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방을 다 가로지르기도 전에 내 두 손은 이미 그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적성 심사실에서 일었던 것보다 훨씬 더 뜨겁고 날카로운 온기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나는 가진 모든 것을 그에게 쏟아부었다. 내 능력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응답하며 그의 피와 장기, 그리고 생명이 꺼져가던 모든 구석구석을 쫓아 손상을 메워나갔다.
생각할 시간 따윈 없었다. 오직 매달려야 할 시간뿐이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단단한 돌바닥에 꿇어앉은 탓에 등허리가 쑤셔왔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타들어 가듯 욱신거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더욱 힘을 밀어 넣었다.
“버텨요. 내 곁에 있어요. 숨을 쉬어요. 제발… 숨을 쉬어 봐요.” 나직이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그의 육체는 거세게 저항했으나, 나는 내 안의 바닥난 줄도 몰랐던 기운까지 끌어모으며 더 필사적으로 맞섰다.
방 안은 점점 어두워졌고, 촛불은 낮게 타들어 갔으며, 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독이 아니었다.
이 손상은 외부의 공격으로 생긴 느낌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오래되고 깊숙한 무언가였다.
그의 몸 안에서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내적인 붕괴였다. 극에 달해버린 지병. 바닥에 쏟아진 강장제는 아마도 그 증세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알파의 숨소리가 먼저 달라지더니, 손끝 밑으로 뛰는 맥박이 점점 굵어졌다. 그의 가슴팍이 더 힘차게 부풀어 올랐고, 나는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짜 내리눌렀다.
그의 눈이 번쩍 뜨였고, 내 입술 사이로 턱 막힌 숨이 새어 나왔다.
아름다운 숲빛을 머금은 짙은 초록빛 눈동자가 내 얼굴에 고정되었다.
나는 탈진으로 온몸을 떨며, 손을 여전히 그의 가슴에 얹은 채 그 위에 꿇어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흘렀는지도 모를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시선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살아났다.
우리 둘 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방 안에는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내 이마가 그의 가슴 위로 푹 꺾여 떨어질 뻔했으나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안타깝게도, 그 버팀은 너무나 덧없는 것이었다.
문이 쾅 열려 젖혀졌다.
경비병들이 쏟아져 들어오며 방 안은 고함으로 가득 찼다.
“이 여자가 독을 썼다!” 첫 번째 경비병의 목소리가 공기를 찢어발겼다. “방랑자 놈이다! 저 여자가 알파를 죽였다!”
뒤이어 더 많은 고함이 등 뒤에서 메아리쳤다. 방은 순식간에 사람들로 메워졌지만, 나는 여전히 알파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내 손은 여전히 그의 몸 위에 얹혀 있었다.
“난 이렇게 쓰러진 걸 발견했을 뿐이에요.”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항변했다. “내가 살려낸 거라고요.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었어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크문 부인이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처참한 광경을 훑더니 이내 내게 가닿았다.
그녀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럴 줄 알았지. 내가 직접 저 방랑자에게 강장제를 전달하라 보냈거늘. 우리 알파를 살해하러 기어들어 온 거야. 불한당 같은 낯선 자들에게 성문을 열어주면 꼭 이 사달이 난다니까.”
나를 향해 삿대질하는 수십 개의 손가락과 함께, 방 안은 동조와 분노로 거세게 들끓어 올랐다.
나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 소리를 질렀다. “알파는 아픈 거예요, 내가 살려냈다고요! 직접 봐요! 숨을 쉬고 있잖아요! 깨어났다고요—”
더 많은 말을 쏟아내려 했지만, 왼쪽 눈 꼬리를 잡아당기는 흉터를 지닌 장신의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목소리를 내는 법조차 잊어버린 듯 말문이 막혀버렸다.
소음이 거짓말처럼 뚝 멎었고,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같은 위압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정체불명의 사내는 우리가 들이쉬는 공기마저 제 소유인 양 당당히 군중을 가르며 걸어왔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알파를 보았고, 나를 보았으며, 우리를 둘러싼 이 아수라장을 차갑게 둘러보았다.
그가 입을 열자 낮게 깔린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블러드팽 무리의 베타이자, 알파 디미트리 님의 2인자로서 명한다. 이 방랑자를 내일 해 질 녘까지 참수형에 처하겠다. 판결을 기다리도록 지하 감옥에 처넣어라.”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렸고, 두 손에서 시작된 한기가 팔을 타고 올라와 마침내 온몸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세상이 비틀거렸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구멍이 콱 막혀버렸다.
