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의심스러운 동맹

Author: 아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6 20:20:53

3화. 의심스러운 동맹

약속한 시각이 가까워질수록 비가 거세졌다.

예령은 연화와 호위 한 명만 데리고 황도 외곽의 폐사로 향했다. 오래전 화재로 승려들이 떠난 곳이라 인적이 드물었고, 진북후부와 서씨 가문 어느 쪽의 눈도 피하기에 적당했다.

“정말 혼자 들어가시려고요?”

연화가 젖은 처마 아래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상대도 혼자 오라고 했으니까.”

“그래도 한무천 공자의 형님이잖아요. 무슨 일을 당하실 줄 알고…….”

“나를 해칠 생각이었다면 나오지도 않았겠지.”

예령은 연화와 호위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등불 아래,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무너진 불상 앞에 서 있었다. 한쪽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비스듬히 기운 모습은 소문대로 다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보였다.

한무겸이었다.

전생의 혼례 날 멀리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창백한 얼굴 때문에 병약하다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느껴졌으나, 예령을 살피는 눈빛만은 조금도 흐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대담하군.”

무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혼인을 앞둔 여인이 밤중에 예비 시아주버니를 불러내다니.”

“그 혼인은 곧 깨질 겁니다.”

“내 아우도 알고 있소?”

“알게 되겠지요.”

예령은 젖은 겉옷을 벗어 문가에 걸었다. 무겸의 시선이 잠시 그녀를 따라왔지만, 그는 더 묻지 않고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후계 자리를 되찾고 싶다면 만나자고 했더군.”

“예.”

“그대가 내게 그 자리를 줄 수 있소?”

“제가 드릴 수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빈말을 적어 보낸 것이오?”

“기회는 드릴 수 있습니다.”

예령은 준비해 온 장부를 꺼내 낡은 탁자 위에 펼쳤다.

“진북후부는 북방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군비를 줄이지 못했습니다. 황실에서 지원한 군량과 은자는 매년 장부보다 적게 들어오고 있고, 부족한 금액은 서쪽 상단에서 빌리고 있지요.”

무겸의 시선이 장부로 향했다.

“두 달 뒤에는 첫 번째 빚을 갚아야 합니다. 막지 못하면 북쪽 농지와 병기 창고 일부가 채권자에게 넘어갑니다.”

“외부인이 진북후부의 살림을 제법 자세히 알고 있군.”

“서씨 상단과 거래한 내역을 맞춰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전부 사실은 아니었다.

예령은 전생에서 진북후부의 살림을 맡으며 알게 된 흐름을 이용했다. 그러나 장부에는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근거만 남겨 두었다. 무겸이 조사하더라도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한동안 숫자를 살피다가 장부를 덮었다.

“그래서 서씨 가문의 재물로 빚을 갚아 주겠다는 말이오?”

“대가 없이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한무천과의 파혼을 도와주십시오.”

무겸의 눈이 천천히 예령에게 돌아왔다.

“내 아우와의 혼인을 깨기 위해 그 형을 찾아왔다는 것이오?”

“진북후부는 쉽게 저를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그 집안에는 제 혼수와 서씨 상단의 자금이 필요하니까요.”

“그대가 무천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황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소.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고 하면 누가 믿겠소?”

“믿게 만들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나요?”

예령은 부정하지 않았다.

“제가 자금과 정보를 제공하면, 진북후부 안에서 제 가문을 압박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십시오. 조씨 가문이 서씨 상단에 손을 뻗는 것도 차단해 주셔야 합니다.”

“그 대가로 나는 후계 자리를 되찾고?”

“그 자리를 되찾는 건 본인의 능력에 달렸습니다. 저는 필요한 기회만 만들겠습니다.”

무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말은 냉정한데 내놓는 것은 꽤 크군.”

“저도 그만한 대가를 요구할 겁니다.”

“파혼만이 목적이라면 다른 권세가를 찾아가도 될 텐데.”

“다른 사람은 진북후부의 장남이 아니니까요.”

그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예령이 한무겸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본래 진북후부의 후계자였고, 한무천이 평생 넘어서지 못했던 형이었다. 다른 가문과 손을 잡으면 한무천을 피할 수 있을 뿐이지만, 무겸과 손을 잡으면 그가 탐내던 것들을 먼저 빼앗을 수 있었다.

“내 아우에게 원한이라도 있소?”

예령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한무천은 서씨 가문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이 복수를 입에 올리는 순간, 회귀의 비밀까지 의심받을 수 있었다.

“한무천이 제가 믿었던 사람인지 확인했을 뿐입니다.”

“무엇을 확인했지?”

