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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신부를 삼키는 법
여우가 신부를 삼키는 법
Author: 빵떡순

1화. 여우비가 내리는 밤

Author: 빵떡순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5 12:18:38

산에는 해가 두 번 졌다.

한 번은 능선 너머로 붉은 해가 가라앉았을 때였고, 다른 한 번은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문을 닫았을 때였다.

낮까지 열려 있던 대문이 닫히고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이 천 조각으로 묶였다. 장독대에 내놓았던 소금 단지가 집 안으로 들어갔으며, 논둑길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자취를 감췄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에는 아직 빛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벌써 밤이 왔다고 믿는 듯했다.

버스 기사는 종점에 도착하자마자 짐칸을 열어 주었다. 낡은 여행 가방을 꺼내는 손길이 쓸데없이 다급했다.

“여기서 내리시면 됩니다.”

이연은 휴대전화로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목적지가 마을 안쪽인데요. 지도에는 차로 10분 정도 더 들어가야 한다고 나오는데…….”

“이 시간에는 더 안 들어갑니다.”

“아직 여섯 시도 안 됐는데요?”

기사는 대꾸하는 대신 운전석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출발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이연이 버스에서 내리자 문이 닫혔다. 여행 가방을 똑바로 세우기도 전에 버스가 움직였다.

바퀴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굽은 산길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남은 것은 이연과 가방, 그리고 지나치게 조용한 길뿐이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목적지까지 도보로 47분이 남았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택시를 호출해 보았지만 근처에 운행 중인 차량이 없다는 문구만 반복해서 나타났다.

그때 길 건너편 가게의 미닫이문이 열렸다.

허리가 굽은 노파가 얼굴만 내민 채 이연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여행 가방에서 시작해 이연의 구두 끝에 머물렀다.

“어디 가는 사람이에요?”

“달목리로 가려고요.”

노파의 눈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 시간에?”

“묵을 곳을 예약해 뒀어요. 초행이라 조금 일찍 출발했는데 버스가 여기까지만 온다고 해서요.”

“예약한 곳 이름이 뭔데요?”

이연이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월하재요.”

노파가 문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잠시 후, 반쯤 열려 있던 미닫이문이 손가락 두 마디만큼 더 좁아졌다.

“그 집은 손님 안 받아요.”

“인터넷으로 예약했는데요?”

“그러니까 가지 말아요. 잘못 찾아온 거니까 날 밝으면 돌아가요.”

“그럼 오늘은 어디에서 묵을 수 있을까요?”

노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연을 바라보던 눈이 천천히 그 뒤로 움직였다.

산 쪽에서 바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바람 끝에는 젖은 흙냄새와 함께 낯선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달고 짙어서 한 번 맡으면 좀처럼 잊히지 않을 것 같은 향이었다.

노파가 황급히 문을 닫았다.

문이 맞물리기 직전, 낮은 목소리가 틈으로 흘러나왔다.

“누가 불러도 뒤돌아보지 말고, 비가 내려도 절대 나무 아래로 들어가지 말아요.”

곧 빗방울 하나가 이연의 손등에 떨어졌다.

하늘은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저녁 하늘 아래로 가느다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물은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이연은 얼떨결에 손바닥을 펼쳤다.

투명한 물방울이 피부 위에서 붉은빛을 띠다가 이내 사라졌다. 여우비였다.

이연은 닫힌 가게 문을 한 번 바라보고 여행 가방의 손잡이를 끌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돌아가려 해도 버스는 이미 끊겼고, 근처에는 문을 연 가게도 숙박업소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월하재의 예약은 정상적으로 결제까지 끝난 상태였다.

주소도, 숙소 주인의 연락처도 분명히 존재했다.

노파가 무언가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이연은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라 걸었다.

처음 십 분 동안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길 양쪽으로 낮은 밭이 이어졌고, 그 너머에는 오래된 기와집들이 띄엄띄엄 자리해 있었다.

이상한 것은 어느 집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집집마다 대문 위에는 흰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비를 맞고도 젖지 않았다. 줄에 묶인 종이 인형들이 처마 아래에서 바람도 없이 흔들렸다.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월하재 주인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길을 잘못 드셨습니다.

이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지도에 표시된 경로는 외길이었다. 잘못 접어들 만한 갈림길조차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답장을 보내려는 순간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 뒤로 열 걸음 돌아가세요.

