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택은 온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화가 잔뜩 난 채 생트집을 잡으려는 모양이었다.다시 그의 뒤를 보니, 온모가 겁에 질린 얼굴로 입을 벌려 ‘하지 마’라고 했다. 하지만 최소택을 제지하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그리고 다시 온모와 눈을 마주쳤을 때, 그녀는 만족스러운 눈빛이었다.최소택이 자신을 위해 쉽게 나서는 것에 대해 아주 만족스러운 듯했다.하지만 아쉽게도 최소택이 온사의 근처까지 다가오자, 예단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섯째야, 막내야, 길시가 다 되었는데 얼른 와서 성년식 준비를 하지 않고 무엇 하느냐.”온사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예단 위에는 단정하게 푸른색 도포를 입은 중년 남자가 맨 앞에 앉아 차가운 얼굴로 그녀들을 보고 있었다.그녀의 아버지, 진국공 온권승이었다.아무리 최소택이 그녀를 괴롭히려고 했지만, 이때는 그저 잠시 물러나 있어야 했다.온사는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예단으로 올라갔다.온모는 예단으로 올라가니 보조개가 들어가 꽃이 핀 듯 예쁜 얼굴로 그녀에게 팔짱을 끼며 친한 척을 했다.“언니, 옷 꿰매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아버지께서 얼마나 오래 기다리셨는데.”“옷을 꿰매?”온권승은 온사를 흘끗 보았다.온사가 말을 하기도 전에 온모는 못 참겠다는 듯 온사가 관복을 잘라버린 일에 대해 얘기하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휴, 역시 제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가 봐요. 둘째 오라버니를 잘 타일렀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언니도 화가 나서 관복을 잘라버리지 않았을 거예요.”짜증 나 죽겠다. 굳이 이 일로 그녀를 난감하게 해야 했는가?온사는 이때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몇 초간 온권승이 그녀를 쳐다보도록 내버려뒀지만 짜증이 났다.“도대체 성년식은 시작하긴 하는 건가요? 아버지랑 막내가 제가 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제가 알아서 꺼져 드릴게요. 그럴까요?”온사는 생각지도 못한 폭력적인 말과 함께 짜증 가득한 얼굴로 예쁜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이 말을 들은 온모도 순간 멍해졌다.온사
온장온은 예단으로 올라가 두 여동생에게 시선을 돌렸다.아직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온모의 기대에 찬 눈을 마주치니 순간적으로 미간이 펴졌다.그리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됐다. 탓하려면 다섯째가 스스로 사랑받지 못한 걸 탓해야지.그러게 누가 버릇처럼 질투를 하랬나, 막내는 하나도 보듬어주지 않고.온장온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온사의 앞을 지나쳐, 온모에게 꽃을 건넸다.그 뒤로 온자신, 온자월, 온옥지……온씨 가문 사람들을 포함한 장 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꽃을 온모에게 주었다.전생과 똑같았다.쓸쓸한 온사와 싱그러운 꽃과 축복에 둘러싸인 온모.온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진작부터 이런 결과를 알고 있었고, 그녀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다음 차례는 최소택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꽃에 비해 그가 들고 있던 꽃은 크고 풍성해서 예뻤는데, 온사는 쳐다도 안 보고, 고민도 없이 온모의 품에 안겨주었다.“온모야, 꽃도 예쁘고 노래도 좋다. 성년이 된 거 축하해. 네 아름다운 그 미소 영원히 변치 않길 바라.”“고맙습니다. 오라버니들. 그리고 소택 오라버니. 오라버니들이 준 꽃 다 너무 예뻐요. 꽃이 너무 많아서 다 보지도 못하겠어요.”온모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최소택과 사람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오랜 시간 고민해서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꽃을 주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온자신이 사람들에게 밀려나다가 실수로 온사와 부딪혔다.온자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는데, 그녀가 꽃을 한 송이도 받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가볍게 비웃었다.“너무 질투하지 말거라. 막내가 꽃을 이렇게 많이 받을 수 있었던 건, 얘가 순수하고 착해서 그런 것이니. 만약 네가 막내의 10분의 1 정도만 했어도 한 송이도 못 받진 않았을 게다.”“그러니, 앞으로 더 반성해.”“관심 가져줘서 고마워요. 둘째 오라버니, 반성은 필요 없어요. 전 지금 이대로 아주 괜찮은 것 같아요.”온사는 부드럽게 웃었지만 따뜻함은 없었다.오늘 이미 시
