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
나는 명함을 뒤집어 뒷면까지 확인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걱정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어요. 제 서류를 보여 드리지는 않을 거예요.”
변호사는 내 가방에서 손을 뗀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연락 주시면 되는 겁니다.”
“필요하면 제가 연락할게요.”
명함은 진술서와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 이헌이 문을 잡아 주었다. 다은이 먼저 나갔고, 나는 문턱을 넘기 전에 경찰관에게 고개를 숙였다.
밖으로 나오자 다은이 얼음팩을 내려다봤다.
“이거 돌려줘야 해.”
내가 받으려 하자 다은이 오른손을 뒤로 뺐다.
“이건 들 수 있어. 잠깐만.”
다은은 지구대로 돌아갔다. 유리문 안에서 순경에게 수건까지 돌려주는 모습이 보였다. 이헌은 내 옆에 서 있었다. 변호사는 문 안쪽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저 사람, 그냥 보내도 돼요?”
내가 묻자 이헌이 대답했다.
“여기서 따져도 답은 안 할 겁니다. 명함은 갖고 있어요.”
“부회장님한테 전화하실 거예요?”
“지금은 안 해요.”
이헌이 내 가방 끈을 봤다. 나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끈을 다시 올렸다.
“먼저 작업실로 가요. 문 수리부터 확인하고요.”
다은이 문을 밀고 나왔다. 나는 변호사 쪽으로 다시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
문 수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손님 책을 잠기는 장 안으로 옮겼다. 다은은 목록에 표시만 했다. 무거운 책을 들려다 내 눈에 걸린 뒤로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헌이 빈 상자를 접어 벽에 세웠다. 창가에 있던 프레스기에는 손대지 않았다.
“이건 그대로 두면 됩니까?”
“네. 누르고 있는 중이에요.”
나는 종이 사이에 끼운 마른 천을 확인했다. 유리가 튄 자리는 다 치웠지만 오늘 작업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앞치마에서 접지칼과 바늘을 꺼내 서랍에 넣었다.
다은이 오른손으로 작업표를 뒤집었다.
“내일 예약은 내가 연락할게. 쉬는 날인 줄도 모르고 오는 분 있을 수 있으니까.”
“오늘은 그만해. 나머지는 집에서 할게.”
“너 집에 가서 또 이거 들여다볼 거잖아.”
다은이 작업표를 자기 가방에 넣었다. 나는 빼앗지 않고 다은의 겉옷을 의자에서 집어 주었다.
아래층 할머니에게 인사하고, 다은이 택시에 타는 것까지 봤다. 이헌이 문을 닫아 주자 다은이 창문을 조금 내렸다.
“둘 다 밥 먹어요. 빵만 먹지 말고요.”
“도착하면 연락해.”
다은이 감지 않은 손을 들었다.
택시가 골목을 빠져나간 뒤 나는 새 열쇠로 문을 한 번 더 잠갔다. 손잡이를 당겨 보고 나서야 열쇠를 가방에 넣었다.
이헌의 차는 골목 끝에 있었다. 조수석 문을 열자 지구대에서 넣어 둔 빵 봉투가 가방 밖으로 나왔다.
“그건 아직 안 먹었어요?”
“조금 먹었어요.”
봉투 끝에 뜯은 자국이 있었다. 이헌은 더 묻지 않고 차에 탔다. 가까운 가게에서 포장한 국과 밥은 뒷자리에 놓여 있었다.
“집에 가져가요. 따뜻할 때 먹을 수 있게.”
나는 안전띠를 당기다가 멈췄다.
“잠깐만 여기 있어도 돼요?”
이헌이 시동을 걸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럼요.”
◈
골목 가게들의 간판이 하나씩 꺼졌다. 차 앞을 지나던 사람이 작업실 쪽 계단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 나는 가방을 무릎 위로 당겼다.
이헌은 내 쪽을 보다가 뒷자리로 팔을 뻗었다. 담요를 가져와 접힌 끝을 폈다.
“다리 위에 놓아도 돼요?”
나는 가방을 발치로 내렸다.
“네.”
이헌이 담요를 무릎에 덮었다. 손은 담요 끝을 내려놓자마자 거뒀다. 나는 무릎 바깥으로 흘러내린 부분을 안으로 접었다.
손톱에 실 하나가 걸렸다.
