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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서 팀장님, 죄송하지만 계약금과 중도금 10억 원은 이미 전액 집행되었습니다.”
은서는 테이블 위에 펼쳐 둔 매장 도면에서 고개를 들었다.
10년을 알고 지낸 민우가 낯선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보석 진열장 위치를 의논하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집행이라니. 매장 보증금이랑 원석 대금으로 쓰라고 보낸 돈이잖아.”
“그러니까 썼다고.”
“어디에?”
민우는 대답하지 않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의 뒤와 출입문 앞에는 사채업자 세 명이 서 있었다. 은서는 그제야 그들이 자리를 잡은 방향을 살폈다. 문으로 나가려면 누구 하나의 몸을 밀쳐야 했다.
“선배. 내 돈 어디 있어!!!”
“공주님이 겨우 10억 가지고 왜 이래? 집에 가서 손 벌리면 되잖아.”
***
공주님....
열여섯 살, 어머니 손을 잡고 성북동 대저택에 들어섰을 때도 사람들은 은서를 그렇게 불렀다. 어머니 서혜진이 서경그룹 강문혁 명예회장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는 이유로.
하지만 은서에게는 신발을 벗는 자리부터 낯선 집이었다. 어머니 뒤에 서 있던 은서가 고개를 들었을 때, 현관 안쪽에서 한 남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서야. 인사해. 앞으로 네 오빠가 될 사람이야.”
강문혁회장의 첫 아내가 낳은 장남, 강시후였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인사를 하고서도 은서는 한동안 그를 오빠라고 부르지 못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과 갑자기 가족이 되는 일은, 그 큰집에 들어가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
“그 집 돈 아니야, 내가 밤새워 일해서 모은 돈이라고. 어디에 썼는지 내역부터 보여 줘.”
“강현민 이사님 쪽 법인으로 정산됐어. 궁금하면 그쪽에 물어봐.”
종이를 접던 손이 멎었다.
“……강현민 한테?”
그 이름을 듣자 계모 조수현의 얼굴부터 떠올랐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강문혁회장의 세 번째 아내가 되어 그 자리에 들어앉은 여자. 강현민은 제 어머니가 안주인이 된 날부터 은서를 대놓고 밀어냈다.
‘네 엄마도 없는데 아직 여기서 살게?’
현민은 아버지가 같은 시후에게는 꼬박꼬박 형님이라 부르면서도, 은서에게는 누나라는 말 한마디를 안 했다.
그런 현민에게 돈을 넘겼다고 했다. 은서가 왜 이 가게를 얻으려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민우선배가.
“처음부터 그쪽하고 짰어?”
“말조심해. 정산이라고 했지?”
“내 허락도 없이 내 돈을 넘겨놓고 무슨 정산이야!”
은서가 일어서자 출입문 앞의 사내가 한 걸음 다가왔다. 민우는 오히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내일까지 잔금 10억 못 채우면 매장은 압류야. 사기 방조로 감정사 자격까지 날아가고 싶진 않을 거 아냐.”
“경찰에 가서도 그렇게 말해 봐.”
은서는 계약서와 도면을 한꺼번에 거뒀다. 민우가 손을 뻗었지만 먼저 가슴에 끌어안았다.
“이거라도 있어야 내가 어디에 돈을 보냈는지 설명하지. 비켜.”
문 앞의 사내가 민우를 쳐다봤다. 민우가 턱짓하자 그제야 길이 열렸다.
“잘 생각해 봐, 공주님. 신고한다고 내일까지 돈이 생기겠어?”
은서는 돌아보지 않았다. 사내의 어깨에 부딪힌 팔이 얼얼했지만, 그보다 계약서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주는 게 급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은서는 처마 아래에 서서 계약서를 코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종이 끝이 벌써 젖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가게가 될 곳이었다. 지금은 문 안에서 흘러나오는 민우의 웃음소리조차 견디기 어려웠다.
빗속으로 몇 걸음 더 나갔다.
