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시설팀 사무실은 이 시간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바리와 무장승이 도착하자, 안경을 코끝까지 내려 쓴 중년 남자가 서류를 흔들며 다가왔다.
"아이고, 두 분 오셨네요. 급하게 불러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감사를 앞두고 있는데, 지하 창고 정리가 안 끝나서요."
"감사요? 이 밤중에 감사가 있어요?"
"명부 관리국은 원래 새벽에 감사 도는 게 규정이라서요. 자, 사정은 이렇습니다."
시설팀장은 두꺼운 서류철을 넘기며 설명했다.
"지하 3층 창고에 '미처리 인연 기록물'이라고, 오래전부터 정리가 안 된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원래는 정직원이 처리해야 하는데, 인력이 부족해서요. 마침 두 분이 2관문 대상자시니까, 이번 기회에 정리하시면서 관문 심사도 겸하시면 딱이겠다 싶어서."
"저희가요? 이 밤중에 창고 정리를요?"
"네, 죄송하지만 오늘 안에 끝내야 감사에 통과해요. 두 분 힘 좀 써주세요."
바리는 무장승을 슬쩍 쳐다봤다.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위치 안내해주시오."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바리는 팔짱을 낀 채 투덜거렸다.
"이거 완전 야근 뺑뺑이잖아요. 죽어서도 야근을 해야 되나."
"불만이오?"
"당연히 불만이죠. 근데 뭐, 규정이라니까 어쩌겠어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쳤다. 지하 3층은 조명도 어둡고, 벽에는 곰팡이 자국까지 희미하게 보였다. 복도를 따라 한참 걸어 들어가자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다. 문을 열자 먼지 쌓인 서류함이 천장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창고가 펼쳐졌다.
"...이걸 오늘 안에 다 하라고요?"
"불평해도 상황은 안 바뀌오. 시작합시다."
두 사람은 각자 서류함을 하나씩 맡아 정리를 시작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낡은 서류들을 하나씩 꺼내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처음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리가 특유의 수다를 시작했다.
"근데 이 창고, 진짜 오래돼 보여요. 서류 날짜 보니까 몇백 년 전 것도 있는데요?"
"명부 관리국 역사가 그만큼 길다는 뜻이오."
"팀장님도 500년째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여기 서류 중에 팀장님 게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소."
"어? 그럼 한번 찾아볼까요? 팀장님 젊었을 때 사진 같은 거 있으면 진짜 웃길 것 같은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시오."
바리는 킥킥 웃으며 서류함을 뒤적였다. 먼지가 콜록콜록 날리는 와중에도 은근히 재밌었다. 무장승과 단둘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 뭔가를 하는 게 처음이라 그런지, 어색하면서도 묘하게 편안했다.
"팀장님은 여기서 500년 동안 뭐 하셨어요? 계속 이 일만 하신 거예요?"
"...그렇소."
"심심하지 않으셨어요? 500년이면 진짜 긴 시간인데."
무장승은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잠깐 멈췄다.
"...심심할 틈이 없었소. 매일이 똑같았으니까."
그 말투에서 뭔가 씁쓸함이 묻어났다. 바리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괜히 분위기를 풀어보려 농담을 던졌다.
"에이, 그래도 재밌는 일 하나쯤은 있었을 거 아니에요. 500년이나 사셨는데."
"...딱히 없었소."
"진짜요? 그럼 오늘부터라도 재밌는 일 하나 만들어드릴까요? 저랑 이렇게 야근하는 것도 나름 새로운 경험 아니에요?"
무장승은 잠깐 바리를 바라봤다. 어둑한 조명 아래서 그 시선이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그런 것 같기도 하오."
바리는 그 말에 왠지 마음이 간질거렸다. 괜히 민망해서 서류함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문득 낡은 서류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겉표지가 유난히 색이 바래고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어? 이거 뭐지."
바리는 서류철을 꺼내 펼쳐봤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훅 풍겼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바리는 숨이 턱 막혔다.
종이 위에는 두 개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바리 — 무장승
붓글씨로 적힌 듯한 고풍스러운 글씨체였다. 날짜는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최근 것은 아니었다. 종이 자체가 누렇게 바래고 삭아 있는 게, 몇백 년은 된 것처럼 보였다.
"팀장님, 이거 좀 보세요. 이거 뭐예요?"
바리가 서류를 들고 다가가자, 무장승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서류를 낚아채듯 받아 들고 빠르게 훑어봤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뭔데요, 이거? 제 이름이랑 팀장님 이름이 왜 같이 적혀 있어요? 이거 옛날 서류 같은데, 저희가 오늘 처음 만났잖아요."
