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10월 24일이었다.
가을이 꽤 깊어져 있었다.
학교 운동장 옆에 서 있는 단풍나무들은 거의 절반쯤 잎이 떨어져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잎들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작게 났다.
점심시간이 끝난 뒤였다.
체육관 뒤 계단.
애리는 계단 중간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수학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고, 연필 끝으로 천천히 식을 따라 계산을 하고 있었다.
가끔 바람이 불면 책장이 살짝 들리기도 했다.
철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애리는 고개를 들었다.
이든이었다.
그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대충 걸친 채 계단을 내려왔다.
애리 옆에 털썩 앉으면서 말했다.
“또 공부야?”
애리는 연필을 굴리며 웃었다.
“시험 있잖아.”
“너는 맨날 시험이야.”
“공부하는 학교에 왔으니까.”
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건 맞네.”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든은 애리 옆에 놓여 있는 문제집을 집어 들었다.
페이지 사이에서 뭔가 얇은 카드가 하나 떨어졌다.
“이거 뭐야.”
애리는 고개를 들었다.
“학생증인데.”
이든이 카드를 집어 들었다.
플라스틱 카드 위에는 애리 사진과 이름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이든이 멈췄다.
“애리.”
“응?”
이든이 카드 아래쪽을 가리켰다.
“이거.”
애리가 몸을 기울여 봤다.
DOB: Oct 25
이든이 말했다.
“내일 생일이네.”
애리는 카드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응.”
이든이 물었다.
“왜 말 안 했어.”
애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거 아니잖아.”
“원래 생일 크게 안 챙겨요.”
이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카드를 다시 문제집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
“응.”
잠시 후 이든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일 연습 있어.”
애리는 그를 바라봤다.
“…응?“
이든이 덧붙였다.
“마커스랑 노아 온다.”
“연습 많이 하네?”
“요즘 좀.”
한 박자 쉬고 이든이 말했다.
“실버라인 곡 마무리해야 돼. 이번에 만드는 곡."
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네.”
이든이 어깨를 으쓱했다.
“좀.”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가방을 고쳐맸다.
애리는 괜히 하늘을 한번 올려다봤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른 잎이 계단 위로 굴러왔다.애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기억은 하겠지.’
***
다음 날.
10월 25일. 아침이었다.
애리는 교문을 지나 복도로 들어왔다.
학생들이 사물함 앞에 모여 있었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애리는 자기 사물함을 열었다.
안쪽에는 시간표와 몇 장의 종이가 붙어 있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애리.”
이든이었다.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 서 있었다.
“응?”
이든이 말했다.
“수학 숙제 했어?”
애리는 그를 봤다.
“…했어.”
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리고 그냥 사물함 문을 닫고 지나갔다.
애리는 그 뒷모습을 잠깐 봤다.
“…아.”
괜히 웃음이 났다.
‘뭐 기대한 것도 아닌데.’
그래도 조금.
조금은 서운했다.***
점심시간.
체육관 뒤 계단.
애리는 오늘도 거기에 앉아 있었다.문제집은 펼쳐져 있었지만 사실 거의 보지 않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이든이 나왔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또 여기 있네.”
애리는 웃었다.
“조용하잖아.”
이든이 옆에 앉았다.
“오늘 연습 좀 길어.”
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든이 물었다.
“오늘 끝나고 작업실 올래?”
애리는 그를 봤다.
“왜?”
“그냥.”
“새로 만든 부분 들려줄게.”
애리는 멈췄다.
“…알겠어요.”
하지만 마음 한쪽이 조금 내려앉았다.
‘진짜 아무 말도 안 하네.’
애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
학교가 끝난 뒤였다.
해가 조금 내려가고 있었다.애리는 가방을 메고 학교 뒤쪽 건물로 걸어갔다.
작업실 문 앞에 섰다.
안이 조용했다.애리는 문을 열었다.
“…어?”
불이 꺼져 있었고 연습도 없는 것 같았다.
“오빠?”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불이 켜졌다.“서프라이즈!!”
애리는 그대로 멈췄다.
작업실 안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이든.
마커스. 노아. 그리고 모르는 여자 한 명.벽에는 종이 장식이 붙어 있었고, 작은 테이블 위에는 케이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애리는 눈을 크게 떴다.