상황을 채 곱씹기도 전에 경비병들이 내 팔을 낚아채 억세게 끌어올렸다. 문가로 질질 끌려가는 내내 알파 디미트리의 초록빛 눈동자가 나를 쫓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기엔 몸이 여전히 너무 쇠약해 보였지만, 시선만큼은 거두지 않았다.
구원자 노릇을 자처한 대가가 고작 이것이었다.
경비병들은 나를 거칠게 끌고 가 집어삼킬 듯 캄캄한 지하 감옥에 내동댕이쳤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차가운 돌벽뿐이었다. 아무리 몸을 웅크려 감싸 안아도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파고들었다. 횃불의 희미한 불빛조차 감방 구석까지는 닿지 못했다. 내가 파멸로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간수 하나 없이, 내 마지막 밤은 이렇게 흘러갈 터였다.
나는 다리에 힘이 다 빠져 주저앉을 때까지 쇠창살 앞에 서서 기적처럼 문이 열리기만을 바랐다. 결국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와 더러운 짚단 위에 주저앉았다.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한 손은 배를 가만히 짓눌렀다.
내 아이.
스스로를 바닥까지 갉아먹을 정도로 모든 기운을 쏟아부어 버렸다. 그것이 뱃속의 작은 생명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알 수 없었고, 확인할 길도,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배 위를 천천히 문지르며 여신께 속삭였다. 제발 내 아이만큼은 무사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제야 돌벽을 타고 울리는 처절한 흐느낌과 함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외곽 구역 어딘가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있을 제나를 위해 울었다. 내일 죽음을 앞둔 어미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아 마땅할 아이를 위해 울었다. 한때의 나였던 여인과, 새장에 갇힌 신세를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낯선 이가 되어버린 지금의 나를 위해 울었다.
스카프 아래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팔은 쑤셔왔고 머리는 깨질 듯 지끈거렸다. 굶주림이 속을 쥐어뜯었고 극심한 피로가 뼈마디를 짓눌렀다.
결국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는 모양이었다.
그날 밤 잠은 찾아오지 않았고, 아침이 밝았을 때의 나는 전날 밤보다도 훨씬 더 무너져 있었다.
경비병들이 나를 데리러 들이닥쳤고, 그들이 나를 질질 끌고 가기 전에 먼저 제 발로 일어섰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망가진 목덜미를 가린 스카프를 단단히 여민 뒤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걸어 나갔다. 오늘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내가 무너지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성을 빠져나가는 길은 끝없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빤히 쳐다보았고, 발걸음마다 수군거림이 뒤따랐다. 그 속에서도 시선을 정면으로 둔 채, 자꾸만 배로 향하려는 손을 억눌렀다.
내 최후를 지켜보려 안달이 난 군중들 앞으로 광장이 넓게 펼쳐졌다.
그러나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제나의 얼굴이었다.
맨 앞줄에 서 있던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내게 꽂혔고, 턱을 어찌나 악물었는지 턱 근육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제나가 내 죽음을 그저 지켜만 볼 거라 생각한 것은 내 오산이었다. 그녀는 내게 다가오려 사람들을 거칠게 밀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비병이 그녀의 팔을 낚아챘지만, 그녀는 거칠게 반항했다. “손 치워! 내 동생이야—”
다른 경비병이 끼어들었다. “끼어들면 너도 같이 목이 날아간다.”
제나는 그 어느 때보다 광기 어린 눈빛으로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찢기는 형벌이었지만, 차마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제나!” 생각보다 더 부서져 나온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멈춰. 제발. 그만해. 난 안 되겠어… 제발 그냥 멈춰.”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굳어졌다. 그녀의 얼굴 어딘가가 산산조각 났고, 마침내 내 무언의 메시지를 알아들은 듯 저항을 멈췄다. 경비병들이 여전히 그녀를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만큼은 끝내 나를 떠나지 않았다.
베타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서늘한 눈빛으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우리 법률에 따라 입국을 허가받은 이 방랑자는 알파 디미트리 님을 암살하려 시도하였기에, 그 죗값으로 처형될 것이다. 이는 블러드팽 영역 안의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경고이자 본보기가 될 것이다. 똑똑히 새겨두도록!”
그가 경비병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마지막 발악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외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난 그분을 살렸다고요! 죽어가던 걸 발견했을 뿐이에요! 그분은 아팠고,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속에서 무언가 잘못되어 있었다고요! 내 능력을 쓴 거예요! 그 방에서 내가 한 일 덕분에 지금 그분의 심장이 뛰고 있는 거라고요!”
