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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팔순 준비 회의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5 17:00:00

『오늘 일정: 1월 11일 토요일, 팔순 준비 회의, 손님 명부 제본』

나는 쪽지를 접어 원단 봉투 안에 넣었다. 봉투는 시집 보관함 옆에 세워 두었다. 갈색 가방을 다시 들었을 때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아직 가게니?”

“지금 나가요.”

불을 끄기 전에 원단 다섯 장을 한 번 더 봤다. 남색 원단의 모서리가 봉투 밖으로 나와 있었다. 안으로 밀어 넣지는 않았다.

◈

토요일 아침, 서진호텔에 가져갈 견본을 싸면서 남색 원단도 잘라 넣었다. 명부 표지에 쓸 것은 아니었다. 작은 조각을 수첩 뒤에 끼우고 가방을 닫았다.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한 22층 회의실에는 의자가 비어 있었다. 나는 출입문 가까운 자리에 앉아 견본 세 권을 꺼냈다. 표지 색과 펼치는 방식이 각각 달랐다.

빈 장을 넘겨 보다가 종이 끝을 엄지로 쓸었다. 겨울이라 손이 말라 있었다. 가방에서 크림을 꺼내려는데 문이 열렸다.

“먼저 왔네.”

주원이 내 옆 의자를 당겼다. 외투를 벗으며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검정 휴대폰이었다.

“명부부터 볼까요?”

“엄마 오시면. 지금 골라 봐야 바뀌어.”

주원이 물병 뚜껑을 열어 내 앞에 놓았다. 자기는 새 병을 하나 더 가져왔다.

“아버님은 좀 어떠셔?”

“다음 주까지 집에 계시기로 했어요.”

“잘하셨네. 공장엔 안 가시고?”

“염 반장님이 아침마다 전화 주세요.”

“감시가 확실하네. 그치?”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주원은 의자를 뒤로 밀어 앉았다. 눈 아래가 꺼져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경란이 들어오자 주원이 허리를 폈다. 뒤따라온 직원들이 서류를 놓았다. 나는 견본을 경란 쪽으로 돌려 밀었다.

“손님들이 직접 서명하실 명부예요. 이건 가운데까지 편하게 펼쳐지고, 이쪽은 나중에 장을 더 넣을 수 있어요.”

경란은 표지부터 만졌다.

“이 색은 너무 어두워. 잔치인데.”

“밝은 색으로 바꿀 수 있어요.”

“밝으면 때가 타잖아. 회장님 서재에 둘 건데.”

나는 준비해 온 원단판을 펼쳤다. 경란의 손가락이 회색과 갈색 사이를 오갔다.

“갈색으로 해. 글씨는 금색.”

수첩에 표시했다. 회색 원단을 접으려는데 경란이 손을 들었다.

“잠깐. 테이블보가 무슨 색이었지?”

직원이 자료를 넘겼다.

“밝은 베이지입니다.”

“그럼 갈색은 가라앉겠네. 회색으로 바꿔.”

나는 표시한 줄을 긋고 그 아래에 다시 적었다. 주원이 내 수첩을 보고 자기 펜 뚜껑을 닫았다.

“엄마, 사진도 같이 봐. 나경 씨가 다시 만들기 전에.”

“보고 있어.”

경란은 행사장 사진 위에 회색 원단을 올렸다. 나는 손을 빼고 기다렸다.

문이 다시 열렸다.

이헌이 들어왔다. 조현석이 뒤에서 서류철을 건넸다. 나는 물병 옆으로 손을 내렸다. 이헌은 경란에게 고개를 숙인 뒤 맞은편 끝자리에 앉았다.

식탁보다 긴 회의 탁자가 우리 사이에 있었다.

나는 수첩의 날짜를 내려다봤다. 펜 끝이 같은 자리에 멈춰 있었다.

“회장님 동선부터 보시죠.”

이헌의 목소리에 직원이 화면을 바꿨다.

◈

잔치 순서를 정하는 동안에도 명부 견본은 여러 사람 손을 거쳤다. 서명받을 자리를 입구에 둘지, 연회장 안에 둘지에 따라 크기가 달라졌다.

“들어오실 때 받으면 줄이 길어질 수 있습니다.”

직원이 말하자 경란이 나를 봤다.

“두 권으로 나눠.”

“나중에 한 권으로 합치실 건가요?”

“당연하지. 따로 두면 빠진 사람을 어떻게 찾아.”

나는 합본 견본을 펼쳤다. 임시 표지에서 속장을 빼서 옮기는 방식을 보여 줬다.

“그러면 접수할 때는 나눠 쓰고, 끝난 뒤 제가 순서대로 다시 묶을게요. 빈 장을 억지로 떼지 않으셔도 돼요.”

“손님 이름은 미리 인쇄하고.”

“서명 칸 옆에 넣을까요?”

“아니. 성함을 어떻게 다 맞춰. 직접 쓰시게 해.”