신고는 할 것이다. 빼돌린 돈도 되찾을 것이다.
그런데 내일까지 필요한 10억은.
휴대폰 화면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연락처를 열려던 손가락 아래에서 수신 화면이 떠올랐다.
[발신자 표시 제한]
은서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비 맞고 서 있지 마라. 꼴사납게.
“……오빠?”
고개가 저절로 들렸다.
골목 어귀에 서 있던 검은 세단의 헤드라이트가 켜졌다. 차에서 내린 윤태준 경호실장이 우산을 펼치고 다가왔다. 우산 아래로 들어오자 어깨를 때리던 빗줄기가 뚝 끊겼다.
— 한남동 펜트하우스 45층으로 와라.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 내 앞에서 네가 숨길 수 있는 건 없다, 은서야.
통화가 끊겼다.
은서는 휴대폰을 내리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밤늦게 돌아올 때마다 복도에서 마주치던 시후의 눈이 떠올랐다. 어디에 갔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대답을 해도 한참 동안 얼굴을 살피던 시선.
오늘도 달라진 게 없었다.
“타시죠. 부사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윤 실장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은서는 코트 안의 계약서를 눌렀다.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제 가게 하나 갖고 싶었을 뿐인데.
비를 피하라고 열린 차 문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
밤 11시, 한남동 서경 펜트하우스 45층.
은서는 복도 끝에서 걸음을 멈췄다. 안쪽 집무실의 잠금장치가 풀리고, 두꺼운 문이 열렸다.
우드 향이 먼저 흘러나왔다.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켜진 방이었다. 벽을 따라 시선을 돌려도 창문은 보이지 않았다. 바깥에서는 아직 비가 쏟아지고 있을 텐데 빗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뒤에서 문이 닫혔다.
철컥!!
은서의 어깨가 움찔했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책상 너머에서 강시후가 몸을 일으켰다.
블랙 셔츠의 단추가 두 개 풀려 있었다. 넓은 어깨를 따라 번진 불빛이 그가 움직이자 걷혔다. 서경그룹 총괄 부사장. 현민조차 함부로 눈을 맞추지 못하는 남자였다.
은서는 젖은 손을 코트 자락에 문질렀다.
“성수동 일, 알고 있었어요?”
시후의 시선이 코트 밖으로 삐져나온 계약서에 닿았다. 은서는 종이가 보이지 않도록 옷깃을 여몄다.
시후가 책상을 돌아 나왔다. 카펫에 발소리가 묻혀, 그가 다가오는 동안 은서는 제 숨소리만 들었다.
“오빠, 물었잖아요.”
시후는 은서 앞에 멈춰 섰다.
차가운 손가락이 젖은 머리칼을 뺨에서 걷어 냈다. 은서가 얼굴을 돌리려 하자 턱끝을 붙잡았다.
힘이 들어간 손가락에 고개가 조금 들렸다. 가까이서 마주한 눈동자는 빛을 받아도 어두웠다.
“내 허락도 없이 새장을 나가려던 작은 새가, 나가자마자 덫에 걸려 날개가 꺾였더군.”
은서는 그의 셔츠 소매를 붙잡았다.
“제가 사기를 당했는데, 왜 오빠가 화를 내요.”
시후의 엄지가 턱끝을 느리게 문질렀다.
은서는 대답을 기다리며 그의 소매를 더 세게 쥐었다. 턱을 붙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시후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도망치려던 벌을 받을 시간이다, 한은서.”
