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길래 나도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성숙하고 듬직하며 잘생기기까지 했다.그의 나이는 조태혁 같은 풋풋한 애송이와는 비교가 안 됐다.아저씨라는 말이 이제는 칭찬처럼 들리는 시대다.성숙한 매력의 대명사가 아니던가.요즘은 다들 아저씨 취향 아니던가?젊은 아가씨부터 결혼한 부인 그리고 심지어 어린 소녀들까지도 진정우 같은 성숙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던가.그런데도 그는 아저씨라는 말을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 보면 이 호칭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나는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정우 씨 나이도 적진 않잖아. 특히 아까 그 풋내기 앞에서는 더 그렇고. 아직 열여덟도 안 됐는데 그 애가 정우 씨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뭐가 이상해?”“너도 내가 늙었다고 생각해?”진정우는 내 말을 끊으며 물었고 표정이 굳어 있었다.‘헉!’진정우가 이렇게 나이에 민감할 줄은 몰랐다.나는 급히 말했다.“내가 말한 건 네가 나이가 어리진 않다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싫어한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는데 그가 바로 말을 잘랐다.“다른 사람은 나이 얘기해도 상관없어. 근데 너는 안 돼.”“...”나는 할 말을 잃었다.그가 억울한 듯 화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혹시 내가 정우 씨 나이 때문에 싫어질까 봐 그러는 거야? 자존심 상해?”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삐져 있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됐어. 난 전혀 신경 안 써. 내가 좋아하는 건 너의 성숙한 매력이야. 안 그랬으면 아까 그 풋풋한 애를 왜 거절했겠어?”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나는 그의 볼을 살짝 비비며 다시 말했다.“진짜 어른답지 못하네. 이렇게 삐지는 거 보면.”문득 강유형이 떠올랐다.그 사람은 내가 사과 한마디만 하면 바로 넘어갔는데.그에 비해 진정우는 마치 삐친 아이 같았다.결국 나는 발끝을 들어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이 정도
나는 안리영과 선약이 있었기 때문에 점심은 진정우와 허진호랑 먹지 않았다.안리영의 말에 따르면 선배가 그들 병원에 객원 교수로 초청되어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인사를 나눴으니 나도 가서 만나보라는 것이었다.특히 진소영의 치료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기회라고 했다.“그럼 정우 씨도 같이 갈게. 어쨌든 소영이 오빠잖아. 직접 듣는 게 좋지 않을까?”그리고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결국 그의 몫이니 함께 있는 게 맞았다.안리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왜? 불편해?”“너 혼자 오는 게 좋겠어. 시간이 촉박해서 선배님이 잠시 쉬는 틈에 간단히 얘기하는 게 전부일 거야.”안리영이 이렇게 설명했다.나는 혼자 진소영의 병력을 들고 병원으로 갔다.안리영은 이미 날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가져온 병력을 확인한 후 곧바로 학술 강연장으로 안내했고 가는 길에 그녀가 말했다.“선배님이 정말 바쁘셔. 강연 끝나면 또 다른 일정이 있어서 아마 너는 4,5분 정도밖에 얘기할 시간이 없을 거야.”나는 어이가 없었다.“그렇게 바빠? 대통령급 아니야?”안리영은 내 농담에 웃으며 말했다.“그렇지 뭐. 지금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교수잖아. 우리 병원에 온 건 완전 행운이지. 아마 병원장이 큰 선물이라도 들고 가서 부탁했거나 정말 운이 좋아서 초청된 거겠지.”나는 안리영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녀의 말 속에서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졌다.안리영도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녀가 흠모하는 선배 앞에서는 그런 우수함이 빛을 잃는 것처럼 보였다.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그녀의 짝사랑은 쉽게 끝나지 않는 거겠지.사랑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을 때 더 아름답다고 했다.“너 그 선배랑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어?”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없어. 그 사람이 워낙 바쁘니까. 그리고 만약 따로 만날 수 있었다면 굳이 너를 부르진 않았겠지.”안리영은 웃으며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말했잖아. 그는 대단한 교수님이고 조교랑 스
그의 강연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의학을 모르는 나조차도 쉽게 이해할 정도로 명확하고 깔끔했다. 덕분에 현대 의학의 대단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너 왜 그래? 꼭 뭔가 수상한 짓이라도 한 사람 같아.”안리영은 내 감탄은 무시한 채 내 상태부터 지적했다.역시 산부인과 의사답게 눈치가 빨랐다. 내 이상함을 단번에 간파한 것도 모자라 이유까지 짚은 듯했다.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좀 피곤하긴 해.”안리영의 눈이 커지며 날 노려봤다.“진짜야? 누구랑?”“뭘 누구랑이야.”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안리영, 네 생각엔 누구겠어?”그녀는 날 한참 뜯어보더니 조용히 말했다.“진정우?”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정말 의외다. 강유형이랑은 10년을 넘게 지냈는데 결국 진정우가 먼저야?”“....”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뭐야, 네가 먼저 덮쳤어?”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장난스러운 말을 던졌다.나는 헛기침하며 말했다.“서로 좋아서 그렇게 된 거야.”안리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왜 웃어? 진짜라니까. 내가 억지로 그런 거 아니야.”“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그렇게 잘생기고 멋진 남자를 차지했다는 거지. 그럼 된 거야.”그녀의 말은 간결했지만 매번 날 놀라게 했다.나는 반격했다.“너는 이 많은 시간 동안 아무도 안 만나더니... 결국 네 목표는 구안석 교수님 같은 완벽한 남자였던 거야?”그녀는 태연히 말했다.“맞아. 마음에 드는 사람이면서도 뛰어난 사람이어야지.”“근데 진짜 구안석 교수님은 놓치기 아까운 사람이야. 마음 있으면 고백이라도 해봐. 혹시 모르잖아.”이번엔 내가 그녀를 부추겼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우린 안 될 거야. 내가 고백하면 결과는 딱 두 가지뿐일 테니까.”“어떤 두 가지?”그녀는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하나는 시작. 서로 사랑하며