“…뭐예요?”
마커스가 웃었다.
“생일이라며.”
노아가 케이크를 가리켰다.
“초도 있다.”
애리는 천천히 이든을 봤다.
이든은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생일이잖아.”
애리는 잠깐 말을 못 했다.
“…어제 아무 말도 안 했잖아.”
이든이 씨익 웃었다.
“그래야 놀라지.”
애리는 그제서야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간 거야?”
이든이 대답했다.
“응. 말하면 네가 눈치 챌 거 같아서.”
연습실 안이 조용해졌다.
“애리.”
마커스가 말했다.
“소개할 사람 있어.”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웃었다.
“레이첼.”
애리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레이첼이 웃었다.
“아, 그렇게 인사 안 해도 돼.”
“너 애리 맞지?”
애리는 조금 놀랐다.
“…네.”
레이첼이 말했다.
“이든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애리가 바로 이든을 봤다.
“뭐라고 했어요?”
이든이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마커스가 웃었다.
“거짓말.”
레이첼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맨날 네 얘기 하더라.”
이든이 또 다른 쪽을 쳐다봤다.
노아가 말했다.
“자 이제 초 불어.”
초가 켜졌다.
다들 대충 음정도 안 맞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애리는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초를 불었다.
박수가 터졌다.
***
작업실 바닥.
케이크가 이미 반쯤 없어져 있었다.
종이접시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노아는 바닥에 기대 앉아 있었다.
마커스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음악은 꺼져 있었지만, 작업실 안에는 웃음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레이첼이 케이크를 한 입 먹다가 애리를 봤다.
“그래서.”
포크를 들고 물었다.
“몇 살 됐어?”
애리가 말했다.
“열여섯.”
마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리고 옆에 있는 이든을 봤다.
“이든.“
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왜.”
마커스가 물었다.
“너 몇 살이냐.”
이든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열여덟.”
노아가 바로 말했다.
“그래도 범죄자.”
작업실이 빵 터졌다.
마커스가 웃으며 말했다.“고3이 고1 꼬셨다.”
노아가 포크로 이든을 가리켰다.
“경찰 부르자.”
애리가 웃으며 말했다.
“오빠가 먼저 꼬신 거 아니거든요.”
노아가 바로 말했다.
“피해자 등장.”
이든이 어깨를 으쓱했다.
“봤지.”
그리고 애리를 한번 보더니 말했다.
“내 편.”
애리는 웃으면서 케이크를 한 입 더 먹었다.
이든이 케이크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근데.”
마커스가 물었다.
“왜.”
이든이 애리를 보며 말했다.
“나 너보다 한 달 늦게 태어났네.”
애리가 눈을 깜빡였다.
“…응?”
이든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 생일 11월 25일이야.”
“한 달 뒤.”
마커스가 바로 말했다.
“야.”
레이첼도 웃었다.
“계산 좀 해라.”
마커스가 손가락으로 이든을 가리켰다.
“니가 애리보다 삼 년 먼저 태어났거든.”
노아가 덧붙였다.
“한 달 늦게 태어난 게 아니라.”
“세 살 먹고 한 달 늦게 태어난 거야.”
연습실에 웃음이 터졌다.
이든이 피식 웃었다.“그래도... 생일은 한 달 뒤잖아.”
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연애하면 뇌가 이렇게 되는구나.”
마커스와 노아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레이첼이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유리온실 완전히 깨졌네.”
이든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좋잖아.”
그리고 애리를 한번 봤다.
“이제 들판이니까.”
애리는 웃음을 참다가 결국 웃어 버렸다.
“근데요.”
애리가 물었다.
“왜 유리온실이에요?”
그러자 레이첼이 포크를 입에 문 채 대답했다.
“투명하게 맑고 예쁜데, 가까이 가면 깨질 것 같대.”
“여자애들이 그렇게 부르더라.”
마커스와 노아가 다시 킥킥거리며 웃었다.
애리는 잠시 생각했다.
“…근데요.”
“오빠 눈이 파래서 그런 거 아니에요?”
연습실이 조용해졌다.
노아가 말했다.
“…뭐?”
애리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햇빛 비치면 유리 같잖아요.”
마커스가 웃기 시작했다.
“오.“
“그거 좀 낭만적인데.”이든이 애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애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그렇게 보였어요.”
