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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다른 여자와 호텔에 들어간 날,
나는 생방송 카메라 앞에서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완벽한 각도.
완벽한 미소.
완벽한 부부.
태강그룹 창립 오십 주년 생방송.
무대 아래 첫 줄에는 시아버지 권태겸이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는데도 그 인간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 옆의 한미라는 내 드레스와 표정을 번갈아 훑었다.
방송 전 대기실에서 그녀는 내 어깨끈을 손가락으로 끌어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좀 제대로 웃어.”
“웃고 있는데요.”
“그건 사람 장례 치르고 온 년 얼굴이고.”
한미라가 내 턱을 들었다.
“태강가 며느리답게 웃으라고. 네 얼굴도 이 집안 자산이야.”
그리고 한마디 더.
“아직 애도 못 낳았으면 얼굴값이라도 해야지.”
나는 웃었다.
아주 예쁘게.
속으로는 그 여자의 진주 목걸이를 잡아 뜯어버리는 상상을 하면서.
생방송이 시작되자 권이록이 내 허리를 감쌌다.
전 국민이 사랑하는 재벌 후계자.
아내밖에 모르는 국민 남편.
그런데 내 휴대폰에는 막 도착한 사진이 떠 있었다.
호텔 복도.
붉은 드레스의 문예라가 이록의 팔에 붙어 있었다.
다음 사진에서는 그 여자의 손이 이록의 넥타이를 잡고 있었다.
세 번째는 호텔 방문 앞.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리고 메시지.
[사모님, 남편분 생각보다 잘 참으시던데요.]
곧 하나가 더 왔다.
[그래도 방에 들어오니까 다르긴 하더라고.]
나는 화면을 껐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이록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웃어요.”
이록이 나를 내려다봤다.
“사진 봤어?”
“네.”
“몇 장?”
“방 앞까지.”
“그 뒤는?”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속삭였다.
“그 뒤도 찍혔으면 더 좋았겠죠.”
“미친 여자.”
“이제 알아요?”
그 여자를 이록에게 붙인 건 나였다.
문예라.
스물여덟.
돈이 급했고, 얼굴이 예뻤고, 남의 남편을 건드리는 데 죄책감이 적었다.
내가 석 달을 들여 고른 여자였다.
향수도 내가 골랐다.
드레스 색도.
이록이 술을 마시는 날도.
호텔까지 따라갈 이유도.
“내 남편 꼬셔요.”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렇게 말했다.
예라는 웃었다.
“어디까지요?”
“사진 나올 만큼.”
“키스는?”
“필요하면.”
“침대는?”
그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라가 내 얼굴을 보더니 웃었다.
“사모님, 생각보다 더 또라이네.”
맞았다.
나는 남편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정확히는 권이록 뒤에 있는 태강을.
방송이 끝난 뒤, 이록이 무대 뒤에서 내 손목을 잡았다.
벽과 그의 몸 사이에 내가 갇혔다.
“놓아요.”
“싫은데.”
“카메라 꺼졌어요.”
“그래서.”
그가 내 손목을 들어 올렸다.
엄지가 맥박 뛰는 자리에 닿았다.
“아까부터 여기만 솔직하네.”
“뭐가요?”
“당신 질투해.”
“염병하네.”
이록의 눈이 아주 조금 변했다.
“욕도 하네.”
“남편이 호텔방 들어갔다 왔는데 존댓말만 할까요?”
“당신이 보냈잖아.”
“보냈다고 진짜 먹으라고 한 건 아니죠.”
말이 튀어나온 뒤 내가 먼저 입을 다물었다.
이록이 웃었다.
“이제 본심 나오네.”
“재수 없게 웃지 마요.”
“키스까진 괜찮고 침대는 안 된다는 거야?”
“뭘 했는데요?”
“궁금해?”
그가 얼굴을 가까이했다.
입술이 닿지는 않았다.
더 열받게도.
“권이록.”
“응.”
“문예라랑 잤어요?”
그가 대답하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예라였다.
[사모님.]
[나 임신했어요.]
사진까지 왔다.
테스트기 두 줄.
나는 화면을 두 번 봤다.
