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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틀린 답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8 19:00:00

가을이 창을 보았다.

하나.

가을의 등이 굳었다. 카디건 어깨가 딱딱하게 올라갔다.

둘.

가을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뒷걸음질 치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창유리를 보고 있었다. 햇빛에 옅게 씻긴 교실. 칠판. 책상들. 그리고 자기 등 뒤에 선, 얼굴 자리가 빈 것.

셋.

가을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주 작게. 몇 걸음 앞에서 삼켜지는 목소리로.

"……열넷. 두려움은 앞에 세워 둔다. 도망친 자의 등 뒤가 가장 넓은 전장. 두려움은 없애는 것이 아니다. 앞에 세워 두는 것이다. 그 옆으로 걸어갈 수 있다."

외우고 있었다.

내 공책의 문장이었다. 갑옷을 입은 그 사람이 정문 유리 앞에서 해 준 말을, 내가 받아 적은. 가을은 그걸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우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등 뒤에 그것을 둔 채로.

"넷. 다섯."

가을이 셌다. 내가 셋을 세던 것처럼. 옹기 수면 앞에서 다섯까지, 일곱까지 세던 것처럼. 그것도 공책에 적어 두었다.

"여섯. 일곱……"

일곱에서 목소리가 끊어졌다.

가을이 창에서 눈을 뗐다. 몸을 홱 돌려 교실 안쪽을 보았다. 칠판 쪽. 창을 등지는 쪽. 유리 속 그것이 보이지 않는 쪽.

그리고 나를 보았다.

"……다 했는데요."

가을의 얼굴이 하얬다. 입술이 떨렸다.

"다 했는데 왜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백 일이에요."

가을의 목소리가 커졌다. 커져도 몇 걸음 앞에서 삼켜졌다. 그래서 가을은 더 크게 말했다.

"씻는다, 입는다, 먹는다, 적는다, 말한다, 기억한다, 배운다, 두 거울 사이에 앉는다. 여덟 칸. 백 일 동안 하루도 안 빠졌어요. 하나도 안 틀렸어요. 규칙 열다섯 개 다 지켰어요. 거울 다 덮었어요. 비치는 거 안 봤어요. 이름 부르지 말라고 해서 아저씨 이름도 안 불렀어요."

가을이 칠판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떨렸다.

"공책에 그렇게 써 있잖아요. 사람답게 하면 그림자가 짙어진다고. 내가 나를 놓으면 그림자가 옅어진다고. 저 안 놨어요. 하나도 안 놨어요."

그리고 가을이 말했다.

"아저씨 답이 틀렸어요."

그 말이 나를 쳤다.

그 열람실에서 무엄하다, 가 나를 쳤듯이. 교과서를 내리치던 손바닥처럼.

아저씨 답이 틀렸어요.

나는 입을 열었다. 무언가 말해야 했다. 틀리지 않았다고. 나에게는 맞았다고. 나는 그 여덟 칸으로 사 년을 버텼다고. 셔츠를 다리고, 이름을 쓰고, 무너지면 치우고.

그런데 가을에게는 틀렸다. 가을의 발밑이 그걸 말하고 있었다. 가을의 등 뒤가.

왜 틀렸지.

나는 알지 못했다.

같은 칸이었다.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은. 가을은 나보다 더 잘 지켰다. 나는 금을 빼먹었고, 일주일을 안 씻었고, 열람실에서 책을 집어 던졌다. 가을은 백 일 동안 하나도 안 틀렸다.

그런데 나는 짙어졌고, 가을은 옅어졌다.

왜.

말로 옮기려 하면 흩어졌다. 무언가가 거기 있었다. 대답의 모양 같은 것이. 그런데 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옮기는 순간 명령이 되었다. 공책을 베끼지 마라. 그럼 뭘 해요. 네 칸을 만들어라. 어떻게요. 몰라.

그 대화도 결국 가을에게 새 공책을 쥐여 주는 일이었다. 이번엔 베끼지 말라는 공책을.

"……가을 씨."

"말해 주세요."