다들 순간 말이 없었다.
노아가 먼저 웃었다.
“야.”
“고1이 로맨스 작가네.”
마커스도 웃었다.
“그러게.”
“유리온실 별명 처음으로 낭만적으로 들렸다.”
레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
이든이 피식 웃으며 애리를 봤다.
창문 밖에서 저녁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그 빛이 그의 눈에 살짝 비쳤다.
애리가 말한 것처럼 유리 같은 색이었다.
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온실은 깨졌잖아.”
노아가 바로 말했다.
“아직도 그 얘기냐.”
이든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들판이 더 좋거든.”
그리고 애리를 한번 봤다.
“훨씬 자유롭잖아.”
애리는 괜히 웃었다.
“…오빠 진짜 이상해요.”
마커스가 말했다.
“맞아.”
“원래 이상했어.”연습실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
작업실 안은 여전히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케이크는 이미 거의 사라졌고, 종이접시들이 바닥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마커스와 레이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이제 가야겠다.”
노아가 말했다.
“왜?”
“장비 정리해야 돼. 내일 공연 리허설 있잖아.”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그는 이든을 힐끗 봤다.
“야.”
이든이 말했다.
“왜.”
노아가 웃으며 말했다.
“갈 때 문 잠가라.”
마커스가 바로 덧붙였다.
“그리고 너무 늦게 보내지 마라.”
애리가 눈을 깜빡였다.
“…뭘요?”
노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하는 말.”
작업실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문이 닫히고 작업실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까까지 떠들던 공간이 순식간에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애리는 아직 바닥에 앉아 있었다.
케이크 접시를 손에 들고, 조금 남은 조각을 천천히 먹고 있었다.이든은 벽 쪽에 기대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창문 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가을 저녁이었다.애리가 먼저 말했다.
“…오늘 진짜 놀랐어.”
이든이 말했다.
“그럼 성공이네.”
애리는 웃었다.
“어제 진짜 아무 말도 안 하길래.”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았어.”
이든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리가.”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애리.”
“응?”
이든이 기타를 집어 들었다.
작업실 벽에 기대 놓여 있던 기타였다.애리는 고개를 기울였다.
“연습해?”
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이든은 기타 줄을 한번 툭 건드렸다.
맑은 소리가 연습실 안에 울렸다.그가 애리를 보며 웃었다.
“…너 생각나서, 이 곡.“
애리는 눈을 깜빡였다.
“응?”
이든은 대답 대신 천천히 코드를 이어갔다.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멜로디였다.
어딘가 조금 엉성했지만, 그래서 더 솔직하게 들리는 소리였다.조용한 연습실 안에 기타 소리만 부드럽게 퍼졌다.
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든이 중간에 한번 멈췄다.
“아직 대충이야.”
애리가 작게 물었다.
“…언제부터 친 거야?”
이든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 학교에서.”
애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이든이 말했다.
“그냥.”
“생일이잖아.”
애리는 웃었다.
“…그게 이유야?”
이든이 다시 기타를 한번 튕겼다.
“응. 충분하지.”
애리는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이거.”
“좀 반칙인데.”
이든이 물었다.
“왜.”
애리가 말했다.
“케이크보다 이게 더 좋아서.”
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기타를 잡았다.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창문 밖으로 가을 저녁 하늘이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연습실 안에는 말 대신 그 소리만 남아 있었다.
***
애리의 집 앞에 다 왔을 때였다.
가로등 불빛이 조용한 골목 위로 내려와 있었다.
가을 밤 공기가 조금 차가웠다.애리가 가방 끈을 고쳐 잡으며 웃었다.
“오늘 고마웠어, 오빠.”
그리고 몸을 돌려 집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려 했다.
그때였다.
“잠깐.”
이든이 말했다.
애리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응?”
이든이 애리 손목을 아주 가볍게 잡았다.
애리는 그를 바라봤다.
이든이 다시 말을 꺼냈다.
“…생일.”
애리가 웃었다.
“응.”
“아직 안 끝났잖아.”
애리가 눈을 깜빡였다.
“…응?”
그 순간.
이든이 애리를 조금 끌어당겼다.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입술이 닿았다.
처음 무도회에서 했던 키스보다 조금 더 길었다.
