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안에는 아주 호화로운 금 장신구가 들어 있었는데, 온씨네 사형제가 온사를 위해 특별 제작한 장신구보다 더 화려했다.온사뿐만 아니라 옆에서 내용물을 확인한 온씨 일가도 화들짝 놀랐다.온모는 질투에 이를 갈았다.‘만약 내가 성녀였더라면 저 머리 장신구는 내 것이었을 텐데!’그런 생각을 하니 온사가 더욱 얄미워졌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저런 걸 받아?’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이것도 열어 보시오.”북진연은 다른 상자를 온사의 앞으로 건넸다.온사는 조심스레 장신구를 내려놓고는 북진연의 선물을 열었다.열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화려하고 아름다운 비단 치마에 사람들은 또 한번 놀랐다.가장 놀라운 것은 비단옷 위에 매화 한 송이가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화려한 옷과 장신구, 그리고 꽃까지!온사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감동을 금치 못했다.“이건 폐하와 내가 성녀에게 드리는 생일 선물이자 성인식 선물이오. 너무 늦은 게 아니었으면 좋겠군.”“늦지 않았습니다. 정말 때마침 주셨네요.”그러자 그녀는 두 번의 삶을 살며 쌓아온 서러움이 순식간에 사라지는듯한 느낌을 받았다.한때는 그녀가 정말로 바랐지만 못 가진 것들이었으니 말이다.온사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었다.혈연관계가 없는 타인마저 그녀의 가족들보다 나았다.그런데 아버지와 오라버니라는 사람들은 그녀가 선물만 욕심낸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온씨 일가의 분위기가 어두워졌다.온자신은 멍하니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북진연이 선물을 가지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스스로를 위안할 핑계라도 있었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도 미처 준비하지 못했으니 너무 큰 죄책감을 가지지는 않았다.그런데 북진연이 공들여 고른 선물을 들고 나타났을 때,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게 되었다.온장온도 마음이 착잡해졌다.집안의 장남으로서 그는 줄곧 생전 어머니의 부탁에 따라 동생들을 잘 이끌고 보살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가 막내에게는 애
결국에 그녀는 그 모든 역경을 뒤로하고 탐스러운 꽃을 피울 것이었다.온사는 그 말속에 숨은 뜻을 이해하고 감격에 겨워서 말했다.“섭정왕 전하의 축복에 감사드립니다.”“섭정왕 전하는 꽃에 대해서도 잘 아시네요. 매화가 언니에게 어울리는 꽃이긴 하죠.”애교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깼다.온모는 온사의 앞으로 다가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아직 계절도 아닌데 피어난 매화는 정말 흔치 않네요. 너무 예뻐요. 언니, 내가 한번 봐도 돼?”“안 돼.”온사가 싸늘한 눈을 하고 단박에 거절했다.“역시 언니는 날 싫어하는구나. 됐어. 언니, 화내지 마. 그렇게 기분 나쁘면 안 볼게.”온모는 금세 상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기대에 찬 눈을 하고 북진연에게 말했다.“왕야, 혹시 장원에 남은 매화가 있나요? 언니의 것을 빼앗기는 싫은데 너무 예뻐서요. 왕야께서 저에게 한송이만 선물해 주신다면 제가 다른 걸 드릴게요!”‘또 시작이네.’온사의 좋아졌던 기분이 온모의 약아빠진 모습을 보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그녀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올라왔고 그건 표정에서도 드러났다.처음부터 온모는 이런 얼굴로 온가의 모두를 속이고 그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에는 온사를 심보 고약하고 질투심 많은 악녀로 만들었다.저 모습을 보니 온모가 또 새로운 사냥감을 정한 모양 같았다.온사는 불안한 마음에 꽃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잠시 고민됐지만 결국 그녀는 온모를 반박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렸다.온모의 이런 모습을 보고 섭정왕 북진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다.그런데 걱정이 무색하게 북진연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리 천해도 진국공부의 양녀인데 네 양부는 너에게 다른 사람이 대화할 때 끼어들지 말라는 예의도 안 가르쳤어?”순간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온모의 표정이 굳어버렸다.온사도 멈칫했다가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온모의