“그 사람은 저보다 제가 가진 것을 더 원합니다.”

무겸은 예령의 얼굴을 한동안 살폈다. 감춘 진실까지 끌어내려는 듯한 시선이었지만, 예령은 피하지 않았다.

“이제 제 대답은 충분한 것 같은데요.”

“내게는 부족하오.”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그대가 무천에게 미련이 없다는 확신.”

예령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그것은 이번 거래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상관이 있지.”

무겸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한 걸음 다가왔다.

“내 힘을 빌려 아우의 관심을 끌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거절할 테니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무천이 찾아와 다시 혼인하자고 하면?”

“거절할 겁니다.”

“울며 용서를 빌어도?”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형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처음으로 무겸의 표정에 분명한 웃음이 나타났다.

“이제야 조금 믿음이 가는군.”

바로 그때, 법당 밖에서 짧은 새소리가 들렸다.

무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약속된 신호처럼 보였다.

“누가 오고 있소.”

“제 사람은 아닙니다.”

“내 쪽이겠지.”

멀리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섞여 들었다. 진북후부의 안주인 조씨가 무겸의 별당에 사람을 붙여 놓았다는 이야기는 전생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실이 들킨 모양이었다.

예령이 문 쪽을 돌아보는 순간 등불이 꺼졌다.

그와 동시에 무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예령은 미처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불상 뒤편의 좁은 공간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 움직임은 지나치게 빨랐다.

다리를 크게 다친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감춘 손목

    12화. 감춘 손목다음 날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무겸의 마차가 서씨 상단 앞에 멈췄다.그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예령은 본점 이층의 작은 응접실을 비워 두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저택보다 상단에서 만나는 편이 눈에 덜 띌 것이라 판단했다.그러나 검은 옷을 입은 무겸이 지팡이를 짚고 안으로 들어서자 상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진북후부의 장남이 서씨 상단에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예령과 혼인을 약조한 사내가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에 더 관심이 많은 눈치였다.예령은 창밖을 내려다보다 휘장을 내렸다.“눈에 띄지 않으려 이곳에서 뵙자고 했는데 소용없게 됐군요.”“내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도 상단으로 나오지 않았소?”무겸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그렇다면 그대도 숨길 생각은 없었던 것 같은데.”“피하지 않겠다는 것과 구경거리가 되고 싶다는 건 다른 일입니다.”“곧 익숙해져야 할 것이오.”예령이 차를 따르던 손을 멈췄다.“무엇에 말입니까?”“사람들이 그대와 나를 함께 묶어 이야기하는 것에.”무겸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예령은 곧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둘의 혼인은 서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약조였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당연하다는 듯 두 사람을 한데 묶는 말이 나오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예령은 찻잔을 그에게 밀어 주며 화제를 돌렸다.“확인할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무겸은 차를 마시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예령의 얼굴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예령은 소매 속에 감춰 둔 손을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렸다.“손을 내놓으시오.”“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왼손.”예령의 눈빛이 가늘어졌다.멍은 소매 안쪽에 가려져 있었다. 연화와 아버지, 함께 갔던 호위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어떻게 아셨습니까?”“무엇을 말이오?”“제 손목이 다쳤다는 사실 말입니다.”무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다쳤다고 말한 적은 없소.”예령은 그가 자신을 떠본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무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감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존재하지 않는 상단

    11화. 존재하지 않는 상단최만석이 무천의 처소를 찾은 것은 다음 날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방 안에는 새 거울이 놓여 있었고, 향로에서는 평소보다 짙은 향이 피어올랐다. 최만석은 무천의 손등에 남은 상처를 발견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오랫동안 남의 비밀을 팔아 살아온 사람은 궁금한 것이 있어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찾으셨습니까, 공자님.”최만석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무천은 앉으라는 말도 없이 탁자 위에 은자 주머니를 던졌다.“서씨 상단에 거래를 넣어라.”“물건을 사시려는 겁니까, 파시려는 겁니까?”“어느 쪽이든 상관없다.”최만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렇다면 거래 자체가 목적은 아니시군요.”무천은 대답하지 않았다.최만석이 주머니를 들어 무게를 가늠했다. 상당한 은자가 들어 있었지만, 곧바로 소매에 넣지는 않았다. 돈이 많은 의뢰일수록 뒤에 감춰진 위험도 컸다.“누구를 불러내면 됩니까?”“서예령이다.”“서씨 상단의 아가씨 말씀이십니까?”“그렇다.”“그분을 만나려는 것이라면 직접 서신을 보내시는 편이 빠를 텐데요.”무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그랬다면 너를 부르지 않았겠지.”최만석은 더 묻지 않았다.서예령과 무천의 파혼 이야기는 이미 황도에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무천이 서씨 상단에서 가져간 물건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소문도 들었다.자신을 만나 주지 않는 여인을 거래로 끌어내려는 것이라면, 실패했을 때 모든 책임을 떠안을 사람까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작은 거래로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최만석이 말했다.“서씨 상단은 황도에서도 손에 꼽히는 곳입니다. 비단 몇 필이나 약재 몇 상자로 아가씨가 직접 나오지는 않겠지요.”“그래서 큰 거래를 만들라고 한 거다.”“큰 거래에는 큰돈이 필요합니다.”“얼마면 되지?”무천이 망설임 없이 묻자 최만석의 시선이 달라졌다.“거래가 진짜처럼 보이려면 물건과 창고, 어음이 있어야 합니다. 상단의 인장도 필요하고, 과거에 다른 곳과 거래한 기록까지 있어야 하지요.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스스로 오게 만들어