조금 더 가까웠다.애리는 처음엔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을 밤이 조용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둘의 그림자가 길게 겹쳐 있었다.
이든이 먼저 살짝 떨어졌다.
애리는 아직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오빠.”
이든이 말했다.
“생일 선물.”
그리고 피식 웃었다.
“마음에 들어?”
애리는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또 반칙이야.”
이든이 물었다.
“왜.”
애리가 작게 말했다.
“…좋아서.”
이든이 웃었다.
“그럼 됐네.”
애리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이제 진짜 갈게.”
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애리는 문 앞까지 걸어가다가 한 번 더 뒤돌아봤다.
이든은 아직 가로등 아래에 서 있었다.
애리가 웃었다.
“…오빠.”
“왜.”
“내년 생일도 기대할게요.”
이든이 말했다.
“그때는.”
잠깐 뜸을 들였다.
“더 큰 거 줄게.”
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
이든이 어깨를 으쓱했다.
“비밀.”
애리는 웃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을 밤 공기 속에 아직 기타 멜로디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애리의 열여섯 번째 생일이 조용히 끝나고 있었다.
9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애리는 예일 기숙사에 들어갔고, 본격적인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처음 며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새로운 강의실을 찾아 캠퍼스를 돌아다녔고, 수업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고등학교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이던 때와 달리 수업 사이에 몇 시간씩 비는 날도 있었고, 하루 종일 강의가 이어지는 날도 있었다.그래도 혼자는 아니었다.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제이미와 니키가 같은 기숙사에 배정되면서 셋은 자연스럽게 자주 어울리게 됐다.점심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니키가 말했다.“나 오늘 낮잠 좀 자야겠다.”제이미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너 아까 수업에서도 잤잖아.”“그건 잔 게 아니라 눈 감고 들은 거야.”애리가 웃었다.“그게 잔 거지.”세 사람은 함께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제이미와 니키의 방은 같은 층에 있었다.둘은 운 좋게 룸메이트로 배정됐다.애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너희는 좋겠다.”제이미가 물었다.“왜?”“둘이 같은 방이잖아.”“너도 룸메 있잖아.”“있지.”애리가 어깨를 으쓱했다.“근데 아직 잘 모르겠어.”니키가 웃었다.“며칠 같이 살았는데?”“마주칠 일이 별로 없어. 들어오는 시간도 다르고.”“어떤 애인데?”애리는 잠깐 생각했다.“잘 모르겠어. 되게 바쁜 것 같던데.”그때까지만 해도 애리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서로 생활 시간이 다르면 오히려 편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뉴헤이븐 시내.안경을 쓴 40대의 여자 부동산 중개인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안녕하세요.""웨스트 씨 맞으시죠?""저는 메건입니다. 오늘 집 안내를 맡았습니다."줄리안이 먼저 악수를 건넸다."잘 부탁드립니다."중개인이 미소를 지었다."저도요.""미리 말씀드린 대로 세 곳 준비했습니다.""먼저 첫 번째 집부터 보시죠."줄리안과 애리는 메건의 안내에 따라 차에 올랐다.운전을 하며 메건이 말을 꺼냈다."첫 번째는 콘도입니다.""예일까지는 걸어서 7분 정도고요.""보안이 좋아 교수님들이나 대학원생분들도 많이 거주하세요."차는 어느 건물의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메건이 리모컨을 누르자 차단기가 올라갔다."입주민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깔끔한 복도가 이어졌다.메건이 현관문을 열었다."여기입니다."둘은 안으로 들어가서 집을 둘러보았다.거실과 주방이 이어진 구조였고, 안쪽에는 침실 두 개가 있었다.전체적으로 깔끔했다.애리가 거실을 둘러보며 말했다.“괜찮은데?”“응. 나쁘지 않네.”줄리안도 천천히 안을 둘러봤다.그러다 메건에게 물었다.“여기 방음은 어때요?”“방음이요?”“제가 밤에도 기타를 치는 편이라서요.”메건이 생각하듯 말했다.“그렇다면 이곳은 조금 불편하실 수도 있어요. 건물 규정상 늦은 시간에는 소음에 꽤 민감하거든요.”줄리안의 표정이 바로 미묘해졌다.애리가 그걸 보고 웃었다.“여기는 안 되겠네.”줄리안도 웃었다.“그러게.”메건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다음 집을 보시죠.”세 사람은 다시 차에 올랐다.두 번째 집은 예일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학교 주변을 벗어나자 거리도 한결 조용해졌다.차는 나무가 늘어선 주택가 안쪽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메건이 비슷한 형태의 집들이 이어진 곳 앞에 차를 세웠다.“여기입니다.”애리가 차에서 내려 건물을 올려다봤다.2층짜리 타운하우스였다.첫 번째 콘도와 달리 각각의 집마다 현관이 따로 나 있었고, 앞쪽에
