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율천이 떠난 뒤 온채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그저 묘비 곁에 앉아 말없이 아빠와 엄마를 바라보았다.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두 다리가 저렸다.그녀는 느릿하게 아쉬운 발걸음으로 공원 입구를 향해 걸어가다 산을 오르던 한 무리의 사람들과 스쳐 지나갔다.“온채아?”그중 한 명이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그녀가 방금 걸어 나온 방향을 훑더니 서둘러 쫓아왔다. “온채아 맞지?”온채아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은 여자가 서 있었다.그녀의 고모였다.당시 부모님이 사망하신 후 집안에 남은 친척은 이 고모뿐이었지만 고모는 온채아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온채아는 복지시설로 보내졌다.온채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라도 집에 외부인이 한 명 더 느는 것을 반기지는 않았을 테니까.온미연은 온채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더욱 확신에 찼다. “오빠랑 새언니 보러 온 거니?”온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불렀다. “고모.”예전에도 제사를 지내러 왔을 때 온미연과 한두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온미연은 퉁퉁 부은 온채아의 눈을 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약을 개발했다는 소식은 뉴스에서 봤어. 정말 대단하더구나.”온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너무나 남 같은 사이라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네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되었으니...”온미연은 말을 꺼내려다 말고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마음을 굳게 먹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다...”온채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사실은...”온미연은 묘비 쪽을 한번 바라보고 깊은 숨을 들이켰다. 이제는 사실대로 말해줘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네가 훌륭하게 자랐으니 하는 말인데 네 친부모를 한번 찾아보는 게 어떻겠니?”말을 마친 온미연은 홀가분한 표정이었지만 온채아는 날벼락을 맞은 듯 멍해졌다.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친부모를 찾으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넌 우리 온씨 집안
그 말을 들은 온채아는 멍해졌다.그 일당이 감옥에 들어간 것이 20년 전이고 박시훈이 출국한 것도 20년 전이었다. 박시훈은 입양되었고 불과 몇 년 전에야 DK 제약을 물려받았다.온채아는 중요한 정보를 찾아내기 위해 머릿속을 정리해 보았다. “DK 제약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인가요?”“똑똑하군요.”하희민은 그녀가 그 짧은 몇 마디만으로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자 감탄했다. “어머니께서 해성에 잠시 다녀오셔야 해서 치료는 잠시 미뤄야 할 것 같아요.”온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모님께서 얼마 동안 가 계시나요? 치료 효과가 막 나타나기 시작한 참이라 될수록 너무 오래 끊기지 않는 게 좋아요.”하희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일주일 정도입니다. 할아버지 생신을 쇠고 바로 돌아오실 겁니다.”“알겠어요”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니 큰 영향은 없을 터였다.온채아도 해성에 다녀올 참이었다. 며칠 뒤면 부모님의 기일이었기 때문이다.저녁에 집에 돌아온 정다슬은 온채아가 해성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 이마를 탁 쳤다. “내가 왜 까맣게 잊고 있었지? 며칠만 기다려주면 나도 일 끝내고 같이 갈 수 있어.”법무법인에서 큰 사건을 하나 맡긴 바람에 정다슬은 당분간 몸을 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온채아는 웃으며 말했다. “나 혼자 다녀와도 돼.”딱히 다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빠 엄마가 보고 싶었을 뿐이다.그리고 뱃속의 아이에게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보여주고 싶었다.기일 당일, 온채아는 이른 아침 경원을 출발해 해성으로 향했다.열사 공원에 도착했다. 부모님의 묘비 앞에는 이미 데이지와 해바라기 꽃다발 몇 뭉치가 놓여 있었다.온채아는 원래 슬퍼하지 않으려 했지만 묘비에 새겨진 부모님의 이름을 본 순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아빠, 엄마...”그녀는 천천히 몸을 굽히고 앉아 묘비 위에 있지도 않은 먼지를 맨손으로 닦아냈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려 했지만 눈물이 멈
