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공원 개장과 관련된 화제와 내가 얽힌 핫이슈는 무려 3일간이나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지만 결국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매일 새로운 화젯거리가 떠돌아다니는 소셜미디어에서 아무리 흥미로운 이야기라도 금세 다른 이야기에 밀리기 마련이다.이 3일은 조나연이 반격하기에 가장 적합한 타이밍이었지만 그녀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강유형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그 영상을 공개할 용기가 없었다.만약 공개한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고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기 때문이다.그렇다고 그녀가 이대로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살 시도’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쓸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나는 병실에서 삼촌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간호사가 달려와 누군가가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한다고 전했다. 그 말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게다가 임산부라네요. 산후우울증이라도 걸린 건지 모르겠어요.”간호사는 벌써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강유형이었다. 갑자기 눈꺼풀이 두 번이나 떨리며 불안감이 밀려왔다.“여보세요?”“지원아, 조나연이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대.”강유형의 목소리는 낮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조나연이 별의별 일을 다 벌여 왔지만 이번은 차원이 달랐다. 이번엔 자기 목숨을 걸고 심지어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생명까지 걸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삼촌이 옆에 있어 나는 전화를 들고 나가 통화하려고 하자 삼촌은 내 움직임을 눈치챈 듯 손짓으로 앉으라고 했다.“지금 어디야?”나는 강유형에게 물었다.“곧 병원에 도착해.”그의 대답에 나는 침을 삼키며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나 지금 아버님이랑 같이 있어.”강유형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아버지께 숨길 수는 없어. 조나연이 병원 옥상에서 난리를 치는 건 아버지한테 알리려고 하는 거잖아.”“그럼 넌 어떻게 할 생각인데?”나는 그에게 물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답이 그려졌다.조나연이 이런 수를 쓰는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며 나는 조나연이 옥상 끝으로 조금 더 다가서는 걸 똑똑히 보았다. 나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심장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와 상관없이 그런 장면 자체가 보는 사람의 숨을 멎게 하고 온몸을 긴장하게 했다.조나연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건 강유형이 옥상에 올라갔기 때문일 것 같았다.옥상이 너무 높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고 나는 그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내게 말했다.“아가씨, 핸드폰이 울리고 있어요.”그제야 정신이 돌아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강유형이었다.그가 지금 위에서 조나연과 대치 중인데 내게 전화를 걸 이유는 하나였다.조나연이 전화하게 시킨 것이다. 전화를 받자 예상대로였다. “지원아, 너 아버님을 모시고 여기로 올라와 줘.”나는 당황했다. 내가 올라가는 건 괜찮지만 왜 삼촌까지 불러야 한다는 건가?삼촌은 몸이 좋지 않으셨다. 조나연이 어떤 일을 벌이든 그것을 감당하는 건 무리가 될 수도 있었다.목이 뻣뻣하게 말라오는 느낌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옥상 끝에 선 조나연을 바라보며 전화를 끊고 인파 속을 헤치고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나는 삼촌을 부르지 않고 혼자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조나연이 나와 삼촌을 부르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계속 생각했다.옥상 문을 열자 강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소름이 돋았다. 강유형은 나를 바라봤고 나는 조나연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소방관이 조나연에게 물었다.“저 사람이 맞나요?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조나연은 답했다.“아직 한 명 더 있어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혼자예요. 삼촌은 몸이 안 좋아서 못 오셔요.”조나연의 얼굴이 굳었고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윤지원, 이쪽으로 와!”강유형이 그녀를 제지하려고 나섰다.“조나연, 지원이를 힘들게 하지 마. 내가 갈게.”조나연은 비웃으며 말했다.“강
조나연의 날카로운 비명은 마치 공기를 찢어놓는 듯한 울림으로 모두의 귀를 때렸다.“저분을 자극하지 마세요.”소방관이 다시 한번 내게 경고했지만 강유형이 손을 들어 막았다.그는 조나연이 진짜로 죽으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단지 연극에 불과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완전히 무너져 자살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쇼였다.역시나, 그녀는 소리를 지르다가 나와 강유형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겁만 주는 줄 알겠지? 진짜로 뛰어내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럼 오늘 내가 보여줄게. 내가 진짜 죽으려는 건지, 아니면 연기하는 건지.”그녀는 말하며 옥상 끝으로 한 발짝씩 물러섰다. 그녀의 발걸음을 볼 때마다 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진짜로 뛰어내릴 생각이 없더라도 발을 헛디디거나 중심을 잃는다면 결국 그녀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나는 그녀의 배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정확한 임신 기간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강유형과 헤어진 지 6개월이 넘었으니 최소한 6, 7개월은 되었을 것이다.조나연이 어떤 짓을 했든 그 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세상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생명이었다.