군중 속 몇몇의 표정이 흔들렸지만, 판결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들의 눈에 나는 여전히 살인자에 불과했다.
베타는 바닥을 성미 급하게 딱딱 두드리며 다시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나를 끌어다 자리에 앉혔고, 나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제나를 응시하며 조용히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내게 유일하게 소중했던 두 존재만을 마음에 품은 채 마지막 숨을 거두리라.
경비병들이 참수를 집행하기 위해 자세를 잡는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자를 놓아라!”
눈이 번쩍 뜨였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몸조차 간신히 가눈 채, 알파 디미트리가 광장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경비병들을 거느린 그가 걸어 나오자 군중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는 자신의 베타 앞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 참수당할 자는 없다. 내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나오지 않는 한은. 이 방랑자 여인은 나의 개인적인 비호 아래에 있다. 이 여자는 나의 새로운 전속 치유자이며,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다.”
그의 목소리가 광장 전체를 뒤흔들며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의 짙은 초록빛 눈동자가 다시 내게로 내려앉았다.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온몸의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얕은 숨만을 몰아쉬며 누워 있었다. 입술은 퉁퉁 부어올라 낯설게만 느껴졌다. 성난 두드러기가 돋아난 목덜미와 턱선을 따라 뜨거운 열기가 번져나갔다. 손이 힘없이 목덜미로 올라가 짓무른 살갗을 긁어대려다 가까스로 멈추었다. 매 호흡이 이전보다 더 무겁게 짓눌려왔다.알파 디미트리가 침대 곁에 서서 짙은 숲빛 눈동자로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 위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턱 근육이 굳어지는 모양새가 마치 무슨 말이라도 내뱉으려는 듯 보였다.그러나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그가 즉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들어와라.”다크문 부인이 작은 쟁반을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뚜껑이 덮인 음식 접시 옆에 놓인 찻잔에서는 탕약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따스한 육수와 갓 구운 빵의 구수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여느 때 같았으면 군침이 돌았을 냄새였다. 하지만 지금은 뱃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메스꺼움이 미처 입맛을 느낄 틈도 없이 식욕을 짓눌러버렸다.그녀가 침대로 다가오자 알파 디미트리의 미간이 좁아졌다. “음식을 가져오라 명한 적은 없다만.”다크문 부인의 목소리는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어조보다 부드러웠다. 다정하기까지 했다. 그녀에게 그런 면모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염려의 기색이 묻어나고 있었다.“환자에게는 제대로 된 영양 공급이 필요합니다, 알파.” 그녀가 말했다. “스칼렛의 건강이… 염려스러워 챙겨왔습니다.”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으나, 부어오른 목구멍에 걸려 소리가 되지 못했다.내가 알던 다크문 부인의 모습이 아니었다.내 간곡한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종일 내 목구멍 속으로 견과류를 억지로 쑤셔 넣던 여자가… 치유소 전체가 보는 앞에서 나를 처참하게 짓밟고 모욕하던 여자가… 이제 와서 불현듯 내가 살든 죽든 진심으로 신경 쓰는 척 굴고 있었다.대신 억지 미소를 지어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천 가방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그녀의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내가 먼저 움직였다. 무릎이 꺾이며 맥없이 허물어지는 그녀를 한쪽 팔로 감싸 안아 지탱하자, 축 늘어진 육신이 내게 와닿았다.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미간을 찌푸렸다.몇 걸음 만에 침대로 가닿았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매트리스 위에 뉘였다. 그녀의 짧은 붉은 머리칼이 어두운 침대 시트 위로 흐트러졌고, 그 선명한 결은 마치 흘린 피처럼 도드라져 보였다.시선으로 그녀의 온몸을 훑었다.입술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목덜미에는 시뻘건 두드러기가 얼룩덜룩 돋아나 스카프 자락 아래를 지나 턱선을 향해 번져가고 있었다. 그녀의 한쪽 손이 힘없이 목덜미로 올라오더니, 멈출 수 없다는 듯 손끝으로 부어오른 살갗을 긁어댔다.호흡은 마땅히 그래야 할 박자보다 훨씬 가빴다. 얕고 불규칙했으나, 다행히 기도가 완전히 막히지는 않은 상태였다. 창백했던 본래의 안색 위로 기이할 정도의 붉은 열꽃이 번져 있었다.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맥박이 빨라졌다.주먹을 꽉 쥔 채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녀는 한낱 치유사일 뿐이었다. 