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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죽음 대신 남주의 침대로 들어갔다
악녀는 죽음 대신 남주의 침대로 들어갔다
作者: ALL장르

01.

作者: ALL장르
last update 公開日: 2026-09-06 20:15:33

01.

피 냄새가 코끝을 찌르다 못해 숨통을 막아왔다. 화려하고 고결하기 짝이 없던 발로아 공작가 저택의 복도는, 불과 몇 시간 만에 비명과 서걱거리는 묵직한 마찰음으로 얼룩진 도살장으로 변해 있었다.

바닥을 적신 검붉은 핏물이 드레스 자락을 축축하게 적시고 무겁게 발목을 잡아끌었지만, 뒤를 돌아볼 겨를 따위는 없었다.

‘제발, 제발……!’

원작 여주인공 세라피나를 괴롭히다 끝내 남주인공의 검에 목이 잘려 처참하게 죽는 악녀, '아그네샤 발로아'로 빙의한 지 어느덧 3년.

죽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 했다. 원작 속 인물들과 그 어떤 접점도 만들지 않기 위해 사교계는커녕 저택 문밖으로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세라피나라는 이름은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렇게 완벽하게 사태를 피했다고 생각했건만. 황실을 쥐락펴락하던 발로아 가문이 한순간에 모함받아 반역죄로 몰릴 줄은, 그리고 그 가문을 도륙할 처형 관으로 제국 최고의 검이자 아셰라드 공작가의 소공작이 직접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흐윽,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허겁지겁 계단을 돌아서려던 그 순간, 아그네샤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굳어버렸다.

피로 물든 복도 한가운데, 거대한 그림자가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칠흑 같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오만한 붉은 눈동자.

장검에서 붉은 피가 뚝, 뚝 떨어지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 밑바닥에서 걸어 나온 신마(神魔) 그 자체였다. 바실리안 아셰라드. 원작에서 나를, 아그네샤의 목을 베어 내던 남주였다.

3년 동안 그렇게 숨을 죽이며 여주와 남주를 피해 다녔건만. 결국 이렇게 그의 손에 목이 베여 죽는 악녀로 끝나는 걸까. 3년 동안 쥐어짜 냈던 그 모든 노력과 밤마다 두려움에 떨었던 시간이 이토록 허망하게 짓밟히는 걸까.

바실리안의 냉혹한 시선이 천천히 아그네샤에게 닿았다. 그가 쥔 검에 나직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살기가 소름으로 변해 피부를 칼날처럼 찌르고 들어왔다. 죽음의 공포가 온몸을 감싸며 사고를 마비시키려던 그 절체절명의 순간.

‘잠깐만, 바실리안 아셰라드……!’

터질 듯 요동치던 머릿속에서 벼락같은 기억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원작 소설 속 남주, 바실리안이 평생 숨겨 온 가장 치명적인 비밀.

제국 최강의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그는 실상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마력의 폭주를 홀로 견뎌내고 있었다.

혈관이 터져 나가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밤마다 홀로 삼키던 그를 구해낸 것이 바로 원작 여주, 세라피나의 순결한 신성 마력이었다. 세라피나의 신성 마력이 그의 폭주를 진정시키며 두 사람은 비로소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신성 마력이 발로아 가문 직계의 혈통에도 아주 희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세라피나가 있기에 아그네샤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아니, 보잘것없다고 여겼던 형질. 하지만 지금은 세라피나가 각성 전이었다.

스슥-. 죽음의 검날이 아그네샤의 목을 향해 느릿하게 들어 올려졌다. 시간이 없었다. 물러설 곳도, 망설일 여유도 없었다. 아그네샤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다잡고 똑바로 바실리안의 붉은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검 끝이 아그네샤의 얇은 목덜미 선에서 멈추었다. 피부에 직접 닿은 서늘한 쇠붙이의 감촉에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것 같았지만, 아그네샤는 눈을 감지 않았다. 도망치지도 않았다. 이것이 그녀가 쥘 수 있는 단 하나의 줄이었다.

“……유언치고는 다소 뻔하군, 발로아 영애.”

낮게 깔린 바실리안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자비나 동정 따위는 없었다. 그저 벌레의 몸짓을 구경하는 오만함뿐. 그러나 아그네샤는 멈추지 않았다.

“나를 살려 준다면, 당신의 마력 폭주를 잠재워 드릴게요.”

“……!”

순간, 바실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주변의 공기가 기압이 낮아지듯 묵직하게 가라앉았고, 그의 주위로 검붉은 오라가 일렁였다. 아무도 몰라야 할, 자신을 평생 괴롭혀 온 치명적인 비밀을 한낱 죄인의 딸이 알고 있다.

바실리안이 검을 내리고 왼손으로 아그네샤의 턱 끝을 강하게 쥐어 올렸다. 짓눌린 턱뼈에서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아그네샤는 이를 악물었다.

“영애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그게 중요한가요? 당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피를 토하며 무너질 것처럼 속이 뒤틀리고 있을 텐데!”

그의 동공이 가늘게 찢어졌다. 아그네샤의 말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오늘 밤 역시, 저택을 도륙하는 내내 폭주의 징후가 그의 뇌수를 짓밟고 있었다.

아그네샤는 속으로 빠르게 날짜를 계산했다. 딱 한 달. 한 달 후면 원작 여주인 세라피나가 자신의 힘을 완전히 각성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그 한 달 동안만 이 바실리안의 곁에서 '치료제'로 살아남으면 된다. 그리고 남주와 여주가 만나 운명적인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간, 흔적도 없이 도망치면 완전히 살 수 있다.

“한 달입니다. 딱 한 달 동안만 제 목숨을 보장해 주세요. 그동안 당신의 폭주를 억눌러 드리죠.”

아그네샤는 붉은 피가 번진 그의 장갑을 향해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단단한 손목을 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주 미미하지만, 그녀의 피부가 닿자마자 바실리안의 뇌리를 타들어 가게 만들던 그 지독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싹 멎어 들었다. 고통으로 얼룩졌던 그 시야가 순간적으로 맑게 트였다.

바실리안의 눈빛이 잔혹한 오만함에서 기이한 충격과, 핏빛에 가까운 욕망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 보잘것없는 아그네샤의 체온이, 손길이 제 안의 괴물을 잠재우고 있었다.

“……하.”

바실리안이 기어이 나직한 실소를 터뜨리며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턱을 거칠게 잡혀 있는 아그네샤를 내려다보며 그늘진 얼굴로 읊조렸다.

“좋다, 한 달이다. 아그네샤 발로아.”

그가 잡아챘던 턱을 놓아주며, 아그네샤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었다.

“만약 네 말이 거짓이거나 나를 낚기 위한 헛수작이라면…… 그땐 단순히 목을 베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차가운 숨결과 함께 죽음 대신 선택한 피할 수 없는 짓눌린 계약의 시작이 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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