"...나도 모르오."
"거짓말. 지금 표정이 완전 아시는 표정인데요."
무장승은 서류를 손에 쥔 채 한참을 말이 없었다. 뭔가 복잡한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바리는 그 옆에서 조바심이 났다.
"팀장님, 진짜 뭔가 아시는 거죠? 손등에 떴던 그 문양이랑 이것도 관련 있는 거예요?"
"...일단 이건 확인이 필요하오. 잠깐 기다리시오."
무장승이 서류를 챙겨 조명 스위치 쪽으로 걸어가려는 순간—
탁, 소리와 함께 창고 안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어? 뭐야, 정전이에요?"
칠흑 같은 어둠이 순식간에 창고를 뒤덮었다. 바리는 순간 방향 감각을 잃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팀장님? 팀장님 어디 계세요?"
대답이 없었다. 바리는 덜컥 겁이 났다. 이 낯선 지하 창고에서, 혼자 어둠 속에 남겨진 것 같은 공포가 확 밀려왔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팀장님!"
그 순간, 누군가 바리의 팔을 확 붙잡았다. 놀란 바리가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낮게 울렸다.
"...나요. 놀라지 마시오."
"팀장님?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신 거예요, 놀랐잖아요!"
"...정전이 났으니 위험하오. 가만히 있으시오."
무장승의 손이 바리의 팔을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숨소리가 평소보다 거칠게 들렸다. 바리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무서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헷갈렸다.
"저기, 팀장님. 손 좀 놔주시면 안 돼요? 좀 아픈데요."
"...안 되오."
"왜요?"
"...당신을 놓치면 안 되니까."
그 말에 바리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어둠 속이라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만큼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평소의 딱딱하고 규정에 얽매인 말투가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장승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바리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살짝 더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어둠 속에서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바리는 그의 숨결이 코앞에서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팀장님..."
"...이 손, 놓지 마시오."
낮게 흘러나온 그 말이, 어둠 속에서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바리의 귓가에 박혔다.
다음 날 아침, 바리는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정확히는 잠을 설쳤다는 표현이 맞았다. 어젯밤 어둠 속에서 들었던 그 말이 밤새 머릿속을 맴돌았다. "당신까지 잃고 싶지 않소." 그 한마디가 계속 귓가에서 재생됐다. 잃고 싶지 않다니. 잃는다는 건 원래 있던 걸 뺏긴다는 뜻인데,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서 대체 뭘 잃는다는 걸까.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결국 뜬눈으로 창밖이 밝아오는 걸 지켜봤다. 저승에도 아침이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뿌연 회색빛이었지만, 조금씩 밝기가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승의 해와는 다른, 뭔가 흐릿하고 은은한 빛이었다.바리는 몸을 뒤척이다 슬쩍 소파 쪽을 바라봤다. 무장승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정확히는, 잠을 잔 흔적이 아예 없었다. 이불은 개켜진 그대로였고, 접힌 각도까지 딱 맞춰져 있어서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웠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등을 곧게 편 채로, 미동도 없이.바리는 이불 속에서 눈만 빼꼼 내밀고 그 뒷모습을 한참 관찰했다. 저 남자, 정말 잠도 안 자나 싶었다. 500년을 살았다는 사람이니 밤새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은 걸까. 아니면 어제 그 서류 때문에 정말 한숨도 못 잔 걸까.바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살폈다. 어제 창고에서 챙겨온 그 낡은 서류철이었다. 무장승은 그 종이를 손에 쥔 채,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오래도록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표정이 없다기보다는,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팀장님.""...일어났소?"무장승은 화들짝 놀란 듯 서류를 서랍에 밀어 넣었다. 그 동작이 너무 급해서 오히려 더 수상해 보였다."팀장님, 얼굴이 왜 그러세요? 밤새 안 주무신 거예요?""...괜찮소.""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눈 밑에 그거, 다크서클 아니에요? 저승 관리도 다크서클 생겨요?"무장승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넥타이를 고쳐 매는 손짓이 평소보다 어수선했다. 바리는 그 모습을 보
