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내가 열네 살 때 어디 가고 싶다고 했는데?”
범준이 골목 모퉁이에서 멈춘다.
내 소매 끝을 본다.
돈가스 소스가 묻은 자리다.
“집에 가서 먼저 씻어.”
“내 질문이랑 소매가 무슨 상관인데.”
“굳으면 안 지워져.”
“어디냐고.”
“수족관.”
나는 접어 올린 소매를 놓는다.
수족관.
그 말을 입 안에서 한 번 굴려 본다.
“내가 그랬어?”
“응.”
“언제.”
“수영부 들어갔을 때.”
“너 그걸 아직 기억해?”
범준은 다시 걷는다.
“가고 싶다며.”
나는 잠깐 뒤처졌다가 따라간다.
‘도범준은 15년 전 목적지를 갖고 있다. 나는 오늘 휴대폰도 놓고 나왔다.’
“그걸 이제 가?”
“다음 주에 시간 되잖아.”
맞는 말이다.
이번에는 맞는 말인데도 곧바로 대꾸가 안 나온다.
나는 소매를 더 높이 접는다.
“됐고. 거기 매점 있어?”
범준이 나를 본다.
“있겠지.”
“없으면 곤란해.”
“물고기 보러 가는 거잖아.”
“물고기도 밥 먹어.”
범준 입가가 올라간다.
나는 앞을 보고 걷는다.
· · ·
5월 16일 토요일.
사진관 문을 열자 엄마가 내 가방을 먼저 본다.
“수족관 간다며.”
“응.”
“수영하러 가는 거 아니지?”
나는 방수 가방을 내려다본다.
“거기서 내가 들어가면 직원이 꺼내 주겠지.”
“가방이 너무 크다니까?”
“작은 걸 들면 물병이 안 들어가.”
엄마는 내 가방 안에 든 물병을 확인하고서야 비켜선다.
곧바로 다시 앞을 막는다.
“사진은 물고기만 찍지 말고.”
“아직 출발도 안 했어.”
“큰 물고기 옆에서 찍어. 둘이.”
길 건너 명숙부동산 문이 열린다.
범준이 나오고, 명숙 아줌마가 느리게 뒤따른다.
엄마는 내 옆을 지나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명숙아. 거기 멀다며?”
“지하철로 50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찾아봤지. 그렇지?”
아줌마가 범준을 본다.
범준은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도 나를 본다.
나는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았다.
“넌 뭐 알아봤어?”
“매점 있는지.”
“있대?”
나는 범준을 본다.
범준이 대답한다.
“있어.”
엄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됐네. 굶으면 재미없다니까?”
아줌마는 부동산 문을 잡은 채 말을 보탠다.
“경애야. 물고기 앞에서 먹으면 안 돼.”
“나도 그건 알아.”
나는 길을 건넌다.
범준이 가방끈을 당긴다.
“다 챙겼어?”
나는 휴대폰을 들어 보인다.
“물병도 있어. 오늘은 다시 안 올라가.”
사진관에서 엄마 목소리가 날아온다.
“큰 물고기!”
나는 범준 옆에서 걸음을 재촉한다.
“우리 엄마는 수족관을 사진 배경으로 알아.”
“보고 찍으면 되지.”
“너까지 그러면 나는 물고기보다 사진을 더 오래 봐야 돼.”
범준은 내 가방이 왼쪽 어깨에 걸린 걸 확인하고 앞을 본다.
“네가 보고 싶은 것부터 봐.”
· · ·
수족관 안은 생각보다 어둡다.
나는 입구에서 눈을 깜빡인다.
물소리가 먼저 들린다.
수조 안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맨 앞에 있는 물고기가 방향을 바꾸자 뒤에서도 한꺼번에 돈다.
나는 유리 앞에 멈춘다.
“잘하네.”
범준이 내 옆에 선다.
“뭘.”
“줄 맞추기.”
“애들 생각해?”
“우리 반은 한 명이 돌면 나머지가 다 다른 데로 돌아.”
작은 물고기 하나가 무리 밖으로 빠진다.
나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려다가 내린다.
유리 너머까지 직업을 가져오면 안 된다.
“쟤는 혼자 가네.”
“다시 오는데.”
정말 돌아온다.
