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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화. 먼저 온 약속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7 20:56:32

“54세 남자분이요. 일하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 오셨는데, 침대 옮길 때부터 못 펴고 계세요.”

은채는 간호사를 따라 가림막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의 작업복 가슴에 냉동창고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한쪽 주머니가 불룩했지만 손으로 누르고 있는 곳은 그 아래 명치였다. 함께 온 동료가 작은 생수병을 든 채 침대 곁에 서 있었다.

“장동식 씨?”

남자가 눈을 들었다. 관자놀이에서 흐른 땀이 귓바퀴에 고여 있었다.

“밥을 잘못 먹었나 봐요.”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11시 좀 전…….”

동료가 말을 보탰다.

“10시 50분이었어요. 점검표 쓰다가 갑자기 주저앉았습니다. 기계에 부딪친 건 아니고요.”

지금은 오전 11시 40분이었다. 은채는 환자에게 손을 대기 전 호흡과 맥박부터 살폈다. 숨을 깊이 들이쉬지 못하고 있었고, 혈압은 높지 않았다. 다친 환자는 아니었지만 즉시 외과 평가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물은 아직 드리지 마세요.”

동료가 병뚜껑을 닫았다.

은채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들은 뒤 진찰했다. 배를 눌렀다가 떼는 큰 동작을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손이 닿자 복벽이 단단하게 긴장했고, 환자는 침대가 조금 움직이는 것에도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담요를 내려준 뒤 권해진을 불렀다.

“명치에서 시작해서 배 전체로 퍼졌습니다. 복막 자극 소견이 뚜렷해요.”

“저도 그게 걸려서 바로 불렀습니다. 심전도는 먼저 찍었고, 혈액검사 진행 중입니다.”

권해진이 초기 평가를 공유했다. 가슴 불편감과 겹치는 증상도 확인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복부 안의 급한 문제를 먼저 찾아야 했다.

은채는 문정원에게 환자 상태를 전했다. 돌아온 답은 짧았다.

―수액 반응 보면서 영상 준비해. 나도 내려갈게.

동식은 간호사가 정맥 주입관을 정리하는 동안 눈을 감았다. 은채가 복용하는 약을 묻자 주머니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허리약밖에 안 먹어요.”

“처방받은 약인가요?”

“예전에 받은 거하고, 약국에서 산 거하고요.”

동료가 허락을 받고 주머니에서 약 봉투를 꺼냈다. 이름이 남은 포장과 글씨가 지워진 작은 봉투가 섞여 있었다. 은채는 확인 가능한 약을 먼저 기록하고 나머지는 가족에게 알아보기로 했다. 약을 많이 먹었으니 그것 때문이라고 정할 수는 없었다.

“며칠 전부터 속쓰림도 있으셨어요?”

“좀. 원래 아침을 잘 안 먹어서…….”

“오늘 같은 통증은 처음이고요?”

동식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움직였다.

그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던 동료가 은채를 복도 쪽에서 조용히 불렀다.

“큰 병인가요? 아까 전화로는 소화제 먹으면 될 것 같다고 해서.”

“지금은 소화제만 드리고 볼 상태는 아닙니다. 안쪽에 구멍이 나거나 염증이 생긴 건 아닌지 빨리 확인해야 합니다.”

동료는 들고 있던 물병을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는 환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유리한테 전화해도 돼요?”

“걔 근무 중인데.”

“아버지도 지금 근무 못 하시잖아요.”

동식은 대답 대신 자기 휴대전화를 내줬다.

은채는 그들에게 시간을 주는 동안 준비를 이어갔다. 진통과 수액 치료를 시작한 뒤에도 환자는 배에 힘을 주고 있었다. 다만 의식과 혈압은 유지됐고, 바로 이용 가능한 검사실까지 이동할 수 있는 상태였다. 문정원이 직접 진찰하고 영상검사와 동시에 수술 가능성에 대비하도록 했다.

침대가 움직이자 동식이 옆 난간을 움켜쥐었다.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은채는 내려다보는 대신 걸음을 맞췄다.

“검사하고 나면 지금 왜 이렇게 아픈지 더 분명하게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

정오 직전, 검사실에서 돌아오기 전 영상의학과의 연락이 먼저 왔다.

위와 십이지장 주변으로 공기가 보였다. 장 안에 있어야 할 공기가 밖으로 나와 있었고, 그 주변과 간 아래에는 액체가 고여 있었다. 은채는 판독 중인 의사와 위치를 맞춘 뒤 문정원에게 화면을 열어줬다.

“위 출구 가까운 십이지장 쪽이 의심됩니다.”

“환자 돌아왔어?”

“바로 올라옵니다.”

문정원은 영상과 초기 진찰 내용을 함께 보고 수술 준비를 지시했다. 항생제를 포함한 처치와 마취 평가도 동시에 진행됐다. 가족에게 상황을 알리는 일은 그 준비가 멈추지 않도록 나누었다.

은채는 돌아온 동식에게 설명했다.

“위에서 장으로 내려가는 부근에 구멍이 난 것으로 보입니다. 내용물이 배 안으로 새면서 염증을 일으키고 있어요.”

동식이 입술을 축였다.

“그걸 막아야 해요?”

“네. 안쪽을 확인해서 새는 곳을 치료하고, 배 안의 오염도 정리해야 합니다.”