어둠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전기가 나간 지 얼마나 지났는지 감도 안 잡혔다. 시간이 어둠 속에서는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바리는 숨을 죽인 채, 자기 팔을 붙잡고 있는 손의 온도를 느끼고 있었다. 차가운 줄만 알았던 손끝이, 지금은 이상하게 뜨거웠다."...팀장님.""...말하시오.""이거 정전, 얼마나 갈까요?""...모르오. 시설팀에서 곧 처리할 거요."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리는 그 목소리의 결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사무실에서 듣던 딱딱한 하오체와는 뭔가 달랐다. 더 조심스럽고, 더 흔들리는."팀장님, 손 좀 놓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이제 안 놀랐어요.""....""팀장님?"대답이 없었다. 손도 놓지 않았다. 바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눈이 조금씩 어둠에 적응하면서, 희미하게나마 무장승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시선을 바리에게 고정한 채로, 뭔가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아까 그 서류."무장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 그 서류가 왜요?""...예전에 본 적 있소."바리는 순간 숨을 멈췄다."본 적 있다고요? 언제요?""...오래전이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 안 나오. 그냥, 어딘가에서 스쳐 지나가듯 본 것 같소.""근데 왜 방금 전까진 모른다고 하셨어요?""...확신이 없었소. 지금도 확신은 없소."무장승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흔들림이 묻어났다. 500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감정을 겉으로 드러낸 적 없다는 사람이, 지금 이 어둠 속에서만큼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팀장님, 저 진짜 무서운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말하시오.""저희, 원래 알던 사이였어요? 이번 생 말고, 그전에."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침묵이 어둠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바리는 그 침묵이 대답이라는 걸 직감했다."...그럴 수도 있소.""...그럴 수도 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명부 관리국 기록은 완벽하
시설팀 사무실은 이 시간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바리와 무장승이 도착하자, 안경을 코끝까지 내려 쓴 중년 남자가 서류를 흔들며 다가왔다."아이고, 두 분 오셨네요. 급하게 불러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감사를 앞두고 있는데, 지하 창고 정리가 안 끝나서요.""감사요? 이 밤중에 감사가 있어요?""명부 관리국은 원래 새벽에 감사 도는 게 규정이라서요. 자, 사정은 이렇습니다."시설팀장은 두꺼운 서류철을 넘기며 설명했다."지하 3층 창고에 '미처리 인연 기록물'이라고, 오래전부터 정리가 안 된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원래는 정직원이 처리해야 하는데, 인력이 부족해서요. 마침 두 분이 2관문 대상자시니까, 이번 기회에 정리하시면서 관문 심사도 겸하시면 딱이겠다 싶어서.""저희가요? 이 밤중에 창고 정리를요?""네, 죄송하지만 오늘 안에 끝내야 감사에 통과해요. 두 분 힘 좀 써주세요."바리는 무장승을 슬쩍 쳐다봤다.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소. 위치 안내해주시오."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바리는 팔짱을 낀 채 투덜거렸다."이거 완전 야근 뺑뺑이잖아요. 죽어서도 야근을 해야 되나.""불만이오?""당연히 불만이죠. 근데 뭐, 규정이라니까 어쩌겠어요."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쳤다. 지하 3층은 조명도 어둡고, 벽에는 곰팡이 자국까지 희미하게 보였다. 복도를 따라 한참 걸어 들어가자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다. 문을 열자 먼지 쌓인 서류함이 천장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창고가 펼쳐졌다."...이걸 오늘 안에 다 하라고요?""불평해도 상황은 안 바뀌오. 시작합시다."두 사람은 각자 서류함을 하나씩 맡아 정리를 시작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낡은 서류들을 하나씩 꺼내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처음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리가 특유의 수다를 시작했다."근데 이 창고, 진짜 오래돼 보여요. 서류 날짜 보니까 몇백 년 전 것도 있는데요?""명부 관리국 역
퇴근하고 관사로 돌아오는 길, 바리는 내내 말이 없었다.원래 같으면 오늘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떠들며 무장승을 놀렸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입이 안 떨어졌다. 낮에 들었던 얘기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500년 만의 최연소 팀장 커플. 사내에서 거의 기정사실처럼 돌았다는 정혼 얘기. 그리고 갑자기 쏙 들어갔다는 그 이유 모를 파혼.'내가 왜 이게 신경 쓰이는 거야.'바리는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자꾸만 낮에 봤던 길례의 미소가 떠올랐다. 위아래로 훑어보던 시선도, "이번 임시직은 좀 특이하네요"라던 그 의미심장한 말투도.관사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도 바리는 평소와 다르게 조용했다.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무장승은 그 침묵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넥타이를 풀면서 슬쩍 바리 쪽을 살폈다."...오늘 무슨 일 있었소?""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오.""원래 조용한 사람이거든요, 저."무장승은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딱 알아챈 눈치였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바리가 조용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는 잠깐 서서 바리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아까 인사팀장 때문이오?"정곡을 찔린 바리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다 오히려 발끈했다."아니거든요? 왜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아까부터 계속 표정이 안 좋았소.""제 표정이 어때서요. 저 지금 완전 평소랑 똑같은데요."무장승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바리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너무 정확하게 속을 꿰뚫는 것 같아서, 바리는 오히려 더 방어적으로 나갔다."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두 분이 무슨 사이였는지.""...업무 외 사항이오.""거봐요, 또 그 소리. 팀장님은 맨날 그러시더라. 뭐 좀 물어보면 업무 외 사항, 규정 위반, 이런 말로 다 피해가시잖아요.""...알아서 뭐 하려고 그러오.""그냥 궁금해서요! 서류상 부부라도 저희 관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만약
