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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연회장 뒤 복도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5 18:00:00

『오늘 일정: 1월 18일 토요일, 회장님 팔순 잔치, 명부 접수』

“제게 먼저 물어보셨어야죠.”

손바닥에 놓인 반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주원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통화 너머에서 방향지시등 소리가 났다.

“나도 오늘 들었어.”

“그럼 발표 전에 얘기할 수 있겠네요.”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작업대에 놓인 명부를 덮었다. 표지 위에 휴대폰 그림자가 생겼다.

“그날은 할아버지 잔치야. 일단 잘 끝내자.”

“잔치하고 제 결혼은 다른 일이에요.”

“알아. 만나서 얘기해.”

주원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반지를 꺼내 실에서 뺐다. 손가락에 끼우고 남은 실은 서랍에 넣었다.

◈

토요일 오후, 호텔 2층에는 꽃을 든 직원들이 오갔다. 나는 접수대 밑에 가방을 내려놓고 명부 두 권을 펼쳤다. 지난주에 찍은 금박 위로 천을 한 번 지나가게 했다.

옆에서 직원이 펜을 시험했다. 첫 획이 끊겼다.

“다른 펜 쓰세요. 이건 제가 빼 둘게요.”

나는 뚜껑을 닫아 접수대 안쪽으로 옮겼다. 직원은 새 펜을 꽂고 명부가 펼쳐진 자리를 확인했다.

“서명받은 뒤에는 여기로 넘기면 될까요?”

“네. 이 끈은 풀지 마세요. 끝나고 제가 합칠 거예요.”

연회장 문이 열리자 안쪽 식탁들이 보였다. 경란은 꽃장식을 살피다 나를 불렀다.

“나경아,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나는 접수 직원에게 자리를 맡기고 들어갔다. 경란이 내 옷깃을 잡아 펴 줬다. 진주 귀걸이가 가까이서 흔들렸다.

“가방은?”

“접수대 밑에 뒀어요.”

“오늘은 일하러 온 사람처럼 다니지 마.”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천을 접었다.

“명부만 확인하고 넣어 둘게요.”

경란은 내 손을 보다가 반지에서 시선을 멈췄다. 더 말하지 않고 식탁 사이로 걸어갔다. 나는 천을 가방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주원은 연회장 앞쪽에 있었다. 직원과 말하다가 나를 보고 손을 들었다. 나는 주원이 다가올 때까지 문 옆에서 기다렸다.

“명부 잘 나왔네. 엄마도 마음에 드신대.”

“잠깐 얘기해요.”

“지금?”

주원이 뒤를 돌아봤다. 직원이 행사표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발표 얘기예요.”

주원의 손이 내 팔꿈치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끝나고 하자. 오늘은 할아버지 손님들이 먼저야.”

“발표한 다음에는 늦어요.”

“내가 시간 낼게.”

직원이 주원을 다시 불렀다. 주원은 나를 빈 식탁 쪽으로 안내하고 앞쪽으로 돌아갔다. 나는 의자를 빼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식탁 위 자리표에는 내 이름이 주원 이름 옆에 놓여 있었다.

◈

아버지는 약속한 시간에 도착했다. 외투 안에 입은 양복 어깨가 조금 남았다. 나는 아버지가 목도리를 푸는 동안 빈 의자를 당겼다.

“약은 드셨어요?”

“먹고 왔다. 다은이가 택시 타는 것까지 보고 갔어.”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여 줬다. 다은이 도착하면 연락하라고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

“도착했다고 제가 보낼게요.”

“네 친구한테 자꾸 신세를 지네.”

“대신 다음에 작업실 전등 갈아 주세요. 계속 깜빡거려요.”

“그건 내가 하지.”

아버지가 웃으며 휴대폰을 건넸다. 나는 짧게 답장을 보내고 돌려드렸다. 아버지는 연회장 안을 둘러보다 접수대에 펼쳐진 명부를 봤다.

“저게 네가 만든 거냐?”

“네. 아직 속장은 따로예요.”

아버지는 가까이 가서 표지 모서리에 손을 댔다. 엄지에 남은 종이 가루를 뒤늦게 보고 손을 거뒀다.

“묻었나?”

“안 묻었어요.”

나는 아버지 손목을 잡고 표지 위에 다시 얹었다. 아버지는 글씨를 건드리지 않고 원단만 만졌다.

“네 엄마도 이런 색을 좋아했지.”

대답하려는데 뒤에서 지팡이 짚는 소리가 났다. 회장이 석진과 함께 들어왔다. 아버지가 손을 내리고 허리를 숙였다. 나도 옆에서 인사했다.