범준은 내가 고개를 옮길 때마다 조금씩 자리를 비켜 준다.
나는 앞에 선 아이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빈 곳에 얼굴을 가까이 댄다.
물고기 배가 환하게 보인다.
“이래서 진짜로 보고 싶다고 했나 봐.”
“그때도 그 말 했어.”
“진짜로?”
“응. 물고기 진짜로 보고 싶다고.”
나는 고개를 돌린다.
범준은 수조를 보고 있다.
“어디서?”
“집 가는 길.”
“수영장 앞에서?”
“응.”
열네 살 봄에는 수영이 끝나면 늘 배가 고팠다.
나는 가방을 메고도 배고프다고 했고, 물을 마시면서도 배고프다고 했다.
범준은 매점 앞에 앉아 있다가 내가 나오면 일어났다.
그날도 그랬던 것 같다.
정작 물고기 이야기는 기억이 흐릿하다.
“나 그런 말 되게 많이 했을 텐데.”
“뭐.”
“가고 싶다는 거.”
“응.”
“그걸 다 기억하면 피곤하지 않아?”
범준이 내 쪽으로 몸을 돌린다.
“지금 피곤해?”
“아직 안 피곤해.”
“그럼 더 보자.”
내 질문은 또 옆으로 비켜 간다.
나는 다음 수조로 걸어간다.
범준도 따라온다.
발소리가 내 옆에서 난다.
· · ·
큰 수조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천장 가까이까지 물이 차 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한동안 위를 본다.
큰 물고기가 천천히 지나간다.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내 얼굴을 덮는다.
“엄마가 찾던 거다.”
나는 휴대폰을 꺼낸다.
범준은 내 손보다 수조를 먼저 본다.
“찍게?”
“임무 끝내 놓자.”
나란히 서서 화면을 켠다.
어둡다.
내 얼굴은 반쯤 나오고 범준 얼굴 뒤에는 물고기 꼬리만 잡힌다.
나는 팔을 조금 움직인다.
범준이 휴대폰을 받는다.
“여기 서.”
“너 사진 실력 늘고 있어.”
“네가 자꾸 움직이니까.”
나는 입을 다문다.
사진이 찍힌다.
화면 속 나는 웃고 있다.
범준은 내 옆에서 고개를 조금 낮췄다.
뒤에는 큰 물고기가 없다.
“실패네.”
“뭐가.”
“큰 물고기.”
“또 오겠지.”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린다.
작은 물고기가 지나간다.
그다음에는 꼬리가 긴 물고기가 온다.
큰 물고기는 저쪽 끝에서 몸을 돌리더니 다른 방향으로 간다.
나는 휴대폰을 든 범준의 팔을 본다.
“됐다. 엄마가 물고기 크기까지 재지는 않을 거야.”
범준이 휴대폰을 돌려준다.
나는 사진을 보낸다.
답장은 바로 온다.
『너희 얼굴이 잘 안 보여.』
나는 화면을 범준에게 내민다.
“큰 물고기 말고 얼굴이래.”
“밖에서 한 장 더 찍자.”
『그래도 같이 간 건 알겠네. 잘 보고 와.』
새 글이 올라온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는다.
“아니다. 통과.”
범준은 대답 없이 수조 쪽으로 돌아선다.
나도 옆에 선다.
물고기가 우리 앞을 지나간다.
나는 배 쪽을 보다가 지느러미를 본다.
범준은 한곳을 오래 보고 있다.
내가 고개를 기울여도 그대로다.
유리에 물빛이 흔들린다.
그 위로 범준 얼굴이 비친다.
물고기가 지나가도 눈이 따라가지 않는다.
나는 수조 안을 다시 본다.
범준이 보고 있는 쪽에는 아무것도 없다.
“야.”
“응.”
“뭐 봐?”
범준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대답은 잠깐 늦다.
“보고 있어.”
“그건 나도 알아. 뭘 보냐고.”
큰 물고기가 다시 우리 앞으로 온다.
이번에는 범준이 물고기를 본다.
나는 범준 옆얼굴을 보다가 얼른 유리로 눈을 돌린다.
‘물고기 보러 왔는데 옆사람 구경이 길어진다.’
