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
“그 종이, 원래 붙어 있던 겁니까?”
계단을 올라온 경찰관이 내 휴대폰 화면을 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문 닫을 때는 없었어요.”
경찰관은 문턱 밖에서 벽을 확인하고, 뒤따라온 동료에게 안쪽을 가리켰다. 다은이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했다.
“안에 누가 있는지 먼저 보겠습니다.”
나는 다은의 가방을 들고 계단 쪽으로 물러났다. 경찰관들이 작업대 뒤와 3층을 살피는 동안 할머니가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
“밟을까 봐 계단 것만 주웠어요. 안에는 안 건드렸고.”
경찰관은 상자와 계단을 번갈아 찍었다.
안에서 나오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문턱 바로 안쪽에 멈췄다. 운동화 밑에서 작은 유리가 눌렸다.
“없어진 물건부터 확인해 주세요. 손은 대지 마시고요.”
내 서랍 앞에 쪼그려 앉았다. 대출 서류를 대조해 둔 봉투가 바닥에 있었다. 입구를 묶었던 실은 끊어졌고, 사진을 끼운 투명 덮개만 남아 있었다.
“이 안에 사진 출력물이 있었어요. 해윤제지 대출 서류를 찍은 것들이요.”
“현금이나 물건은요?”
다은이 뒤에서 말했다.
“제 서랍에 현금 통이 있어요. 그쪽은 안 열렸어요.”
경찰관이 서랍을 열게 하고 안을 찍었다. 다은이 말한 돈은 그대로였다. 컴퓨터와 카메라도 남아 있었다.
나는 벽의 종이를 가리켰다.
“저걸 두고 간 사람이 사진을 가져간 것 같아요.”
“같은 사람이 한 건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은 침입해서 물건을 가져간 절도로 보고 접수하겠습니다.”
“돈이 아니라 저 서류만 가져갔어도요?”
“가져간 물건이 있으면 조사해야죠. 쪽지를 남긴 경위도 같이 적겠습니다.”
경찰관이 종이의 위아래를 찍었다. 나는 휴대폰에 남겨 둔 사진을 열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어요. 그래서 이 문구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어요.”
경찰관의 펜이 멈췄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은 없어요. 다만 저 사진에 관련된 일로 다투는 사람이 있어요.”
“지구대에 가셔서 그 부분까지 말씀해 주세요.”
나는 화면 속 글씨를 다시 봤다. 경찰관이 종이에 손을 대기 전에 옆에 있던 작업표를 가리켰다.
“저건 어제도 있었어요. 새로 붙인 건 이 종이 한 장뿐이에요.”
◈
다은은 병원에서 손목을 감고 나왔다. 뼈에는 이상이 없지만 당분간 손을 쓰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약 봉투를 가방에 넣고 이헌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은이 진료 끝났어요. 솔빛 지구대로 가요.』
답장은 차 문을 닫기 전에 왔다.
『그쪽으로 갈게요.』
다은이 내 휴대폰을 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 사람이지?”
“응.”
“내 손 때문에 부른 건 아니지? 나 혼자 병원 갈 수 있었어.”
“작업실 일도 알아야 하는 사람이야.”
다은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으로 안전띠를 잡아당겼다. 내가 버클을 받쳐 주자 그제야 끼웠다.
지구대에 들어갔을 때는 점심이 지나 있었다. 창가 의자에 앉자 다은이 감은 손목을 무릎 위에 올렸다.
접수대에 있던 순경이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얼음팩을 가져왔다.
“병원에서 찜질 얘기 들으셨죠? 바로 대지 마시고 이걸로 감싸세요.”
작은 수건까지 건네자 다은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순경은 얼음팩을 수건 안에 넣고 한 번 접어 주었다.
“손목 아래에 놓으시면 돼요.”
다은이 얼음팩을 받치자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나는 옆 의자에 가방을 놓고 진술서를 받았다.
첫 줄에 이름과 연락처를 썼다. 그다음 칸에는 작업실 문을 연 시간을 적어야 했다.
“저는 발견한 뒤에 왔어요. 처음 본 건 직원이고요.”
경찰관이 다은에게도 종이를 건넸다.
“쓰실 수 있겠어요?”
“오른손잡이라 괜찮아요.”
나는 내 진술서에 도착한 시각을 적고, 다은에게 전화를 받은 시각은 통화 기록을 보고 따로 적었다.
◈
경찰관이 내 앞에 휴대폰을 놓았다. 전송한 사진 중 봉투를 찍은 장면이 떠 있었다.
