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은서는 듀얼 모니터 아래쪽의 붉은 문장을 읽었다. 국과수 비공개 재감정 소견서라는 표제를 다시 확인하고, 같은 줄로 눈을 돌렸다. 잘못 읽은 것이기를 바랐다.
[사인: 급성 심근경색 의증 → 체내 미량 검출된 디기탈리스 유도체에 의한 인위적 심정지 가능성 농후. 타살 의심.]
타살.
단순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줄 알았던 어머니의 죽음 뒤에, 누군가의 잔혹한 살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게, 정말이에요?”
은서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가늘게 떨렸다. 은서가 홀린 듯 손을 뻗어 마우스를 잡으려던 찰나였다. 시후의 커다란 그림자가 등 뒤에서 덮쳐오며, 은서의 가녀린 허리를 단단한 팔로 감싸 안았다.
탁!
시후의 다른 한 손이 모니터 전원을 거칠게 꺼버렸다. 푸른빛이 일순간 사라지고, 창문 없는 방 안에는 다시 숨 막히는 어둠과 두 사람의 거친 호흡만이 남았다.
“오빠…… 놔요! 더 봐야 해요! 누가 우리 엄마를……!”
은서가 시후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남자의 거대한 체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후는 은서의 등을 자신의 단단한 가슴팍에 빈틈없이 밀착시켰다. 은서의 귓가에 닿는 남자의 뜨거운 숨결과 등 너머로 전해지는 심장 박동이 온몸을 옭아맸다.
“조수현이다.”
시후의 낮고 서늘한 음성이 은서의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10년 전 네 어머니가 쓰러지던 날 밤, 별장 관리인을 매수해 약물을 바꿔치기한 흑막. 내가 그 여자의 목을 조르기 위해 10년 동안 피를 말리며 모아온 증거다.”
은서의 호흡이 턱 멎었다.
계모 조수현.
저택에서 자애로운 안주인 행세를 하며 은서를 고립시키던 그 여자가, 어머니를 죽인 진범이었다.
“네가 성수동으로 도망쳐 보석이나 깎고 앉아 있는 동안, 그들은 네 목덜미까지 칼을 들이밀고 있었어.”
시후의 서늘한 손가락이 은서의 떨리는 턱선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시후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는 광기 어린 독점욕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 증거를 세상에 까발리고 조수현 모자를 지옥으로 처넣을 수 있는 힘은, 대한민국에서 오직 나 강시후뿐이다.”
시후가 은서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며 속삭였다.
“10억의 빚을 털어내고,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라. 그 대가로 넌 내 곁에 남아.”
치명적인 덫이었다.
하지만 은서에게는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은서는 가쁘게 떨리는 숨을 들이마시며 시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약속하세요. 조수현을 반드시 파멸시키겠다고. 그럼, 이 계약을 받아들일게요.”
시후의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위험하게 비틀렸다.
그 웃음을 보니 은서는 자기가 어떤 대답을 하리라고 그가 예상했는지 알 것 같았다.
“대신 제가 모르는 곳에서 없던 일로 끝내지 마세요.”
은서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집안 체면 때문에 합의하고, 돈 받고 입 다물라고 하면 그때는 못 참아요. 엄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끝까지 알아야 해요.”
시후가 꺼진 화면을 돌아봤다. 한동안 손끝만 책상에 닿아 있었다.
“네 어머니 일은 묻지 않는다.”
은서는 그 말을 붙잡고 가까스로 숨을 내쉬었다. 조수현과 끝까지 싸워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고, 시후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버틴 참이었다.
시후는 책상 서랍에서 민우의 진술이 담긴 서류철을 꺼냈다. 은서는 첫 장의 이름부터 확인했다. 10년을 믿었던 사람의 손끝에서 나온 글씨였다. 다음 장에는 현민의 법인명이 적혀 있었다.
종이를 넘기는 은서의 손이 멎자 시후가 대신 넘기려 했다. 그녀는 서류 끝을 눌렀다.
“제가 읽을게요.”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의 사기는 다른 사건이었다. 하나가 두렵다고 다른 하나까지 남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은서는 마지막 장까지 읽은 뒤 서류철을 가슴에 붙였다.
시후는 은서를 안아 올려 집무실 안쪽 가죽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리고 서재 금고에서 묵직한 검은색 벨벳 상자를 꺼내 들었다.