내 안에서 그녀를 향한 분노와 연민이 뒤섞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좋게 말하거나 부탁해봐야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흐를 뿐이었다. 그녀의 탐욕을 겨냥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조나연, 네가 지금 뛰어내린다고 해도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네가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어. 그건 자살로 간주할 거고 네가 얻고 싶었던 모든 건 사라질 거야. 네 계획은 허사가 되고 널 사랑했던 그 남자의 희생도 무의미해지겠지.”내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난 아무것도 없어. 시댁에서도 버림받았고 친정에서도 외면받아.”그녀의 말에 지금 그녀가 얼마나 벼랑 끝에 몰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동생까지 그녀를 배신했으니, 더는 기댈 곳이 없었을 것이다.“윤지원, 내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강유형을 내게 줘. 강유형이 나와 결혼하게 해
조나연이 갑자기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난 상관없어! 강유형, 말해. 나랑 결혼할 거야? 말 거야?”강유형은 입을 꽉 다물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대답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솔직하고 단호하게 말했다.“조나연, 보상은 해줄 거라고 말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그의 대답에 소방관들조차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조나연의 눈에는 절망으로 가득 찼다. “내가 원하는 보상은 바로 너야!”강유형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조나연, 넌 날 함정에 빠뜨렸고 임석진을 죽게 했어. 내가 그걸 문제 삼지 않는 건, 오직 이 아이 때문이야.”강유형은 어릴 때부터 협박에 굴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의 어머니조차 그를 고집불통이라며 혀를 찼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단호한 태도는 조나연을 더 자극했다.“아이? 또 아이 얘기야?”조나연은 배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너희 모두 이 아이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럼 난 뭐야? 아이 낳는 도구야?”그녀는 눈빛을 번뜩이며 강유형을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이 아이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이 아이를 없애버릴 거야.”그러더니 그녀는 배를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떨렸다. 호랑이도 제 새끼는 해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여자는 너무도 잔인했다. 그녀는 아이를 도구 삼아 협박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조나연!”강유형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만약 이 아이가 잘못되면, 너를 지옥 끝까지 쫓아갈 거야.”하지만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나연은 배를 더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몰래 그녀에게 접근했던 소방관 한 명이 그녀를 재빠르게 끌어안았다.하지만 조나연은 본능적으로 몸부림쳤고 그녀는 건물 가장자리에 서 있었기에 소방관의 몸도 균형을 잃고 뒤로 기울어졌다.“아악!”조나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막으며 그 장면을 똑똑히 지켜봤다.소방관의 한 손이 건물 난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고
아이는 7개월 반 만에 조산으로 태어났다. 거의 투명에 가까운 몸으로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안리영조차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모든 건 이 아이의 운명에 달려 있어.”조나연은 결국 뛰어내리지 않았지만 아이와 함께 큰 대가를 치렀다. 그녀는 자궁 파열로 인해 대량 출혈을 겪었고 결국 자궁을 제거해야 했다.그녀가 목숨을 건진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이후 그녀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 아이는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아버지 없이 태어난 데다, 임석진의 부모님조차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조나연이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할지도 의문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사랑했다면 그렇게 무모한 짓을 반복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정우가 병원으로 나를 데리러 왔을 때 그의 표정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안리영은 내 옆에서 가볍게 어깨로 나를 쿡 찌르며 말했다.“너 남편 화난 것 같아.”나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너 이렇게 강유형이랑 얽히고설켜 있으면, 누가 안 화나겠어?”안리영의 농담 섞인 충고였다. 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진정우는 이미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그의 차가운 시선은 주위 공기마저 얼어붙게 했다. 우리가 함께한 이후로 그는 한 번도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나도 오늘 일이 조금만 어긋났다면 여기서 무사히 설 수 없었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나는 한 발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나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하지만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간절히 말했다.“다시는 그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게. 약속할게.”안리영은 가볍게 헛기침하며 다가왔다.“정우 씨, 당신 부인 이미 오늘 겁나서 혼쭐났을 텐데 그만 화 푸시죠. 이럴 땐 따뜻하게 안아줘야 하잖아요?”하지만 진정우는 안아주기는커녕 안리영에게 물었다.“확실히 아무 문제 없나요?”“의사인 나의 명예를 걸고