“엄마가 좋아하겠다. 아까 저걸 찍었어야 하는데.”
“다시 찍을까?”
“아니. 배고파.”
범준이 백팩 앞주머니를 연다.
나는 손을 뻗어 막는다.
“매점까지 왔는데 젤리는 넣어 둬.”
범준이 지퍼를 닫는다.
“그럼 가자.”
· · ·
매점에는 우리가 앉을 자리가 있다.
나는 가방을 의자 옆에 내려놓고 주문하는 곳을 본다.
음식 이름보다 김이 나는 쪽에 눈이 간다.
“어묵 먹자.”
범준이 내 옆에서 묻는다.
“하나?”
“일단 하나. 같이 먹고 다른 것도 보자.”
범준이 주문한다.
나는 자리를 잡고 물병을 꺼낸다.
가방 아래쪽에 물방울이 조금 맺혀 있다.
손바닥으로 닦고 의자를 당긴다.
범준이 어묵이 담긴 작은 접시를 가져온다.
둘 사이에 놓는다.
나는 손을 뻗는다.
“뜨거워.”
범준이 먼저 꼬치를 든다.
“알아. 입으로 불면 돼.”
“잠깐.”
범준이 김이 많이 나는 끝을 작게 베어 문다.
곧바로 씹지 못한다.
입을 다문 채 잠깐 기다린다.
나는 물병을 밀어 준다.
“너 뜨거운 거 못 먹잖아.”
범준이 물을 마신다.
목이 움직인다.
나는 접시를 본다.
방금까지 김이 오르던 자리가 조금 줄었다.
범준이 꼬치를 내 쪽으로 돌려 놓는다.
“이제 먹어.”
나는 꼬치만 본다.
범준은 물병 뚜껑을 닫아 준다.
평소처럼 딱 맞춰 놓는다.
‘지금 도범준이 뜨거운 부분을 먼저 먹었다. 나는 그걸 봤다.’
입 밖으로는 다른 말이 나온다.
“너 한입이 너무 작아. 내가 다 먹겠다.”
“먹어.”
나는 어묵을 작게 문다.
따뜻하다.
입을 데일 정도는 아니다.
범준은 내가 내려놓은 꼬치를 집는다.
접시 하나가 둘 사이를 오간다.
나는 물병을 당겨 놓았다가 다시 가운데로 민다.
“더 먹을래?”
범준이 묻는다.
“조금 있다가.”
“배고프다며.”
“천천히 먹을 거야.”
괜히 밖을 본다.
매점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손을 잡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서 이번에는 접시를 본다.
빈 접시다.
볼 게 없다.
범준이 휴지를 내 쪽으로 민다.
“입.”
나는 입가를 닦는다.
묻은 것도 별로 없다.
“이런 데 올 줄 알았으면 다른 가방 들고 올걸.”
“물병 안 들어간다며.”
“그건 맞는데.”
“뭐가 불편해?”
“안 불편해.”
범준이 내 가방을 본다.
나는 가방끈을 발로 의자 밑에 넣는다.
“수영장 가는 사람 같잖아.”
“수영장 다니잖아.”
“일하러 가는 거랑 놀러 오는 건 다르지.”
“오늘은 놀러 왔어.”
범준이 말한다.
나는 휴지를 접는다.
다시 편다.
작전이라고 보태려다가 그만둔다.
이미 사진을 보냈다.
지금은 더 찍을 것도 없다.
· · ·
범준이 빈 접시를 정리하고 돌아온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앉는다.
“여기 의자 편하다.”
“더 앉아 있어.”
“시소보다 훨씬 낫네.”
범준이 맞은편에 앉는다.
“안 떠 있으니까.”
“너랑 앉으면 맨날 내가 떠 있잖아.”
“발로 버티면 되지.”
“옛날에는 발이 안 닿았거든.”
범준이 내 발 쪽을 본다.
나는 발끝을 바닥에 붙인다.
“지금은 닿아.”
“알아.”
나는 물병을 열었다가 닫는다.
시소 이야기를 하니까 공원 계단이 떠오른다.
밤에 올라가던 계단.
맨 위에서 기다리던 범준.
겨울이었다.
나는 뚜껑을 쥔 채 묻는다.
“그때도 시소였지?”
“언제.”