찰칵.
상자가 열리자, 은은한 조명 아래 정교하게 세공된 백금 앵클릿(발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경 가문의 적통을 상징하는 검은 다이아몬드가 중앙에 박힌, 서늘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신구였다. 하지만 그 안쪽에는 은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초소형 위치 추적 칩이 내장되어 있었다.
시후는 망설임 없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서경그룹의 제왕이라 불리는 남자가, 소파에 앉은 은서의 발치 아래 겸허하게 머리를 숙인 것이었다. 시후의 크고 거친 손이 은서의 가느다란 발목을 쥐어 올렸다.
화상을 입힐 듯 뜨거운 남자의 손바닥과 차가운 공기가 맞닿자, 은서의 발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오, 오빠…… 잠깐만요. 이건 너무 지나칩니다……!”
은서가 당황하여 발을 빼려 했지만, 시후의 손아귀는 쇠사슬처럼 단단했다. 시후의 뜨거운 엄지손가락이 은서의 복사뼈 주변의 연약한 살결을 느리게 쓸어올렸다.
“발 빼지 마. 네가 또 어디로 갈지 알아야겠으니까.”
딸깍.
차가운 백금 앵클릿이 은서의 하얀 발목에 감기며 전용 열쇠로만 해제되는 잠금장치가 체결되었다. 시후가 은서의 발목에 자신의 뜨거운 입술을 깊게 묻었다. 살과 살이 맞닿는 순간, 은서의 전신을 관통하는 야릇한 전율에 은서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넌 어디로도 날아갈 수 없다, 은서야.”
시후가 고개를 들어 은서를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내일부터 넌 내 직속 비서 겸 전략실 총괄이다. 회사에서도, 밤의 침실에서도 넌 내 숨결 아래 머무는 거다.”
시후의 폭탄선언에 대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검찰청 특수수사관들이 들이닥쳐 조수현과 강현석의 가슴팍에 긴급 체포영장을 들이밀었고, 강 명예회장은 뒷목을 잡고 쓰러져 구급대에 실려 나갔다. 소란과 플래시 세례를 뒤로한 채, 시후는 은서의 손목을 단단히 쥔 채 연회장 뒤편 VIP 프라이빗 다이닝 룸으로 걸어 들어갔다.쾅-!육중한 참나무 문이 닫히고 도어락이 잠기자, 바깥의 소음이 단숨에 차단되었다. 은서의 거친 숨결이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오빠…… 이제 정말 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었어요.”은서가 떨리는 눈빛으로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전 국민과 언론, 재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의붓여동생을 ‘내 여자’라 선언한 파계였다. 하지만 시후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오히려 남자의 깊은 눈동자에는 통제할 수 없는 짙은 열망과 광기가 일렁이고 있었다.“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알아요?”은서는 가방을 내려
오전 11시, 서울 성북동 서경그룹 본가 그랜드 볼룸.은서는 대기실 문틈으로 연회장을 봤다. 전날 밤 조사받던 사람들이 하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변호인들과 함께 돌아와 치료를 받았다는 보고를 듣고도 믿기지 않았는데, 조수현은 이미 샴페인 잔을 들고 웃고 있었다.“불편하시면 입장 순서를 바꾸겠습니다.”윤 실장이 물었다. 은서는 가방 속 태블릿을 확인했다. 밤새 받은 자료와 자신이 준비한 화면이 차례대로 열렸다.“그대로 할게요. 저 사람들은 제가 못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잖아요.”윤 실장이 연결 장치의 표시등을 확인해 줬다. 은서는 화면을 잠갔다가 제 손으로 다시 열었다. 어머니 이름이 가장 먼저 보였다. 잠깐 그 글자에 손끝을 댔다가, 밖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에 태블릿을 가방으로 돌려놓았다.거울 속 은서는 잔뜩 차려입고 있었다. 드레스는 약혼식에 어울렸지만 그 안에 넣어 온 서류는 아니었다. 은서는 귀걸이 잠금쇠를 다시 눌렀다. 사소한 것부터 확인해야 손이 덜 떨렸다.문 너머에서 음악이 시작됐다. 윤 실장이 입장할 때가 됐다는 듯 한 발 물러났다.크리스탈 샹들리에의 눈부신 조명 아래, 정재계 거물들과 30여 개 언론사 취재진이 연회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상석에는 굳은 표정의 강문혁 명예회장, 그리고 어젯밤 펜트하우스 습격의 상흔을 감추기 위해 짙은 화장을 떡칠한 조수현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깁스를 한 채 살기 어린 눈빛으로 입술을 씹고 있는 태강그룹 강현석 상무가 자리했다.“시간이 되었습니다. 서경그룹과 태강그룹의 백년대계를 약속하는 정략 약혼 서약식을 거행하겠습니다.”사회자의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그랜드 볼룸의 흑단나무 양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순식간에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며 장내가 숨죽였다.버진로드 위로,