“안 돼!”“그럴 수 없다!”맹세하는 것뿐이라서 최소택도 알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크게 반응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더 이상한 것은, 그와 똑같이 크게 반응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막내?”온장온과 일행은 이상하다는 듯 온모를 바라보았다.온모는 표정이 굳어졌다.방금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급히 감정을 추스르며 억지로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아니…… 그게, 저는…… 저는 그저 언니가 한 말이 조금 옳지 않은 것 같아서, 만약…… 만약 나중에 소택 오라버니가 마음을 돌리면, 그러니까 언니도 여지를 좀 남겨두는 게 어떨까?”첫째 온장온은 서서히 미간을 찌푸렸다. 온모의 말이 뭔가 이상했다.셋째 온자월은 별 반응이 없었다.넷째 온옥지는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온모를 보더니 다시 최소택을 보았다.그들에 비해 순진한 둘째 온자신은 온모를 완전히 믿고 있었다. 그는 애초에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됐다, 막내야. 나도 네가 온사를 걱정하는 것은 알지만,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그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시큰둥하게 최소택을 흘끗 보았다.“너도 그렇게 우리 온씨 집안 딸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아예 깔끔하게 오늘 우리 아버지 앞, 오신 이렇게 많은 손님들 앞에서 깔끔하게 맹세하면, 앞으로 온사가 네게 매달린다 하여도 우리 온씨 가문에서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둘째 오라버니……”온모가 다급해졌다. 하지만 최소택은 그녀보다 더 다급했다.“안 됩니다. 이 맹세는 할 수 없습니다!”최소택은 매섭게 온사를 노려보았다.그는 온사가 분명 온모에 대한 그의 마음을 깨닫고 고의로 이런 못된 조건을 내걸어 그와 온모를 방해한다고 생각했다.허.기왕 이렇게 된 거, 그도 이 못된 여자가 절대 우쭐거리게 두지 않을 것이다.최소택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속에서 굳건한 용기가 솟았다.그는 다시 손을 모으고 고민도 없이 온권승에게 말했다.“외삼촌, 파혼 외에 또 한가지 말씀 드릴 일이 있습니다. 외삼촌
“그대들의 말이 옳습니다. 전 제 동생이 아니고, 그리 착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절 괴롭히고 제게 모욕을 주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복수할 것입니다.”온사의 말투는 차가웠다. 그녀는 최소택을 보며 전생에 사람들 앞에서 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던 말을 꺼냈다.“최소택, 파혼하고 싶다 하였지? 그래, 나도 좋아. 아무 조건도 필요 없어. 그저 오늘 이후로 나 온사는 너희 충용후 저택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야!”그녀가 뱉은 말로 장 내는 고요해졌다.최소택 본인마저 멍하니 있었다.그…… 그냥 이렇게 알겠다고?그는 오늘 파혼 얘기를 꺼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온사가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온사가 매달리고 울며 소란을 피울 것이라고 생각했다……이곳에 오기 전, 최소택은 많은 가능성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건, 정말 온사가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아니, 이건 쉽게 받아들인 게 아니다.심지어 그의 뺨을 때렸으니.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체면이 구겨졌다고 생각한 최소택은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뜨거운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차가운 눈으로 온사를 흘끗 보고 말했다.“네가 눈치가 있는 것을 보아서, 방금 맞은 것은 내 넓은 아량으로 따지지 않겠네. 다만 너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야. 앞으로 네가 감히 또 나를 귀찮게 하거나 온모에게 무슨 수작을 부린다면, 나는 결코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쾅!갑자기 위에서 거세게 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온권승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무표정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할 말은 다 했는가?”온사는 눈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말했다.“저는 다 했습니다. 아버지 선택만 남았습니다.”그녀는 온권승이 아무리 조카 최소택을 소중히 여긴다고 해도, 자신이 오늘 이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아버지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역시, 곧이어 온권승의 말이 들렸다.“네가 그렇게 생