“섭정왕 전하께서 잘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일 겁니다.”온권승이 입을 열었다.“온모의 생일은 사실 진짜 생일이 아니라 저 아이 모친의 기일입니다.”“정말?!”북진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못 믿겠다는 얼굴로 말했다.“어머니의 기일을 왜 생일로 바꾼 거지?”“온모가 앞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을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생일을 두 달 앞당긴 겁니다. 진짜 생일로 따지면 온모는 온사보다 나이가 어린 게 맞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막내가 된 것이지요.”“그게 다인가?”“그럼요.”온권승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하자, 온모도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버지께서는 저를 위해서 그렇게 정한 것인데 섭정왕 전하께서 오해하실 줄은 몰랐네요. 제 진짜 생일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게 맞아요.”온장온 일행은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 눈치만 보았다.그들은 오늘에야 막내의 생일에 그런 사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물론 그건 다 거짓말이었지만 말이다.온모의 모친이 죽은 날도 그 날이 아니었다. 온권승은 그저 북진연을 속이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온모는 바로 화제를 돌려 온사에게 말했다.“언니가 신경 쓰인다면 내가 호칭을 바꿀게.”“그럴 필요 없어.”온사는 단박에 거절했다.“난 온씨 가문 사람도 아닌데 굳이 호칭을 바꿀 필요도 없지. 아니, 그냥 앞으로 언니라고 부르지 마.”북진연은 듣고 있는 것마저도 역겨웠다.두 사람의 거짓말에 속을 그가 아니었다.“정말 그런 거면 왜 무우 사태의 생일까지 저 여인이랑 같은 날로 앞당긴 거지? 내 기억에 진국공 부인의 기일은 그날이 아닌 걸로 아는데?”“당연히 아니죠. 제 어머니의 기일은 이미 지난지 오래입니다.”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온사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물론 그건 눈앞의 북진연이 아닌 온권승을 향한 것이었다.온권승이 그녀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예, 그렇지요. 단지 그때는 온모가 우리 집에 온지 얼마되지 않았고 자매의 정을 키우라고 배려해서 그렇게 안배했습니다.”“친딸을
그 말에 숨은 뜻을 알아차린 온장온 일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들은 그제야 눈앞의 이 사내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섭정왕 전하이며, 전장에서 수많은 적군의 목을 벤 백전백승 무장이라는 것을 떠올렸다.저런 사람에게 밉보이는 건 자살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막내와 셋째가 북진연의 대화에 끼어들고 반발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은 것이었다.아버지를 대신해서 그들을 가르친다는 말은 분명한 협박이었다.사실을 알고 있는 온자월도 화는 났지만 그저 주먹을 꽉 쥘 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짝! 짝! 짝!온권승은 아들이라고 봐주지 않았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힘을 주어 아들의 얼굴을 가격했고, 얼마 안 가 온자월의 입가에서 피가 스며나왔다.그 모습을 본 온모는 저도 모르게 뒤로 뒷걸음질쳤다.‘섭정왕 전하라는 사람 왜 이렇게 속이 좁아? 까탈스럽기는!’지금에 와서야 온모는 북진연이라는 사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새삼 깨달았다.항상 고고하고 위엄 있던 아버지마저 감히 그를 상대로 반박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그녀가 함부로 건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왜, 무섭니?”온사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놀란 온모는 사람들이 안 보는 틈을 타 그녀를 힘껏 노려보았다.“무슨 소릴 하는지 전혀 못 알아듣겠네. 뭐가 무섭다는 거야?”그녀의 속을 훤히 꿰뚫어본 온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차라리 겁먹은 게 나아. 너 같은 신분을 가진 애가 건들 수 없는 상대도 있는 법이니까.”온모는 순간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그녀는 의심의 눈초리로 온사를 바라보았다.‘이년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니야?’‘아니지! 그럴 리 없어!’아버지는 진작에 그녀의 과거 흔적들을 깨끗이 지웠고 그녀의 출생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다.‘온사 저년, 날 겁주는 거야!’그런 생각을 하며 온모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언니가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언니 말이 맞겠지. 섭정왕 전하는 아무나 쉽게 건들 수 없는 분이니까.