철컥.피비린내 나는 복도의 소음이 차단되고, 시후가 다시 ‘창문 없는 방’으로 들어섰다. 소파 구석에서 숨을 죽인 채 떨고 있던 은서가, 문이 열리자마자 튕겨 나가듯 달려왔다.“오빠……!”은서의 시선이 시후의 찢겨진 블랙 셔츠와 소매에 묻은 붉은 피에 닿는 순간,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경악과 눈물이 차올랐다.“피…… 피가 나잖아요! 다친 거예요? 어서 구급상자……!”은서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시후의 상체를 더듬으려 하자, 시후의 커다란 손이 은서의 떨리는 두 손을 허공에서 단단히 낚아챘다. 남자의 거칠고 뜨거운 손바닥이 은서의 손등을 으스러져라 감싸 쥐었다.“내 피가 아니다.”시후의 낮고 긁히는 중저음이 은서의 귓전을 때렸다.“버러지들의 더러운 피가 튄 것뿐이야.”격투의 여열과 맹렬한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시후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은서의 가녀린 어깨와 쇄골 위를 위험하게 훑어내렸다. 시후는 거칠게 셔츠 단추를 뜯어내듯 벗어던졌다. 조각 같은 활배근과 복근 위로 흉터와 땀방울이 뒤엉켜 성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따라와.”시후는 은서의 손목을 쥔 채 마스터 베드룸 안쪽의 프라이빗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촤아아아-!천장 매립형 레인 샤워기에서 차가운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앗……!”시후의 힘에 이끌려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선 은서의 머리칼과 옷 위로 차가운 물벼락이 쏟아졌다. 순백의 팬츠 수트와 실크 블라우스가 물에 흠뻑 젖어 들며, 은서의 가녀린 허리선과 뽀얀 살결의
콰앙-! 콰앙-!펜트하우스 45층 깊숙한 ‘창문 없는 방’의 육중한 방음 도어가 유압 절단기의 굉음과 함께 요동쳤다. 철판이 비틀리는 섬뜩한 파열음 너머로, 조수현의 표독스러운 고함이 복도를 찢었다.“당장 문 부숴! 서경그룹 후계자가 집무실에 의붓여동생을 감금하고 추잡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다! 기자들에게 라이브 스트리밍 당장 연결해!”은서는 소파에서 문을 바라봤다. 조수현은 가문의 이름이 망가지는 것까지 감수할 작정이었다. 문만 열리면 자신과 시후의 모습이 그대로 기자들에게 넘어갈 터였다.“오, 오빠…… 어떡해요…… 문이 뚫리면……!”은서가 떨리는 손으로 시후의 셔츠 자락을 붙잡으려던 찰나였다. 시후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천천히 셔츠 소매의 커프스링크를 풀고 있었다. 남자의 깊고 어두운 흑요석 눈동자 안에서, 인간의 이성이 증발한 맹수의 살기가 번뜩였다.“떨지 마라.”시후가 몸을 숙여 은서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은서의 새하얀 이마에 뜨거운 입술을 깊게 묻었다.“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문 안쪽 잠금장치를 걸고 절대 나오지 마.”“오빠, 혼자 나가면 위험해요! 밖에 30명이 넘게……!”“은서야.”시후의 낮고 서늘한 음성이 은서의 말을 가로막았다.“감히 내 새장에 발을 들인 버러지들이 어떻게 찢겨 나가는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기다려라.”은서는 책상 위 인터폰으로 손을 뻗었다. 시후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돌아봤다.“열지 말라고 했다.”시