“리영아, 나를 찾았다면서?” 구안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그러자 안리영은 빠르게 자세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선배, 이쪽은 내가 말했던 윤지원이야. 전에 수술 상담을 요청했던 진소영이 바로 지원이의 시누이이고.”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안리영이 한마디로 나를 진정우와 엮어버린 셈이었다.구안석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고 나는 재빨리 진소영의 병력을 그에게 건넸다.그는 병력을 받아 들고 빠르게 훑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소영 씨의 상태는 이미 파악했습니다. 병력과 대체로 일치하고요. 이 수술은 치료 효과가 확실합니다. 게다가 빨리 진행할수록 좋습니다. 이미 심장이식 대기 등록도 해두었으니 적합한 심장이 나오면 바로 수술 가능합니다.”“그럼 진소영 씨가 지금 바로 입원해서 이식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야?” 안리영이 전문적인 질문으로 대화를 이어갔다.“응. 최대한 빨리 진행하는 게 좋을 거야.” 구안석은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 순간 이상하게도 그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그저 선배가 후배를 바라보는 평범한 시선이라기엔 묘하게 다정함이 느껴졌다. 혹시 이건 일방적인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오가는 거 아닐까? 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구... 교수님.”나는 그의 호칭을 부르다 멈칫했다. 그는 이제 단순히 의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조만간 소영이를 입원시킬게요.”나는 재빨리 대답했다.안리영도 말을 덧붙였다.“선배, 바쁘신 와중에 신경 써주셔서 정말 고마워.”구안석은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입술이 살짝 움직이며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하얀 가운을 입은 여성이 다가왔다.그녀는 하얗고 고운 피부에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흰 가운과 잘 어울리는 우아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곱슬머리를 살짝 묶어 올린 모습은 완벽한 미인이었다.그녀는 자연스럽게 구안석의 옆에 멈춰 섰다.“구 교수님, 왕 원장님이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별거 아니야. 너랑 밥 한 끼 먹고 싶어서.” 구안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안리영은 잠시 멍해 있다가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이 바보 같은 계집얘... 또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거절하는 거 아니야?’그때 안리영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좋아요.”‘오! 생각보다 똑똑하네. 하긴 이렇게 멋진 남자를 멀리할 리 없지.’나는 속으로 안리영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녀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선배와 함께 아름다운 저녁 시간을 보낼 상상을 하고 있었다.그런데 그때 소희연이 끼어들었다.“졸업 이후로부터 우리 셋은 정말 오랜만에 만났네요. 다 같이 한 번 모이죠.”‘뭐라고? 정말 이렇게 눈치 없는 방해꾼이라고.’ 경험자로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소희연은 분명히 구안석과 안리영이 단둘이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이었다.안리영이 간신히 용기 내어 잡은 기회였기에 내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내가 말을 꺼내기 직전 안리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소 교수님, 저랑 구 교수님은 따로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놀랍게도 안리영은 이번에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이런 그녀를 보며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잡은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그녀의 태도가 돋보였다.하지만 소희연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아. 친구 가족분의 수술 관련 이야기겠지? 아마 모를 텐데 나도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어. 나중에 구 교수님과 함께 수술대에 설 거야.”‘와, 이건 정말 기가 막힌 이유네.’ 소희연이 수술에 직접 관여할 예정이라는 신분을 내세우다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끼어들겠다는 의지였다.안리영의 입술이 약간 떨리는 걸 보니 거절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그러나 그때 구안석이 나섰다.“희연아, 나랑 리영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그 한마디에 나는 속으로 외쳤다.‘이제 됐어!’이보다 더 완벽한 대응은 없었다.그 순간 소희연의 아름다운 얼굴이 굳어졌고 억지로 짓던 미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확실히 말할 수 있다고. 구안석 씨는 널 좋아하는 게 확실해.”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구안석이 안리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분명히 애정이 담겨 있었다.다만 지금의 안리영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그도 그럴 것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구안석을 짝사랑했지만 고백하지 못했다.그가 너무 뛰어난 사람이라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그녀의 이런 태도는 사실 스스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아마도 구안석이 직접 그녀에게 명확히 감정을 표현해야만 그녀가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다.이 문제는 내가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굳이 말을 더 할 필요도 없었다.“난 이만 가볼게. 오늘 저녁 잘 준비하고 예쁘게 꾸미고 약속에 나가. 