“열여섯 살 때. 12월 24일.”
범준 손이 테이블 위에서 멈춘다.
“네가 할 말 있다고 불렀잖아.”
나는 말을 계속한다.
“나 저녁 먹다가 나갔어. 엄마가 어디 가냐고 해서 너 만난다고 했고.”
그날 엄마는 더 묻지 않았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찬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범준은 시소 옆에 서 있었다.
내가 앉자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는데 기다리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했다.
우리는 가족이잖아, 그치?
범준은 잠깐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그치.
그 뒤에는 시소가 삐걱거리는 소리만 났다.
나는 물병 뚜껑을 놓는다.
“그때 무슨 말 하려고 했어?”
범준은 내 손을 보다가 눈을 올린다.
“그때 네가 가족이라고 해서—”
말이 끊긴다.
매점 안쪽에서 그릇 놓는 소리가 난다.
나는 기다린다.
범준이 입술을 한번 눌렀다가 뗀다.
“…나중에.”
“또 끝까지 물으면?”
“응.”
나는 물병을 당긴다.
“너는 질문을 왜 이렇게 어렵게 받아.”
범준은 웃지 않는다.
나는 뚜껑을 다시 연다.
물은 안 마신다.
“됐고. 그렇게 뜸 들이면 내가 엄청난 얘기인 줄 안다.”
“하늬.”
“뭐.”
“엄청난 얘기면 끝까지 들을 거야?”
뚜껑 가장자리가 손바닥에 눌린다.
나는 힘을 뺀다.
‘하나, 둘, 셋.’
범준은 기다린다.
재촉하지 않아서 더 대답을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신다.
“내용을 알아야 결정하지.”
“그러네.”
짧게 대답한다.
범준이 내 가방을 의자 옆에서 꺼내 세워 준다.
나는 물병을 넣는다.
지퍼가 한 번 걸린다.
다시 당기면 된다.
그런데 쓸데없이 물병을 돌려 넣는다.
“그때 나도 이상한 말을 했네.”
범준 손이 가방에서 떨어진다.
“뭐가.”
“친구한테 가족이라고.”
“오래 봤으니까.”
“그래도 가족은 아니잖아.”
말하고 나서 고개를 든다.
범준이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가방끈을 집는다.
“너 우리 집 식구면 엄마가 밥 세 공기 안 줘. 나도 그렇게는 안 줘.”
범준 입가가 조금 움직인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자. 다른 물고기 남았어.”
· · ·
수족관 밖으로 나오자 눈이 부시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구 옆에 선다.
범준이 휴대폰을 내민다.
“아까 사진.”
“또?”
“얼굴 안 보인다고 하셨잖아.”
나는 범준 옆에 선다.
이번에는 큰 물고기가 없다.
내 얼굴이 잘 보인다.
범준 얼굴도 그렇다.
나는 사진을 확인하다가 엄마한테 보낸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범준이 묻는다.
“다리 괜찮아?”
“응. 수영장이 더 힘들어.”
“앉아 가자.”
“지하철에 자리 있을까?”
“버스도 있어. 조금 걸으면 정류장.”
나는 길 쪽을 본다.
앉아 가자는 말에 발바닥이 갑자기 느껴진다.
“그럼 버스.”
범준이 걷기 시작한다.
나는 따라가며 휴대폰을 확인한다.
『이게 훨씬 낫네. 조심해서 와.』
사진 아래에 엄마 답장이 붙는다.
나는 화면을 끈다.
범준은 내가 멈추는 줄 알고 걸음을 줄인다.
“왜.”
“엄마가 조심해서 오래.”
“응.”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는다.
사진을 다시 확인하고 싶지만 지퍼까지 닫는다.
· · ·
버스에는 나란히 앉을 자리가 있다.
범준이 창가 쪽을 가리킨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앉는다.
방수 가방은 무릎 위에 놓는다.
범준은 백팩을 발 앞에 세운다.
버스가 출발하자 창밖 건물이 뒤로 움직인다.
나는 가방을 조금 끌어안는다.
“물고기 많이 봤다.”
“응.”
“우리 반 애들 오면 좋아하겠다.”
“너는.”
“나?”
“좋았어?”
나는 창문에 비친 범준을 본다.