이록도 봤다.
“와.”
내가 웃었다.
“개같네.”
“당신 계획엔 없었지?”
“당신 애예요?”
“나한테 묻지 말고 당사자한테 물어.”
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예라는 첫 신호에 받았다.
—사모님.
“애 아빠 누구야?”
—왜요?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니야.”
—아까는 남편이랑 호텔 들어가도 그렇게 예쁘게 웃으시더니.
“문예라.”
—네.
“권이록 애냐고.”
예라가 웃었다.
—그렇게 믿고 싶어요?
“이 미친년이 진짜.”
이록이 내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았다.
“문예라.”
전화기 너머로 예라가 잠잠해졌다.
“내 애라고 말할 거면 지금 말해.”
—왜요? 무서워요?
“아니.”
이록이 나를 보며 말했다.
“내 애 아니니까.”
나는 고개를 돌렸다.
“뭐?”
예라가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대표님은 알고 있었네.
“둘이 지금 무슨 개수작이야?”
예라가 말했다.
—사모님.
“뭐.”
—나 대표님 꼬시라고 보낸 거 맞죠?
“맞아.”
—근데 나도 사모님한테 하나 숨긴 게 있어요.
“뭔데.”
—나 돈 때문에 이 집에 들어온 거 아니에요.
그 순간 이록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나는 그것부터 봤다.
“계속해.”
—나 원래 태강 사람이었어요.
“무슨 소리야?”
—정확히는.
예라가 한 박자 쉬었다.
—사모님 시아버지 사람이었어요.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
—권태겸 회장.
예라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나 그 인간이랑 먼저 잤어요.
이번에는 이록이 욕했다.
“이런 미친.”
나는 벽에서 등을 뗐다.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지?”
—아뇨.
“그럼 애 아빠가 누구야.”
전화기 너머로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문예라가 말했다.
—사모님 남편 아니에요.
나는 이록을 봤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예라의 마지막 한마디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사모님 시아버지 애예요.
순간 내 머릿속에서 모든 관계가 뒤집혔다.
내가 남편에게 붙인 불륜녀.
그 여자가 가진 아이가 사실이라면—
권이록의 아이가 아니라,
권이록의 동생이었다.
바로 그때 대기실 문이 열렸다.
권태겸이 서 있었다.
그는 나도, 이록도 보지 않았다.
내 손에 들린 휴대폰만 봤다.
그리고 말했다.
“문예라 그 년이 입 열었냐?”
나는 웃음이 나왔다.
기가 막혀서.
“아버님.”
“뭐.”
“애가 생겼다는데 축하부터 드릴까요?”
권태겸의 얼굴이 처음으로 변했다.
이록이 내 앞을 막아서려 했지만 나는 그의 팔을 밀어냈다.
“비켜요.”
“사율아.”
“비키라고, 개새끼야.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
나는 시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내 남편한테 붙인 불륜녀가 사실은 시아버지 정부였고.”
한 걸음 더.
“그 여자가 지금 시아버지 애를 가졌고.”
또 한 걸음.
“내 남편은 그걸 알고 호텔방까지 따라 들어갔다?”
나는 웃었다.
“이 집안 진짜 개판이네요.”
권태겸이 내 귀 가까이 얼굴을 숙였다.
“아직 절반도 모르면서 지랄하지 마라.”
“절반?”
그가 내 눈을 봤다.
“문예라를 네 남편한테 붙인 게 네가 처음인 줄 알아?”
내 웃음이 멎었다.
권태겸이 말했다.
“그 여자.”
그리고 이록을 가리켰다.
“원래 내가 이 새끼한테 붙이려고 데려온 여자야.”
그날 처음 알았다.
내가 골랐다고 믿었던 불륜녀는,
처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화부터 이야기 전면 수정중입니다. 최대한 빨리 모두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1화부터 12화까지는 전면 수정하였습니다.