회색 천 위에 남색 실밥이 붙어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집어 올리니 꼬인 가닥 끝이 풀어졌다. 시집 표지에 썼던 원단의 씨실이었다.
“이게 왜 여기 있어요?”
이헌이 내가 든 실밥을 봤다.
“책을 꺼냈다가 여기 뒀어요.”
“담요 위에요?”
“네. 표지가 쓸릴까 봐.”
나는 남색 실을 손바닥에 놓았다. 올이 더 빠지지 않게 가장자리를 안으로 접어 붙였었다. 이 정도는 잘라 낸 조각에서 묻었을 수도 있었다.
“뜯어진 데가 있어요?”
이헌은 안주머니에서 시집을 꺼내 내밀었다.
나는 담요 위에 책을 놓고 책등부터 살폈다. 이헌이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가 멈췄다. 표지 안쪽을 볼 수 있게 책을 조금 돌렸다.
“괜찮아요. 붙인 데는 안 벌어졌어요.”
“다시 맡겨야 하나 했어요.”
“들고 다니는 책인데 실밥 하나 붙었다고 맡기면 제가 곤란하죠.”
나는 가방에서 빈 종이봉투를 꺼내 실밥을 넣었다. 쓰레기와 섞이면 다시 옷에 붙을 수 있었다. 책을 돌려주려는데 이헌의 손이 아직 무릎 위에 있었다.
앞 유리 너머로 문 닫는 소리가 났다.
나는 책을 든 손을 조금 내렸다. 이헌이 내 손에서 시집을 받아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돼요.”
“아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당신 작업실 앞이니까 그럴 수 있죠.”
나는 담요 끝을 다시 접었다.
이헌은 시동 단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제 숨기지 않으려고요.”
손가락 사이에서 담요가 구겨졌다. 나는 접은 곳을 펴지 못한 채 이헌을 봤다.
“오늘 지구대에 오신 것도 그런 뜻이에요?”
“네.”
“회사에도 말하겠다는 거예요?”
“물으면 말할 겁니다. 왜 당신 옆에 있었는지.”
나는 시선을 내려 안전띠의 잠금쇠를 봤다. 아직 끼우지 않은 채 문 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이헌 씨.”
“네.”
“저는 아직 아니에요.”
이헌의 손이 무릎에서 멎었다.
차 밖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며 지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도 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
내가 먼저 가방을 열었다. 진술서 사본과 다은의 약 봉투가 겹쳐 있었다. 그 사이에 끼운 수리 영수증을 펴서 안쪽 칸에 넣었다.
“계속 이렇게 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알아요.”
“아버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세요.”
이헌이 앞 유리를 봤다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직접 말씀드릴게요. 당신이 원하면 같이 가고요.”
“가서 뭘 먼저 말씀하시게요? 주원 씨 삼촌인 건 아시니까, 그다음부터요.”
이헌의 입술이 잠깐 다물렸다.
나는 가방을 닫았다.
“아버지는 약혼만 깨지면 공장도 끝나는 줄 아세요. 대출 서류가 잘못됐다는 건 아셔도, 그걸 바로잡을 수 있는지는 모르시고요.”
“그 부분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만난다는 얘기를 듣고도 그 설명을 들으실 수 있을까요?”
이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창문에 비친 내 무릎을 봤다. 담요를 쥔 손이 그대로였다.
“공장 사람들도 있어요. 다시 일하러 나온 분들이요. 월급이 언제 끊길지부터 물어보는데 제가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 먼저 알려지면…….”
말끝을 멈췄다. 이헌이 기다렸다.
“제가 부회장님하고 싸우는 이유까지 달라질 거예요. 서류가 위조됐다고 해도 제 말부터 의심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오늘도 혼자 앉아 있으려고 했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헌의 목소리는 낮았다.
“변호사가 와도, 형님 이름을 꺼내도. 내가 옆에 있으면 안 되는 겁니까?”
“오지 말라는 건 아니었어요.”
“그럼 어디까지 괜찮아요?”
나는 손을 놓았다. 담요에 접힌 자국이 남았다.
지구대에서는 옆에 앉아 줘서 숨을 돌렸다. 명함을 꺼냈을 때는 다은이 보고 있다는 생각부터 했다. 둘 다 내가 한 일이었다.
“저도 그걸 오늘 알았어요.”
이헌이 내 말을 기다렸다.
“혼자 하겠다고 진술서에는 다 써 놓고, 이헌 씨가 들어오니까 의자부터 비웠어요.”
