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10화
지빌라는 당혹스러운 듯 고개를 떨궜다. 그의 심기를 짐작한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연기였다.
그녀는 황위를 원하지 않는다는 제스처였고, 이황자와 그 사이의 싸움에 끼지 않겠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대공과의 결혼이 오롯이 그녀의 ‘사적인 욕망’ 때문이라는 그림을 내세워야 했다.
“내가 먼저 어머니께 청한 일이야. 오랫동안 대공을 사모해왔거든. 그가 성인식을 치르며 처음 수도에 왔을 때부터… 오래전부터.”
“그래서 직접 나서서, 어머니와 귀족의회를 움직여 대공을 압박했다?”
“그 정도로 하지 않으면… 알잖아. 그의 마음은 얻기 어렵다는 걸.”
지빌라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레나토에게 황후의 정원을 함께 거닐자고 했다. 한창 물오른 꽃들이 정원 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레나토의 시선은 꽃을 스쳐도 아무 감흥 없이 차갑고 무심하기만 했다.
오히려 긴 소매에 가려진 누이의 손끝에…… 치맛자락 사이로 부드럽게 옮겨지는 걸음에…… 자꾸만 시선이 머물렀다.
“어릴 땐, 누이가 내 우상이었지.”
“우리가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누이라는 말은 좀 이상해.”
“왜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지?”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지빌라를 채근하듯 응시했다. 지빌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 이야기. 이 대화는 몇 번을 반복하는 걸까.
“네가 더 잘할 거라 생각했어. 나는… 자질이 없다는 걸 일찍 깨달았거든.”
“거짓말.”
회귀 전, 지빌라는 레나토의 내면에 이토록 깊은 욕망이 있을 줄 몰랐다. 그녀조차도 정해진 길을 가기에 급급했던 시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제 패인이었다.
일황자가 원하는 것이 단지 황위였을까.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패망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 전체를, 그 운명까지도 그의 손아귀에 쥐고 망치려는 그 폭력성에 지금도 숨이 막혔다.
그녀는 너무 뒤늦게야 그것을 알아챘다는 것이 뼈아팠다. 그가 황제의 재목이 아니듯 황후의 집착도 그 못지않게 위험했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끝내야만 했다.
‘이번만큼은… 어림없어, 레나토.’
지빌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짐짓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거짓말? 훗. 너도 참…….”
“나는 누이의 능력을 똑똑히 봤어. 그런데 갑자기 달라지더군. 너무 갑작스럽게.”
“그건 네 오해야. 내가 뭐든 잘하길 바랐던 시절이 있었을 뿐이야.”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 눈동자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들은 걸음을 옮겨 정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때, 누군가 레나토를 찾았다.
지빌라는 멈춰 레나토를 찾아온 이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 조프루아가 있었다. 서부 변경백이자, 회귀 전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남자.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린 채, 인사도 없이, 조용히 레나토와 함께 사라졌다.
지빌라는 홀로 굳은 채 서 있었다. 회귀 후 줄곧 반복되는 일이 있다면,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을 저 혼자만 기억하며 되새기는 것이었다. 홀가분하면서도 허망한 그 기분이, 그녀를 회귀자만이 아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곤 했다.
“황녀 전하… 괜찮으세요?”
에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어… 괜찮아. 정원을 조금 더 돌아보다 가야겠어.”
회귀 후 처음 마주한 조프루아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잘 지냈나요, 조프루아…….’
레나토는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그 과정에서 지빌라는 황태녀 자리에서 끌려 내려왔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내린 명령은, 지빌라를 서부 변경백 조프루아 몸므와 혼인시킨 것이었다.
그것도 강제로.
그녀로서는 차마 견디기 힘든 수모의 연속이었다. 제국의 패망 후 더한 굴욕과 수치가 기다리고 있을 줄 그때로서는 더욱 알 길이 없었지만.
다만, 지빌라는 조프루아에게 깊은 원한은 없었다. 그저 그는 레나토의 사람이었고, 그 역시 억울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에르나… 오늘은 좀 지치는 날이네. 오후 일정은 모두 취소해줘.”
“네, 전하.”
***
황녀의 약혼은 순조롭게 준비되었다. 축복연회 날, 황녀의 약혼식을 공표할 예정이었다.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호화로운 드레스를 준비했다. 통상 몇 달은 걸릴 의상이었지만, 회귀한 덕분에 이미 1년 전부터 제작이 시작되었다.