“몸은 괜찮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회장은 아버지의 얼굴을 살피고 명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직원이 펜을 내밀자 손을 저었다.

“아직 손님도 안 왔는데 내 이름부터 쓰나.”

직원이 물러섰다. 회장은 표지를 덮어 금박을 봤다.

“이건 누가 했어?”

“제가 했습니다.”

“열어 봐.”

나는 다시 명부를 펼쳤다. 가운데를 눌러 놓지 않아도 속장이 펴진 채로 있었다. 회장은 빈 서명 칸에 손끝을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쓰면 내 서재로 가져와.”

“끝난 뒤 한 권으로 묶어서 드릴게요.”

석진이 손목시계를 봤다.

“아버지, 안으로 가시죠. 손님들 오시겠습니다.”

석진의 뒤쪽에 이헌이 있었다.

검은 정장 소매 아래로 손이 보였다. 나는 펼쳐 둔 명부를 반쯤 덮었다. 이헌은 아버지에게 먼저 인사했다.

“퇴원하신 뒤로 좀 어떠십니까.”

“이제 괜찮습니다. 나경이가 일을 못 나가게 해서 탈이지요.”

“조금 더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헌의 얼굴을 보지 않고 명부 끈을 바로 놓았다. 접수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헌이 서 있었다.

“자기도 앉아요.”

주원이 내 옆으로 왔다. 손에는 내 몫의 자리표가 들려 있었다.

“할아버지랑 사진부터 찍자.”

나는 명부에서 손을 뗐다. 이헌은 회장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사진을 찍을 때 주원은 내 어깨 뒤에 손을 뒀다. 사진사가 조금만 더 붙어 달라고 했다. 나는 발을 옮겼다. 앞줄에 앉은 아버지의 양복 등에 접힌 자국이 보였다.

“이쪽 보세요.”

고개를 들자 카메라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 이헌은 사진사가 뒤로 물러날 자리를 비켜 줬다. 나도 렌즈로 시선을 돌렸다.

촬영이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졌다. 주원의 손이 떨어진 뒤에도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직원이 의자를 치우러 와서야 옆으로 물러났다.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란이 나를 불러 세워 인사를 시켰다. 나는 주원 옆에서 허리를 숙였다.

“우리 주원이 약혼녀예요.”

같은 소개가 이어졌다. 손님 한 사람이 반지를 보고 손을 잡았다. 나는 웃으며 손을 내드렸다. 주원은 내 앞에 물잔을 놓았다.

“목마르겠다. 마셔.”

나는 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주원 씨. 아까 하던 얘기요.”

주원이 직원에게 건네받던 행사표를 접었다.

“지금 여기서?”

“여기서 못 하면 밖에서요.”

주원은 손님들이 모인 쪽을 봤다. 누군가 주원의 이름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나도 계속 붙잡혀 있잖아.”

주원이 내 의자를 빼 줬다. 나는 앉지 않았다.

“제 대답 없이 날짜부터 정하지 말아 주세요.”

주원이 행사표 끝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알았어. 얘기하자.”

누군가 다시 부르자 주원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접수대 쪽으로 걸어 나왔다. 직원이 넘겨 둔 명부 끝장이 비스듬히 접혀 있었다. 손바닥으로 누르지 않고 밑에서 들어 펴 줬다.

“죄송해요. 손님이 급하게 넘기셔서.”

“괜찮아요. 지금 펴면 자국 덜 남아요.”

나는 받침 종이를 끼우고 명부를 덮었다. 직원이 내게 휴지를 건넸다.

“손가락 다치셨어요?”

왼손 검지 끝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아침에 종이를 정리하다 베인 자리였다. 피는 나지 않았다.

“아니에요. 고마워요.”

휴지를 접어 쥔 채 돌아서는데 이헌이 연회장 문을 지나갔다. 통화 중이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이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도 부르지 않았다.

◈

행사가 시작되자 접수대가 한산해졌다. 나는 명부를 덮고 직원에게 보관 위치를 알려 줬다. 안에서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아버지가 문밖으로 나왔다.

“어디 가세요?”

“화장실. 혼자 갈 수 있어.”

나는 안내 표지를 가리켰다. 아버지는 몇 걸음 가다가 돌아왔다.

“네 자리 안 비워도 된다. 천천히 다녀올 테니.”

“그럼 여기서 기다릴게요.”

아버지가 복도 끝으로 가는 것을 보고 벽에 기대지 않은 채 섰다. 발을 조금 옮기자 연회장 안쪽에서 박수가 났다.