“서류 원본을 도난당한 건 아니고요?”
“네. 제가 찍어서 출력한 사진이에요. 원본 파일은 따로 있어요.”
“그 파일도 제출할 수 있습니까?”
“없어진 사진이 뭔지 확인할 수 있게 정리해서 드릴게요.”
나는 봉투 이름과 대출 서류, 부지 도면을 적었다. 장부 사진은 어느 부분을 출력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따로 표시했다. 확실하지 않은 것까지 없어진 목록에 넣을 수는 없었다.
경찰관이 빈칸을 짚었다.
“피해 금액은 나중에 확인해 주셔도 됩니다.”
“사진값보다 안에 있는 내용이 중요해요.”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누군지도 적어 주세요.”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석진의 이름부터 적으려다 멈췄다.
“이걸 가져간 사람을 봤다는 뜻은 아니에요.”
“네. 알고 있습니다. 짐작과 직접 보신 건 나눠서 말씀하시면 됩니다.”
나는 사진을 알고 있거나 서류 문제로 만난 사람들을 적었다. 석진의 이름 옆에는 서진그룹 부회장이라고 썼다.
경찰관이 그 줄을 보고 물었다.
“혼인하실 분의 아버지입니까?”
“네.”
옆자리에서 다은의 펜이 멎었다. 나는 종이를 내 쪽으로 조금 당겼다.
“작업실에는 손님 책도 있어요. 다시 들어와서 다른 걸 가져가면 곤란해요.”
“문부터 수리하시고, 오늘은 중요한 물건을 두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주변 영상은 확인하고 있습니다.”
나는 문 수리를 맡길 곳의 연락처를 찾았다. 현장을 정리해도 되는 시점을 확인한 뒤 전화를 걸었다. 잠금장치까지 바꿔 달라고 하고, 방문하기 전에 연락을 달라고 했다.
통화를 끝내자 다은이 물었다.
“맡긴 책들은 어디로 옮겨?”
“오늘은 잠기는 쪽에 두고, 손님들한테 먼저 연락하려고.”
“내가 할게. 목록은 내 휴대폰에도 있어.”
“손 아프면 말해.”
다은이 얼음팩을 고쳐 놓고 통화 목록을 열었다. 경찰관은 우리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벽에 붙은 종이 사진을 다시 띄웠다.
“종이를 보고 따로 알아보신 게 있습니까?”
“평범한 복사용지로 보여요. 사진만으로는 단정 못 해요.”
“직업이 종이 복원이라고 하셨죠?”
“네. 모서리는 칼로 잘랐어요. 가위로 자른 흔적은 안 보였어요. 그것도 가까이 본 건 아니고요.”
나는 사진을 확대했다. 글씨 바깥으로 잘린 여백이 보였다.
“같은 종이가 작업실에 있었는지는 확인해야 해요. 거기서 꺼내 쓴 건지 가져온 건지요.”
경찰관이 내 말을 적었다. 나는 마지막 문장을 덧붙였다.
“종이 떼실 때 테이프도 같이 보관해 주세요.”
지구대 문이 열렸다.
나는 펜을 든 채 고개를 돌렸다.
이헌이 문 안으로 들어와 나를 찾았다. 셔츠 소매가 두 번 접혀 있었다. 다은의 손목을 먼저 보고, 내 앞에 놓인 진술서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의자를 밀려다 멈췄다. 경찰관이 일어섰다.
“같이 오신 분입니까?”
이헌이 내 옆에 섰다.
“연락받고 왔습니다. 동석해도 되겠습니까?”
경찰관은 나를 봤다. 나는 진술서 위에 펜을 내려놓았다.
“네. 괜찮아요.”
◈
내 오른쪽 의자에는 가방이 있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 발 옆에 놓았다. 이헌은 내가 비운 자리에 앉았다.
탁자 아래에서 구두 끝이 보였다. 손을 내리면 닿을 거리였다. 나는 두 손을 탁자 위에 뒀다.
“많이 다치셨어요?”
이헌이 다은에게 물었다.
“삔 거래요. 책은 며칠 못 만지겠지만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다은이 나를 한번 봤다.
“우선 얘 밥 좀 먹여 주세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거든요.”
나는 다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도 안 먹었잖아.”
“나는 병원에서 빵 먹었어. 너는 가방에 넣었고.”
이헌이 내 발치의 가방을 내려다봤다. 겉주머니에 종이봉투 끝이 나와 있었다.