밤 11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서경 펜트하우스 45층 ‘빛의 아틀리에’.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통유리창 너머 한강에는 불빛이 길게 번졌고, 천장 채광 돔에는 서울의 밤하늘이 보였다. 아이들은 베이비룸에서 축제의 피로를 잊은 채 잠들어 있었다.은서는 얇은 순백 실크 슬립만을 걸친 채, 45층 빛의 아틀리에 한가운데 서 있었다. 테이블 위 투명 방탄 아크릴 큐브 안에는 한때 족쇄였던 ‘백금 앵클릿’이 영구히 잠들어 있었고, 은서의 발목에는 영원한 사랑과 헌신의 증표인 ‘핑크 다이아몬드 발찌’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축제에서 받은 작은 꽃이 가방 안에 남아 있었다. 은서는 물컵에 줄기를 담가 선반에 놓았다. 스위스에서 가져온 자갈 두 개 옆이었다. 둘 다 값비싼 보석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자기 손으로 찾아 건넨 것들이었다.창가에 서니 성수동에서 비를 맞던 밤이 떠올랐다. 그때 은서는 잃어버린 돈을 되찾으면 자신의 삶도 되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돈을 갚고, 가문을 벗어나고, 새로운 이름으로 일을 하게 된 뒤에도 해야 할 말은 남아 있었다.싫다는 말. 아프다는 말. 혼자 있고 싶다는 말.사랑한다는 말도 그 말들을 할 수 있게 된 뒤에야 제 모양을 찾았다. 은서는 열린 문을 바라봤다. 남자가 들어오면 오늘 그림 하나를 더 그려도 되겠느냐고 묻지 않을 것이다. 먼저 원하는 것을 말하고, 함께 보낼 시간을 고를 것이다.큐브 안의 앵클릿을 잠깐 보고 시선을 거뒀다. 매일 들여다볼 필요는 없었다. 지금 발목에 있는 장신구는 자기 손으로 채웠고, 원하면 오늘 밤에도 벗어둘 수 있었다.벅, 벅.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셔츠 단추를 세 개 푼 시후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남자의 긴 두 팔이 은서의 허리를 단숨에 낚아채며, 제 뜨거운 맨가슴 위로 밀착
화창한 오월의 주말 오후, 서울 성북동 故 서혜진 박물관 및 아카데미 후원 그랜드 가든. 어린 시절, 16살의 은서가 고립된 채 피눈물을 삼키며 갇혀 있던 성북동 대저택. 그때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찾아 헤매던 은서는 오늘 하객들을 맞고 있었다. 푸른 잔디밭에는 ‘서경-EUN 감사 패밀리 가든 대축제’의 테이블이 길게 놓였다.윤태준 실장을 비롯해 10년간 두 사람의 곁을 목숨 걸고 지켜온 임직원들, 성북동 장학재단 청년 장학생 100인, 그리고 각국 주한 대사와 유럽 황실 귀빈 수백 명이 정원을 가득 메웠다. 고운 전통 한복을 차려입은 쌍둥이 도윤과 서아가 잔디밭 위를 아장아장 뛰어다니며 하객들에게 장미 꽃잎을 나누어주었다.“꽃! 예쁜 꽃!”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퍼져나갈 때마다, 하객들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번져났다. 단상에 오른 은서가 마이크를 잡았다.은서는 단상에 오르기 전 직원들이 앉은 테이블을 돌았다. 늘 복도에서 마주치던 사람의 가족을 오늘 처음 소개받기도 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있자 그녀는 먼저 몸을 낮춰 인사했다.윤 실장은 여전히 정문 쪽을 살피고 있었다. 시후가 다가가 잔을 건넸다.“교대했으면 앉아. 오늘은 손님으로 온 가족도 챙겨야지.”“습관이 남아서 그렇습니다.”“나도 고치는 중이야.”윤 실장이 짧게 웃었다. 은서는 그 표정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두 사람의 위기 뒤에서는 누군가의 식사와 퇴근도 자꾸 밀렸을 것이다. 오늘 하루의 감사가 그 시간을 다 갚지는 못해도, 없던 일처럼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행사 담당자가 마이크 순서를 알렸다. 은서는 내려갈 때 바로 함께 앉겠다고 약속하고 단상으로 향했다. 먼 곳에서 온 귀빈보다 방금 소개받은 아이의 얼굴이 먼