“그 자리에 앉은 걸 후회하지 않아요.”
“저도요.”
말을 하고 나서야 이헌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까지 준비한 건 아니었어요. 오늘 여기서 나가서 아버지한테 전화할 수는 없어요.”
이헌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우리 사이에는 기어가 놓인 칸이 있었다. 나는 그 위에 손을 올렸다가 내 쪽으로 거뒀다.
“계속 기다려 달라는 말로 들리죠?”
“기다리는 건 할 수 있어요.”
이헌이 접혀 있던 소매 끝을 눌렀다.
“다만 당신이 위험할 때도 뒤에 있어야 한다면, 그건 못 하겠습니다.”
나는 발치의 가방을 내려다봤다. 진술서에 적은 피해 목록보다 빠진 항목이 더 많았다. 다은이 책을 못 드는 날과 손님에게 미뤄 달라고 한 약속은 거기에 없었다.
“오늘 와 준 건 고마워요. 그걸 숨기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네.”
“대신 제가 말할 사람한테는 먼저 말하게 해 주세요. 남한테 듣기 전에요.”
이헌은 내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아버지의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
“받아요.”
이헌이 몸을 앞으로 돌렸다. 나는 통화 단추를 눌렀다.
◈
“아버지, 전화하셨어요?”
“다은이는 괜찮니?”
“손목을 삐었어요. 집에 갔고요.”
“너는?”
“안 다쳤어요. 문도 고쳤어요.”
아버지 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났다. 리모컨을 눌렀는지 곧 조용해졌다.
“거기서 자는 건 아니지?”
“이제 가요.”
“누구 같이 있니?”
나는 휴대폰을 쥔 손을 바꾸었다. 이헌은 앞 유리를 보고 있었다. 차 안이 조용해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릴 거리였다.
“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
“혼자 있지 말고. 집에 가면 연락하고.”
“네. 아버지.”
나는 전화를 끊지 못하고 화면을 봤다.
“이번 주에 같이 저녁 먹어요. 제가 갈게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라.”
“아무거나요. 전화드릴게요.”
아버지가 먼저 통화를 끊었다. 나는 화면이 꺼질 때까지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이헌이 창문 쪽으로 돌렸던 고개를 바로 했다.
“지금 말하지 않은 거, 미안해요.”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그래도 들으셨잖아요.”
“들었어요.”
짧은 대답 뒤로 히터 바람 소리가 났다. 나는 담요를 무릎 위로 끌어 올렸다.
“아버지한테 먼저 말할게요. 공장 일도 그냥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 않고, 어디까지 확인됐는지 말씀드리고요.”
“필요한 자료는 정리해 드릴게요.”
“제가 설명할 수 있는 것부터요.”
“네. 모르는 건 같이 확인해요.”
나는 발치의 가방을 무릎으로 올리려다 담요에 걸렸다. 이헌이 가방을 들어 주려는 손을 멈췄다. 나는 가방 대신 그 손등에 손끝을 얹었다.
“오늘처럼 와 주세요. 제가 말을 못 했다고 멀리 기다리지 말고요.”
이헌이 손을 뒤집었다. 손바닥이 닿았지만 손가락을 쥐지는 않았다. 나는 그 위에 손을 그대로 두었다.
“대신 밖에 알리는 건 같이 정해요.”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정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손을 거두고 가방을 뒷자리로 옮겼다. 국이 든 봉투가 아직 따뜻했다. 용기가 기울지 않게 바로 세우자 이헌이 안전띠를 끼웠다.
내 휴대폰에 다은의 문자가 왔다.
『집 도착. 약 먹었어. 밥은 먹었지?』
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먹고 연락하겠다고 보내고 화면을 내렸다.
이헌은 내 안전띠가 잠기는 소리를 듣고도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놓으려던 손을 멈췄다.
“그럼 날짜를 정해요. 공개할 날.”
나는 휴대폰 달력을 열었다.