육중한 철제 도어락이 세 번의 잠금음을 울리며 차갑게 맞물렸다. 주주간담회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지만, 하루 종일 팽팽하게 곤두서 있던 신경이 한순간에 풀려버린 탓에 은서의 다리가 맥없이 풀렸다.“아…….”은서가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무너지려던 찰나였다.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후의 거대한 그림자가 벼락처럼 은서의 허리를 낚아챘다. 남자의 단단하고 뜨거운 품 안에 안착하는 순간, 익숙한 시더우드 향과 짙은 체향이 은서의 전신을 마비시키듯 덮쳐왔다.“수고했다, 한은서.”회의장에서 수없이 들었던 축하와는 다른 말이었다. 은서는 대답하려다가 숨만 내쉬었다. 이제 아무 표정도 꾸미지 않아도 되는지, 이 남자 앞에서만큼은 더 조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시후의 낮게 긁히는 중저음이 은서의 귓전을 울렸다. 시후는 은서를 가볍게 안아 올려 집무실 중앙의 커다란 이탈리아산 천연 가죽 소파 위에 앉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서경그룹의 황태자이자 재계의 잔혹한 군주가, 지친 은서의 발치 아래 머리를 숙인 것이었다. 시후의 커다란 손이 은서의 하이힐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은서의 하얀 발목을 감싸고 있는 차가운 백금 앵클릿이 조명 아래에서 서늘하게 빛났다.시후의 뜨거운 손바닥이 은서의 굳어 있던 종아리 근육과 발목 주변을 깊고 묵직하게 눌러주기 시작했다.“읏…… 하아…… 오빠…….”예상치 못한 강한 자극과 찌릿한 쾌감에 은서의 입술 사이로 야릇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하루 종일 날 선 가시를 세우고 적들을 짓밟느라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있더군.”시후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 속에서 위험할 정도로 짙은 열망과 집착이 소용돌이쳤다. 그의 손길은 발목에서 멈추지 않고, 얇은 슬랙스 바짓단을 밀어 올리며 종아리와 무릎 안쪽의 연약한 살결을 느리게 쓸어 올렸다.은서는 소파 팔걸이에 놓인 휴대폰을 봤다. 간담회가 끝난 뒤부터 알림이 멎지 않았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메시지 사이로, 뒤늦게 안부를 묻는 사람들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다음 날 오전 10시, 광화문 서경그룹 본사 40층 그랜드 볼룸.수백 명의 주주들과 경제부 기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회의실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단상 위에 오른 계모 조수현은 검은색 명품 투피스를 차려입은 채, 가식적인 눈물을 훔치며 마이크를 잡았다.“존경하는 주주 여러분, 그리고 임직원 여러분. 한은서 팀장은 서경그룹의 이름을 사칭하여 성수동에 개인 사설 아틀리에를 차리고, 10억 원대의 금융 사기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회사 윤리 규범 위반이자 배임 행위입니다.”조수현은 마이크에서 입을 떼며 잠깐 웃었다. 그녀의 등 뒤 스크린에는 인터넷 찌라시 매체에 뿌려진 허위 기사들이 대문짝만하게 떠올랐다.“따라서 오늘 이 자리에서 한은서 팀장의 즉각적인 직위 해제 및 디자인 전략실 퇴출, 그리고 형사 고발을 결의하고자 합니다.”찬성표를 던지기 위해 매수된 어용 주주들이 웅성거리며 손을 들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쿵-!육중한 대회의실 양문이 거칠게 열렸다. 순식간에 회의실 전체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어버렸다.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버진로드 같은 통로를 따라, 순백의 테일러드 팬츠 수트를 입은 한은서가 홀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단정하게 빗어 넘긴 흑발, 맑고 투명하지만 칼날처럼 차가운 눈동자. 그녀의 쇄골 위에는 전날 오전 시후가 새겨놓은 붉은 키스마크를 가리기 위해 실크 스카프가 우아하게 둘러져 있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짓단 사이로 백금 앵클릿이 서늘하게 번뜩였다.“누, 누가 저 계집애를 들여보냈어?! 경비원, 당장 끌어내요!”조수현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하지만 은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단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은서는 단상 계단 아래에서 멈췄다. 화면에는 자신의 이름이 보였다. 모르는 기자가 쓴 문장인데도 마치 자신의 잘못을 읽는 것처럼 얼굴이 뜨거워졌다.객석의 누군가가 휴대폰을 들어 얼굴을 찍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멈췄다. 조수현은 그 한 번의 회피마저 이용할 여자였다.은서는 프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