줄리안은 계속 바빴다.아침이면 작업실로 향했다가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녹음이 끝나면 편곡을 수정했고, 수정이 끝나면 다시 녹음이 이어졌다.노아는 베이스 라인을 다듬었고, 마커스는 키보드와 스트링 편곡을 여러 번 수정했다.라이언은 세 사람의 의견을 하나씩 정리해서 사운드를 맞춰 갔다.댄은 그 사이를 오가며 일정표를 계속 조정했다.3집은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그 사이 애리도 예일대학교 입학 준비를 차근차근 이어 갔다.어느 날 저녁.애리는 노트북으로 예일에서 온 메일을 읽고 있었다."줄리안."작업실에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있던 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응?""예일에서 메일 왔어."줄리안이 애리 옆으로 다가왔다.애리는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오리엔테이션 안내인데..."천천히 아래로 내리던 손가락이 한곳에서 멈췄다.'교외 거주 신청.'기숙사 대신 교외 거주를 희망하는 학생은 별도의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다는 안내였다.애리가 화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이거 신청해 볼까?"줄리안도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집은 어차피 구할 생각이었잖아.""그러니까.""미리 신청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애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날 두 사람은 신청서를 함께 작성했다.공개된 신분으로 인한 사생활 보호 문제와 학교 인근 거주 계획을 간단히 적어 제출했다.며칠 뒤 예일대학교에서 답장이 도착했다.결과는 불가였다.사유는 간단했다.학부생은 첫 네 학기 동안 교내 거주가 원칙이며, 예외는 기혼자나 만 21세 이상 학생에게만 허용된다는 내용이었다.애리는 메일을 읽고 줄리안을 바라봤다."안 된다네."줄리안이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결혼할 걸 그랬네.""그때?""나 졸업하기 전.""프롬 가기 전에 프로포즈했을 때.""그랬으면 같이 살 수 있잖아."애리가 줄리안을 쏘아봤다."줄리안~.""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안 되나?"줄리안이 멋쩍
햄튼에서 돌아온 지 이틀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줄리안은 기타 케이스를 닫고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소파에서 책을 읽던 애리가 고개를 들었다."오늘 작업실 가?""응.""댄이 오라잖아."애리가 빙긋 웃었다."3집 작업 잘하고 와."줄리안도 웃었다."그러게."애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줄리안 앞에 섰다.구겨진 셔츠 깃을 손으로 가볍게 펴 주었다."잘 다녀와."줄리안이 웃으며 물었다."넌 뭐 할 건데?""글쎄.""책 좀 읽고.""장도 좀 보고."잠시 생각하던 애리가 말했다."저녁은 내가 해 볼까?"줄리안이 피식 웃었다."또 라면?"애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아니야.""이번엔 다른 거 해 볼게."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주방은 살아남길 바래.“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줄리안!""끝나면 전화할게."줄리안이 웃으며 말했다."알았어."가볍게 입을 맞춘 뒤 줄리안은 현관문을 나섰다.***애틀랜틱 작업실.줄리안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노아와 마커스는 이미 와 있었다.잠시 후,문이 다시 열리며 댄과 라이언이 들어왔다.라이언이 멤버들을 둘러보며 웃었다."너희, 여름 잘 보낸 것 같다.""얼굴이 많이 탔네."마커스가 어깨를 으쓱했다."네. 뭐... 그럭저럭요."댄은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노래.""12곡이라고 했지?"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네.""들어보자."줄리안은 노트북을 스피커에 연결했다.바탕화면에 있는 폴더 하나를 열었다.[Horizon]그 안에는 열두 개의 데모 파일이 정리되어 있었다.줄리안은 첫 번째 트랙을 클릭한 뒤 재생 버튼을 눌렀다.첫 번째 곡은 햄튼 별장에서 처음 공개했던 'Summer Starts with You'였다.경쾌한 기타 리프가 작업실 안을 가득 채웠다.곡이 끝나자 작업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댄이 먼저 입을 열었다."좋네."곧바로 다음 곡이 재생됐다.어떤 곡은 30초 만에 넘어갔다.어떤 곡은 1분 정도 듣고 멈췄다.그