경란이 견본을 덮었다. 나는 인쇄라고 적은 곳에 줄을 그었다. 종이가 눌려 다음 장까지 펜 자국이 남았다.

이헌은 내 쪽을 보지 않고 행사표에 표시하고 있었다. 소매는 두 번 접혀 있었다. 펜을 놓자 셔츠 끝이 조금 내려왔다. 이헌이 다시 접어 올리는 동안 나는 수첩을 넘겼다.

“겉표지 문구는 여기 적힌 대로 하면 될까요?”

나는 받은 원고를 가운데 놓았다. 이름과 팔순을 기념하는 글이 들어 있었다.

경란은 안경을 쓰고 원고를 살폈다.

“이름 위에 회장이라고 넣어.”

직원이 받아 적었다.

“행사 끝난 뒤 보관할 책이라 직함 없이 가기로 하셨습니다.”

조현석이 앞서 확인받은 종이를 내밀었다. 경란은 두 장을 번갈아 보다가 안경을 벗었다.

“그럼 그대로 해. 대신 글씨가 너무 크면 안 돼.”

나는 원고 옆에 글자 크기를 적었다.

“여기 확인해 주시면 이대로 금박 작업할게요.”

경란이 종이 끝에 서명했다. 나는 번지지 않게 잠깐 기다린 뒤 별도 파일에 넣었다. 오늘 바뀐 사항은 그 위에 겹쳐 적지 않았다.

회의가 끝날 무렵에는 탁자 위에 견본보다 메모가 많았다.

주원은 호텔 담당자와 함께 먼저 나갔다. 경란도 연회장 꽃을 확인하겠다며 직원을 불렀다. 나는 남은 원단판을 가방에 넣고 명부 견본의 모서리를 천으로 감쌌다.

맞은편에서 의자 밀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자 이헌이 서 있었다.

회의실에는 열린 문 하나가 있었다. 복도에서 직원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헌은 내 자리로 오지 않았다.

나는 가방 안에 넣었던 수첩을 다시 꺼냈다. 뒤쪽을 펴서 남색 원단 조각을 견본 위에 올렸다. 이헌의 시선이 그곳으로 내려갔다.

그다음 내 얼굴로 돌아왔다.

나는 원단에 얹은 손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이헌도 고개를 숙였다. 탁자 양 끝에서 눈을 맞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나는 수첩을 덮지 않았다.

이헌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나도 가방 손잡이를 쥔 손에서 힘을 뺐다.

“자기야.”

문밖에서 주원이 불렀다.

나는 원단을 수첩에 끼웠다. 이헌은 서류철을 들고 먼저 문으로 향했다. 주원이 옆으로 비켜섰다.

“삼촌, 아버지가 전화해 달라던데.”

“알았다.”

나는 견본을 가방에 넣었다. 손가락이 천에 걸려 한 번 놓쳤다. 다시 잡을 때까지 이헌은 문 앞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주원이 내 가방을 가리켰다.

“그거 무겁지 않아?”

“들 수 있어요.”

“오늘 끝나면 연락해. 엄마한테 보여 드릴 사진도 받아야 해.”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완성되면 보낼게요.”

◈

작업실에 돌아오니 다은이 프레스기에서 속장을 꺼내고 있었다. 묶을 순서대로 놓인 종이 옆에 금박용 판이 든 상자가 있었다.

“판 왔어. 원고도 같이 넣어 주셨더라.”

“고마워. 표지는 회색으로 정했어.”

“진짜 정했어?”

나는 서명받은 종이를 펼쳐 보였다. 다은이 손뼉을 치려다가 손에 묻은 풀을 보고 멈췄다.

“이건 보관해야겠다.”

“이미 따로 넣어 놨어.”

우리는 재단해 둔 표지판에 원단을 붙였다. 다은은 안쪽 면지를 붙이고, 나는 접히는 부분의 간격을 확인했다. 두 권을 나란히 놓아도 등 높이가 맞아야 했다.

해가 진 뒤 첫 표지를 금박기에 넣었다.

판이 달아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험용 원단을 끼웠다. 압력을 확인하고 필름을 떼자 글씨가 남았다. 금박이 비지 않았는지 살피던 다은이 몸을 숙였다.

“나경아.”

나는 기계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기념이 아니라 기원이야.”

시험지를 들어 빛 아래에 놓았다.

팔순 아래에 찍힌 두 글자 중 뒤가 달랐다. 나는 원고와 판을 나란히 놓았다. 원고에는 기념이라고 되어 있었다. 판에는 기원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사진으로 판 확인할 때 못 봤어?”

“뒤집힌 글자 보고 위치만 확인했어.”

내가 승인 표시를 한 사진을 열었다. 확대하자 틀린 글자가 보였다.

“표지는 안 찍었지?”

“응. 시험만 했어.”

다은이 작업대에 놓인 표지를 멀리 옮겼다. 나는 판을 주문한 곳에 전화했다. 몇 번 신호가 간 뒤 통화가 됐다.