오늘 밤 목숨을 잃는다 한들 내 처소에 다른 치유사를 배정하면 그만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내 강장제를 확인하고, 매일 밤 진맥을 올리며 똑같은 소임을 다하면 될 일이었다.말도 안 되는 헛된 생각이었다.수년간 수십 명의 치유사들이 나를 거쳐 갔다. 그들은 나를 살피고, 상태를 감시하며, 기력을 북돋아 주리라 믿는 온갖 강장제를 달여 올렸다. 하지만 그들 중 단 한 명도 내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 나는 그저 쉽게 피로해지거나 무리하게 일을 도맡는 알파로 보였을 뿐이었다. 의문을 품은 자도, 그 이면을 파고든 자도 아무도 없었다.오직 그녀만이 달랐다.남들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지나칠 때, 나를 마주하고 지병의 존재를 꿰뚫어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방 한가운데 놓인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내 주위로,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다 결국 실패한 치유사들이 둘러서 있었다. 잔혹한 구경거리의 원치 않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으나, 그들의 시선이 몇 번이고 내게로 닿는 것이 느껴졌다. 몇몇은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고, 다른 이들은 거의 동정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대다수는 그저 거리를 유지했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어깨를 안으로 웅크리며, 최대한 작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려 애썼다.위장이 비틀리듯 쥐어짜며 날카로운 허기의 고통에 절로 낯이 찌푸려졌다. 밤새도록 차오른 굶주림은 이제 외면하기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당장이라도 바닥이 입을 벌려 나를 삼켜버렸으면 싶다가도, 탈진에 찌든 또 다른 내면은 이것도 엄연한 음식이라며 나를 다독였다.먹을거리를 찾아 헤매던 차에, 마침 알아서 음식이 내게로 오고 있지 않은가. 치유소 전체의 감시 어린 눈초리 아래서 한 접시 한 접시 맛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은 먹을 수만 있다면 그만이었다. 그 생각 하나에 매달려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어느 젊은 치유사의 손에 들려 첫 번째 쟁반이 도착했다. 접시를 내려다보기도 전에 향긋한 냄새가 먼저 코끝을 스쳤다. 향기로운 약초로 간을 한 구운 고기, 빵 껍질 사이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빵, 아침 햇살 아래 번들거리는 버터에 버무린 채소들.입안에 침이 고였다.그 소중한 찰나의 순간, 그 밖의 모든 것이 시야에서 지워졌다.수색도. 엘비스도. 천 가방 속에 숨겨둔 책들도. 알파 디미트리의 비밀도.쟁반이 내 앞에 놓이는 순간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오직 음식에 대한 생각뿐이었다.떨리는 손가락으로 작은 시식용 포크를 집어 들고 첫 조각을 입에 넣었다.고기는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릴 만큼 연했고, 약초 향이 풍부하게 배어 있었으며 주방의 열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빵은 힘을 주지 않아도 부드럽게 찢어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치유소 서고 안으로 다시 발을 들이며 등 뒤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마침내 잠금쇠가 맞물릴 때까지 열쇠를 쥔 손가락이 헛돌았다. 금속이 제자리를 찾아 미끄러지는 나직한 긁힘에 가슴속에 팽팽하게 엉켜 있던 긴장이 조금은 풀려나갔다. 내가 결코 손대서는 안 될 책들에 둘러싸여 있는 꼴을 누군가 들이닥쳐 보게 되는 일은 없을 터였다. 특히 다크문 부인은 더더욱.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이곳에서 나를 꿰뚫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웠다. 오늘 밤에는 또 다른 충돌을 감당해 낼 여력이 없었다.깊은 밤의 서고는 사뭇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천장의 매립등이 서가 위로 창백한 불빛을 드리우며 좁은 통로마다 짙고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거치대에 꽂힌 태블릿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내가 스쳐 지날 때마다 검은 화면 위로 희미한 빛이 반사되었다. 서늘하고 고요한 공기 속에는 낡은 종이와 말린 약초 냄새, 그리고 전자기기 특유의 희미한 쇠 냄새가 배어 있었다. 서가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매끄러운 돌바닥 위로 발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옆구리에 찬 천 가방이 조금씩 더 무거워지는 듯했다.분명한 목적을 품고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서가에서 책을 한 권씩 뽑아 불빛 아래서 재빨리 내용을 훑어본 뒤, 천 가방에 집어넣을지 아니면 다시 선반에 꽂아둘지 가늠했다. 피로로 눈이 타들어 갈 듯 시렸지만 멈추지 않았다.어느 책 한 권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의학 전문서라기보다는 동화책에 더 가까워 보이는 얄팍한 책자였다. 삽화는 세월에 바래 있었고, 책장은 닳고 닳아 부드러웠다.그 책은 피가 기묘한 그림자에 집어삼켜진 어느 알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그저 민담에 불과함이 분명했고, 알파 디미트리를 괴롭히는 그 지병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그러나 그의 명령이 머릿속을 울렸다.