“어떤 애인데?”애리는 잠깐 생각했다.“잘 모르겠어. 되게 바쁜 것 같던데.”그때까지만 해도 애리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서로 생활 시간이 다르면 오히려 편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뉴헤이븐 시내.안경을 쓴 40대의 여자 부동산 중개인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안녕하세요.""웨스트 씨 맞으시죠?""저는 메건입니다. 오늘 집 안내를 맡았습니다."줄리안이 먼저 악수를 건넸다."잘 부탁드립니다."중개인이 미소를 지었다."저도요.""미리 말씀드린 대로 세 곳 준비했습니다.""먼저 첫 번째 집부터 보시죠."줄리안과 애리는 메건의 안내에 따라 차에 올랐다.운전을 하며 메건이 말을 꺼냈다."첫 번째는 콘도입니다.""예일까지는 걸어서 7분 정도고요.""보안이 좋아 교수님들이나 대학원생분들도 많이 거주하세요."차는 어느 건물의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메건이 리모컨을 누르자 차단기가 올라갔다."입주민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깔끔한 복도가 이어졌다.메건이 현관문을 열었다."여기입니다."둘은 안으로 들어가서 집을 둘러보았다.거실과 주방이 이어진 구조였고, 안쪽에는 침실 두 개가 있었다.전체적으로 깔끔했다.애리가 거실을 둘러보며 말했다.“괜찮은데?”“응. 나쁘지 않네.”줄리안도 천천히 안을 둘러봤다.그러다 메건에게 물었다.“여기 방음은 어때요?”“방음이요?”“제가 밤에도 기타를 치는 편이라서요.”메건이 생각하듯 말했다.“그렇다면 이곳은 조금 불편하실 수도 있어요. 건물 규정상 늦은 시간에는 소음에 꽤 민감하거든요.”줄리안의 표정이 바로 미묘해졌다.애리가 그걸 보고 웃었다.“여기는 안 되겠네.”줄리안도 웃었다.“그러게.”메건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다음 집을 보시죠.”세 사람은 다시 차에 올랐다.두 번째 집은 예일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학교 주변을 벗어나자 거리도 한결 조용해졌다.차는 나무가 늘어선 주택가 안쪽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메건이 비슷한 형태의 집들이 이어진 곳 앞에 차를 세웠다.“여기입니다.”애리가 차에서 내려 건물을 올려다봤다.2층짜리 타운하우스였다.첫 번째 콘도와 달리 각각의 집마다 현관이 따로 나 있었고, 앞쪽에
줄리안은 계속 바빴다.아침이면 작업실로 향했다가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녹음이 끝나면 편곡을 수정했고, 수정이 끝나면 다시 녹음이 이어졌다.노아는 베이스 라인을 다듬었고, 마커스는 키보드와 스트링 편곡을 여러 번 수정했다.라이언은 세 사람의 의견을 하나씩 정리해서 사운드를 맞춰 갔다.댄은 그 사이를 오가며 일정표를 계속 조정했다.3집은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그 사이 애리도 예일대학교 입학 준비를 차근차근 이어 갔다.어느 날 저녁.애리는 노트북으로 예일에서 온 메일을 읽고 있었다."줄리안."작업실에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있던 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응?""예일에서 메일 왔어."줄리안이 애리 옆으로 다가왔다.애리는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오리엔테이션 안내인데..."천천히 아래로 내리던 손가락이 한곳에서 멈췄다.'교외 거주 신청.'기숙사 대신 교외 거주를 희망하는 학생은 별도의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다는 안내였다.애리가 화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이거 신청해 볼까?"줄리안도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집은 어차피 구할 생각이었잖아.""그러니까.""미리 신청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애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날 두 사람은 신청서를 함께 작성했다.공개된 신분으로 인한 사생활 보호 문제와 학교 인근 거주 계획을 간단히 적어 제출했다.며칠 뒤 예일대학교에서 답장이 도착했다.결과는 불가였다.사유는 간단했다.학부생은 첫 네 학기 동안 교내 거주가 원칙이며, 예외는 기혼자나 만 21세 이상 학생에게만 허용된다는 내용이었다.애리는 메일을 읽고 줄리안을 바라봤다."안 된다네."줄리안이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결혼할 걸 그랬네.""그때?""나 졸업하기 전.""프롬 가기 전에 프로포즈했을 때.""그랬으면 같이 살 수 있잖아."애리가 줄리안을 쏘아봤다."줄리안~.""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안 되나?"줄리안이 멋쩍
햄튼에서 돌아온 지 이틀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줄리안은 기타 케이스를 닫고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소파에서 책을 읽던 애리가 고개를 들었다."오늘 작업실 가?""응.""댄이 오라잖아."애리가 빙긋 웃었다."3집 작업 잘하고 와."줄리안도 웃었다."그러게."애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줄리안 앞에 섰다.구겨진 셔츠 깃을 손으로 가볍게 펴 주었다."잘 다녀와."줄리안이 웃으며 물었다."넌 뭐 할 건데?""글쎄.""책 좀 읽고.""장도 좀 보고."잠시 생각하던 애리가 말했다."저녁은 내가 해 볼까?"줄리안이 피식 웃었다."또 라면?"애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아니야.""이번엔 다른 거 해 볼게."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주방은 살아남길 바래.“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줄리안!""끝나면 전화할게."줄리안이 웃으며 말했다."알았어."가볍게 입을 맞춘 뒤 줄리안은 현관문을 나섰다.***애틀랜틱 작업실.줄리안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노아와 마커스는 이미 와 있었다.잠시 후,문이 다시 열리며 댄과 라이언이 들어왔다.라이언이 멤버들을 둘러보며 웃었다."너희, 여름 잘 보낸 것 같다.""얼굴이 많이 탔네."마커스가 어깨를 으쓱했다."네. 뭐... 그럭저럭요."댄은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노래.""12곡이라고 했지?"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네.""들어보자."줄리안은 노트북을 스피커에 연결했다.바탕화면에 있는 폴더 하나를 열었다.[Horizon]그 안에는 열두 개의 데모 파일이 정리되어 있었다.줄리안은 첫 번째 트랙을 클릭한 뒤 재생 버튼을 눌렀다.첫 번째 곡은 햄튼 별장에서 처음 공개했던 'Summer Starts with You'였다.경쾌한 기타 리프가 작업실 안을 가득 채웠다.곡이 끝나자 작업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댄이 먼저 입을 열었다."좋네."곧바로 다음 곡이 재생됐다.어떤 곡은 30초 만에 넘어갔다.어떤 곡은 1분 정도 듣고 멈췄다.그