황녀의 사치는, 그 절정에 달해 있었다. 이토록 많은 결격 사유를 드러냈는데도, 레나토는 여전히 그녀를 의심했다.
‘그것도 병이겠지.’
회귀 전, 지빌라는 바로 이 축복연회에서 황태녀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그날, 일황자는 몰래 용병왕 카이사르를 초대해 그를 공개적으로 모욕했다. 그것이 전쟁의 도화선이었다.
지빌라는 그 일이 전쟁의 시발점이었단 걸, 전리품처럼 끌려가 재혼하고, 삶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나를 모욕하지만 않았더라면, 전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당신이 이렇게… 죽게 되지도. …지빌라, 나를 원망해.’
석 달 뒤, 한여름이 오면 왕국들의 사신이 하나둘 도착할 것이다. 축복연회를 위해서.
123화에르나는 확인하듯 물었다.“그럼 레오노라는?”지빌라는 잠시 침실 쪽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의 기척이 아니라, 그곳에 이어져 있던 시간들을 가늠하듯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늦은 오후의 차와 목욕은 그대로 두되, 준비와 확인은 네가 맡아.”완전한 배제는 아니었다. 지빌라는 단지 통로를 바꾸었다. 같은 결정이, 더 많은 눈과 손을 거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에르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던 어긋남의 정체를 또렷이 붙잡았다. 레오노라를 곁에서 지켜보며 느꼈던, 말로 설명할 수 없던 미세한 불균형.그리고 지금 이렇게 정확히 선을 긋는 대공비의 태도는, 그 감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그녀는 묻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책임이 생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알겠습니다, 전하.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지빌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것으로 충분했다.***프레데리크는 아침부터 정무에 묶여 있었다.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보고서를 넘기며, 스스로 평소보다 훨씬 느리게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문장 하나를 읽고도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다만 집중이 잘게 갈라지고 있었다. 이 시간마저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차라리 갑주를 입고, 검을 쥐는 편이 나았다.
122화다음 날 아침.엘제는 부엌으로 이어진 회랑에서 다른 하녀들과 함께 물을 나르다, 무심코 입을 열었다.“어제 전하 목욕에 쓰인 향이… 황실에서 쓰는 건지, 은은하고 잔향이 오래 남아서—”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녀장의 걸음이 멈췄다.“…향이라고?”그제야 엘제는 제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아, 아주 소량이었어요. 전하께서도 아무 말씀 없으셨고요. 제가 맡기엔 그냥—”시녀장은 더 묻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엘제를 물린 뒤, 곧바로 대공비의 처소로 향했다.지빌라는 차를 마시다 말고 시녀장을 올려다보았다.“실수가 있었던 듯합니다, 전하.”그 말에는 꾸짖음도 과장도 없었다.“합방 전날부터 합방일까지, 북부에서는 향유나 목욕제를 쓰지 않는 관습이 있습니다. 어제 목욕에 소량의 향이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잠깐의 침묵.지빌라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아주 짧게 눈을 깜빡였다.“…그렇군.”시녀장은 곧바로 덧붙였다.“의식이나 절차를 무를 정도는 아닙니다. 대공 전하께 보고할 사안도 아니고요. 다만—&rdq
121화홀 안에 있던 랑베르와 피엘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는 표정이었다. 각자가 추천한 인물 중에서 선발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그들은 말없이 만족을 나눴다.프레데리크는 지빌라를 향해 몸을 돌렸다.“사람을 보는 눈은 당신이 더 낫고,”그는 목소리를 낮췄다.“위험을 대비하는 건, 내 몫이지.”지빌라는 그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 선발된 두 기사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그럼 앞으로는—둘 다 제 곁에 서게 되겠군요.”노아르가 무릎을 꿇었다. 그 뒤로 프레데리크가 추가 선발한 기사들이 일제히 뒤따랐다.“목숨을 걸고 모시겠습니다, 전하.”그 선언과 함께, 대공성에 스며들어 있던 막연한 긴장은 비로소 형태를 갖추었다.질서였다.누군가의 의도와 계산 위에 놓인, 단단한 질서.그 변화를 기꺼이 반길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레오노라는 홀을 떠난 뒤에도 한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대공비의 호위가 이전보다 훨씬 견고해졌다는 사실이, 서서히 몸으로 와닿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조심해야 했다. 말 한마디, 시선 하나, 기회 하나까지.드레스 안쪽,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깊숙한 곳에 두 가지가 숨겨져 있었다. 하나는 조금씩 대공비의 차에 섞어 온 불임약.