이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빗속에 아무도 없었다.

걸어온 길이 길게 뻗어 있을 뿐이었다. 멀리 정류장 옆 가게가 보였지만 조금 전보다 훨씬 멀어진 것처럼 흐릿했다.

다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 아홉 걸음 남았습니다.

이연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멎었다.

아직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 여덟 걸음.

― 일곱 걸음.

메시지는 일정한 간격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이연은 월하재 주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이어지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지금 보내신 메시지가 무슨 뜻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빗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서 있는 곳과 똑같은 빗소리였다.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나뭇잎을 두드리는 소리 사이로 누군가 웃음을 삼키는 듯한 숨소리가 섞였다.

“여보세요?”

― 열까지 세는 동안 돌아보지 말라고 했잖아.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다정한 말투였지만, 웃음이 너무 가까웠다. 수화기 너머가 아니라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이연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길 위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누구세요?”

대답 대신 전화가 끊겼다.

동시에 화면 위에 떠 있던 지도가 바뀌었다.

월하재까지 40분 넘게 남아 있던 거리가 어느새 100 미터로 줄어 있었다.

고개를 들자 조금 전까지 없었던 갈림길이 보였다.

오래된 돌계단이 숲 사이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 양옆에는 붉은 등불이 걸려 있었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는데도 등불 속 불꽃은 선명했다.

그 아래에 남자가 서 있었다.

눈에 띄게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비에 젖지 않았고, 검은색 옷자락에는 작은 물방울 하나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남자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이연을 바라보았다.

“월하재에 가시는 길입니까?”

“네. 혹시 그곳에서 나오셨어요?”

남자의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연은 안도했다.

예약이 잘못된 것도, 존재하지 않는 숙소를 찾아온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 긴장이 조금 풀렸다.

“숙소 주인분이세요?”

“주인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겠군요.”

“방금 전화도 하셨나요? 메시지 내용이 이상해서요.”

남자의 눈이 이연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로 내려갔다.

“제가 보낸 것은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휴대전화가 다시 진동했다.

월하재 주인의 번호였다.

― 그 남자를 따라가지 마세요.

이연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곧이어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 저희 숙소에는 남자 직원이 없습니다.

손끝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이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는 조금 전과 같은 자리에서 웃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제법 거리가 있었는데도 그의 눈동자에 비친 휴대전화 화면이 선명하게 보였다.

“따라오지 말라던가요?”

남자가 물었다.

이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을 믿으실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불쾌함도 초조함도 없었다. 오히려 이연이 어떤 선택을 할지 기대하는 듯했다.

그때 숲 안쪽에서 방울 소리가 울렸다.

딸랑.

한 번뿐이었던 소리는 금세 여러 겹으로 늘어났다. 돌계단을 따라 걸려 있던 붉은 등불이 아래에서부터 차례로 밝혀졌다.

멀리서 음악 소리도 들려왔다.

피리와 북이 어우러진 느린 가락이었다.

처음 듣는 곡인데도 이상하게 낯익었다.

오래전에 외웠다가 잊어버린 노래처럼 다음 장단이 어디에서 이어질지 알 것 같았다.

이연은 자신도 모르게 돌계단을 바라보았다.

계단 끝에 붉은 천이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천이 들렸고, 그 너머로 금빛 장식이 반짝였다. 누군가의 혼례가 열리고 있는 듯했다.

남자가 계단 아래로 한 걸음 내려왔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저 위에서 혼례를 하는 것 같은데요.”

그 순간 남자의 웃음이 조금 짙어졌다.

“아직도 보이는군.”

“무슨 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희고 깨끗했다. 손가락 끝에는 붉은 실 한 가닥이 느슨하게 감겨 있었다.

실의 반대편은 숲속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니었다.

이연은 뒤늦게 그것이 숲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붉은 실의 끝은 자신의 여행 가방 손잡이에 묶여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길이 미끄럽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손을 잡으시지요.”

이연이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먼저 숙소에 확인해 볼게요.”

“그러세요.”

남자는 순순히 손을 내렸다.

붙잡지도, 억지로 길을 막지도 않았다. 예상보다 쉽게 물러나는 모습에 오히려 이연은 잠깐 당황했다.

