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다음 날 아침.줄리안은 거실 한쪽에 놓여 있던 기타를 집어 들었다.노아의 것이었다.소파에 앉아 몇 번 줄을 튕겼다.오랜만에 잡는 기타였다.손은 익숙하게 움직였다.코드 몇 개를 이어 보고, 떠오르는 대로 멜로디를 붙였다.나쁘지 않았다.줄리안은 같은 부분을 다시 쳤다.그리고 그다음을 이어 가려 했다.손이 멈췄다.다른 코드로 바꿔 봤다.몇 마디를 더 쳤다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이번에도 비슷한 곳에서 멈췄다.줄리안은 기타를 내려다봤다.다시 해 봤다.결과는 같았다.멜로디가 나오지 않는 건 아니었다.그런데 끝까지 이어지는 게 없었다.한참 후 줄리안은 기타를 소파 옆에 내려놓았다.그날은 다시 잡지 않았다.***8월 말.줄리안은 맨해튼에 있는 회사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맞은편에는 댄이 있었다.“세 달이 넘었어.”줄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투어 끝난 게 5월이야.”“알아요.”“알면 뭐라도 가져와야 될 거 아니야.”“없는데요.”댄이 줄리안을 쳐다봤다.“하나도?”“네.”“써 놓은 곡이 하나도 없어?”“전에 쓴 건 있죠.”“새로 쓴 거.”“없어요.”댄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줄리안은 별다른 표정
7월이 되었다.줄리안은 여전히 뉴헤이븐에 있었다.투어가 끝난 뒤 두 달 가까이 별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처음 며칠처럼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일은 없어졌다.대신 생활은 더 엉망이 됐다.아침인지 오후인지 모를 시간에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먹을 게 있으면 먹었고, 없으면 배달을 시켰다.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맥주를 마셨다.배가 고프면 과자를 뜯었다.기타는 거실 한쪽에 세워 둔 채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술도 맥주만 마셨다.두 달 전 버번 한 병을 다 비운 다음 날 죽을 것 같은 숙취를 겪은 뒤로 독주는 쳐다보기도 싫었다.그날도 다르지 않았다.줄리안은 소파에 반쯤 누운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며칠째 면도를 하지 않은 턱에는 수염이 제법 자라 있었다.머리도 마지막으로 자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헐렁한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손에는 맥주가 들려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뜯어 놓은 감자칩 봉지가 있었다.초인종이 울렸다.줄리안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다시 울렸다.이번에도 움직이지 않았다.세 번째.네 번째.결국 줄리안이 맥주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아, 진짜.”소파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마커스와 노아가 서 있었다.줄리안은 두 사람을 한번 보고 돌아섰다.“왜 왔어.”마커스와 노아가 뒤따라 들어왔다.줄리안은 다시 소파에 앉아 맥주캔을 집어 들었다.노아가 그 앞에 서서 줄리안을 위아래로 훑어봤다.“너 몇 살이냐?”줄리안이 노아를 올려다봤다.
며칠이 더 지났다.줄리안은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한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몸을 옆으로 돌렸다.다시 반대로 돌아누웠다.그래도 마찬가지였다.결국 이불을 걷어 냈다.이번에는 더 잘 수가 없었다.며칠 동안 하루의 대부분을 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줄리안은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냉장고를 열자 먹을 게 가득 들어 있었다.마커스가 사다 놓고 간 것들이었다.빵을 하나 꺼내 대충 먹었다.우유도 마셨다.배가 고프지는 않았다.냉장고 문을 닫았다.할 일이 없었다.줄리안은 거실로 나왔다.텔레비전을 켰다.몇 번 채널을 돌리다가 다시 껐다.기타를 집어 들었다.한동안 줄을 튕겨 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기타도 내려놓았다.휴대폰을 확인했다.쌓여 있던 메시지는 대부분 비슷했다.마커스.노아.댄.몇 개를 읽다가 화면을 껐다.시간이 지나지 않았다.줄리안은 소파에 누웠다.눈을 감았다.잠은 오지 않았다.다시 눈을 떴다.“미치겠네.”혼잣말이 조용한 거실에 떨어졌다.해가 지고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줄리안은 집 안을 돌아다니다 주방으로 들어갔다.찬장을 열었다.안쪽에 술병 하나가 보였다.버번이었다.언제 사 놓은 건지도 기억나지 않았다.줄리안은 병을 꺼냈다.잔도 하나 꺼냈다.처음에는 한 잔만 마셨다.