“권도혁.”사진 뒷면의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그때 현관문이 열렸다.도현이 들어왔다.“무슨 일이야?”나는 사진을 내밀었다.“이거 봐.”도현의 얼굴이 굳었다.“어디서 났어?”“우편함.”그가 사진을 뒤집었다.그리고 한참 말이 없었다.“당신도 알고 있었어?”“아니.”“거짓말하지 마.”“정말 몰랐어.”나는 사진을 그의 손에서 빼앗았다.“그럼 권도혁은 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거야?”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그때 뒤에서 강도혁이 들어왔다.사진을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이 굳었다.“그 사진……”“알아?”“알아.”“뭔데?”그가 숨을 내쉬었다.“사율이 태어나던 날 찍힌 사진이야.”나는 그에게 다가갔다.“그럼 권도혁이 진짜 아버지야?”강도혁이 고개를 저었다.“아니.”“그럼 왜?”“권도혁은 죽기 전에 자기 이름을 이용해서 보험을 하나 만들어놨어.”“무슨 보험?”“사율이 위험해졌을 때만 공개되는 자료.”나는 사진을 바라봤다.“그 자료가 뭔데?”강도혁이 말했다.“친부 검사 결과.”“그럼 이제 진짜 아버지를 알 수 있겠네.”그가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봉투를 열었다.결과지를 펼쳤다.그리고 친부 이름을 보는 순간 숨을 멈췄다.강도현.나는 결과지를 내려놓았다.“역시.”도현이 나를 바라봤다.“그래.”“사율의 아버지는 당신이야.”그가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해.”“뭐가?”“너한테 말하지 못해서.”“왜 숨겼어?”“권이록이 사율을 노리고 있었으니까.”그때 사율이 달려왔다.“엄마!”나는 아이를 안았다.“응.”“아빠는 누구야?”나는 도현을 바라봤다.도현도 나를 바라봤다.나는 잠시 망설이다 아이에게 말했다.“네가 직접 정하면 돼.”사율이 고개를 갸웃했다.“뭘?”“누구를 아빠라고 부를지.”도현이 눈시울을 붉혔다.“연희야.”나는 고개를 저었다.“이제 아무도 대신 결정하지 못해.”나는 사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네 인생은 네가 정해.”아이가 도현에게 다가갔다.한참 바라보다가
병원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였다.권이록이 기다리고 있었다.그의 옆에는 사율이 있었다.“사율아!”아이가 나를 보자 달려왔다.“엄마!”나는 아이를 끌어안았다.“괜찮아?”“응.”권이록이 웃었다.“역시 아이 앞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네.”나는 아이를 뒤로 숨겼다.“이번에는 끝내.”“그래.”그가 병원 안쪽을 가리켰다.“저 방에 들어가면 네가 잊은 모든 게 있어.”나는 사율을 도현에게 맡겼다.“잠깐만 데리고 있어.”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혼자 방 안으로 들어갔다.벽에는 오래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십 년 전.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그리고 옆에는 갓난아기 사율이 있었다.나는 영상을 보며 숨을 삼켰다.화면 속 내가 울고 있었다.“이 아이를 살려주세요.”권이록이 말했다.“그러려면 네가 사라져야 해.”“내가?”“네 신분도, 기억도 전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아이는 살려줘.”그때 화면 속 엄마가 들어왔다.“연희야.”“엄마.”“이 아이는 내가 키울게.”“안 돼.”“네가 기억을 잃으면 아이를 알아보지 못할 거야.”“그래도……”화면 속 나는 아기를 끌어안았다.“이 아이가 나를 기억하게 해줘.”엄마가 울었다.“약속할게.”영상이 끝났다.나는 눈물을 닦았다.그때 뒤에서 권이록이 말했다.“기억났어?”나는 돌아봤다.“그래.”“그럼 이제 알겠네.”“뭘?”“사율은 네 아들이 아니야.”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뭐?”“사율은 내가 낳지 않았어.”권이록이 웃었다.“그렇지.”“하지만 내 아들이야.”그의 표정이 굳었다.“내가 낳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내가 끝까지 지킨 아이야.”권이록이 다가왔다.“그 아이 때문에 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알아?”“거짓말.”“네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야.”“그럼 보여줘.”권이록은 잠시 침묵했다.나는 그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빼앗았다.저장된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그리고 영상 속 권이록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도현이…… 가짜였어?”내 목소리가 떨렸다.내 앞에는 똑같은 얼굴을 가진 두 남자가 서 있었다.