바로 옆을 보는 건 조금 이상하다.
“응. 매점도 있고.”
범준이 작게 웃는다.
나는 가방 위에 턱을 잠깐 올렸다가 뗀다.
오른쪽 어깨가 당긴다.
범준이 곧바로 내 쪽을 본다.
“가방 내려놔.”
“괜찮아.”
“발 앞에 자리 있어.”
나는 가방을 내린다.
범준이 백팩을 옆으로 옮겨 준다.
두 가방이 발 앞에 나란히 선다.
버스가 천천히 흔들린다.
나는 창밖을 본다.
건물 이름을 읽다가 놓친다.
다음 것도 놓친다.
눈꺼풀이 내려간다.
“나 자면 깨워.”
“응.”
“정류장 지나가지 말고.”
“안 지나가.”
“너도 자지 마.”
“응.”
대답을 확인했으니 잠깐 눈을 감아도 된다.
창문 쪽으로 머리가 기울었다가 돌아온다.
딱딱한 데 닿을 줄 알았는데 다른 곳에 닿는다.
나는 눈을 뜨려다가 못 뜬다.
범준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자.”
· · ·
눈을 뜨자 제일 먼저 검은 옷이 보인다.
나는 잠깐 가만히 있는다.
그다음 내 머리가 어디에 놓였는지 안다.
범준 어깨다.
나는 몸을 바로 세운다.
가방은 여전히 발 앞에 있다.
버스는 움직인다.
범준도 같은 자세다.
“왜 안 깨웠어?”
“아직 안 왔어.”
“내가 이쪽으로 넘어왔잖아.”
범준이 고개를 조금 돌린다.
“잤잖아.”
나는 범준 팔을 본다.
왼팔이 팔걸이 옆에 붙어 있다.
손끝이 하얗다.
범준이 손가락을 펴려다가 멈춘다.
“야. 팔 저려?”
“조금.”
나는 어깨에서 더 멀어진다.
범준이 팔을 들어 보지만 손은 천천히 따라온다.
“많이 저린데?”
“곧 풀려.”
“움직이지 그랬어.”
범준은 손가락을 하나씩 굽힌다.
펴고, 다시 굽힌다.
나는 빈 물병을 꺼내려다가 멈춘다.
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범준 손등을 보다가 내 손도 무릎 위에 내려놓는다.
“나 무거웠지?”
“아니.”
대답은 빠르다.
나는 범준 어깨에 남은 작은 주름을 본다.
손으로 펴 주려다가 손끝을 거둔다.
“다음에는 꼭 깨워.”
범준이 손을 마저 펴며 나를 본다.
“다음에도 여기 기댈 거야?”
(8화 끝)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는다.“누가 누굴 데려가.”아영이 내 옆을 본다.범준은 내 방수 가방이 넘어지지 않게 의자 다리 안쪽으로 밀고 있다.“지금도 챙기잖아.”“가방이 넘어지니까.”“홍 쌤. 나 가방은 안 넘어져?”아영 가방도 반쯤 기울어 있다.나는 일어나서 바로 세워 준다.“됐다.”“왜 홍 쌤이 해?”“내가 가까워.”범준이 나를 올려다본다.입가가 조금 올라간다.나는 앉으면서 범준의 팔꿈치를 식탁 안쪽으로 밀어 준다. 옆을 지나가는 손님이 부딪힐 뻔한다.아영이 그걸 본다.나도 내가 한 걸 본다.젓가락을 다시 든다.“물회 먹어. 국물 남기면 아까워.”아영은 대답 대신 국물을 뜬다.범준도 그릇 쪽으로 몸을 당긴다.나는 식탁 아래에서 내 가방을 발로 한 번 더 건드린다.안 넘어진다.잘 세워 놨다.괜히 확인했다.· · ·6월 13일 토요일 오후.엄마가 내 손에 안경집을 얹는다.“아빠 갖다줘.”“아빠 어딨어?”엄마가 마우스를 누른다.사진 속 손님의 턱이 조금 줄어든다.“길 건너.”“길 건너에서 안경 없이 바둑 둬?”“안 보인다고 갖다 달래.”나는 안경집을 연다.