"오랜만이네요, 장승 씨."그 한마디에 사무실 전체가 숨을 죽였다. 바리는 서류를 보는 척하면서도 곁눈질로 두 사람을 살폈다. 무장승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평소보다 동작이 딱딱하다는 걸, 바리는 알아챘다."인사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목소리마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존댓말을 쓰는 것도 처음 들었다. 바리는 그동안 무장승이 팀원들에게도, 자기한테도 하오체를 쓰는 걸 당연하게 여겼는데, 저 여자 앞에서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별건 아니고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임시직 인사평가 건 때문에 왔어요."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슬쩍 바리 쪽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바리는 저도 모르게 등을 곧게 폈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뭔가 재는 듯한 느낌이 확실하게 느껴졌다."이분이시구나. 얘기 많이 들었어요.""아, 네. 바리라고 합니다."바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그런 바리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는데, 그 미소가 이상하게 냉기를 품고 있었다."인사팀장 길례예요. 반가워요.""네, 반갑습니다.""임시직 채용 규정상 배우자 보증인 건에 대해선 제가 서류로 검토하긴 했는데, 이렇게 실물로 보니까 느낌이 또 다르네요."느낌이 다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바리는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칭찬인지 아닌지 애매한 화법이었다. 길례는 다시 무장승 쪽으로 몸을 돌렸다."장승 씨,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업무적으로.""...여기서 하시죠.""아니요, 잠깐이면 돼요. 자리 좀 옮기죠."길례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회의실 쪽으로 걸어갔다. 무장승은 잠깐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결국 뒤따라갔다. 그 뒷모습을 바리는 물끄러미 지켜봤다. 왜인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두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덕순이 바리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바리 씨, 저분 누군지 알아요?""인사팀장이라고 하셨잖아요.""그거 말고요. 저 두 분, 예전에
점심시간, 바리는 식판도 안 들고 곧장 재무팀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손등이 자꾸 신경 쓰여서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오해영 대리님, 저 아까 그거요."오해영 대리는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손사래를 쳤다."아, 그 문양 얘기시죠? 별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근데 아까 표정이 별거 아닌 표정이 아니셨는데요. 저도 눈치 있거든요.""제가요? 아닌데요, 저 원래 표정이 좀 그래요. 놀라면 다 저래요."오해영 대리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게 너무 티가 났다. 손가락이 마우스를 클릭하는 척하면서 실은 계속 같은 자리만 클릭하고 있었다. 바리는 책상에 손을 짚고 몸을 살짝 기울였다."대리님, 저 지금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제 손등에서 빛난 거, 그거 뭐예요? 저 그거 보고 나서부터 계속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손에 안 잡혀요.""...그건 제 담당 구역이 아니라서요. 죄송한데 저 지금 마감이라.""마감이요? 아까는 여유 있어 보이셨는데.""갑자기 바빠졌어요. 재무팀이 원래 이래요, 바리 씨. 죄송해요."오해영 대리는 서둘러 모니터 뒤로 몸을 숨기듯 앉았다. 심지어 의자까지 살짝 돌려서 시선을 아예 차단해버렸다. 바리는 더 캐물으려다가, 어차피 여기서는 답이 안 나올 거란 걸 직감하고 발걸음을 돌렸다.'담당 구역이 아니다? 그럼 대체 누구 담당인데. 이렇게까지 피할 일이야?'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마침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고 있던 덕순을 발견하고 바리가 다가갔다. 덕순이라면 뭐든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사내 정보통이라고 자기 입으로 그랬으니까."덕순 씨,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네, 뭐든지요! 저 모르는 거 없어요, 여기서 5년 넘게 굴렀거든요.""제 손등에 떴던 그 문양 있잖아요. 그게 뭔지 알아요?"덕순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커피 스틱을 뜯다 말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반응이 오해영 대리보다 더 컸다."어, 그, 그게...""덕순 씨도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인데요? 표정이 딱 그래요.""아니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