“조사 끝나면 같이 먹어요.”
경찰관 앞이라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봉투를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네.”
경찰관이 이헌에게 관계를 물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붙였다.
“강이헌입니다. 서진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헌은 명함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경찰관이 명함과 진술서를 번갈아 봤다. 종이 위에 석진의 이름이 그대로 있었다.
“여기 적으신 분과 같은 회사시네요.”
“형님입니다.”
다은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나는 경찰관에게 말했다.
“제출할 내용은 제가 정리해서 드릴 거예요.”
이헌은 내 진술서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경찰관 쪽으로 몸을 돌려 짧게 물었다.
“현장 확인은 끝났습니까?”
“담당자가 아직 확인 중입니다. 결과는 신고하신 분께 안내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탁자 위 명함을 봤다.
서진그룹 전략기획실장.
작업실에 왔다면 멀리 기다려도 됐을 사람이 내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접수대 순경도, 맞은편 경찰관도 이헌의 이름을 들었다.
“실장님.”
내가 작게 부르자 이헌이 고개를 돌렸다.
“네.”
“여기까지 오신 거, 회사에서 알 수도 있어요.”
이헌은 내 목소리를 듣고도 몸을 가까이 기울이지 않았다.
“윤나경 씨 혼자 앉아 있을 이유는 없어요.”
나는 이헌의 손을 봤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 앞에서 경찰관이 종이를 넘겼다.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여기 하나 더 적을게요.”
작업실을 닫기 전 사진을 보관해 둔 날짜를 적었다. 이헌은 내가 쓰는 동안 말없이 기다렸다.
다은이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오후에 찾으러 오기로 한 분들은 다 연락됐어. 할머니 가계부는 자기가 내일 온대.”
“할머니 집에 가셨어?”
“문 수리하는 사람 올 때까진 아래층에 있겠대.”
나는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
진술서를 내기 전에 적은 내용을 소리 없이 읽었다. 발견한 시각과 내가 도착한 시각은 달랐다. 직접 본 것과 다은에게 들은 것도 나눠져 있었다.
경찰관이 다은의 진술서를 받아 내 것 옆에 놓았다.
“추가로 기억나는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 피해 목록도 같이 보내 주시고요.”
나는 안내받은 번호를 저장하고 가방을 들었다. 이헌이 먼저 일어나 통로를 비웠다. 문 쪽으로 나가려는데 입구에 서 있던 남자가 우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양복을 입은 남자의 손에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윤나경 씨 맞으십니까?”
나는 다은 앞을 지나지 않고 그 자리에 섰다.
“누구세요?”
남자는 경찰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변호사입니다. 피해 확인을 도우러 왔습니다.”
이헌이 내 옆에서 멈췄다.
“누가 보냈습니까?”
남자는 이헌에게 허리를 조금 굽혔다. 대답은 나를 보고 했다.
“작업실에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문 수리나 피해품 정리도 도움이 필요하실 테고요.”
“어디서 들으셨어요?”
남자가 서류 가방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우선 다친 분이 계시다니 유감입니다. 치료비 부분도 확인해 드릴 수 있습니다.”
다은은 얼음팩을 쥔 채 말이 없었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제 쪽에서 변호사를 부른 적은 없어요.”
경찰관이 남자에게 물었다.
“피해자분이 선임하신 분은 아닌 겁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필요한 부분을 안내하려고 왔습니다.”
“그러면 조사 내용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헌보다 먼저 한 걸음 나갔다.
“피해 목록도 제가 직접 낼 거예요. 수리는 이미 맡겼고요.”
“네.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나는 받기 전에 물었다.
“누가 오라고 했는지부터 말씀해 주세요.”
남자의 손이 내 앞에서 멎었다. 명함에는 변호사라는 직함과 연락처가 찍혀 있었다.
내 손에 든 진술서 사본에는 방금 적은 석진의 이름이 있었다. 나는 사본을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남자는 명함을 내 쪽으로 조금 더 내밀었다. 나는 끝을 잡아 받아 들었다.
“부회장님이 걱정하십니다.”