온장온은 동의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온씨 가문의 가법에 있는 곤장은 보통 곤장이 아니라 특수 제작된 쇠로 만든 곤장이었고, 50대를 맞으면 성인 남자라도 최소 열흘에서 보름 넘게 누워만 있어야 한다. 근데 온사가 어찌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옆에 서있던 온모는 몰래 기뻐하고 있었다.온사가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갈 줄은 생각도 못 했다.아버지께 어떻게 보답할지도 생각해 봐야겠다.아버지가 승낙만 하시면 곤장 50대로 온사의 수명을 절반으로 줄이는 건 정해진 일이다.하지만 온모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그녀가 직접 손을 대지 않아도 온권승이 온사에게 물었을 때, 온사는 다시금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다.“진심이더냐?”온권승도 온사가 스스로 벌을 받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렇게 엄중한 벌이라니.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평소에 예쁨 받기 위해 수작을 부리던 온모에게 실눈을 뜨고 그녀를 경고하던 모습이 떠올랐다.“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내 앞에서 거짓으로 대하는 사람이다.”온사는 고개를 들고 그의 혐오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고는 살짝 웃었다. 스스로를 비웃는 말투였다.“어떻게 해야 아버지 눈에 거짓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을까요?”영원히 착하게 ‘말을 잘 듣고’, 사랑받기 위해 싸우지 않고, 반항하지 않고, 나무토막처럼, 온모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으면서, 가족들이 편애하는 것을 그대로 두면서, 억울함을 당하고, 결국 절망적으로 죽어가고…… 그래야 거짓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달갑지 않은 그의 마지막 질문에 눈가는 이미 촉촉했고, 서글픔이 차올랐다.고통스럽고 고집스러운 그녀의 눈빛에 온권승의 동공이 작아지며 보기 드물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온사가 왜 고통스러운지, 딸이 왜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지 알 수 없었다.놀란 것도 잠시, 온권승은 더 이상 온사의 눈을 보고 싶지 않아 차가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잘못한 것을 알면서 고치지 않는 것
그녀는 자신의 수척한 몸으로 곤장을 겨우 견뎌내고 있었다.온장온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정하게 내리쳤다. 마치 온사의 몸에 있는 모든 뼈를 하나도 남김없이 부숴버리겠다는 듯했다.온사는 확실히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아쉽게도 그 고통은 영원히 마음의 고통에 못 미쳤다.그래서 온장온의 곤장은 온사의 뼈를 부수긴커녕 오히려 그녀의 분노와 원한을 훨씬 부추겼다.만약 죽더라도, 그녀는 절대 온모와 온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곤장 50대.많지도 적지도 않았다.온장온이 마지막 한 대를 치고 났을 때, 온사는 이미 진작부터 살갗이 벗겨지고 속살이 드러나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고, 걸치고 있던 수수한 옷 역시 그녀의 피로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온장온은 곤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고 다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마지막 곤장 한 대까지 쓰러지지 않고 꿋꿋이 버텨낸 온사를 보았다.왠지 모르게, 그는 속이 답답했다.온장온은 더 이상 못 보겠는지 곤장을 하인에게 던지고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너 혼자 여기서 잘 생각해 보거라.”그러고는 모든 하인을 데리고 사당을 나섰다.그가 가자마자 온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떨며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온사가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밖은 이미 깜깜해져 있었다.그녀는 여전히 사당의 그 자리에 있었다.아무도 그녀를 보러 온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유일하게 남아있던 것은 바닥에 놓인 다 식은 밥과 반찬이었다.온사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지만 그 음식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사당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그녀는 옥고리를 손에 쥐고 속으로 생각하자 옥패의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는 옥패의 공간에서 지혈에 쓰는 약초를 찾으려 했지만, 뭔가 오류가 있었는지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시냇물로 떨어졌다.“아……”시냇물에 떨어진 그녀의 상처가 시냇물에 닿자마자, 순간 찌르는 듯한 고통이 전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온사는 그 고통으로 다시 의식을