틀린 글자를 설명하고 다시 만들 수 있는지 물었다. 오늘은 작업장을 닫았고, 새 판은 빨라도 월요일에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경란에게는 내일 오전까지 완성 사진을 보내기로 했었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통화를 마쳤다. 다은이 앞치마를 벗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

“월요일에 찍으면 안 된대?”

“잔치 전에 확인할 게 많다고 내일 달랬어.”

“글자 하나만 따로 바꿀 수는?”

나는 금박기 아래 서랍을 열었다. 낱글자 활자를 넣어 둔 상자가 있었다. 크기별로 나뉜 칸에서 같은 글자를 찾아 종이에 찍었다.

새 판의 글씨보다 조금 작았다.

다은이 두 장을 겹쳐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건 옆에 놓으면 보여.”

“문구 전체를 다시 맞출게.”

나는 판을 고정한 나사를 풀었다. 다은이 작업등을 가까이 당겨 줬다.

◈

막차 시간 전에 다은을 보냈다. 내일 아침 속장을 묶으려면 둘 다 밤을 새울 수는 없었다. 다은은 문 앞에서 돌아와 작은 봉투를 작업대 끝에 놓았다.

“집에 있던 손난로. 아직 쓸 만해.”

“난방 켰는데.”

“손 시리면 글자 떨어뜨리잖아.”

다은이 가고 난 뒤 봉투를 열었다. 손난로는 두 개였다. 하나를 눌러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대로 뒀다.

활자를 거꾸로 끼우는 일보다 간격을 맞추는 일이 오래 걸렸다. 이름을 먼저 잡고, 아래 문구를 한 줄씩 맞췄다. 자를 대고 확인한 뒤에도 시험지에 찍으면 한쪽이 기울었다.

기계를 식히고 활자를 다시 조였다.

휴대폰이 울린 건 시험지를 3번째 바꿀 때였다. 아버지가 보낸 식사 사진이었다. 약 봉투까지 옆에 놓여 있었다.

나는 사진을 확대해 빈 반찬 그릇을 확인했다.

『저도 먹고 갈게요. 먼저 주무세요.』

답장을 보내고서야 저녁을 안 먹은 게 생각났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마셨다. 빵은 기계에서 떨어진 창가 탁자에 놓고 먹었다.

다시 앉으니 손난로가 아직 따뜻했다.

나는 금박이 붙은 시험지를 원고 아래에 놓았다. 이번에는 한 글자씩 가리며 읽었다. 이름, 팔순, 기념. 틀린 글자는 없었다.

표지를 올리기 전 압력을 조금 낮췄다. 시험용 천보다 원단을 붙인 표지판이 두꺼웠다. 남은 자투리로 한 번 더 찍은 뒤에야 완성할 표지를 넣었다.

손잡이를 눌렀다 놓고 필름을 천천히 벗겼다.

첫 글자의 가장자리가 고르게 나왔다. 뒤쪽 글씨도 벗겨지지 않았다. 나는 표지를 받침판으로 옮긴 다음 남은 표지를 올렸다.

창밖 골목에서 차가 한 대 지나갔다. 벽시계의 긴 바늘이 한 바퀴 더 도는 동안 뒷표지 안쪽에 붙일 종이를 잘랐다. 풀을 바른 면을 덮고 마른 천으로 눌렀다.

휴대폰에는 주원의 부재중 전화가 남아 있었다.

새벽에 다시 걸기는 어려워 완성 사진부터 찍었다. 화면으로 보니 금박이 어둡게 나왔다. 등을 옮겨 한 번 더 찍고, 글씨가 보이는 사진을 골랐다.

『표지 끝났어요. 아침에 속장 묶고 가져갈게요.』

전송한 뒤 원고와 완성품을 나란히 두었다.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짚지 않고도 끝까지 읽었다.

됐다.

다은이 오기 전까지 잘 자리를 찾다가 창가 의자를 당겼다. 목에 걸린 실을 옷 밖으로 꺼냈다. 고개를 숙여 자면 반지가 눌릴 것 같아 앞치마 주머니에 잠깐 넣었다.

수첩 뒤에서 남색 원단이 조금 나와 있었다.

나는 그 조각을 꺼내 시집 보관함 위에 놓았다. 쪽지는 봉투 안에 그대로 뒀다. 표지 재료 확인이라고 적힌 작업표에 작은 표시를 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주원이었다. 나는 의자를 밀어 앉고 전화를 받았다.

“사진 봤어요?”

“응. 아직 가게야?”

“방금 끝났어요. 늦게 전화하셨네요.”

“나도 이제 나왔어.”

통화 너머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손바닥에 놓았다.

“명부는 아침에 확인하고 가져갈게요.”

“그건 천천히 해. 할 말이 있어서.”

주원이 잠깐 말을 멈췄다. 나는 반지에 꿴 실을 손가락에서 풀었다.

“무슨 말인데요?”

“팔순 날 우리 결혼 날짜 발표한대. 5월 17일.”

(3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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