“되었네, 진국공. 이제 그만하시게.”온자월이 아버지에게 서른대를 맞은 후에야 북진연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내가 성격 포악한 사람도 아니고 아들들에게 예의 좀 가르치려고 한 건데 왜 그리 성을 내시오? 아들 얼굴이 엉망이 됐네. 불쌍해라.”진심이 전혀 안 느껴지는 그의 말에 온권승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오늘 북진연의 불만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아마 온자월은 평생 순탄치 못한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었다.온권승은 아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그러자 온자월은 부어서 엉망이 된 얼굴로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소인이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섭정왕 전하.”온자월이 이토록 자존심을 굽히는 상황은 드물었기에 온사는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이때, 북진연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온사가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왜 그러십니까?”북진연이 눈을 찡긋하며 물었다.“사태는 용서할 의향이 있소?”온권승 일행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특히나 온자월은 더욱 모멸감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분명 북진연에게 죄를 사하여 달라고 빌었는데 왜 질문이 온사에게로 돌아간단 말인가!본능적으로 반박하려던 온자월은 입가에서 느껴지는 아린 통증에 말도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장남 온장온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얌전히 무릎 꿇고 있어.”온장온은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섭정왕 북진연은 철두철미한 황제파였다. 어쩌면 온사가 폐하가 친히 책봉한 복명 성녀이기에 섭정왕은 진국공부와 온사 사이에서 그녀를 택한 것이다.그리고 북진연이 진국공을 시켜 온자월을 때리게 한 것도 온자월이 몇번이고 온사를 모욕하는 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냥 온사가 셋째를 용서하면 넘어갈 일이네.’하지만 온장온의 바람과는 다르게 온사의 반응이 미묘했다.“용서요?”온사는 시선을 내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온자월을 바라보았다.온장온만큼 생각이 깊지 않은 온자월이기에 북진연이
‘설마 아까 일하다가 먼지라도 끼었나? 그런데 난 왜 아무 느낌도 없지?’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북진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제는 사라졌소. 방금 사태가 온자월을 바라볼 때 많은 감정을 담고 있더군. 분노, 증오, 그리고 슬픔, 고통까지…!”그 말을 들은 온사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북진연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사태는 온씨 가문에서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이오?”온사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그녀는 한참의 침묵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섭정왕 전하께서 이리도 눈썰미가 좋은 줄은 몰랐습니다.”“눈썰미가 좋은 게 아니라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군. 아까 사태의 눈빛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는지.”그 깊이가 너무 깊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였다.북진연을 제외하고 또다른 누군가도 그 눈빛을 읽어버렸다.온사는 주먹을 꽉 쥐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말했다.“그동안 소인을 보살펴 주시고 지켜주신 전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우리 사이가 그런 깊은 사정까지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북진연은 멈칫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도 맞는 것 같군. 아직 그럴 사이는 아니지.”말을 마친 그는 바로 뒤돌아섰다.“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푹 쉬시오. 만약 진국공부 인간들이 또 찾아오면 추월을 시켜서 실컷 두들겨패고 내쫓아도 되오.”온사는 떠나려는 그의 모습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나?’그녀는 뭐라도 해명하고 싶었지만 북진연은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대문을 나갔다.온사는 약간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었다.그녀는 시선을 돌려 북진연이 가져온 선물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것들을 매만졌다. 맨 마지막에 그녀의 손길이 매화꽃가지에서 멈추었다.그 시각, 북진연이 수월관을 나서자 고요 일행이 그에게 다가왔다.“왕야, 오늘은 어떠셨나요? 성녀께 드린 선물이 마음에 든답니까?”북진연은 선물을 받았을 때 미소를 짓던 온사의 얼굴을