“그럼 지금 다시 물어보면?”범준이 의자를 고쳐 든다.“들어 줄게.”“대답을 해야지.”“의자부터 놓고.”나는 사진관 앞까지 걸어간다. 의자를 내려놓자 엄마가 화분을 가져온다.범준도 의자를 놓는다.엄마가 그 앞에 서서 물을 달라고 한다.질문 하나 하는 사이에 일이 또 생긴다.나는 범준을 보고 입을 연다.“너 다음에도 이렇게 말 돌리면—”“하늬야, 물.”엄마가 빈 물조리개를 내민다.범준이 대신 받는다.“제가 할게요.”나는 빈손으로 서 있다.대답을 받아야 하는데 도움을 받는다.이러면 따지기도 애매하다.· · ·6월 6일 토요일.수영장 바닥에 물이 튄다.나는 파란 줄을 목 뒤로 넘기고 새 호루라기를 입에 댄다.짧게 한 번.민들레반 아이들이 내 쪽을 본다.정확히는 절반쯤 본다.나머지는 관람석의 엄마를 찾고, 수영모를 당기고, 옆 아이 물안경을 구경한다.“민들레반. 발은?”“천천히!”대답은 빠르다.발은 더 빠르다.나는 출발대 쪽으로 뛰려는 아이 앞에 손을 편다.“입으로만 천천히 하지 말고.”아이가 걸음을 줄인다.옆에서 금아영이 물안경을 들고 웃는다.“홍 쌤, 얘들 목소리만 들으면 다 준비 끝났어.”“목소리로 헤엄치면 우리 반이 이겨.”“그건 수영이 아니야.”“알아. 그래서 지금 급해.”아영은 나와 같은 어린이반 수영 강사다. 긴 머리를 단단히 묶었는데, 아이들 수영모부터 바로잡느라 자기 머리 끝은 어깨에 붙어 있다.내 반 아이 하나가 아영 앞에 선다.“선생님, 자꾸 물 들어가요.”아영이 물안경 줄을 살핀다.“거꾸로 썼네.”“아빠가 해 줬는데.”“아빠도 긴장했나 보다.”아영은 아이를 탓하지 않고 물안경을 뒤집는다. 눈 주위에 잘 붙는지 손끝으로 살핀 뒤 줄을 맞춘다.나는 관람석을 올려다본다.보호자들이 유리 너머에서 손을 흔든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는 옆 사람 휴대폰을 내리게 한다.그 사이에 검은 백팩이 보인다.그 위에 도범준이 있다.정확히는 도범준이 백팩을 앞에 놓고 서
“다음에는 네가 창가에 앉아.”범준이 손가락을 폈다 굽힌다.“그러면 안 기대?”“내가 또 넘어가면 창문이 받아 주겠지.”“아플 텐데.”“그러니까 깨우라고.”버스가 멈춘다.범준은 먼저 일어나서 내 가방을 꺼내 준다. 나는 가방끈을 왼쪽 어깨에 걸고, 아직 덜 풀린 범준 손을 본다.“너 물리치료사잖아.”“응.”“자기 팔부터 잘 돌봐.”범준이 손을 내린다.“다음에는.”나는 대꾸하려다가 앞사람을 따라 내린다.다음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나도 방금 했다.· · ·5월 23일 토요일.사진관 앞에 플라스틱 의자가 쌓여 있다.나는 맨 위 의자를 든다.엄마가 바로 손잡이를 잡는다.“그거 말고 옆에.”“의자도 자리가 정해져 있어?”“그건 다리 흔들려. 내가 앉을 거야.”“엄마는 흔들려도 돼?”“나는 일어나면 되지. 어르신들은 허리 아프시다니까?”엄마는 의자를 바닥에 놓고 눌러 본다. 한쪽 다리가 조금 뜬다.나는 멀쩡한 의자 두 개를 포갠다.경로당 봄 잔치에 간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은 했다.놀러 간다.의자를 나른다.아마 접시도 나른다.놀러 가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의 차이는 도착해서 알게 된다.“하늬야, 그거 내려놔.”길 건너에서 범준이 온다.검은 백팩을 한쪽 어깨에 걸었다. 내 손에 든 의자부터 받는다.“두 개야.”“알아.”“나도 들 수 있어.”“그럼 저거.”범준이 접힌 식탁을 턱으로 가리킨다.나는 의자를 다시 잡는다.“됐고. 이쪽이 가벼워.”범준이 웃으며 식탁으로 간다.명숙 아줌마가 부동산 문을 잠그고 천천히 건너온다. 팔 아래에는 두꺼운 스프링 노트가 있다.엄마가 묻는다.“명숙아. 몇 개 모자란대?”“의자 넷.”“넷? 아까는 셋이라며.”“네가 앉을 것도 있어야지. 그렇지?”엄마가 흔들리는 의자를 가리킨다.“내 거 여기 있어.”아줌마는 의자 다리를 보고, 엄마를 본다.“그건 화분 올려.”범준이 식탁을 펼치려다 잠깐 멈춘다.나는 고개를 돌린다.웃으면 엄마가 나도 일 시킨다.