실버라인의 월드투어는 5월 23일에 끝났다.마지막 공연을 마친 멤버들은 다음 날 뉴욕으로 돌아왔다.공항을 빠져나온 줄리안은 곧바로 뉴헤이븐으로 향했다.몇 달 만이었다.차를 세우고도 한동안 내리지 않았다.익숙한 집이 눈앞에 있었다.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줄리안은 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향했다.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집 안은 조용했다.몇 달 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공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줄리안은 현관에 서서 안을 바라봤다.달라진 건 없었다.거실도, 주방도.마지막으로 이 집을 나갔을 때와 거의 같았다.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갔다.계단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2층으로 올라가니 애리가 쓰던 물건들이 있었다.한국으로 떠나기 전 애리는 뉴헤이븐에 남은 짐을 부탁했다.정리해 달라고.알겠다고 했다.그런데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줄리안은 계단을 올라갔다.침실 문을 열었다.옷장에는 애리의 옷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책상 위에는 학교에서 쓰던 책과 노트가 남아 있었다.욕실에도 애리가 쓰던 물건들이 있었다.줄리안은 문 앞에 선 채 방 안을 바라봤다.몇 달 전과 똑같았다.애리만 없었다.한동안 그대로 서 있던 줄리안이 침대로 걸어갔다.그리고 그대로 누웠다.천장을 바라봤다.투어가 끝났다.내일은 갈 곳이 없었다.모레도.줄리안은 눈을 감았다.얼마나 잤는지 알 수 없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도 방 안은 어두웠다.줄
다음 쉬는 날.애리는 다시 부동산을 찾았다.지난번에 만났던 여자가 애리를 알아봤다.“돈은 준비했어요?”“네.”“얼마까지 볼 건데?”“보증금 500이요. 월세는 30 정도.”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몇 군데 봅시다.”처음 본 방은 부동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오래된 건물의 3층이었다.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자 현관 바로 앞에 작은 주방이 있었고, 그 너머로 방 하나가 보였다.“여기는 500에 28.”애리는 안으로 들어갔다.방 한쪽에 작은 창문이 있었다.욕실도 확인했다.혼자 살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그런데 방을 둘러보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예전에 줄리안과 집을 보러 다녔던 날이 떠올랐다.뉴헤이븐에서 처음 집을 구하던 날이었다.마지막으로 본 주택은 욕실만 여섯 개였다.그때는 그런 집들을 차례로 둘러보면서 어디가 더 좋은지를 고민했다.애리는 눈앞에 있는 방을 다시 둘러봤다.여기는 이게 전부였다.작은 주방과 방 하나.그리고 욕실 하나.“어때요?”중개인의 목소리에 애리가 고개를 돌렸다.“괜찮아요.”“다른 데도 볼래요?”“네.”애리는 먼저 문밖으로 나왔다. 두 번째 방은 조금 더 넓었지만 반지하였다.창문을 여니 바로 앞에 도로가 보였다.애리는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세 번째 방은 편의점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건물은 오래됐지만 2층이었고, 앞에서 본 두 곳보다 햇빛이 잘 들어왔다.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뒤로 애리는 틈날 때마다 방을 찾아봤다.처음에는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하는지도 몰랐다.인터넷으로 근처 원룸을 검색해 보고, 쉬는 날에는 동네 부동산 앞에 붙어 있는 종이도 들여다봤다.생각했던 것보다 집은 많았다.문제는 돈이었다.월세만 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대부분 보증금이 필요했다.싼 곳도 몇백만 원은 있어야 했다.애리는 편의점에서 쉬는 시간마다 계산기를 두드려 봤다.한 달에 들어오는 돈에서 필요한 만큼만 쓰고 나머지를 전부 모은다고 해도 당장은 어림없었다.그렇다고 몇 달을 더 기다리고 싶지도 않았다.결국 쉬는 날 오후, 애리는 집 근처 부동산에 들어갔다.“어서 오세요.”책상에 앉아 있던 여자가 애리를 바라봤다.“방 좀 보려고요.”“어떤 방 찾으세요?”“혼자 살 거예요. 작은 방이면 돼요.”“이 근처로?”“네.”“그럼 원룸 보면 되겠네.”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제일 싼 게 어느 정도예요?”여자가 애리를 한번 바라봤다.“학생이에요?”“아니요.”“직장 다녀?”“아르바이트해요.”여자는 책상 위에 놓인 파일을 몇 장 넘겼다.“이 근처에서 혼자 살 거면 보증금 500 정도는 있어야 그나마 볼 만해요.”“500만 원이요?”“더 싼 것도 있기는 한데 상태가 별로고.”애리는 파일에 적힌 숫자를 내려다봤다.보증금 500만 원.월세는 30만 원 안팎이었다.“500이면 방 있어요?”“있죠. 좋은 데는 아니어도 혼자 살 만한 곳은 있어.”애리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