    10화. 스스로 오게 만들어예령이 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밤이 깊어 있었다.대문 앞에는 등불 여러 개가 밝혀져 있었고, 서문백이 직접 마당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마차가 멈추자마자 그가 계단을 내려왔다.“어찌 이리 늦었느냐?”“병영에서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다친 곳은 없고?”예령은 괜찮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마차에서 내리는 연화의 표정이 먼저 굳었다. 서문백의 시선이 예령의 손목으로 향했다.소매 아래로 검붉은 멍이 드러나 있었다.“이게 어찌 된 일이냐?”예령이 손목을 감추기도 전에 서문백이 다가왔다.“오는 길에 한무천 공자가 마차를 막았습니다.”결국 연화가 먼저 털어놓았다.“아가씨를 억지로 데려가려고 했어요.”서문백의 얼굴이 굳었다.예령은 그를 안으로 모신 뒤 길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무천이 자신을 밤새 붙잡아 두고 소문을 퍼뜨리려 했다는 말까지 듣자 서문백의 손이 떨렸다.“그자가 감히…….”“실패했습니다. 당분간은 다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어찌 벗어났느냐?”예령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누군가 도와주었습니다.”“누구냐?”“저도 모릅니다.”이름도 밝히지 않고 흔적 없이 사라진 사내였다. 무겸이 보낸 사람일 가능성이 가장 컸지만, 확인하지 않은 일을 사실처럼 말할 수는 없었다.서문백은 곧바로 호위를 늘리라고 명했다.“앞으로는 네가 어디를 가든 최소 열 명을 붙이겠다.”“호위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눈에 띕니다.”“오늘 같은 일을 겪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오늘은 제가 경솔했습니다.”예령은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전생의 기억만 믿고 지금의 무천을 지나치게 얕본 것은 사실이었다.자신이 파혼을 요구하면 무천은 서씨 상단의 재물을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무겸과 혼인하겠다는 말이 그의 자존심을 자극한 뒤부터는 행동이 달라졌다.무천은 이제 손익을 따지지 않았다.자신을 되찾는 일에 집착하고 있었다.“앞으로는 혼자 판단하지 않겠습니다.”예령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서문백은 조금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모르는 척

    9화. 모르는 척검은 무복의 사내가 사라진 뒤에도 예령은 한동안 빈 길을 바라보았다.사람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아가씨, 괜찮으세요?”연화가 달려와 예령의 손목을 살폈다. 무천에게 붙잡혔던 자리에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괜찮아.”“그냥 저택으로 돌아가요.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호위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무천의 수하들에게 제압당한 것이 수치스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러나 예령은 돌아갈 수 없었다.무천이 자신을 데려가지 못했으니 조씨는 곧 다른 방법을 쓸 것이다. 진북후에게 파혼서를 전하는 일이 늦어질수록 불리해졌다.“병영으로 간다.”“하지만 아가씨…….”“저들이 다시 돌아오지는 못할 거야.”무천의 얼굴에 떠올랐던 공포는 거짓이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예령은 바닥에 떨어진 비녀를 주워 들었다. 끝에 묻은 피를 닦아 소매 안에 넣은 뒤 마차에 올랐다.길을 다시 출발한 뒤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우연히 지나던 무인이었다면 무천을 쫓아낸 뒤 사례를 요구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을 지켜보던 사람이라면 누구의 명을 받았는지가 문제였다.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하지만 증거는 없었다.예령은 섣불리 결론짓지 않기로 했다.황도 외곽의 병영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뒤였다.병사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귀족가의 여인을 경계했다. 예령이 서씨 상단의 인장을 내보이자 그제야 안으로 들어가 확인했다.잠시 후 체격이 다부진 중년의 사내가 막사에서 나왔다. 왼쪽 눈썹에서 뺨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가 있었다.북방에서 군량을 관리했던 유강이었다.“서 대인의 따님이시오?”“예.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합니다.”유강은 예령과 망가진 호위들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오는 길이 편하지 않았던 모양이군.”“그래도 반드시 전해야 할 것이 있어 왔습니다.”예령은 봉인된 파혼서를 내밀었다.“진북후께 직접 전달해 주십시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흔적도 없이