그리고 근무는 미리 교대해 둬.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약속 깨는 건 절대 안 돼.”나는 마치 그녀의 엄마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엄마도 너만큼 나에 대해 그렇게 신경 안 써.”그건 그녀의 엄마가 딸이 이렇게 힘들게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힘내, 리영아!”나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그녀를 응원했다. “그럼 난 간다.”“잠깐. 그냥 가지 말고 나랑 사무실에 좀 들르자.” 안리영이 나를 붙잡았다.“왜? 빨리 가서 정우 씨랑 얘기해서 소영이를 입원 준비시키는 일 상의해야 하는데.” 나는 급한 일이라며 서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팔을 놓지 않았다.“조금만 시간 내. 금방이면 돼.”결국 나는 그녀를 따라 사무실로 갔다. 그녀는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이게 뭐야?”나는 그녀가 건넨 물건을 보며 물었다.뭔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가 사용법과 용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집에 가서 깨끗이 씻은 뒤에 발라. 부기를 가라앉히고 멍도 없애 줄 거야.”그제야 나는 그 약의 용도를 알아챘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이런 건 좀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나 필
똑같은 말이지만 지금 그의 입에서 다시 들으니 그저 비웃음처럼 들렸다.“알아. 나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까.”내 말에 강유형은 숨은 의미를 이해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괜히 내가 너무 신경 썼네.”나는 대꾸하지 않았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론 걸을 때 집중 좀 해. 딴생각하지 말고.”나는 짧게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순간 지난밤 꿈속에서 피투성이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지금 병원에 있는 그를 보니 괜히 가슴이 철렁했고 나는 본능적으로 물었다.“여긴 왜 온 거야?”그는 잠시 입을 열 듯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아픈 데 없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멀리서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유형 씨, 빨리 와요!”조나연이었다.강유형의 큰 키에 가려 그녀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그 순간 나는 그가 왜 병원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그가 아파서 온 게 아니라 조나연과 함께 온 것이다.굳이 이유를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조나연의 산부인과 검진을 위해 왔을 것이었다.그런데 나는 겨우 꿈 하나 때문에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니.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다.조나연의 부름에 강유형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나는 빈정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볼 일 있으면 먼저 가봐.”그렇게 말한 뒤 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차에 올라타자 휴대전화가 두 번 진동했다. 누군가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확인해 보니 조나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지원 씨, 당신과 유형 씨는 이미 끝났으니 앞으로는 유형 씨와 거리를 두길 바랍니다.”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나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불안하면 강유형의 허리에 끈이라도 묶어놓으세요. 난 상관없으니까요.”메시지를 보낸 뒤 난 조나연의 번호를 바로 차단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차를 몰아 회사로 돌아갔다.하지만 회사에 도착해 보니 진정우도 허진호도 없었다. 입사 환영회가 너무 즐거웠던
나는 갑자기 긴장감이 스쳤다. ‘설마 이 사람이 또 그럴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본능이라더니 정말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맛을 본 사람은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니 아무리 품위 높은 사람도 결국은 이겨내지 못하는 게 사랑인 것 같다.그래서일까.판타지 드라마 속 차가운 신들조차 금기를 깨고 연애를 한다는 설정이 이해가 갔다.사랑이란 하늘이 인간에게 준 가장 치명적인 약점일지도 모른다.진정우의 깊은 키스에 정신을 빼앗긴 나는 엉뚱한 생각들을 하다가 갑자기 입술에 살짝 아린 통증을 느끼고서야 현실로 돌아왔다.그는 이미 나를 침대에 눕힌 상태였다.그의 눈에는 강렬한 갈망이 가득했다.그의 목젖이 은근히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습 양팔로 내 몸을 감싸며 반쯤 몸을 지탱하고 있는 근육질의 팔 모든 게 한눈에 들어왔다.이 상황 자체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유혹 그 자체였다.내 몸은 알 수 없는 떨림과 함께 묘한 쾌감이 퍼지기 시작했다.찌릿찌릿.온몸을 감싸는 전류처럼 말이다.뭔가가 한 점에서 시작해 천천히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느낌이었다.나는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욕망이란 것이 이렇게 통제 불가능한 것임을 이제야 체감했다.그런데 어제의 불편함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터라 마음 한편에서는 불안감이 있었다.‘만약 정말 리영이 말했던 대로 무리하다 다치기라도 한다면 심지어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지?’이런 불안감은 내 머릿속에서 줄곧 맴돌았다.나는 마음을 다잡고 이 상황을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런데 진정우가 갑자기 몸을 숙이며 그의 얼굴이 내 뺨에 닿았다.그리고 그의 입술은 내 머리카락과 귀 언저리를 스쳤다.“수고했어, 우리 아내.” 그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다.이 한마디가 진소영의 수술 준비로 내가 고생한 것을 알아주겠다는 의미인 걸 알았다.그런데 아까 그가 너무 담담해서 나는 그가 별로 원하지 않는 줄 알았었다.“난 정우 씨가 별로 기뻐하지 않는 줄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