그녀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었을 때 화면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통화 기록도, 주고받았던 메시지도, 월하재의 예약 내역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숙박 앱의 검색창에 월하재를 입력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목적지를 안내하던 지도에는 이곳의 지명조차 표시되지 않았다.

“이게 왜…….”

이연이 화면을 몇 번이나 내렸다 올리는 동안 남자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곤란해하는 사람을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만은 웃고 있었다.

그녀가 믿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그 눈 안의 즐거움이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

“제가 잘못 온 것 같아요.”

“그럴 리가요.”

남자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당신은 제대로 왔습니다.”

“하지만 예약한 기록이 없어요. 아까 분명히 확인했는데…….”

“잘못 알고 계신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분명 월하재를 예약했고, 버스 기사님한테도…….”

이연이 말을 멈추었다.

버스 기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눴는데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정류장 앞 가게에서 만난 노파의 얼굴도 흐려져 있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어렴풋이 남아 있었지만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누가 불러도 뒤돌아보지 말고.

비가 내려도 나무 아래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 말을 들었던가.

혹시 자신이 알고 있던 옛이야기를 실제 기억과 혼동한 것은 아닐까.

이연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릿속에서 얇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여자가 겁에 질리는 순간보다, 스스로의 기억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을 더 좋아했다.

그 사실을 이연은 아직 알지 못했다.

“이름이 뭐예요?”

이연이 물었다.

남자는 금세 웃음을 거두었다. 친절하고 반듯한 표정만 남았다.

“여휘라고 합니다.”

그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새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커다란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었다. 내내 맑았던 하늘은 사라지고 붉은 잎들이 빈틈없이 하늘을 가렸다.

나무 아래로 들어가지 말라는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려다보니 젖은 흙 위에 자신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구두 안은 비어 있었다.

그녀는 맨발로 여휘의 앞에 서 있었다.

언제 구두를 벗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당신이 한 짓이에요?”

떨리는 목소리에도 여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이연의 공포와 혼란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의 입가가 천천히 휘어졌다.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 재미있을까.

여휘는 그녀가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보다 오래 버텨 주면 좋겠는데.”

숲 위로 마지막 햇빛이 꺼졌다.

동시에 돌계단 끝에서 수십 개의 방울이 울렸다.

붉은 천이 걷히고, 아무도 없는 혼례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 위에는 촛불 두 자루와 술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한쪽 잔에는 이미 입술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여휘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붉은 실이 그의 손가락이 아니라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감겨 있었다.

“가시겠습니까?”

이연은 그가 어디로 데려가려는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도, 정말 숙소를 예약했던 것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눈앞의 남자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본능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러나 발은 이미 여휘를 향해 한 걸음 움직인 뒤였다.

여휘의 눈이 즐거운 빛으로 가늘어졌다.

여우비가 두 사람 사이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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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어디에서 울리는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깊고 낮은 울림이 월하재의 기둥과 바닥을 타고 번졌다.한 번.두 번.종이 울릴 때마다 방 안의 촛불이 하나씩 밝혀졌다.조금 전까지 없었던 촛불이었다.벽을 따라 놓인 붉은 초에 푸른 불꽃이 붙으면서 방 안의 모습도 달라졌다.흰 이불은 붉은 비단 이불로 변해 있었다.천장에서는 혼례 때 사용하는 청사초롱이 흔들렸고, 창문에는 붉은색과 푸른색 천이 길게 늘어졌다.이연이 휴대전화로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다.다만 화면 속에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여휘는 옷장 안에 앉아 있었다.문밖에서도 여휘의 목소리가 들렸다.“이연.”둘의 목소리는 완전히 같았다.높낮이도, 말끝에 밴 미세한 웃음도 구별할 수 없었다.옷장 안의 여휘가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시간이 많지 않습니다.”“왜요?”“밤은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그가 가볍게 눈짓하자 방문 손잡이가 다시 돌아갔다.철컥.철컥.밖에 있는 것이 잠금장치를 확인하듯 천천히 손잡이를 흔들고 있었다.“열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이연이 물었다.옷장 속 여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들어가지 못하겠지.”두 여휘가 서로의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이연은 문에서 멀어졌다.“둘이 같은 편이에요?”“아닙니다.”이번에는 두 목소리가 동시에 대답했다.같은 소리가 겹쳐지자 방 안의 공기가 낮게 떨렸다.이연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어느 쪽이 진짜인지 고르려고 해서는 안 됐다.둘 다 여휘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한쪽을 믿는 순간 그것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가능성이 컸다.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주웠다.동영상 촬영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그러나 화면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옷장은 닫혀 있었고 방문 앞도 비어 있었다.붉은 혼례방 한가운데에 이연 혼자 서 있었다.그런데 화면 속 이연은 현실의 그녀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실제 이연은 옷장을 향해 서