(76화 끝)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나는 명함을 뒤집어 뒷면까지 확인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걱정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어요. 제 서류를 보여 드리지는 않을 거예요.”변호사는 내 가방에서 손을 뗀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연락 주시면 되는 겁니다.”“필요하면 제가 연락할게요.”명함은 진술서와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 이헌이 문을 잡아 주었다. 다은이 먼저 나갔고, 나는 문턱을 넘기 전에 경찰관에게 고개를 숙였다.밖으로 나오자 다은이 얼음팩을 내려다봤다.“이거 돌려줘야 해.”내가 받으려 하자 다은이 오른손을 뒤로 뺐다.“이건 들 수 있어. 잠깐만.”다은은 지구대로 돌아갔다. 유리문 안에서 순경에게 수건까지 돌려주는 모습이 보였다. 이헌은 내 옆에 서 있었다. 변호사는 문 안쪽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저 사람, 그냥 보내도 돼요?”내가 묻자 이헌이 대답했다.“여기서 따져도 답은 안 할 겁니다. 명함은 갖고 있어요.”“부회장님한테 전화하실 거예요?”“지금은 안 해요.”이헌이 내 가방 끈을 봤다. 나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끈을 다시 올렸다.“먼저 작업실로 가요. 문 수리부터 확인하고요.”다은이 문을 밀고 나왔다. 나는 변호사 쪽으로 다시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문 수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손님 책을 잠기는 장 안으로 옮겼다. 다은은 목록에 표시만 했다. 무거운 책을 들려다 내 눈에 걸린 뒤로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그 종이, 원래 붙어 있던 겁니까?”계단을 올라온 경찰관이 내 휴대폰 화면을 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어제 문 닫을 때는 없었어요.”경찰관은 문턱 밖에서 벽을 확인하고, 뒤따라온 동료에게 안쪽을 가리켰다. 다은이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했다.“안에 누가 있는지 먼저 보겠습니다.”나는 다은의 가방을 들고 계단 쪽으로 물러났다. 경찰관들이 작업대 뒤와 3층을 살피는 동안 할머니가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밟을까 봐 계단 것만 주웠어요. 안에는 안 건드렸고.”경찰관은 상자와 계단을 번갈아 찍었다.안에서 나오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문턱 바로 안쪽에 멈췄다. 운동화 밑에서 작은 유리가 눌렸다.“없어진 물건부터 확인해 주세요. 손은 대지 마시고요.”내 서랍 앞에 쪼그려 앉았다. 대출 서류를 대조해 둔 봉투가 바닥에 있었다. 입구를 묶었던 실은 끊어졌고, 사진을 끼운 투명 덮개만 남아 있었다.“이 안에 사진 출력물이 있었어요. 해윤제지 대출 서류를 찍은 것들이요.”“현금이나 물건은요?”다은이 뒤에서 말했다.“제 서랍에 현금 통이 있어요. 그쪽은 안 열렸어요.”경찰관이 서랍을 열게 하고 안을 찍었다. 다은이 말한 돈은 그대로였다. 컴퓨터와 카메라도 남아 있었다.나는 벽의 종이를 가리켰다.“저걸 두고 간 사람이 사진을 가져간 것 같아요.”“같은 사람이 한 건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은 침입해서 물건을 가져간 절도로 보고 접수하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나경아, 계단에서 조심해. 유리 있어.”휴대폰 너머로 다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건물 현관에 들어서다 멈췄다.“무슨 유리?”“우리 출입문. 누가 깨고 들어왔어.”계단 위에서 빗자루가 바닥을 긁었다. 나는 가방을 몸 앞으로 당겼다.“너는 어디 있어?”“복도. 안에는 아무도 없어. 불 켜고 나오다가 넘어졌어.”“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마. 바로 올라갈게.”전화를 끊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난간 밑에 유리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위층에서 할머니가 빗자루를 세웠다.“가운데로 와. 벽 쪽은 아직 못 쓸었어.”가끔 가계부를 고치러 오는 할머니였다. 손에는 쓰레받기 대신 빈 과자 상자가 들려 있었다.다은은 2층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받친 채였다. 나는 다은 앞에 쪼그려 앉았다.“머리는 안 부딪혔어?”“손만 짚었어. 불이 꺼져 있어서 바닥에 뭐가 있는지 못 봤거든.”다은의 바지 무릎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손가락은 움직였지만 손목을 들자 입술을 깨물었다.“삐었나 봐.”“움직이지 마. 손바닥 좀 보여 줘.”긁힌 곳은 없었다. 손목 바깥쪽이 조금 부어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은 손 밑에 접어 넣었다.복도 끝의 출입문은 잠금장치 옆 유리가 깨져 있었다. 안쪽 문고리에 유리 조각이 걸려 있었다.다은이 내 팔을 잡았다.“컴퓨터는 있어.&rd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