“내가 열네 살 때 어디 가고 싶다고 했는데?”범준이 골목 모퉁이에서 멈춘다.내 소매 끝을 본다.돈가스 소스가 묻은 자리다.“집에 가서 먼저 씻어.”“내 질문이랑 소매가 무슨 상관인데.”“굳으면 안 지워져.”“어디냐고.”“수족관.”나는 접어 올린 소매를 놓는다.수족관.그 말을 입 안에서 한 번 굴려 본다.“내가 그랬어?”“응.”“언제.”“수영부 들어갔을 때.”“너 그걸 아직 기억해?”범준은 다시 걷는다.“가고 싶다며.”나는 잠깐 뒤처졌다가 따라간다.‘도범준은 15년 전 목적지를 갖고 있다. 나는 오늘 휴대폰도 놓고 나왔다.’“그걸 이제 가?”“다음 주에 시간 되잖아.”맞는 말이다.이번에는 맞는 말인데도 곧바로 대꾸가 안 나온다.나는 소매를 더 높이 접는다.“됐고. 거기 매점 있어?”범준이 나를 본다.“있겠지.”“없으면 곤란해.”“물고기 보러 가는 거잖아.”“물고기도 밥 먹어.”범준 입가가 올라간다.나는 앞을 보고 걷는다.· · ·5월 16일 토요일.사진관 문을 열자 엄마가 내 가방을 먼저 본다.“수족관 간다며.”“응.”“수영하러 가는 거 아니지?”나는 방수 가방을 내려다본다.“거기서 내가 들어가면 직원이 꺼내 주겠지.”“가방이 너무 크다니까?”“작은 걸 들면 물병이 안 들어가.”엄마는 내 가방 안에 든 물병을 확인하고서야 비켜선다.곧바로 다시 앞을 막는다.“사진은 물고기만 찍지 말고.”“아직 출발도 안 했어.”“큰 물고기 옆에서 찍어. 둘이.”길 건너 명숙부동산 문이 열린다.범준이 나오고, 명숙 아줌마가 느리게 뒤따른다.엄마는 내 옆을 지나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다.“명숙아. 거기 멀다며?”“지하철로 50분.”“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찾아봤지. 그렇지?”아줌마가 범준을 본다.범준은 고개를 끄덕인다.엄마도 나를 본다.나는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았다.“넌 뭐 알아봤어?”“매점 있는지.”“있대?”나는 범준을 본다.범준이 대답한다.“있어.”엄마가 고
나는 거품 묻은 밥그릇을 돌려 본다.바닥까지 깨끗하다.“한 공기 먹는 애한테 왜 세 공기를 줘?”“달라니까 줬지.”“엄마가 먼저 물었잖아.”“물었는데 먹겠다잖아.”엄마가 물기를 닦은 접시를 찬장에 넣는다.나는 밥그릇을 헹군다. 밥풀 하나가 안 붙어 있다.‘도범준은 밥도 남기지 않고 내 반박할 거리도 남기지 않는다.’“다음에는 덜 줘.”“다음에도 부르게?”수돗물이 장갑 안으로 들어온다.나는 손을 든다.“그 말이 아니잖아.”“그럼 다음에는 안 불러?”“그것도 아니고.”엄마가 내 손에서 그릇을 받는다.오른손 장갑 끝을 조금 당겨 준다. 안에 든 물이 손목으로 흐른다.“그릇 그만 씻어. 수저만 마저 해.”“나 할 수 있어.”“할 수 있는 거 알아. 엄마도 할 수 있다니까?”나는 수저를 모은다.엄마는 범준이 쓰던 밥그릇을 물기까지 닦아서 올려 둔다.맨 위다.“걔 이번 주말에는 뭐 하니?”“몰라.”“만날 거 아니야?”“만날 때 물어보면 되지.”“그러면 어디 갈지도 모르니?”나는 수도꼭지를 잠근다.엄마가 나를 기다린다.