  • 여우가 신부를 삼키는 법   3화. 이름을 부르는 것

    옷장 안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이연은 움직이지 않았다.잘못 들은게 아니었다.누군가 입을 막고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다.옷장의 나무문 너머에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이어졌다.이연은 발치에 떨어진 사진을 내려다보았다.월하재 앞에 서 있는 자신과 여휘, 그리고 현재보다 정확히 일 년 앞선 촬영 일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사진 속 자신은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얼굴은 빗물에 번진 것처럼 흐릿했지만, 왼손에 낀 은색 반지는 선명했다.이연은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같은 반지가 중지에 끼워져 있었다.몇 년 전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산 것이었다. 흔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도 아니었다.사진 속 여자가 자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그런데 사진 뒤에는 분명 자신의 필체가 남아 있었다.― 이번에도 그를 믿었다.문장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글씨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획의 끝이 번지고, 글자 사이의 간격이 좁아졌다.이연은 사진을 뒤집어 바닥에 내려놓았다.확인해야 했다.두려움 때문에 옷장을 열지 않는다면 밤새 안에서 나는 소리에 시달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는 편이 나았다.그녀는 화장대 앞에 놓인 나무 의자를 들었다.한 손으로 의자를 세워 든 채 다른 손으로 옷장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쇠붙이가 손바닥에 닿았다.안쪽의 숨소리가 멎었다.“누구 있어요?”대답은 없었다.이연은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옷장 문이 열리며 짙은 향 냄새가 밀려 나왔다.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사람이 몸을 숨길 공간조차 없었다.옷장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여러 벌의 옷이었다.흰 저고리와 붉은 치마, 금빛 자수가 놓인 겉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비슷해 보이지만 모양과 색이 조금씩 달랐다.어느 것은 오래되어 소매 끝이 누렇게 변했고, 어느 것은 며칠 전에 지은 것처럼 천의 광택이 선명했다.모두 혼례복이었다.이연은 들고 있던 의자를 천

  • 여우가 신부를 삼키는 법   2화. 월하재

    이연은 자신이 언제부터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한 걸음 앞에서는 여휘가 걷고 있었다.붉은 등불 아래를 지날 때마다 그의 검은색 옷자락에 옅은 금빛이 번졌다가 사라졌다.여휘는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따라오라고 재촉하지도 않았고, 뒤를 돌아보며 제대로 오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그녀가 도망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여유로운 걸음이었다.그 태도가 오히려 불안했다.이연은 몇 계단을 더 오른 뒤 멈춰 섰다.“저는 따라가겠다고 한 적 없어요.”여휘도 걸음을 멈추었다.“그렇습니까?”그가 천천히 돌아보았다.이연이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분명 그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 그런데 따라가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아니, 했던가.기억을 더듬을수록 머릿속에 안개가 차올랐다.“돌아갈게요.”“그러십시오.”여휘는 선뜻 길을 비켜 주었다.그의 반응에는 아쉬움이 없었다.예상과 달리 붙잡지 않자 이연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돌아가도 된다는 말을 들으니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부터 막막해졌다.그래도 이 남자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이연은 몸을 돌렸다.조금 전까지 길게 이어져 있던 돌계단이 사라져 있었다.그녀의 발뒤꿈치 바로 아래로 검은 물이 출렁였다.산 아래에 있어야 할 강도, 계곡도 아니었다.끝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물이 계단이 있던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비가 떨어질 때마다 동그란 파문이 번졌는데, 물결 사이로 붉고 흰 옷자락이 수없이 떠다녔다.물속에 잠긴 여자들이었다.긴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흔들렸다.모두 얼굴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다만 물 위로 떠오른 손가락마다 붉은 실이 묶여 있었다.이연이 숨을 들이켠 순간 여휘의 목소리가 들렸다.“왜 그러십니까?”“저 아래에…….”그녀가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때 물은 사라지고 없었다.내려가는 돌계단이 멀쩡히 이어져 있었다.붉은 등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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