약이 순조롭게 출시되자 온채아의 진료실은 환자들로 가득했다. 다음 날 온채아가 한의원에 도착했을 때 주차장에는 주차할 자리가 없었다. 한의원 주변을 몇 바퀴나 돌았지만 불법 주차할 공간조차 찾지 못했다.주차 자리를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는데 강태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온채아는 초조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오늘 한의원에 무슨 일 있어요? 주차할 곳이 하나도 없네요.”그녀의 환자들은 일찍부터 대기 번호가 불리는 것에 익숙했다. 지금쯤 이미 애를 태우는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강태무는 난처해하며 말했다.“전부 네 환자들이야. 이른 아침부터 한의원이 꽉 찼어. 간호사들이 온라인 예약을 해야 한다고 일일이 설명하고 있는 중이야.”강태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약이 출시되어 온채아의 명성이 자자해지면 한의원을 찾는 환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한의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른 진료실 간호사들까지 임시로 몇 명이나 배정되어 온채아의 진료를 돕게 할 정도였다.의사 생활을 수년간 해온 온채아는 환자들의 간절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병에 걸린 이들 중 하루빨리 낫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온채아는 자기 몸 상태도 잘 알고 있었다. 임신 중이라 무리하게 에너지를 소모해서는 안 되었다.그녀가 망설이고 있을 때 강태무가 말했다. “차를 한의원 입구에 세워둬. 사람을 보내서 주차를 도와줄게. 넌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진료실로 올라와.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강태무는 그가 부탁하면 온채아가 조금 힘들더라도 더 많은 환자를 돌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최근 온채아의 얼굴 살이 부쩍 빠지고 기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 것을 느꼈기에 그는 한의원 일보다는 그녀의 건강 우선으로 생각했다.온채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네. 알겠어요.”임신 중이 아니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료를 봐서라도 이 상황을 해결했겠지만 지금은 아이를 걸고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두 마디에 민은하는 할 말을 잃고 멍해졌다. 차 안에 있던 심서정이 민은하를 발견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차 문손잡이를 부여잡고 창문을 두드려 댔다.“어머니, 어머니! 율천이가 아이를 지우러 가재요!”악에 받친 심서정의 외침이 민은하의 귀에 또박또박 박혔다. 민은하는 순식간에 얼굴색이 변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율천을 바라보았다. “배 속의 아이가 이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나 하는 소리야? 낙태라니! 율천아, 네 자식이야!”“내 아이가 맞는지부터가 의문이죠.”주율천은 차갑게 대꾸하고는 더는 말을 섞기 싫다는 듯 운전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사이드브레이크를 풀고 가속 페달을 밟기까지 모든 행동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그는 오늘 반드시 심서정을 데려가 아이를 지우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율천아!”심서정은 공포에 질려 처참하게 울부짖었다. “안 돼! 내가 잘못했어. 정말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아이만은 살려줘.”주율천은 단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 심서정의 입에서 진실한 말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거짓말투성이였고 그 버릇은 죽어도 고치지 못할 것이다.차가 마당을 빠져나가려 하자 다급해진 민은하가 차 앞으로 달려들어 길을 막아섰다. 주율천이 거칠게 급브레이크를 밟았다.민은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율천아, 네가 그동안 뭘 하든 나와 네 할머니는 널 지지해 왔어. 하지만 우리 주씨 가문의 핏줄이 걸린 문제야. 나뿐만 아니라 네 할머니도 절대 동의 안 하실 거야.”“기어이 아이를 없애야겠다면... 나를 먼저 치고 지나가.”자손이 귀하지 않은 집안이라면 모를까 주씨 가문은 다른 명문가에 비해 유독 자식을 귀하게 여겼다. 주씨 가문의 핏줄이기만 하다면 민은하는 누구 배에서 나오든 상관없었다. 정 안 되면 아이만 남기고 어미는 내치면 그만이었다. 재벌가에서 사생아 한둘쯤 있는 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으니까.주율천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그는