“약으로 붙는 건 아니고요?”

“지금 진찰과 영상에서는 기다리면서 약만 쓰기 어렵습니다.”

그는 손에 쥔 휴대전화를 봤다. 동료가 통화를 마친 뒤 돌려준 것이었다.

“딸은 50분 걸린답니다.”

“오시는 동안 저희가 연락할 수 있도록 해두겠습니다. 수술은 그보다 먼저 준비해야 합니다.”

동식은 화면을 한 번 문질렀다. 은채는 수술 방법이 안쪽 상태와 마취 중 반응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까지 설명했다. 문정원이 추가 질문을 받는 동안 환자의 얼굴에서 대답을 망설이던 표정이 조금씩 사라졌다.

“해주세요.”

그가 말했다.

“여기 누워 있어도 계속 더 아픈 것 같아요.”

은채는 환자가 이해하고 선택했는지 다시 확인한 뒤 준비를 진행했다. 수술 동의를 마친 동식은 서명하던 펜을 바로 놓지 못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억지로 펜을 빼지 않았다. 그가 손을 펴자 받아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제가 문 교수님과 함께 들어갑니다.”

동식의 시선이 그녀의 명찰로 내려갔다가 돌아왔다.

“서은채 선생님.”

“네.”

“이름이 잘 안 외워져서요. 한번 말해봤어요.”

그는 웃으려다 배가 당겼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은채는 담당 간호사와 통증을 다시 살핀 뒤 가림막 밖으로 나왔다.

민재가 수술실 상황표를 들고 서 있었다.

“외상 수술실은 두 팀 다 다른 응급수술 진행 중이고요. 공용 3번이 앞 수술 끝나서 정리 중입니다. 그쪽 마취팀이 가장 빨리 가능합니다.”

“그 방으로 요청했어요?”

“그런데 다음 환자가 잡혀 있다고…….”

은채가 표를 받았다.

공용 3번실 다음 칸에 유선경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복강경 담낭절제술. 소화를 돕는 담즙을 저장하는 쓸개를 떼어내는 수술이었다.

오후 일정 사이에 추가된 환자였다. 다른 칸과 달리 예정 시각 옆에 별표가 붙어 있었다.

마취에 들어간 환자는 아니었다. 수술 전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문 교수님 환자예요?”

“오늘 오전 급성기외과 쪽으로 의뢰돼서 송 교수님이 보셨고, 문 교수님하고 일정 상의한 분이랍니다.”

은채는 외과 쪽 인계에 있던 이름을 떠올렸다. 반복되는 담석 통증으로 치료 계획을 세운 환자. 오전 평가는 송현섭이 맡았고, 은채는 자세한 내용까지 읽지는 못했다.

그때 수술실 조정 담당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동식 씨 준비는 진행하고 있습니다. 문 교수님하고 마취과에서 순서 결정해주시면 됩니다. 다만 유선경 씨 쪽에 원무에서 이미 시간을 말씀드렸다네요.

“환자 상태 먼저 확인해서 바로 공유하겠습니다.”

은채는 문정원에게 상황을 전했다. 문정원이 송현섭과 통화하는 동안 그녀는 맡겨진 유선경의 진료 경과를 열었다. 검사 결과와 오전 진찰, 통증이 가라앉은 시점이 순서대로 남아 있었다.

급성 담낭염이나 담즙이 흐르는 통로인 담관의 폐쇄를 의심한 근거는 없었다. 다만 오전 평가만 읽고 끝낼 수는 없었다. 현재 상태도 다시 봐야 했다.

문정원이 전화를 끊었다.

“현섭 선생 평가와 같으면 천공 환자 먼저 들어가. 유선경 씨는 병동에서 한 번 더 보고 계획 바꿔서 설명하고.”

“네.”

“소민 선생한테 현재 혈압이랑 검사 전달해. 나는 유선경 씨 쪽도 정리할게.”

은채는 할 일을 나눠 받고 마취팀에 연락했다. 소민은 방이 정리되는 동안 직접 환자를 보겠다고 했다.

그때 진료구역 입구에 오경환이 나타났다.

늘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이 없었다. 대신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지 않은 채 문정원을 찾았다. 그는 통화를 끝내고 은채 쪽으로 다가왔다.

“유선경 여사 순서 바꾼다면서?”

“응급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들어와서요. 문 교수님하고 마취팀이 조정 중입니다.”

“위 천공?”

“십이지장 쪽이 의심됩니다. 진찰에서 복막 자극이 있고 영상에도 공기와 액체가 확인됩니다.”

오경환은 은채가 보여준 화면을 빠르게 훑었다. 은채가 짚은 공기와 액체가 있는 부분에 그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이 사람 수술해야 하는 건 맞네.”

은채가 다음 설명을 이어가려는데 그가 먼저 물었다.

“그런데 먼저 약속한 분한테는 누가 얘기했어?”

가림막 안에서 동식의 침대 높이를 조정하는 소리가 났다. 조금 전 자기 이름을 외워 부르던 사람이 거기 누워 있었다. 은채는 수술실 상황표를 접지 않은 채 오경환을 마주했다.

“담당팀에서 설명합니다. 장동식 씨 준비는 계속하겠습니다.”

오경환의 시선이 잠깐 그녀에게 머물렀다.

“서 선생. 여기서는 수술만 잘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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