“좀 아쉽네.”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온장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섭정왕 전하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온사랑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얼굴에 약을 바르고 있던 온자월이 짜증스럽게 말했다.“형님, 아직도 모르겠어요? 섭정왕께서 오시지 않았다고 해도 온사는 우리와 대화할 마음이 없을 거에요.”“네, 셋째 형 말이 맞아요! 큰 형님,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온옥지가 연신 경고했다.“특히나 막내 앞에서는 더욱 말을 조심해야 해요.”온장온은 인상을 확 썼다.“막내 앞에서 왜 말을 못해. 막내는 착하고 줄곧 언니를 따랐으니까 우리가 이런 말한다고 서운해하지 않을 거야.”그 말을 들은 온자월과 온옥지는 처음으로 큰 형님이 눈치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막내가 착하니까 더욱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죠.”온자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면박을 주었다.“온사는 원래 인성 나쁜 애였어요. 아무리 큰 형님이 설득해서 데려온다고 해도 또 집안에 불화만 만들 텐데 그러다가 또 막내를 다치게 하면요? 온사가 그런 짓을 안 한 것도 아니고! 막내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요?”온장온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한참 후에야 그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설마 그러겠어….?”“뭐가 설마예요? 형님 벌써 잊었어요? 온사 걔 막내를 밀어서 물에 빠뜨린 적도 있다고요. 그리고 두 달 전에는 막내 성인식을 망치겠다고 막내의 옷까지 일부러 망가뜨렸잖아요!”온자월은 말할수록 화가 치밀었다.아까 수월관에서 매를 맞고도 온사의 용서를 구해야 했을 때, 그는 사무치는 굴욕감을 느꼈고 더욱 더 온사가 미워졌다.“둘째 형님도 벙어리처럼 있지 말고 말 좀 해봐. 설마 형도 큰 형님처럼 온사가 집으로 돌아오길 바라?”온자신은 마차에 탔을 때부터 창밖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온자월이 불렀을 때에야 그는 고개를 돌려 형제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보세요, 큰 형님.! 둘째 형님도 온사가 돌아오는 걸 바라지 않는다잖아요. 그런데 뭘 그렇게 아쉬워해요?”온
“외삼촌,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온모야, 오래 기다렸어.”고개를 돌리자 언제 온 건지, 최소택이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최소택은 빠른 걸음으로 온모에게 다가가더니 물었다.“어딜 다녀오는 거야? 오후에 왜 집이 텅 비어 있었어?”그 말을 들은 온장온 일행은 순간 멈칫했다.그들 말고도 온사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전 약혼자까지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까맣게 잊어 버렸던 것이었다.온자신은 점점 무기력함을 느꼈다.하지만 유독 온모만 생글생글 웃으며 질문에 답했다.“오후에 수월관에 언니 보러 갔었어요. 오늘 언니 생일이잖아요.”온사 얘기가 나오자 최소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걔 생일을 왜 챙겨줘?”“우리만 간 게 아니라 섭정왕 전하까지 가셨는걸요.”온모는 일부러 북진연 얘기를 꺼냈다.그러자 그녀의 예상대로 최소택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고함을 질렀다.“뭐? 그 사람은 할 일이 그렇게도 없대?! 이 나라의 귀하신 섭정왕 전하께서 왜 맨날 여승들 사는 수월관에 달려가?”그는 항상 온사의 곁을 맴도는 북진연이 불쾌했다.‘설마 성녀라고 특별히 보살피는 건가?’“닥쳐.”온권승이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렇게 맞았는데 이제 정신을 차릴 때도 되지 않았나?”그는 최소택을 두고 하는 말이었지만 옆에 있던 온자월은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또 외삼촌에게 욕을 먹은 최소택은 차마 반박은 못하고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알았어요, 외삼촌. 걱정 마세요. 여긴 우리밖에 없잖아요.”온권승은 상종하기도 싫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더니 얘기 다했으면 꺼지라는 말만 남기고 서재로 들어갔다.최소택은 잔뜩 화가 나 있는 온권승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오늘 누가 외삼촌 심기를 건드렸어?”온장온은 당연히 아니라고 답했다.가족끼리는 괜찮지만 최소택에게 말할 수 없는 게 있었다.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그가 진국공부의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눈치 빠른 최소택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그쳐 물었다.“잠깐,