다음 날 아침.뉴욕의 한 연예 매체에는 짧은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실버라인 줄리안 웨스트, 이스트햄튼 파티서 미공개 신곡 깜짝 공개]실버라인의 보컬 줄리안 웨스트가 어젯밤 이스트햄튼의 한 별장에서 열린 비공개 파티에서 미공개 신곡을 선보인 것으로 알려졌다.관계자들에 따르면 줄리안은 통기타를 들고 신곡 **〈Summer Starts with You〉**를 처음 공개했으며, 현장에 있던 참석자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이번 자리는 멤버들과 지인들이 함께한 사적인 모임으로, 공식 공연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실버라인 측은 신곡의 정식 발매 일정과 3집 앨범에 대해서는 별도의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아침 신문을 펼쳐 보던 노아가 기사를 읽고 웃었다."너 또 기사 났네."줄리안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이번엔 뭐."노아가 신문을 내밀었다."어제 부른 신곡."줄리안은 기사를 훑어보고는 피식 웃었다."...빠르네."마커스가 신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아니, 어제 파티는 톰이 그렇게 사람들 관리했는데도 기사가 나네."줄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그러게.""나도 어디서 새는 건지 모르겠다."마커스가 문득 물었다."참, 톰은?"노아가 대답했다."아침 일찍 돌아갔어."그리고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이거 괜찮겠냐?""댄 또 전화 오는 거 아니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줄리안의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는 '댄'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줄리안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다."네."댄의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줄리안.""어제 신곡 공개했다며.""...""어디까지 불렀어?"줄리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한 곡이요."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던 애리와 레이첼도 자연스럽게 줄리안을 바라봤다.댄이 다시 물었다."확실한 거지?""네.""신곡은 몇 곡이나 썼나?"줄리안은 한 박자 생각한 뒤 대답했다."12곡입니다.""..."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이내 댄이 입을 열었다."내
"...잠깐."톰이 리아와 그 일행들의 진입을 막았다.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초대받은 사람이야?"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아니요.""여기 사는데요."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뭐?"리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여기 우리 집.""아니, 정확히는 우리 쌍둥이 동생 집.""근데 나도 맨날 와서."그러더니 별장 안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노아!""야, 노아!"잠시 후 노아가 현관으로 걸어 나왔다.리아를 보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너 왜 왔냐?"리아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무슨 소리야.""나도 여기 살잖아."노아가 헛웃음을 흘렸다."어제 아침에 짐 싸서 나갔잖아."리아가 입을 삐죽였다."그건…“노아가 어깨를 으쓱했다."나갈 땐 마음대로 나가도..."잠깐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들어올 땐 안 되지.""웃기지 마."리아가 막무가내로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톰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길을 막았다."오늘 파티는 초대받은 분만 입장 가능합니다."리아가 노아를 노려봤다."너, 정말 이럴 거야?"노아는 어깨를 으쓱했다."여기 계신 톰 사령관님 명령이야.""난 권한 없어.""잘 가라."리아는 분을 참지 못한 채 씩씩거리다가 노아를 한 번 더 노려봤다.“엄마한테 이를 거야.”노아가 피식 웃었다.“그래.”“엄마도 초대 안 받았어.”그렇게 말한 노아는 미련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리아는 한동안 별장을 노려보다가 등을 돌렸다."그냥 가자.""치사해서 원."그때 일행 중 한 명이 아쉬운 듯 말했다."실버라인 파티라며?""들어가서 사진 좀 찍으려고 했더니…"그 말을 들은 톰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졌다."계속 여기 있으면 경찰 부르겠습니다."톰의 말에 일행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슬슬 발걸음을 돌렸다.잠깐의 소동은 그렇게 끝이 났다.별장 안에서는 다시 음악과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누가 왔다 간거냐?"음악을 잠시 멈춘 DJ 케빈이, 안으로 들어온 노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