가을이 한 걸음 다가왔다. 달려오지는 않았다. 한 걸음.

"틀린 데 말해 주세요. 빨간 펜으로 표시해 주세요. 어디서 틀렸는지. 고칠게요. 저 오답노트 잘 써요. 왜 틀렸는지 적고, 다시 풀고, 형광펜 칠하고. 그럼 다음엔 안 틀려요. 저 원래 한 번 틀린 거 두 번 안 틀려요."

나는 가을을 보았다.

반듯한 아이였다. 틀린 문제를 빨강, 파랑, 형광으로 적는. 왜 틀렸는지까지.

이건 오답노트에 적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모르겠어요."

가을의 얼굴이 멈췄다.

"모르겠다고요?"

"네. 모르겠어요. 왜 틀렸는지."

초침을 보았다.

서른 바퀴였다. 삼십 분.

지나 있었다. 지난번 방문보다 길었다. 그런데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서른하나. 서른둘.

가을이 교탁 쪽으로 걸어갔다. 도시락 가방을 집어 들었다. 두 팔로 끌어안았다. 가슴께에. 지퍼는 열지 않았다.

그리고 칠판 앞에 섰다. 분필 지우개를 집었다.

11번. 빨간 네모 네 겹. 정답 칸.

가을이 지우개를 들어 올렸다. 네모 위로.

멈췄다.

지우개를 든 손이 공중에서 떨렸다.

"……지우면 안 되는데."

가을이 중얼거렸다.

"적는 게 그림자를 지키는 건데. 지우면 안 되는데."

가을이 지우개를 내려놓았다. 칠판 받침대 위에. 반듯하게. 그리고 칠판 앞에 주저앉았다. 도시락 가방을 끌어안은 채.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었다.

울지는 않았다. 어깨가 떨리지 않았다. 그냥 거기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창을 보았다.

유리 속에서 그것이 가을을 따라 옮겨 와 있었다. 칠판 앞. 웅크린 가을의 등 뒤. 한 걸음도 안 되는 거리 그대로. 허리를 숙이고. 빈 얼굴로 가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나에게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서른다섯. 마흔.

나는 일어섰다. 천천히. 교실 앞으로 걸어갔다. 가을과 두 걸음 떨어진 칠판 아래 바닥에 앉았다. 책상다리로. 교실 바닥이 차가운 모양이었다. 차갑지는 않았다.

가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대답이 없었다. 빨간 펜이 없었다.

곁에 앉으러 왔다고 했다. 첫날에. 가을은 그게 다냐고 물었다. 실망한 얼굴로.

지금 나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마흔다섯.

유리 속의 그것이 조금 움직였다. 몸을 더 숙였다. 가을의 머리 가까이. 얼굴 자리가 가을의 정수리에 닿을 듯이.

나는 숨을 멈췄다.

"가을 씨."

가을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눈이 붉었다. 울지 않으려고 참은 눈.

"거기 있을 때, 나도 3이었던 날이 있어요."

가을이 나를 보았다.

"공책에는 짧게 썼어요. 점검표를 빼먹고, 셔츠 대신 회색 후드를 입은 날. 집 앞 편의점에 갔는데, 유리문에 그게 비쳤어요. 처음으로. 등 뒤에."

"……"

"넘어졌어요. 편의점 앞에서. 도망쳤어요. 12층까지 한 번도 안 쉬고 뛰어 올라갔어요. 계단으로. 해인이 만삭 때 쉬던 10층 계단참도 그냥 지나쳤어요. 집에 들어가서 욕실 거울을 수건으로 덮고, 이불 뒤집어쓰고 떨었어요."

가을이 무릎에서 얼굴을 조금 더 들었다.

"아저씨가요?"

"네. 이우진이요. 공책 쓴 사람이요."

가을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이 아니었다. 무언가 풀리려다 만.

"공책엔 그렇게 안 써 있었어요. 넘어졌다는 거."

"안 썼어요. 창피해서."

"……아저씨도 창피한 거 있어요?"