진국공부 서재.“아버지, 형님, 어찌 막내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후궁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아시면서, 폐하께서 진국공 가문을 얼마나 견제하는지 아시면서 어떻게 막내를 그곳에 두고 와요!”“막내가 황궁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우리가 옆에 없으면 누가 걔를 지켜줘요?”“왜 다들 대답이 없어요? 아버지랑 형님이 안 가면 제가 가요!”“이럴 줄 알았으면 막내를 연회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애를 그런 곳에 버려두고 와요! 내가 거기 갔어야 하는 건데!”진국공 가문은 온모가 황궁에 남은 일로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온자월이 일방적으로 소란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온옥지는 온자월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매번 온자월이 소란을 피울 때 그는 온자월의 편에 섰다.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처음에는 인내심 있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온모를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온모가 고집을 피워서 황궁에 남은 거라는 말도 했다.하지만 온자월에게는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았다.“막내는 순진해서 후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무리 폐하의 후궁에 아직 사람이 없다지만 앞으로는 누가 보장해요?”“폐하께서 막내한테 질려서 후궁 간택을 또 하면요? 그럼 수많은 여인들이 입궐하게 될 텐데 막내는 거기서 어찌 살아남아요?”이틀째 소란을 피우는 온자월 때문에 온권승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그는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폐하께서 우리 진국공가를 견제하는 걸 알면 그분이 막내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을 것도 알지 않니.”“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온자월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에 폐하께서 정말 막내를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면요? 막내를 인질로 잡고 아버지와 우리 진국공 가문을 협박할 생각이라면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구나.”더 이상 그와 입씨름하기 싫었던 온권승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그리고 이때, 옆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던 온장온이 담담히 말했다.“황비로 간택하여 우리 가문을
양 어멈은 태후의 심복이자, 태후가 온모에게 예의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보낸 사람이었다.그녀는 온모의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죄송합니다, 아씨. 아씨는 아직 시골 촌티가 너무 나요. 빨리 궁중의 귀인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련을 다 통과하셔야 합니다.”촌티가 난다는 말에 온모는 금세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이 할망구가 감히 날 모욕해?’온모는 이를 부드득 갈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폐하께선 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하셨는걸요. 만약 어멈과 예의 법도를 배우다가 얼굴을 다치기라도 하면 어멈도 곤란하지 않을까요?”온모의 뻔한 수작은 양 어멈에게 너무도 하찮은 수로 보였다.어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모에게 말했다.“아씨, 그건 틀린 말씀이죠.”온모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어디가 틀렸는데요?”“그 말 자체가 틀렸습니다. 폐하께서 아씨께 한눈에 반하여 아씨를 비로 들이겠다고 하셔서 제가 태후의 명을 받고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런데 아씨는 열심히 배우지도 않고 외모만 신경 쓰고 계시니, 폐하를 얼굴만 보는 속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아닙니까?”양 어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온모는 가슴이 철렁했다.“그… 그건 모함이에요! 제가 언제 폐하를 속된 사람으로 말했어요!”“아씨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때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 늙은 것을 협박할 게 아니라요!”온모는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머리에 이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양 어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며 힘을 주어 온모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아씨, 진국공 저택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나 보군요. 아씨가 입궁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제 눈에는 성에 차지도 않지만요.”“폐하께서 아씨를 가르치라고 저를 보냈으니 저는 열심히 임할 뿐입니다. 아씨께서 제가 가르쳐 드린대로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 제가 드린 숙제만 완수하면 빠른 시일 내에 궁중법도를 익히고 폐하의 시침을