다음 날 아침.뉴욕의 한 연예 매체에는 짧은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실버라인 줄리안 웨스트, 이스트햄튼 파티서 미공개 신곡 깜짝 공개]실버라인의 보컬 줄리안 웨스트가 어젯밤 이스트햄튼의 한 별장에서 열린 비공개 파티에서 미공개 신곡을 선보인 것으로 알려졌다.관계자들에 따르면 줄리안은 통기타를 들고 신곡 **〈Summer Starts with You〉**를 처음 공개했으며, 현장에 있던 참석자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이번 자리는 멤버들과 지인들이 함께한 사적인 모임으로, 공식 공연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실버라인 측은 신곡의 정식 발매 일정과 3집 앨범에 대해서는 별도의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아침 신문을 펼쳐 보던 노아가 기사를 읽고 웃었다."너 또 기사 났네."줄리안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이번엔 뭐."노아가 신문을 내밀었다."어제 부른 신곡."줄리안은 기사를 훑어보고는 피식 웃었다."...빠르네."마커스가 신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아니, 어제 파티는 톰이 그렇게 사람들 관리했는데도 기사가 나네."줄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그러게.""나도 어디서 새는 건지 모르겠다."마커스가 문득 물었다."참, 톰은?"노아가 대답했다."아침 일찍 돌아갔어."그리고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이거 괜찮겠냐?""댄 또 전화 오는 거 아니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줄리안의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는 '댄'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줄리안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다."네."댄의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줄리안.""어제 신곡 공개했다며.""...""어디까지 불렀어?"줄리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한 곡이요."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던 애리와 레이첼도 자연스럽게 줄리안을 바라봤다.댄이 다시 물었다."확실한 거지?""네.""신곡은 몇 곡이나 썼나?"줄리안은 한 박자 생각한 뒤 대답했다."12곡입니다.""..."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이내 댄이 입을 열었다."내
"...잠깐."톰이 리아와 그 일행들의 진입을 막았다.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초대받은 사람이야?"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아니요.""여기 사는데요."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뭐?"리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여기 우리 집.""아니, 정확히는 우리 쌍둥이 동생 집.""근데 나도 맨날 와서."그러더니 별장 안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노아!""야, 노아!"잠시 후 노아가 현관으로 걸어 나왔다.리아를 보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너 왜 왔냐?"리아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무슨 소리야.""나도 여기 살잖아."노아가 헛웃음을 흘렸다."어제 아침에 짐 싸서 나갔잖아."리아가 입을 삐죽였다."그건…“노아가 어깨를 으쓱했다."나갈 땐 마음대로 나가도..."잠깐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들어올 땐 안 되지.""웃기지 마."리아가 막무가내로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톰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길을 막았다."오늘 파티는 초대받은 분만 입장 가능합니다."리아가 노아를 노려봤다."너, 정말 이럴 거야?"노아는 어깨를 으쓱했다."여기 계신 톰 사령관님 명령이야.""난 권한 없어.""잘 가라."리아는 분을 참지 못한 채 씩씩거리다가 노아를 한 번 더 노려봤다.“엄마한테 이를 거야.”노아가 피식 웃었다.“그래.”“엄마도 초대 안 받았어.”그렇게 말한 노아는 미련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리아는 한동안 별장을 노려보다가 등을 돌렸다."그냥 가자.""치사해서 원."그때 일행 중 한 명이 아쉬운 듯 말했다."실버라인 파티라며?""들어가서 사진 좀 찍으려고 했더니…"그 말을 들은 톰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졌다."계속 여기 있으면 경찰 부르겠습니다."톰의 말에 일행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슬슬 발걸음을 돌렸다.잠깐의 소동은 그렇게 끝이 났다.별장 안에서는 다시 음악과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누가 왔다 간거냐?"음악을 잠시 멈춘 DJ 케빈이, 안으로 들어온 노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