"많아요. 공책에 안 쓴 게 쓴 것보다 많아요."

가을이 나를 한참 보았다. 그러다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엔 어깨가 떨렸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몇 걸음 앞에서 삼켜졌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쉰.

가을이 무릎에서 고개를 들었다. 한참 만에.

"아저씨는 왜 짙어졌는데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똑같은 칸인데. 아저씨는 왜요."

나는 대답을 찾았다. 규칙 말고. 칸 말고.

"……셔츠를 다렸어요."

"공책에 있어요. 입는다."

"해인이 월요일마다 다려 둔 셔츠였어요. 일곱 벌. 칼라부터 다리는 사람이었어요. 한 벌 입을 때마다 해인 생각이 났어요. 다 입고 나서는 어머니가 물려준 철 다리미로 제가 다렸어요. 칼라부터."

가을이 나를 보았다.

"씻는다도 그래요. 해인이 사람은 씻어야 사람이라고, 잔소리 대신 욕실에 수건을 걸어 두는 사람이라서. 적는다는 해인한테 쓰는 편지였고. 기억한다는 서아 실내화였어요. 셔츠 안에 넣고 다닌."

"……"

"칸 이름은 같아도, 그 안에 든 건 전부 그 사람들이었어요. 공책엔 칸 이름만 적었어요. 안에 든 건 못 적었어요. 적을 수가 없어서."

가을이 오래 말이 없었다.

그러다 도시락 가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누빔 천이 구겨졌다. 연분홍. 작은 꽃무늬.

"저는 그런 거 없어요."

가을이 말했다. 도시락 가방에 턱을 괸 채로.

나는 그 가방을 보았다. 가을도 보았다. 아주 잠깐. 그러고는 눈을 돌렸다. 교실 바닥으로.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쉰다섯.

이렇게 오래 머문 적이 없었다. 돌아오고 나서.

알 것 같았다. 왜인지.

아저씨 답이 틀렸어요.

그 말 앞에서 나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벽이 아니었다. 벽이라면 두드려 볼 수 있었다. 수의 길 끝처럼 아무것도 없는 자리도 아니었다. 거기엔 무언가가 있었다. 가을의 등 뒤에. 가을의 발밑에. 백 개의 1과 3 사이에.

나는 그걸 알고 싶었다. 정말로. 수의 길 끝보다 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여기 있었다.

막힘의 깊이만큼 머문다. 그렇다면 이 막힘은 깊었다. 사 년 동안 쌓은 공책이 한 아이 앞에서 틀린 답이 된 자리. 그 자리가 이만큼 깊었다.

쉰여섯.

유리 속의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더 가까이 오지도, 물러나지도. 가을의 등 뒤에서.

가을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를 카디건 소매로 문질렀다. 얼굴이 엉망이었다. 서른 며칠째 교문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그런데 그 얼굴이 처음으로 가을의 얼굴 같았다. 칠판의 글씨 말고. 오답노트의 반듯함 말고.

"……아저씨 아직 안 가요?"

"안 가지네요."

"곧 한 시간인데요. 공책에 방문자는 십 초에서 한 시간이라고 써 있었어요."

"그럼 오늘이 제일 긴 날인가 봐요."

가을이 웃었다. 코로. 흥, 하고. 선배처럼. 이번엔 진짜 웃음이 조금 섞여 있었다.

그러고는 일어섰다. 도시락 가방을 안은 채로. 창 쪽을 보았다. 보지 않으려고 등지던 쪽을.

"……같이 세 주실래요?"

나는 일어나 가을 옆에 섰다. 두 걸음 떨어져서. 창 앞에.

유리 속에 둘이 비쳤다. 가을과 나. 그리고 가을의 등 뒤에 그것.

"하나."

가을이 말했다. 나도 따라 말했다.

"둘. 셋."

가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도 계속 셌다.

"넷. 다섯."

다섯에서 가을이 눈을 감았다. 나는 그 옆에서 계속 셌다. 여섯. 일곱. 그리고 일곱에서, 유리 속의 그것에게 허리를 숙였다. 도서관 옹기 앞에서 매일 아침 그랬듯이.