120화프레데리크는 고개를 들어 곁에 서 있던 보좌관들을 불렀다.“랑베르.”“예, 각하.”“피엘.”“명하시면.”프레데리크는 단호하게 말했다.“대공비의 호위기사를 새로 임명한다. 각자 한 명씩—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사로 추천해.”이건 선택이 아니라 대비였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적을 향한, 가장 조용한 준비.프레데리크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시험대 위에 올려둘 생각이 없었다.***조용하던 대공성에,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긴장이 스며들었다.본성 홀의 문이 열리자 열 명의 기사 후보들이 동시에 들어섰다. 깔끔한 북부의 검은 기사복을 입은 채, 숨을 삼키는 소리만은 숨길 수 없었다. 바닥의 석재 위로 발꿈치를 미세하게 옮겼다.대공의 보좌관 랑베르와 피엘은 홀 가장자리에 물러서 있었다. 각자가 고른 다섯 명. 검술, 가문, 충성, 모두 계산된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기준을 묻는 이는 없었다. 선택은, 대공비의 몫이었다.잠시 후.홀의 공기가 달라졌다. 문지기들이 먼저 고개를 숙였고, 이어 시종들이 한 박자 늦게 숨을 죽였다.지빌라가 들어섰다. 황녀이자
119화지빌라는 잠시 시선을 떨군 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얼굴에 미묘한 열기가 번지는 것을 느끼자, 스스로를 나무랐다. 생각이 어디까지 닿았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한 채, 괜한 상념에 발이 묶였다는 자각 때문이었다.‘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프레데리크는 기사단의 훈련을 마치고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갑주를 벗자 어깨에 남아 있던 열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갔지만, 책상 위에 쌓인 보고서들은 그를 쉬게 두지 않았다.식사는 들지 않았다. 몸의 피로보다도, 머리가 멈추지 않는다는 감각이 먼저였다.문이 열리며 토르벤이 들어왔다. 시종장은 잠시 그의 안색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각하, 대공비 전하께서 온실 정원을 마련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허락을—”“이미 말했을 텐데.”프레데리크는 말을 끊었다.“전부 위임했어. 성 안의 일은, 그녀가 결정한다.”그러나 토르벤은 물러서지 않았다.“그럼에도 전하께서… 큰 변동이 있는 사안은 재차 확인을 받으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저희에게까지요.”그리고 레오노라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보고했다.프레데리크는 잠시 침묵했다.그 뜻을 이
118화지빌라는 개인 서재에 앉았다. 책상 위에 종이를 올려두고 잠시 펜을 멈췄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기 전,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클로리스였다.서부에서 북부로 떠나오던 날, 끝내 말로 다 하지 못했던 것들. 그 모든 것을 편지에 담아내듯, 그녀는 천천히 글을 적어 내려갔다.클로리스에게.서부를 떠나 북부로 오는 동안, 네 생각을 참 많이 했단다. 덕분에 무사히, 그리고 생각보다 잘 도착했어.처음 겪어 본 북부는 차갑고, 화려함보다는 실용을 중시하는 곳이었지만…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단다.함께하던 신부 수업은 잘 이어가고 있니? 장부 보는 일은 이제 제법 눈에 익었을 테고, 말 타는 것도—네가 겁내던 것에 비해 꽤 나아졌을 거라 믿어.괜히 잔소리처럼 느껴질까 싶어도, 자꾸 네 근황이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구나.봄이 되면, 서부에 남아 있던 북부 기사들이 돌아올 예정이야. 그때 기회가 된다면, 함께 북부로 놀러 오지 않겠니?눈이 녹은 뒤의 풍경은, 지금과는 전혀 다를 거야.조만간 다시 편지할게.그때는, 조금 더 여유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늘 너를 걱정하는,지빌라가.마지막 문장에 점을 찍고 나서야, 지빌라는 숨을 고르듯 펜을 내려놓았다. 편지는 다정했고, 거짓은 없었다. 클로리스를 걱정하는 마음도, 함께했던 시간에 대한 애틋함도 모두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