문틈으로 주원이 보였다. 내 빈자리를 한 번 보고 직원에게 뭐라고 물었다. 나는 문 안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자리로 모셔다드리고 나왔을 때 직원이 나를 찾았다.

“뒤쪽 접수 물품에 빈 명찰이 더 있나요? 손님 명찰 하나를 못 찾았어요.”

“제가 볼게요.”

접수대 서랍에는 명찰집만 남아 있었다. 나는 뒤 복도에 옮겨 둔 상자를 떠올렸다. 직원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하고 연회장 옆문을 열었다.

안쪽 소리가 문에 막혀 작아졌다. 뒤 복도에는 운반용 수레가 벽에 붙어 있었다. 상자를 찾으러 가던 나는 바닥에서 걸음을 멈췄다.

명찰 하나가 뒤집혀 떨어져 있었다.

주워서 돌려 보니 회장 손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집게는 벌어져 있었고 이름표 한쪽이 접혀 있었다. 나는 손톱으로 누르지 않고 종이를 빼서 접힌 쪽을 폈다.

옆문이 열려 직원이 나왔다.

“발표까지 10분 남았습니다. 자리로 모셔야 해서요.”

“명찰 찾았어요. 집게만 바꿔 주세요.”

직원이 무전기를 확인했다. 안에서 사람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여기 넣어 둘게요. 입구에서 드릴게요.”

나는 명찰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집게가 옷감에 걸리지 않게 종이로 감쌌다.

직원이 문을 닫고 들어갔다. 나는 빈 명찰집을 찾으러 상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헌이 복도 모퉁이에서 걸어왔다.

◈

이헌은 내 앞에서 멈췄다. 손을 뻗으면 소매에 닿을 거리였다. 나는 주머니 밖으로 나온 종이 끝을 안으로 밀었다.

“아버님은요.”

“안에 계세요.”

“안색은 좋아지셨던데.”

“네. 오늘은 먼저 가시라고 하려고요.”

짧은 말 뒤에 신발 소리가 들렸다. 이헌은 한 걸음 옆으로 비켰다. 모퉁이를 지난 직원이 우리에게 인사하고 수레를 끌고 갔다.

바퀴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나는 벽에 붙은 행사 안내문을 봤다. 안으로 들어가면 내 이름이 적힌 의자가 있었다. 그 옆에는 주원의 자리가 있었다.

나는 이헌 쪽으로 돌아섰다.

“오늘 끝나면 다 정리할게요.”

이헌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말을 잇기 전에 입술을 한 번 눌렀다.

“주원 씨한테 말할 거예요. 날짜 발표도 제 대답 없이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나경아.”

“알아요. 아버지 회사도 걸려 있고, 제가 그 집에서 나오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

이헌의 손이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나는 그 손을 보고 내 손을 주머니에서 뺐다.

“그래도 계속 옆에 서 있을 수는 없어요. 아까 사진 찍는데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나 때문에 혼자 결정하지 마요.”

“혼자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먼저 말하는 거예요.”

옆문 너머에서 접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헌이 문 쪽을 확인하고 다시 나를 봤다.

“여기서 먼저 나갈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헌이 물러서지 않고 기다렸다. 나는 구두 앞코를 내려다봤다가 한 걸음 다가갔다. 재킷 자락에 손이 스쳤다.

“저한테 기다리라고는 하지 마세요.”

“안 해요.”

“그럼 제가 말할 때 옆에 있어 주세요.”

“그럴게요.”

나는 이헌의 소매를 잡았다. 손가락으로 옷감을 조금만 쥐었다. 이헌이 내 손을 내려다봤다.

주머니 속 명찰 집게가 허리에 닿았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안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손을 놓으려 하자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이헌이 몸을 낮췄다. 가까워진 얼굴 앞에서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헌은 잠깐 멈췄다.

나는 잡은 소매를 놓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닿았다. 숨을 들이마시기도 전에 이헌이 조금 떨어졌다. 나는 눈을 뜨고도 소매를 쥐고 있었다.

문 하나 건너에서 박수가 났다.

이헌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로 옮겨갔다. 소매를 잡은 손에 다른 손이 닿지는 않았다. 나는 손가락을 펴고 뒤를 돌아봤다.

복도 모퉁이에 주원이 서 있었다.

주원은 내 손에서 이헌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입가에는 웃음이 남아 있었다.

“삼촌, 내 약혼녀한테 뭐 하세요?”

(40화 끝 ·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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