30분 뒤, 온사는 그 당시 폐하의 서재에 서있었다.그녀가 왕궁으로 들어온 과정은 아주 간단하고 쉬웠다고 할 수 있다.그녀의 손에 아직 어머니가 물려주신 부적, 선왕께서 친히 내리신 어명이 있었다.전생에 그녀는 곁에서 시중들던 노비, 즉 춘향이에게 이 어명을 도둑맞고 춘향이는 그것을 온모에게 가져다주어,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다행히 다시 태어난 이번 생에서 어명은 아직 도둑맞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이 선왕의 어명으로 이 젊은 폐하 앞에 설 수 있었다.“신녀 온사, 폐하께 인사드리옵니다.”“온사? 짐의 기억이 옳다면 넌 진국공의 다섯째 여식이구나, 맞는가?”어안 뒤에 앉아있던 왕은 조서를 내려두고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온사를 한 번 보았다.폐하는 선왕의 아홉째 아들이었고, 즉위 때는 겨우 열한 살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겨우 열다섯 살 정도였다.비록 온사와 나이가 같지만 용포를 입은 그는 온몸의 기운이 굉장했고, 심지어 알 수 없는 압박감까지 느껴졌다.온사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네, 폐하 말씀대로 그 신녀가 맞습니다.”“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궁에 오다니, 혹시 온씨 가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왕은 궁금하다는 듯 그녀를 보고 말했다. 흥미진진하다는 듯한 말투가 마치 그녀의 뜻에 관심이 아주 많은 것 같았다.보아하니 어제 온씨 가문의 성년식에서 있던 사건이 이미 폐하의 귀에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폐하가 진심으로 궁금했던 것은 온씨 가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 그녀였다.그녀는 뭘 하고 싶은 걸까?“폐하의 보살핌 덕에 온씨 가문은 항상 평안하고 무사했습니다. 다만 신녀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 이렇게 폐하께 은혜를 구하러 왔습니다.”흥미진진하던 왕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좋다. 짐에게 말해보거라. 무슨 부탁이더냐?”온사는 가볍게 말했다.“신녀 출가하여 여승이 되고자 하옵니다. 폐하께서 도와주십시오.”“출가를 하겠다고?”왕은 깜짝 놀랐다.그는 온사가 이런 의도를 가지고 왔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
됐다. 누구의 몫이든, 기회만 있으면 된다.“명을 내리시옵소서, 폐하.”온사가 정중하게 말했다.왕은 몸을 일으켜 온사의 앞까지 가서 어명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최근 몇 년 간 나라 남쪽에서 천재지변이 끊이질 않아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어, 짐의 근심이 깊다. 그리하여 국가와 백성을 위해 진심을 다해 기도할 사람 한 명이 필요하다.”“신녀 하겠사옵니다!”온사는 바로 하겠다고 했다.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네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경성 근처 남산 수월관의 관주가 덕망이 높고 덕을 많이 쌓은 스승이다. 만약 스승께서 동의하신다면, 짐도 동의하겠다.”“네, 폐하의 성은에 감사드립니다.”“감사하기엔 아직 이르다. 만약 스승께서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짐도 네게 도움을 줄 수 없다.”말을 마친 왕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가거라. 짐이 소식을 기다리겠노라.”지금의 온사에게는 이미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아무리 험악하고 위험하더라도 온씨 가문을 떠나야만 했다.온사가 물러가겠다 하며 돌아섰을 때, 왕이 갑자기 다시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시.”온사는 발걸음을 멈추고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그녀의 이런 표정을 본 왕은 더더욱 복잡해진 눈빛이었다.하지만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남산으로 가는 길이 멀다. 만약 바로 가려거든 덕자에게 마차를 준비하라 하겠다.”이 말을 들은 온사는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덕공께서 고생하시겠네요.”“아닙니다. 아가씨 이쪽으로 오시죠.”온사가 떠난 뒤, 왕의 뒤에 있던 내시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온씨 아가씨, 아프신 것 같사옵니다”혈흔이 가득하고, 상처가 가득한 것이 딱 봐도 곤장에 맞아 새로 생긴 상처였다.위대한 진국공 정실의 딸인데, 만약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녀가 이렇게 맞았다는 것을 누가 감히 믿을 수 있겠는가?어쩐지 출가하여 여승이 되겠다면서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에게 알리지도 못했다니.정말 불쌍하구나.왕은 그저 담담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