(77화 끝)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나는 명함을 뒤집어 뒷면까지 확인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걱정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어요. 제 서류를 보여 드리지는 않을 거예요.”변호사는 내 가방에서 손을 뗀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연락 주시면 되는 겁니다.”“필요하면 제가 연락할게요.”명함은 진술서와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 이헌이 문을 잡아 주었다. 다은이 먼저 나갔고, 나는 문턱을 넘기 전에 경찰관에게 고개를 숙였다.밖으로 나오자 다은이 얼음팩을 내려다봤다.“이거 돌려줘야 해.”내가 받으려 하자 다은이 오른손을 뒤로 뺐다.“이건 들 수 있어. 잠깐만.”다은은 지구대로 돌아갔다. 유리문 안에서 순경에게 수건까지 돌려주는 모습이 보였다. 이헌은 내 옆에 서 있었다. 변호사는 문 안쪽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저 사람, 그냥 보내도 돼요?”내가 묻자 이헌이 대답했다.“여기서 따져도 답은 안 할 겁니다. 명함은 갖고 있어요.”“부회장님한테 전화하실 거예요?”“지금은 안 해요.”이헌이 내 가방 끈을 봤다. 나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끈을 다시 올렸다.“먼저 작업실로 가요. 문 수리부터 확인하고요.”다은이 문을 밀고 나왔다. 나는 변호사 쪽으로 다시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문 수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손님 책을 잠기는 장 안으로 옮겼다. 다은은 목록에 표시만 했다. 무거운 책을 들려다 내 눈에 걸린 뒤로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그 종이, 원래 붙어 있던 겁니까?”계단을 올라온 경찰관이 내 휴대폰 화면을 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어제 문 닫을 때는 없었어요.”경찰관은 문턱 밖에서 벽을 확인하고, 뒤따라온 동료에게 안쪽을 가리켰다. 다은이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했다.“안에 누가 있는지 먼저 보겠습니다.”나는 다은의 가방을 들고 계단 쪽으로 물러났다. 경찰관들이 작업대 뒤와 3층을 살피는 동안 할머니가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밟을까 봐 계단 것만 주웠어요. 안에는 안 건드렸고.”경찰관은 상자와 계단을 번갈아 찍었다.안에서 나오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문턱 바로 안쪽에 멈췄다. 운동화 밑에서 작은 유리가 눌렸다.“없어진 물건부터 확인해 주세요. 손은 대지 마시고요.”내 서랍 앞에 쪼그려 앉았다. 대출 서류를 대조해 둔 봉투가 바닥에 있었다. 입구를 묶었던 실은 끊어졌고, 사진을 끼운 투명 덮개만 남아 있었다.“이 안에 사진 출력물이 있었어요. 해윤제지 대출 서류를 찍은 것들이요.”“현금이나 물건은요?”다은이 뒤에서 말했다.“제 서랍에 현금 통이 있어요. 그쪽은 안 열렸어요.”경찰관이 서랍을 열게 하고 안을 찍었다. 다은이 말한 돈은 그대로였다. 컴퓨터와 카메라도 남아 있었다.나는 벽의 종이를 가리켰다.“저걸 두고 간 사람이 사진을 가져간 것 같아요.”“같은 사람이 한 건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은 침입해서 물건을 가져간 절도로 보고 접수하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나경아, 계단에서 조심해. 유리 있어.”휴대폰 너머로 다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건물 현관에 들어서다 멈췄다.“무슨 유리?”“우리 출입문. 누가 깨고 들어왔어.”계단 위에서 빗자루가 바닥을 긁었다. 나는 가방을 몸 앞으로 당겼다.“너는 어디 있어?”“복도. 안에는 아무도 없어. 불 켜고 나오다가 넘어졌어.”“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마. 바로 올라갈게.”전화를 끊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난간 밑에 유리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위층에서 할머니가 빗자루를 세웠다.“가운데로 와. 벽 쪽은 아직 못 쓸었어.”가끔 가계부를 고치러 오는 할머니였다. 손에는 쓰레받기 대신 빈 과자 상자가 들려 있었다.다은은 2층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받친 채였다. 나는 다은 앞에 쪼그려 앉았다.“머리는 안 부딪혔어?”“손만 짚었어. 불이 꺼져 있어서 바닥에 뭐가 있는지 못 봤거든.”다은의 바지 무릎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손가락은 움직였지만 손목을 들자 입술을 깨물었다.“삐었나 봐.”“움직이지 마. 손바닥 좀 보여 줘.”긁힌 곳은 없었다. 손목 바깥쪽이 조금 부어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은 손 밑에 접어 넣었다.복도 끝의 출입문은 잠금장치 옆 유리가 깨져 있었다. 안쪽 문고리에 유리 조각이 걸려 있었다.다은이 내 팔을 잡았다.“컴퓨터는 있어.&rd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