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인데, 내가 어디 간다고 하면 거기까지 따라올 것 같다.“밥 먹겠지.”“뭐.”“밥.”“범준이는 밥을 잘 먹더라.”나는 젖은 장갑을 벗는다.‘이 얘기는 다시 세 공기로 돌아간다.’· · ·5월 9일 토요일.나는 신발을 신다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간다.엄마가 계단 아래에서 고개를 든다.“왜? 뭐 놓고 왔어?”“휴대폰.”“그걸 놓고 가면 어떡하니. 사진 찍어야지.”“연락부터 해야지.”“연락은 길 건너 가서 하면 되잖아.”맞는 말이다.그런데 사진을 찍어야 하는 이유가 먼저 나오는 건 이상하다.나는 방에서 휴대폰을 챙긴다. 물병은 방수 가방 안에 넣는다.아래층 사진관으로 내려오자 엄마가 보정하던 화면에서 눈을 뗀다.“오늘은 어디 가?”“옛날돈가스.”“돈가스?”“응.”“둘이 먹는 거지?”“다른 사람까지 부를까?”“둘이 먹으라니까?”엄마는 내가 먼
물병을 내려놓자 방문 밖에서 엄마가 부른다.“하늬야. 범준이 뭐 좋아하니?”나는 거울에서 눈을 뗀다.“왜.”“밥 먹일 거야.”“지금?”“토요일에.”나는 방문을 연다. 엄마가 빨래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서 있다.“엄마, 걔는 길 건너 살잖아.”“그래서 멀리서 오는 애만 밥 먹이니?”“집에서 먹으면 되잖아.”“우리 집에서 먹으면 안 되니?”대답하려다가 물병을 다시 본다.뚜껑은 아직 느슨하다.“너 어깨는?”엄마가 묻는다.“치료받았어.”“그러니까. 고맙다고 밥 먹여야지.”“그럼 나 치료해 준 사람 다 불러?”“범준이만 부를 건데.”엄마는 빨래 바구니에서 내 수건을 꺼낸다.내 손에는 안 주고 방 안 의자에 놓는다.“토요일 저녁. 너도 어디 가지 마.”“주말마다 한 번이면 되는데.”“뭐가?”나는 물병을 든다.“만나는 거.”엄마의 손이 수건 위에서 멈춘다.그러더니 수건 모서리를 반듯하게 맞춘다.“그 한 번 우리 집에서 만나면 되겠네.”나는 입을 다문다.맞는 말이라서 더 할 말이 없다.· · ·5월 2일 토요일.저녁상을 차리기도 전에 엄마가 내 자리를 옮긴다.내 물컵은 원래 아빠 맞은편이다.지금은 옆이다.그 옆에 물컵 하나가 더 있다.나는 컵을 원래 자리로 밀어 놓는다.엄마가 다시 가져온다.“거긴 범준이.”“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자리가 있어?”“손님 자리는 있어야지.”“나는 살고 있는데 자리가 없어?”엄마가 접시를 내민다.“이거 놔.”접시에는 오이무침이 담겨 있다. 나는 왼손으로 받아 식탁에 놓는다.엄마가 내 오른팔을 본다.“무거운 건 내가 할게.”“이 정도는 들어.”“범준이가 조심하랬다며.”“내 말은 안 듣고 걔 말은 들어?”“네가 조심하라고 했으면 네 말도 듣지.”나는 오이무침을 가운데로 민다.‘지금 봉경애가 내 반박까지 미리 꺼내 놓는다. 접시 놓을 자리만 남는다.’아빠는 식탁 끝에 앉아 생선 접시를 보고 있다.“아빠. 오늘 손님 오는 거 알아?”“어.”“누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