    8화. 흔적도 없이다음 날 아침, 진북후부에서 파혼서를 돌려보냈다.봉인조차 뜯지 않은 채였다.서문백은 되돌아온 서신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진북후께서 직접 거절하신 것은 아닌 듯하구나.”“조씨 부인이 중간에서 막았겠지요.”조씨에게 이번 파혼은 혼약 하나가 깨지는 일이 아니었다. 예령의 혼수와 서씨 상단의 자금을 모두 잃는 일이었다. 더구나 예령이 무겸과 혼인하면 그 재물이 장남의 힘이 된다.무천을 후계자로 세우려는 조씨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내가 직접 찾아가 보마.”“지금은 만나 주지 않을 겁니다.”“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지 않으냐?”예령은 파혼서를 집어 들었다.“진북후께 이 서신부터 전해야 합니다.”전생에도 조씨는 진북후에게 들어가는 서신을 가려 받았다. 무천에게 불리한 소식은 대부분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북방에서 군량을 관리했던 장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황도 외곽의 병영에 머물고 있으니, 그분을 통하면 서신을 전할 수 있을 겁니다.”“사람을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제가 직접 만나 확답을 받겠습니다.”서문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날 무천이 보인 태도가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예령은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연화와 호위들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날이 저물기 전에 돌아올게요.”한참 망설이던 서문백이 마침내 허락했다.예령은 정오가 되기 전에 저택을 나섰다.마차에는 연화가 함께 탔고, 호위 두 명이 앞뒤를 지켰다. 예령은 파혼서와 무천이 사용한 재물의 내역을 품에 챙겼다.황도를 벗어나자 길은 빠르게 한산해졌다.간간이 짐수레가 지나갈 뿐, 수상한 기척은 없었다.마차가 야트막한 언덕 아래에 이르렀을 때 앞쪽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곧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멈췄다.“밖에 무슨 일이냐?”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예령이 문을 열기도 전에 문짝이 거칠게 젖혀졌다. 낯선 사내들이 서씨 가문의 호위들을 제압하고 있었다.그 뒤로 무천이 다가왔다.“내려.”“길을 막고 무슨 짓입니까?”“너와 조용히 이야

  •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빼앗길 수 없는 것

    7화. 빼앗길 수 없는 것무겸의 말이 사랑채 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다.무천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령이 파혼하겠다고 했을 때도 남아 있던 비웃음이 얼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형님이 예령과 혼인하겠다고요?”“그렇다.”“말도 안 됩니다.”무천은 탁자 위의 혼인 약조문을 집어 들려 했다. 그러나 무겸이 지팡이 끝으로 종이 위를 눌렀다.무천의 손이 멈췄다.“예령은 저와 혼인하기로 한 여자입니다.”“그녀가 그 혼인을 거절했지.”“잠시 화가 나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형님께서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무천은 예령을 돌아보았다.“네가 형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혼인하겠다는 말을 거둬.”여전히 명령하는 말투였다.예령은 무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싫습니다.”“예령아.”“제가 먼저 혼인을 청했습니다.”무천의 눈이 가늘어졌다.“거짓말하지 마.”“폐사에서 한무겸 공자를 만나 혼인 약조문을 건넨 사람도 저입니다.”예령이 밤에 저택을 나갔던 이유를 깨달은 무천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그날 만난 사람이 형님이었어?”“그렇습니다.”“나를 속이고 둘이 몰래 만났다는 말이냐?”“공자께 알릴 이유가 없었습니다.”무천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예령이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은 믿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몰래 무겸을 만났다는 사실은 견디기 어려운 듯했다.“왜 형님이지?”“그 질문에 대답할 의무도 없습니다.”“내가 아니라 형님을 택한 이유를 묻는 거야.”무천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다리를 다쳐 후계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이다. 지금의 형님에게 무엇이 있다고 나를 버리고 그쪽을 택해?”예령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그런 식으로 형님을 깎아내리면 제가 공자께 돌아갈 것 같습니까?”“나는 진북후부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다.”“그래서 저와 혼인하려는 것이겠지요. 서씨 상단의 재물이 있어야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으니까.”“그만해.”“한무겸 공자께서는 제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물었습니다.”예령의 시선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