‘모조리 찾아내 치워라.’요행을 바라고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그 책은 내 천 가방 속으로 사라졌다.서가를 훑으며 태블릿의 데이터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잠시도 가만히 서 있지 못한 채 방 안을 서성였다. 천 가방을 가슴팍에 꼭 끌어안은 채였다.수색이 끝난 뒤 성 안에는 불안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치유사들은 모두 일찌감치 물러났고, 심지어 다크문 부인조차 날 선 말 한마디 던지지 않은 채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이래 갑옷처럼 두르고 있던 그 꼿꼿한 침착함이 엘비스에게 닥친 일의 무게에 짓눌려 금이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손목을 파고들던 은 수갑. 타들어 가는 살갗에서 피어오르던 가느다란 연기. 그가 등을 돌려 떠나기 전 찰나의 순간 마주쳤던 눈빛,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조차 전하지 못하고 날려버린 유일한 기회까지.양심의 가책이 나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같은 비난이 귓전을 때리는 듯했다.‘너는 무언가 말할 수 있었잖아. 진실을 밝힐 수도 있었잖아.’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순간 알파 디미트리의 혈통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날 터였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그 어떤 핑계도 죄책감을 덜어주지는 못했다.아직은 감추기 쉬운 완만한 곡선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며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손끝 아래서 미세한 태동이 느껴지며, 내가 진짜로 지켜내야 할 목숨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었다. 여신께 다시금 기도를 속삭였으나, 이번만큼은 그 말들이 공허하게 흩어졌다.방문에서 날카로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심장이 목구멍까지 덜컥 튀어 올랐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열었다.알파 디미트리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문간에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깊은 숲빛 눈동자가 침묵 속에 나를 응시했으나, 그 너머에 도사린 감정은 조금도 읽어낼 수 없었다. 자각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숙여지며 시선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그의 시선이 내 천 가방 쪽으로 잠시 향했다.“그 책은,”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디서 찾았지?”제어할 틈도 없이 고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그 자리에 얼어붙어 선 채, 방 안의 모두에게 들릴까 두려울 만큼 갈비뼈를 세차게 두드리는 심장 박동을 억눌렀다.불안감이 방 전체로 물결치듯 번져나갔다. 몇몇 치유사들은 차트나 태블릿을 쥔 손에 힘을 주었고, 다른 이들은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머리 위 조명의 나지막한 웅웅거림과 거칠게 날뛰는 내 심장 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베타 페트루가 알파 디미트리의 곁을 벗어나 곧장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 태연한 표정을 더는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천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숨이 턱 막혔다.베타 페트루의 손이 닿기 직전, 알파 디미트리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그 아이는 아니다.”베타 페트루가 그 즉시 걸음을 멈췄다.“알파, 이자부터 먼저 수색해야 합니다. 그날 밤 강장제를 전달한 자입니다. 방랑자 출신인 데다, 알파께 접근하기 위해 독을 썼을 동기가 이 방의 그 누구보다도 충분합니다.”디미트리의 초록빛 눈동자는 자신의 베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그 아이가 내 방으로 들어오기 전, 나는 이미 독을 섭취한 상태였다. 그 추궁은 사실이 아니다.”방 안으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자네의 다른 우려를 묵살하겠다는 건 아니다.” 모두가 귀를 기울이게 만들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가 직접 수색하겠다.”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굳어졌다.“아니면, 알파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건가?”모두가 숨을 죽였다.베타 페트루는 하마터면 반론을 뱉어낼 뻔한 입술을 짓씹으며 찰나의 순간 동안 굳어 있었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숙였다.“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알파.”숨을 쉴 수가 없었다.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그날 밤 내가 처소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알파 디미트리의 몸에 이미 독이 퍼져 있었다면, 도대체 왜 치유소를 수색하는 것인가? 그들이 진짜로 찾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