한쪽은 내가 십 년 동안 알고 지낸 도현.다른 한쪽은 방금 나타난 남자.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내가 먼저 물었다.“둘 중 누가 진짜야?”도현이 입을 열었다.“나.”동시에 다른 남자도 말했다.“나야.”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이제 이런 것까지 해야 해?”내가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그럼 간단하게 확인하자.”두 사람의 얼굴을 찍었다.그리고 경찰에게 사진을 전송했다.“지문 채취하면 끝나.”그 순간 한쪽 남자가 달려들었다.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도현이 그 남자를 밀쳤다.“연희한테 손대지 마!”“너야말로 그 입 닥쳐!”두 사람이 서로의 멱살을 잡았다.나는 그 틈에서 둘의 손목을 바라봤다.그리고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내가 십 년 동안 알고 지낸 도현의 오른쪽 손목에는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사고로 생긴 흉터라고 들었다.그런데 다른 남자의 손목에도 똑같은 흉터가 있었다.“둘 다 같은 흉터?”두 남자가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나는 천천히 말했다.“이제 알겠어.”두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둘 다 도현이야.”“뭐?”“한 명이 가짜인 게 아니야.”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둘 다 도현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던 거야.”그때 권이록이 웃었다.“드디어 알아냈네.”나는 그를 돌아봤다.“당신도 알고 있었어?”“그래.”“왜 숨겼어?”권이록의 얼굴이 굳었다.“네가 알아버리면 사율이 위험했으니까.”“또 그 말.”나는 권이록에게 다가갔다.“이번엔 내가 묻는 대로 대답해.”“…….”“사율의 친아버지는 누구야?”권이록은 두 남자를 바라봤다.“둘 중 한 명.”“누구?”“진짜 강도현.”나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그럼 가짜는 누구야?”권이록이 말했다.“가짜는 없어.”나는 눈을 찌푸렸다.“무슨 소리야?”“한 명은 강도현.”잠시 후.“다른 한
“사율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바로 나였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결과지를 구겨버렸다.“말도 안 돼.”여자의 몸으로 내가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일 수는 없었다.이건 또 다른 조작이었다.나는 봉투를 뒤집어 봤다.병원 이름.검사 날짜.검사번호.전부 적혀 있었다.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강연희’라는 이름 옆에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검체번호 A-01.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잠깐.”권이록이 피를 흘린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나는 그에게 결과지를 내밀었다.“이게 무슨 뜻이야?”권이록은 힘겹게 웃었다.“이제 알아차렸네.”“검체번호 A-01.”“그래.”“내 이름이 아니잖아.”“네 이름을 붙인 게 아니야.”나는 숨을 멈췄다.“그럼?”권이록이 낮게 말했다.“원본 강연희의 유전자 샘플 번호야.”나는 결과지를 다시 봤다.A-01 강연희.그리고 그 아래에는 친자관계가 적혀 있었다.사율과의 부계 유전적 일치 가능성 99.98%.“원본의 유전자?”“그래.”“그럼 사율의 친아버지가 원본 강연희라는 뜻은 아니잖아.”권이록이 웃었다.“맞아.”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검사 결과가 말하는 건 단 하나야.”그가 피 묻은 손으로 결과지를 가리켰다.“사율의 아버지와 원본 강연희가 동일한 유전적 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그게 무슨 뜻인데?”“강연희가 남자였다는 뜻이야.”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강연희가?”권이록이 고개를 끄덕였다.“원본 강연희의 주민등록상 성별부터 조작됐어.”그때 뒤에 있던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니.”모두가 그녀를 바라봤다.“그건 아니야.”“그럼 뭔데?”그녀는 결과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저 검사는 부계 검사가 아니야.”나는 굳었다.“뭐?”“저건 친자관계를 확인하는 검사야. 그런데 사율에게 아버지로 등록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면 별도의 기준 검체가 필요해.”“그럼 저 A-01은?”여자가 대답했