자정, 서울 용산구 한남동 ‘EUN’ 글로벌 타워 30층 최상층, ‘유리궁전’.사방 통유리창과 천장 채광 돔 너머로 한강의 황금빛 야경과 서울의 은하수 같은 별빛이 침실 바닥 위로 쏟아져 내렸다. 비엔날레 대상 트로피를 장식장 위에 올려둔 은서는, 얇은 실크 슬립 가운만을 걸친 채 창가에 서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호텔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은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 와 아이들 얼굴을 보고, 씻고, 따뜻한 물을 마신 뒤에야 하루가 끝나는 느낌이 들었다. 시후는 그녀가 창가에 서는 동안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또 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 행사장.”은서가 먼저 말했다.“오늘 잘했다고 말해도 되나?”그녀는 돌아보며 웃었다.“네. 오늘은 듣고 싶네요.”시후가 잘했다고 말했다. 공포를 견뎌낸 것을 시험에 통과한 일처럼 칭찬하지 않고, 그녀가 정한 일을 끝냈다는 뜻으로 들렸다. 은서는 남자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트로피가 놓인 장식장을 지나며 그는 더 잘 보이는 곳에 옮겨줄까 물었다. 그녀는 지금 자리가 좋다고 했다. 들어설 때마다 가장 먼저 보아야 할 물건은 아니었다. 아이들 사진과 책 옆에 있어도 그 영광이 줄어들지 않았다.스륵-다가온 시후의 큰 손이 은서의 실크 슬립 어깨끈을 부드럽게 밀어 내렸다. 가운이 바닥으로 사락거리며 흘러내리고, 달빛 아래 드러난 은서의 눈부신 나신 위로 시후의 육중한 체구가 덮쳐왔다. 시후가 은서를 안아 올려 킹사이즈 침대 매트리스 위로 조심스럽게 눕혔다.침대 옆 작은 서랍에는 평소 쓰는 머리끈과 립밤이 놓여 있었다. 은서는 남자가 벗어둔 시계를 그 옆에 올렸다. 물건들이 뒤섞여도 누가 무엇을 숨겼는지 먼저 의심하지 않는 방이었다.
오후 7시,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홀.천장 와이어가 끊어지며 5톤 강철 조명탑이 떨어져 내리고, 시후가 피를 흘리며 은서를 감싸 안았던 바로 그 장소. 공포와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상흔이 서려 있던 그 홀이, 오늘 밤 해외 수백 명의 글로벌 귀빈들이 운집한 가운데 찬란한 영광의 무대로 다시 태어났다. 스위스 연방 문화재청과 프랑스 명품협회가 공동 주관하는 ‘세계 앤틱 보석 비엔날레 10주년 특별 헌정식’.은서는 행사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몸이 기억하는 방향이었다. 시후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봤지만 다 괜찮다는 말로 덮지 않았다.행사 책임자가 점검 결과를 설명했다. 은서는 자료를 읽고 무대에서 이동할 길을 직접 걸었다. 그날 쓰러졌던 자리에는 다른 무대 마감이 놓여 있었다. 흉터처럼 보이는 것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발이 잠시 멈추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다른 곳에서 해도 돼.”시후가 말했다.“오늘은 여기서 할래요. 다만 조금만 같이 있어요.”은서는 무대 바닥의 경계선을 발끝으로 더듬었다. 그날과 달라진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이미 점검했다고 했지만 자신의 발로 걸어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시후에게는 다른 방향을 보라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기억하는 장면도 서로 다를 것이다. 은서는 잠깐 그의 옆얼굴을 봤다. 남자는 천장보다 그녀가 멈춘 발을 보고 있었다.“조금만 더 걸어볼게요.”그가 길을 비켰다. 은서는 무대 끝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스태프가 준비됐느냐고 물었을 때는 아직이라고 답했다. 얼마든지 기다리겠다는 말을 듣자 다시 물 한 모금 마실 여유가 생겼다.그가 그녀의 곁에 섰다. 은서는 천장보다 객석을 보려고 했다. 조금 뒤 사람들이 앉을 빈 의자들을 하나씩 세어보