주율천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차가운 눈빛으로 심서정을 노려보았다.“아직 안 지웠어?”위협적이고 단호한 목소리였다.심서정은 그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황급히 그릇을 내려놓고 눈시울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도저히 아이를 보낼 수가 없어서...”“병원에 가려고 했어. 그런데 병원 입구에 서니 차마 마음이 독해지지가 않더라고.”“우리 예전에는 정말 좋았잖아. 제발 아이만은 낳게 해주면 안 될까? 부탁이야.”그녀는 목소리까지 파르르 떨었다. 이 아이마저 없어진다면 정말 살아남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주율천이 콧방귀를 뀌었다.“보낼 수가 없다고? 아이를 못 보내는 거야 아니면 네 목숨줄을 못 놓는 거야?”“당연히 우리 아이지!”심서정은 손가락을 떨며 주율천의 소매를 붙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생명이잖아. 아이는 죄가 없어.”“그래. 아이는 죄가 없지.”주율천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며 혐오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넌 죄가 크잖아. 너 같은 엄마를 둔 아이가 너무 불쌍해.”“네가 결단을 못 내리겠다면 내가 도와주지.”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마치고는 대꾸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녀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심서정은 주율천이 본가까지 쫓아와 자신을 낙태시키려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울부짖었다.“싫어! 제발 부탁이야. 네 아이잖아! 제발 아이한테 모질게 굴지 마.”주율천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녀를 집 밖으로 끌어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내 아이는 너처럼 독한 여자의 배에서 나오지 않아.”“내가 독하다고?”심서정은 갑자기 자극을 받은 듯 악에 받쳐 따져 물었다.“그럼 누가 안 독한데? 누구 배에서 네 아이가 나왔으면 좋겠어? 온채아?”“온채아가 나보다 나은 게 뭔데! 정신 좀 차려! 온채아는 나보다 내숭이 훨씬 심하다고!”그렇지 않고서야 심서정이 온채아에게 이렇게 당할 리가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처참하게.온채아가 처음부터 구
“난 이제 엄마가 없어.”어린 온채아는 울음이 터질 것 같은지 입술을 움찔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온채아는 성유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뛰어가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는 아빠랑 같이 하늘의 별이 됐어. 매일매일 채아를 지켜보고 계신대.”“오빠네 엄마 아빠도 분명 오빠를 지켜보고 계실 거야.”온채아는 떠나기 전 남은 사탕 한 알마저 성유준의 손에 쥐여주었다. 성유준이 물었다. “너 먹을 사탕은 있어?”“없어.”온채아는 고개를 저으며 조그만 머리를 치켜들고 말했다. “하지만 난 이제 필요 없어.”성유준은 나중에 집사들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온채아에게 사탕은 그 무엇보다 절실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사탕이 필요했기에 유통기한이 다 되도록 아까워서 먹지도 못하고 숨겨두었다는 사실을 말이다.그 뒤로 성유준은 그녀에게 엄청난 양의 단것을 사다 주면서 아침저녁으로 양치질을 하는지 철저히 감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충치는 막을 수 없었다. 열 살 무렵, 온채아가 처음 충치 치료를 받으러 갔을 때도 성유준이 동행했다. 자지러지게 울면서도 그녀는 약속을 강조하는 걸 잊지 않았다. “약속했어. 치료 끝나고 집에 가면 케이크 계속 먹게 해준다고!”성유준은 옛정에 연연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온채아와의 과거는 심장에 뿌리를 내린 듯 해마다 몇 번이고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를 향한 그리움은 더해갔고 그녀가 미련 없이 주율천에게 시집가 버린 사실을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유준은 분명 가장 빠른 속도로 모든 일을 해결했는데 아주 조금 늦어버렸다. 그러니 어찌 미련이 남지 않겠는가.‘단 한 번도 남의 편에 서 본 적이 없어.’온채아의 귀에는 그저 비꼬는 듯한 말로 들렸다. 온채아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 편을 드는 방식은 뭔데?”“나를 버리는 거? 아니면 오늘처럼 수모를 그냥 참으라고 하는 거?”그들 사이는 이미 어릴 적 그 시절이 아니었다. 성유준이 무슨 말을 하든 온채아가 쉽게 믿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