가을이 눈을 떴다. 나를 보았다.

"……왜 숙여요?"

"모르겠어요. 그러고 싶어서요."

"공책엔 그거 없었어요."

"안 적었어요."

가을은 유리 속의 그것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저는 안 할래요. 왜 하는지 모르니까요."

나는 그 말을 들었다. 백 일 동안 공책의 모든 줄을 베낀 아이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베끼지 않았다.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인지는 몰랐다.

초침이 쉰일곱 바퀴를 돌았다. 끝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손끝부터. 무언가가 나를 당기는.

"가을 씨."

"네."

"다음에 오면 보여 줄 게 있어요."

가을이 도시락 가방을 고쳐 안았다.

"뭐요?"

"거울 속 거울에. 내 공책 말고. 다른 사람들 공책이요. 가을 씨가 못 읽은 거."

"……아저씨 공책 옆에 있던 거요? 한자로 된 거, 꼬부랑 글씨로 된 거?"

"네."

"그거 읽으면, 틀린 데 알 수 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니까.

가을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해인이 택시에서 한 말이었다. 알았어. 알겠다는 뜻이 아니라, 기다리겠다는 뜻으로.

"그리고 가을 씨."

"네."

"오늘은 여덟 칸 다 안 해도 돼요."

가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그림자가 더 옅어지잖아요."

"모르겠어요. 그것도."

가을이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하려고.

초침이 예순 번째로 12에 닿았다.

한 시간.

새근, 새근.

서아의 숨소리.

서아 방. 침대 옆 바닥. 가로등 불빛이 그린 커튼 무늬.

내 손가락을, 서아의 작은 손이 쥐고 있었다.

아까 그대로. 한 시간 전 그대로. 일 초나 이 초 전 그대로.

나는 그 손을 보았다. 따뜻했다. 작았다. 손톱이 반달 모양이었다. 해인이 주말마다 깎아 주는.

서아는 모를 것이다. 아빠가 한 시간 동안 어디 있었는지. 손가락을 쥔 채로 잠들어 있었으니까.

가을은 한 시간 동안 도시락 가방을 쥐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빼지 않았다. 서아의 침대 옆 바닥에 앉은 채로, 창밖이 밝아질 때까지 있었다. 커튼 무늬가 흐려지고, 가로등이 꺼지고, 해가 떴다. 흘러서.

아저씨 답이 틀렸어요.

그 말은 떠나지 않았다.

해가 벽을 타고 내려올 무렵, 나는 떠올렸다. 도서관 3층 자료실. 거울 속 거울의 반쯤 부서진 서가. 먼지 안 앉은 빈자리에 다시 꽂아 둔 실 묶음 책. 그 첫 장보다 조금 뒤, 필사 씨가 적은 한 줄.

갓을 바로 쓰고 먹을 갈면 그림자가 짙어진다.

나는 갓을 쓴 적이 없었다.

여섯 시 반, 해인이 서아 방 문을 열었다.

나를 보고 멈췄다. 침대 옆 바닥에 앉은 나. 서아가 쥔 내 손가락.

"……밤새 여기 있었어?"

"세 시부터."

해인이 문틀에 기댔다. 잠옷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서아 깼었어?"

"응. 무서운 꿈 꿨나 봐. 아빠 거기 있냐고."

해인이 서아를 보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내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은 모양이었다.

"……또 갔지."

"응."

"몇 초였는지 모르겠네. 내가 못 봤으니까."

"여기선 이 초였을 거야."

"거기선?"

나는 해인을 보았다.

"한 시간."

해인이 숨을 들이켰다. 문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한 시간 동안 뭐 했어."

"앉아 있었어. 그 애 옆에."

"그게 다야?"

가을이 한 말이었다. 첫날에. 그게 다예요?

"응. 그게 다야.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었어."

해인은 한참 나를 보다가, 들어와서 내 옆 바닥에 앉았다. 서아의 침대 난간에 등을 기대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무겁게.