온모는 뒷담화 하다가 본인에게 들켰는데도 그들이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홧김에 앙칼진 목소리로 따졌다.“너희 어느 가문 애들이야? 왜 한 번도 본 적 없지? 어디 일반 관료네 딸인가 본데 어딜 감히 내 뒷담화를 하고 있어?”온모는 그제야 여기 있는 아가씨들 모두 못 보던 얼굴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진국공가로 들어온 뒤, 온모가 만난 사람들은 다 온권승의 부하 관원들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다들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어쨌거나 온권승에게 아부하는 입장이기에 그들의 자식들도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하지만 눈앞의 소녀들은 그들 중에 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그래서 온모는 그들이 관직이 낮은 집안 자식들이라 평소에 진국공 가문에 방문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내 아버지 체면을 봐서 너희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줄 것이다. 거부할 시, 너희들이 방금 한 말을 모두 아버지한테 알릴 거야. 그럼 너희도 곤란해질 건 물론이고 너희들의 아버지한테까지 피해가 가겠지!”온모는 턱을 뻣뻣하게 치켜들고 거만하게 말했다.그러나 그런 협박의 말은 소녀들의 비웃음만 자아낼 뿐이었다.“세상에나, 쟤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역시 비천한 사생아야. 여자들끼리 한 말을 아버지한테 일러바친대.”이소은은 경멸의 눈빛으로 온모를 바라보며 말했다.“일러바쳐서 뭐 하게? 설마 우리가 널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온사였으면 어느 정도 눈치를 봤겠지만 너는… 그럴 가치가 없어.”이소은은 팔짱을 끼고 온모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혀를 찼다.“너!”이소은의 도발에 넘어간 온모가 도끼눈을 뜨고 상대에게 소리쳤다.“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다른 소녀들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소은아, 말귀를 못 알아먹는 애한테 그런 말을 해도 소 귀에 경 읽기야.”온모는 그 말을 듣고 더 부아가 치밀었다.“너희 죽고 싶어? 내 아버지가 진국공이야!”“알아! 우리 다 알아!”“경성에 네
이번 제사에는 성녀가 필요 없었기에 온사와 수월관 사태들은 참석하지 않았다.제사가 끝난 후, 궁중 연회가 시작되었다.관원들은 처자식을 대동하고 입장했다.명절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 오늘의 연회는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웠다.어린 황제는 태후와 함께 공연을 감상했고 각 집안의 부인, 아가씨들은 떼를 지어 수다를 떨었다.줄곧 방에만 갇혀 있던 온모도 사람들을 만나고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래서 부하와 얘기 중인 온권승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아가씨들이 모인 쪽으로 걸어갔다.“다들 여기서….”온모가 인사를 건네려는데 그녀를 등진 한 아가씨가 말했다.“온사는 왜 오늘 연회에 안 왔지?”“못 온 거겠지. 걔 지금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잖아. 우리 어머니 말로는 절 생활이 그렇게 자유롭지 않대. 아무 때나 하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그래? 너무 아쉽네. 올해는 어떤 가야금 곡을 연주하려나 듣고 싶었는데.”“우리들 중에 걔가 가야금 연주를 가장 잘하지 않아?”“당연한 소릴. 가야금뿐이겠어? 바둑 좀 못하는 거 말고 서예나 그림 실력 모두 최고라고 할 수 있지.”“아쉽네. 앞으로는 걸작을 감상할 기회가 없겠어.”“진국공부에서 온모라는 애가 왔잖ㅇ라. 뭐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다고 칭찬이 자자해서 귀에 피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어. 요즘은 뭐 다른 소문 없어?”“있지! 최근에 그런 소문이 들리잖아. 걔 진국공 나리의 양녀가 아니라 사생아라고.”“세상에나, 그게 사실이야?”“사실이래!”“설마… 그런데 뻔뻔하게 연회에 왔어?”“난 저렇게 밖에서 태어난 애가 제일 싫어. 첩이나 이랑이 낳은 서자, 서녀들보다 더 얄미워!”“걔네 어미와 진국공 어르신은 일찍부터 연인이었대. 그런데 진국공부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인을 버리고 란씨 가문의 아가씨와 혼인한 거지.”“그럼 왜 첩이나 이랑으로 들어오지 않고 굳이 밖에서 애를 낳았을까?”“주제도 모르고 자존심만 센 거지.”“맞아, 밖에서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첩이 되길 거부하는 여자들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내가 언제 널 버린다고 했어?”온권승은 홧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심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최근에 친 사고들을 생각해 봐. 