온장온은 순간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녹두과자 아니었어? 그럼 계화떡인가?”온사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계화떡이요? 확실한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더 맞혀보세요. 어쩌면 매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걸 말씀하시는지, 그것도 재능 아닌가요? 그만큼 제가 싫었고 관심이 없었던 거겠죠.”온장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됐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든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 못하는 것도 이해해요.”온사의 어투에는 진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난 싫어하지만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그러니 얼른 그거 갖고 식기 전에 오라버니가 가장 총애하는 동생한테 갖다주세요.”“아니야, 온사야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일부러 네가 싫어하는 녹두과자를 사온 게 아니야. 그냥 저도 모르게… 이걸….”온장온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다시 생각해 보니 녹두과자와 계화떡은 막내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분명 온사를 찾아온다고 왔는데 온사에게 막내가 가장 좋아하지만 온사는 가장 싫어하는 걸 가져왔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온사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됐다.온장온은 손에 들린 녹두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온사야, 화내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가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걸 사올게!”온사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장온을 바라보며 말했다.“큰 오라버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기억이 나요?”“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 오리구이, 맞지?”온장온은 기대에 찬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입에서 긍정의 답을 기다렸다.하지만 온사는 말없이 한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온장온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녹두과자도 아니고, 계화떡도 아니고, 오리구이는….’‘그래, 오리구이는 셋째가 좋아하는 거잖아!’어쩌다가 그것들을 온사가 좋아한다고 인지하게 된 걸까?온장온은 손에 들고 있던 녹두과자를 툭 하고
“제가 정말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른다면 저는 사람도 아닙니다. 벼락 맞아 죽어도 불만이 없어요!”온장온은 수월관 밖에서 장장 한 시진을 기다리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사태들에게 사정했다.보다못한 사태가 와서 말을 전했지만 온사의 반응은 냉담했다.“안 가요.”그 말은 그대로 온장온에게 전해졌다.하지만 그는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제발 동생 좀 설득해 주세요. 꼭 만나야 합니다.”“안 돼요. 성녀 전하께서 안 만나신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세요.”안 그래도 진국공 가문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태들은 말만 전하고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그렇게 그 뒤로 매일 온장온은 수월관을 찾아왔다.그는 오후 업무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바로 수월관으로 왔다.그가 매일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니 사태들도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무고 사저는 난감한 얼굴로 또 온사를 찾았다.“정말 끈질긴 사람이야. 강제로 침입한 건 아니지만 매일 찾아와서 꼭 널 만나야 돌아간다잖아.”막수와 함께 새로운 독약을 연구해낸 온사는 손을 씻고 돌아와서 말했다.“알겠어요, 사저들은 일단 돌아가 계세요. 제가 해결할게요.”그 말을 들은 무고 사저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사매야, 흥분하면 안 돼. 비록 짜증나게 굴긴 하지만 전에 왔던 그 녀석들과 비교하면 양반이잖아. 시비를 걸려고 온 건 같지 않았어. 그냥 몇 마디 해서 좋게 돌려보내.”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 제가 알아서 할게요.”온장온이 온 이유는 뻔했다.온씨 가문 인간들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면 분명 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서일 것이다.이미 어머니를 묻어드렸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절대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그러니 온장온이 매일 찾아와도 헛수고였다.사저와 사태들의 수련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온사야!”드디어 온사를 마주한 온장온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드디어 나와줬구나. 오라비가 오늘 정성루에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