“그게 나야.”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도현과 똑같은 얼굴.하지만 눈빛은 전혀 달랐다.도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형…… 정말 형이야?”남자가 웃었다.“이제야 알아보네.”“말도 안 돼.”도현이 한 걸음 다가갔다.“형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했어.”“그렇게 기록했으니까.”“누가?”남자의 시선이 아버지에게 향했다.“저 사람.”아버지의 표정이 굳었다.나는 숨을 삼켰다.“왜 당신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어요?”남자가 나를 바라봤다.“내가 실험을 거부했거든.”“무슨 실험?”“너를 만든 실험.”순간 머리가 멍해졌다.“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이 있었어?”“그래.”그가 천천히 말했다.“나는 원본 강연희의 유전자를 복제하는 실험에 반대했어.”“그래서?”“그래서 나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지.”도현이 이를 악물었다.“그럼 형이 사라진 뒤 아버지가 나를 이용한 거야?”“너뿐만 아니야.”남자가 나를 바라봤다.“서연도 이용했어.”“왜 나를?”“네가 원본과 가장 가까웠으니까.”나는 손을 꽉 쥐었다.“원본 강연희는 누구야?”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나.”나는 그녀를 바라봤다.“정말 당신이 원본이야?”“그래.”“그럼 왜 나를 만들었어?”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내가 만든 게 아니야.”“그럼 누가?”여자는 아버지를 바라봤다.“저 사람.”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그에게 다가갔다.“왜?”“네가 필요했으니까.”“무슨 뜻이야?”“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고 싶었어.”“누구를?”아버지가 대답했다.“내 딸.”나는 얼어붙었다.“딸?”“강연희.”원본 강연희가 눈을 감았다.“나는 죽지 않았어.”“뭐?”“죽은 건 내 기억이야.”그 말이 떨어지자 남자가 웃었다.“이제 거의 다 기억났네.”나는 그를 바라봤다.“사율의 아버지가 당신이라고 했잖아.”“그래.”“그럼 당신이 내 아이를 낳게 만든 거야?”그의 표정이 흔들렸다.“아니.”“그럼?”“네가
“이 아이는…… 인간복제 실험의 첫 번째 성공 개체입니다.”화면 속 의사의 목소리가 끝나는 순간, 내 손에서 휴대전화가 떨어졌다.“복제……?”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화면을 바라봤다.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갓난아기.작은 얼굴.눈썹 모양.왼쪽 귀 아래의 작은 점.전부 나와 같았다.“저게 나라고?”의사가 화면 속에서 말했다.“유전적으로는 강연희와 동일합니다.”나는 숨을 삼켰다.“강연희?”화면에 내 얼굴과 똑같은 여자의 사진이 떴다.그런데 그 사진 속 여자는 내가 아니었다.내 앞에 서 있던 여자.내가 언니라고 믿었던 여자.그녀가 화면을 보는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이 영상이 아직 남아 있었어?”친엄마가 그녀를 노려봤다.“당신도 알고 있었어?”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당신이 원본이야?”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그래.”“그럼 나는?”“너는 나를 복제해서 만든 아이야.”머리가 멍해졌다.“왜?”“널 만들면 안 됐어.”“그런데 왜 만들었어?”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네 아버지가 원했어.”나는 천천히 아버지라고 믿었던 남자를 바라봤다.그는 침묵하고 있었다.“당신이 나를 만든 거야?”“정확히는…….”“말해.”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네 유전자를 만든 건 내가 아니야.”“그럼 누가?”“도현의 아버지.”나는 도현을 바라봤다.도현 역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내 아버지가?”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십 년 전 그 실험의 목적은 단순한 복제가 아니었어.”“그럼 뭐였는데?”“기억을 복제하는 것.”나는 얼어붙었다.“기억?”“사람의 유전자뿐 아니라 기억과 성격까지 복제할 수 있는지 실험했어.”나는 머리를 움켜쥐었다.“그럼 내가 가지고 있던 기억은…….”친엄마가 조용히 말했다.“원본 강연희의 기억 일부를 이식한 거야.”순간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폭발하듯 떠올랐다.학교.엄마.도현.권이록.그리고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다고 생각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