"한 시간이면 당신 다리 저렸겠다."

"……거기선 안 저려."

"여기선 저리잖아. 밤새 이러고 있었으면."

그랬다. 다리가 저렸다. 발끝부터 무릎까지. 찌릿찌릿. 흐르는 세상의 몸이었다.

해인이 서아의 손을 살짝 펴서 내 손가락을 빼 주었다. 서아가 뒤척이더니, 해인의 손가락을 대신 쥐었다. 자면서.

우리는 셋이서 그렇게 앉아 있었다. 해가 서아의 이불 끝에 닿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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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교수의 연구실은 이공관 사 층 복도 끝에 있었다.토요일 오전 열 시.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문에 붙은 이름표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발소리 들었어요. 토요일엔 이 층에 아무도 안 와서."한 교수가 흰 운동화를 신고 서 있었다. 회색 니트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방이었다. 창가에 말라 가는 화분 하나. 칠판은 지우개 자국으로 뿌옜다. 한 교수가 의자를 하나 비워 주었다. 의자 위에 쌓여 있던 논문 더미를 바닥으로 옮기면서.한 교수는 서른한 번째 장 복사본을 먼저 폈다. 빨간 동그라미 옆, 여백의 내 글씨. 같이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한 교수가 그 줄을 한참 보다가 웃었다. 소리 내어. 안경이 콧등으로 미끄러질 만큼."이게 무슨 수학이에요."그러고는 칠판 앞으로 갔다. 분필을 쥐고, 한 걸음씩 적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보았다. 틀리면 말했다. 거기 아니에요. 한 교수는 왜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흰 운동화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한 시간이 금방 갔다.한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이우진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이우진 씨 눈에 보이는 거요. 저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보여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한 교수가 기다렸다. 그러다 먼저 웃었다."그렇겠죠. 알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죠. 숙제로 할게요. 저도, 이우진 씨도."한 교수가 칠판 모서리를 분필로 톡톡 쳤다. 세 번. 그리고 칠판 한구석에 작게 적었다. 어떻게 보이는가.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이십 년 전에 제 지도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 세상의 뒷면   78화. 국밥

    바람이 없었다. 똑딱.교문이 아니었다.지붕이 있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지붕. 그 아래로 좁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고, 양옆으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천막, 좌판, 빨간 고무 대야, 플라스틱 바구니. 형광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시장이었다.나는 통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생선 가게. 얼음 위에 고등어와 갈치가 은빛으로 누워 있었다. 주인이 방금 물을 뿌린 모양이었다. 대야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유리 막대처럼. 물방울 몇 개가 갈치 비늘 위에 떠 있었다.맞은편 어묵 가게. 커다란 사각 냄비에 꼬치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다 멈춰 있었다. 하얀 솜뭉치처럼. 냄비 위 한 뼘에 걸려서.그 옆 전 가게. 넓은 철판 위에 기름이 끓다 멈췄다. 방울방울 부풀어 오른 채로. 동그랑땡 하나가 뒤집히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뒤집개 끝에서 반쯤 떨어져.전부 아침이었다. 늦가을 아침 여덟 시 칠 분의 시장. 장사를 막 시작한. 채소 가게 앞 소쿠리에 쪽파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새벽에 다듬어 놓은. 가격표가 매직으로. 한 단 삼천 원.아무도 없었다.그런데.통로 저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하얀 것이. 천장의 형광등 아래서. 피어올라서, 흩어지고, 또 피어올라서, 흩어지는.김이었다.흐르는.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통로 끝 가까이, 오른쪽. 간판이 낡은 작은 가게. 돼지국밥.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앞에 가마솥 두 개가 가스 화구 위에 올라 있었다. 하나는 김이 멈춰 있었다. 솥뚜껑 틈에서 새어 나오다 굳은 하얀 솜뭉치.다른 하나에서 김이 흘렀다.솥 앞에 가을이 서 있었다.교복 치마 위에 가게 앞치마를 두르고. 붉은색.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긴

  • 세상의 뒷면   77화. 한 교수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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