그거 수습해 준 사람이 누구야? 다만 이번에는 선을 넘었어! 계속 이런 식이면 이제 나도 너 못 지켜준다. 네 어미한테 간다는 말로 날 협박할 생각은 하지 마!”말을 마친 그는 차갑게 뒤돌아서 방을 나가버렸다.온모는 다급히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아니… 아니에요, 아버지. 협박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저를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순간 말이 잘못 나온 거예요. 화 푸세요, 아버지.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그녀는 울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어릴 적 그녀는 사람들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그녀는 죽은 어미와 너무 닮았으며 우는 모습까지 닮았다고 사람들이 말해주었다.어린 시절 풋풋한 설렘을 온권승은 잊을 수 없었다. 그녀와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우는 온모를 보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어. 어차피 너도 교훈을 얻었고 잘못을 알면 된 거야….”온권승의 어투가 드디어 누그러지자 온모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온권승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다만 이번 일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만일을 대비해서 당분간은 방에서 나가지 말고 네 어미의 측근들도 만나지 마. 안 그럼 나도 다신 널 돕지 않겠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억울한 얼굴로 반박했다.“괜한 걱정이세요, 아버지. 온사의 어머니 시신도 이미 돌려줬잖아요. 걔가 뭘 더 어쩌겠어요?”온권승은 고개를 돌리고 한심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이 온사랑만 연관된 줄 아니? 란씨 가문이 이미 멸문했지만 조정에는 아직도 그들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만약 걱정해야 할 상대가 온사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그가 걱정하는 건 황제였다.안타깝게도 온모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그녀는 온권승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어쩌
온모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세 오라버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라버니들, 어차피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건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온장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하지만 너와 관련 있는 자들이 우리 어머니의 시신을 관 채로 도굴해서 가져간 걸 봤어. 정말 이 일이 너랑 관련이 없다고?”온모는 이 일에서 완전히 발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말을 바꾸었다.“사실 저와 관련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한 게 아니라고 한 이유는 큰 오라버니께서 본 그 세 사람은 제 친어머니께서 저를 지켜주라고 남겨주고 가신 사람들이에요. 다만 아버지께서 저를 진국공부 양녀로 들이면서 그들은 경성에 같이 따라오지 않은 거고요.”그녀는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거짓말을 이어갔다.“얼마 전에 제가 곤장을 맞은 이후로 너무 서러워서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 하소연한 적 있어요. 경성으로 와서 날 좀 지켜달라고요. 그런데 그 일을 듣고 그 사람들이 너무 화가 나서… 저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양어머니의 무덤을 도굴한 거예요….”“정말 죄송해요, 큰 오라버니… 믿기 힘든 걸 알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온모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흐느꼈다.겉으로 보기에는 절절하고 진심으로 느껴졌다.처음에는 온모를 탓하던 온장온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온사는 왜 네가 사람을 시켜서 그 짓을 했다고 하지? 게다가 보복한다고 시신을 훼손한다고까지 했다며?”온모는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그건… 저는 그 일을 알고 당장 양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놓으라고 했죠. 그런데 그날 밤에 온사 언니가 저를 납치해 간 거예요. 언니는 저를 때리고 독까지 먹이니까 너무 무서워서… 내가 시킨 거라고, 날 안 내보내 주면 다신 어머니를 만날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거래가 성사된 거예요.”“내가 막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