안리영이 웃으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어머, 이렇게 쉽게 대답한다고? 구 교수님한테 물어보긴 했어?”나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물어볼 필요 없어.”안리영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순간 깨달았다.“설마 내일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한 거 아니야?”“뭐, 그런 거지. 그래도 네 명이서도 괜찮아.”안리영은 윙크하며 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구 교수가 떠나는 걸 아쉬워하지 않을 리 없지만 안리영은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내일은 제대로 대접해야겠어. 그리고 이벤트도 준비하자.”나는 진정우에게 작게 속삭였다.“이벤트? 뭔데?”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럭셔리 스위트룸.”진정우는 스위트룸 대신 저녁 식사를 해동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호텔로 정했다.“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두 분 덕분에 과분한 대접을 받네요.”진정우가 청혼한 이후, 안리영은 나를 이미 진정우의 아내로 대하고 있었다.“구 교수님은 소영이를 살려주신 분입니다. 이 정도는 대접해야죠.”진정우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흰 가운 대신 세련된 정장을 입은 구 교수는 더욱 빛났다. 오늘 진정우 역시 평소와 달리 정장을 차려입었는데 드라마 속 재벌 2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정우 씨, 이렇게 멋지면 반칙 아니에요? 비주얼로 제대로 군기 잡는데요?”안리영이 감탄하며 말했다.“내가 고른 거야.”나는 자랑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녁 식사는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나와 안리영은 먹고 마시며 분위기를 띄웠고 구 교수는 친근하고 유쾌하게 사람들을 대했다.진정우는 평소 조용한 이미지와 달리, 구 교수와 학술적인 대화를 나누며 놀라운 지식 면을 보여줬다.“너희 집 진정우, 진짜 보물이네. 모르는 게 없어.”화장실로 가는 길에 안리영이 감탄하며 말했다.“그럼, 내가 온 우주를 돌아다니며 찾아낸 보물이거든.”나는 손을 씻으며 농담처럼 말했다.그 순간, 남자 화장실에서 강유형이 나왔다. 그는 나를
‘강씨 가문을 붙잡아 뒀다고?’이 말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진수로가 진정우에게 ‘우리’라고 표현했다는 점이었다.안리영도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인 채 진정우의 대답을 기다렸다.진정우는 고급 맞춤 정장을 입고 강한 카리스마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고위 결정권자 같았고 진수로는 오히려 그의 부하처럼 보였다.“힘들면 알아서 결정하세요.”진정우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그럼 오늘 강씨 가문과 최종적으로 논의할게.”진수로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고 곧이어 물었다.“시간 되면 한 번 같이 밥 먹자.”진정우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요즘 바빠서...”진수로는 거절당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더 해보려는 듯했지만, 진정우는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난 지금 약혼녀와 친구들과 저녁 식사 중이라 다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그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진수로는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려놓았다.그들이 멀어지자 안리영이 나를 쿡 찌르며 말했다.“야, 진수로가 진씨 가문의 상속자잖아. 그런데 진정우 앞에서는 마치 말단 직원 같네.”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건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진정우가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인재라서 그런가? 요즘 대기업들은 기술형 인재를 중요하게 여기잖아.”나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하며 웃었다.“하, 우리나라에 인재가 넘쳐나는데 그런 이유는 아닐걸?”안리영은 코웃음을 쳤다.“그럼 왜 그런 거지?”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혹시... 진정우도 진씨 가문 사람 아니야?”안리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 있다가, 그동안의 기억이 스쳐 갔다.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말도 안 돼. 소영이 수술비도 내가 냈는데 그가 진씨 가문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어.”“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런데...”안리영은 잠시 뜸을 들
나는 창밖의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그 둘이 정말 뭔가 있었다면 벌써 그런 기류가 있었겠지. 그랬다면 너한테 기회조차 없었을 거고.”“맞아. 내가 구 교수를 좋아할 때, 그도 날 좋아했어. 우리는 같은 주파수에 있었어. 비록 완전히 같은 차원은 아니어도.”안리영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너희는 정말 영혼의 짝 같아.”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물었다.“근데 너희 혹시... 그냥 영혼만 통하는 게 아니라 몸도...”안리영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아직은 아니야.”“그럼 그가 주저하는 거야? 아니면 네가 아직 망설이는 거야?”나는 그녀를 계속해서 놀렸다.“그냥 뭔가 아직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그녀는 숨김없이 솔직히 말했고 나는 고민하는 척하며 말했다.“그럼 오늘 나와 정우가 너희를 위해 호텔 스위트룸을 하나 잡아줄까? 분위기만 맞추면 다 잘 될걸?”“야, 됐거든? 그런 거 분위기 아니고 민망한 거야.”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내 말을 받아넘겼다.“근데 왜 그렇게 날 빤히 쳐다봐?”“네가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나 싶어서.”안리영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여자는 살짝 나쁜 구석이 있어야 남자가 더 좋아하는 법이거든.”우리는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는 진정우가 이미 돌아와 구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아까 화장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슬쩍 말을 꺼냈다.“아까 대표님 만났어.”“그래?”그의 반응은 여전히 미지근했다.“둘이 뭐라고 얘기했어?”나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화장실에서 잠깐.”진정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살짝 더 떠봤다.“근데 대표님이 KS 그룹이랑 협력 논의 중인 것 같더라.”“맞아.”이번에도 그는 짧게 대답했다.“응? 넌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