밤 11시, 45층 빛의 아틀리에.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찬란한 야경이 별빛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가운데, 시후가 금고에서 묵직한 벨벳 케이스를 꺼내 세공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은서는 낮에 정리한 물건 목록을 내려놓았다. 시후가 상자를 가져와도 바로 열지 않았다.“오늘 봐도 괜찮겠나?”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열어달라고 했다. 예전에 사용하던 추적 장치의 전원과 송신 기능은 이미 없애두었다는 설명도 들었다. 다시 누군가의 몸에 채울 물건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었다.시후가 뚜껑에 손을 올렸지만 은서가 몸을 가까이 기울일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발목에 있는 새 발찌를 한 번 만졌다. 비슷한 금속의 감촉인데 지금은 그것을 벗는 데 남자의 열쇠가 필요하지 않았다. 차이를 알고 보니 예전 물건을 마주할 수 있었다.딸깍-케이스가 열리자, 그 안에서 은빛 금속이 스탠드 불빛을 받았다. 처음 계약을 맺은 밤, 시후가 은서의 발목에 직접 채워 넣었던 ‘위치추적기 내장 백금 앵클릿’. 은서의 도망을 막고, 제 새장 안에 영원히 가두기 위해 채웠던 지독한 집착과 억압의 족쇄였다.은서는 상자 안쪽을 손대지 않고 들여다보았다. 복사뼈에 닿던 차가움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따라오던 무게가 생각났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안쪽의 작은 틈을 모르면 누구도 무엇에 쓰인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이걸 선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시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내 곁에 두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제 생각은 안 물었죠.”“그래.”은서는 대답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변명을 준비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시후가 자신을 구하러 왔던 날들도 떠올랐지만, 그 기억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서경 펜트하우스 45층. 한때, 외부의 빛이 한 줌도 들지 않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은서를 가두고 감시하던 상징적인 공간, ‘창문 없는 방’.은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자기 가방의 열쇠를 꺼냈다. 윤 실장이 먼저 열어주려다가 그녀가 손을 내밀자 비켜섰다. 시후는 뒤에서 아이들 가방을 받아 들고 기다렸다.문에 달린 장치를 새것으로 바꿀 때 은서는 안쪽에서 언제든 열리는지부터 확인해 달라고 했다. 이번에도 손잡이에 손을 얹고 잠금이 풀렸는지 확인했다. 예전의 무거운 문틀은 남아 있었지만 여는 방식은 달랐다.문틈으로는 비 냄새 대신 새로 정리한 나무장 냄새가 옅게 났다. 은서는 성수동에서 계약서를 코트 안에 넣고 들어왔던 밤을 잠깐 떠올렸다. 오늘은 가방 속에 아이들이 고른 자갈 주머니와 스케치북이 들어 있었다. 은서는 자갈 주머니가 눌리지 않도록 가방을 고쳐 들었다. 새 선반에 어느 쪽 돌부터 놓을지 생각하며 문 안을 들여다봤다.철컥-육중했던 삼중 방음 차단문이 열리는 순간, 은서의 맑은 눈동자에 눈부신 황금빛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예전에 암막 벽체를 걷어낸 자리에 들어선 스마트 통유리창 너머로, 한강의 은빛 물결과 남산의 푸른 숲이 펼쳐져 있었다. 이번 단장으로 작업실에서도 그 풍경을 막힘없이 볼 수 있게 되었다.천장 중앙의 채광 돔으로 서울의 하늘이 보였다. 은서는 올려다보다 눈이 부셔 고개를 조금 낮췄다. 방 한가운데 놓인 천연 대리석 세공 테이블에도 빛이 닿았다. 보석함을 열면 마터호른 에메랄드 원석의 색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은서가 보내온 배치도대로 세공대와 생활 공간 사이에 낮은 구분장이 놓여 있었다. 날카로운 공구는 잠글 수 있는 서랍에, 가족 사진과 아이들 작품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선반에 나뉘었다.그녀는 자갈 주머니를 열어 두 개의 돌을 선반에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