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서를 잘 숨겨야만 큰 시름을 덜 수 있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허종혁은 안소현의 팔을 더 꼭 잡았다.안소현은 그런 허종혁을 보며 문득 전에 전화했을 때 들었던 이상한 소리가 떠올라 의심하기 시작했다. 허종혁이 말하려 하지 않으니 캐묻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하나씩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허종혁. 늘 이렇게 얌전해야 할 거야. 내게 미안한 짓은 애초에 할 생각도 하지 마. 아니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거야.’이렇게 생각한 안소현은 허종혁을 보는 눈빛이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허종혁은 얼른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안소현은 허종혁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사람은 늘 직접 겪어야만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는 동물이었다....한편, 전화를 끊은 김미진은 조급하게 윤해준을 연락했다. 평소 안다혜에게 엄격하긴 했어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서툰 엄마였다.남편을 일찍 보내고 혼자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역할을 소화하다 보니 부드러울 때보다는 엄격할 때가 더 많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김미진 혼자 안소현과 안다혜를 돌보느라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빼먹지 않고 교육한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김미진은 이걸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다.태안 그룹에서 의지할 곳이 없었던 김미진은 믿을 사람이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믿지도, 믿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김미진은 늘 안다혜에게 성장을 요구했다. 게다가 안소현이 아프자 김미진은 안다혜를 더 엄격하게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생각한 김미진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내가 너무 엄격하기만 했던 건 아닐까? 소현이가 아프다는 이유로 다혜의 기분을 헤아려본 적이 없네.’‘다혜에게는 너무 불공평하네. 다혜 때문에 소현이가 아픈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김미진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전화가 걸린다 해도 무슨 말을
이연서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했다. 다만 아직 질리기 전이라 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안소현은 허종혁의 신경이 다른 곳에 팔린 걸 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상대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릿한 고통에 허종혁이 안소현을 놓아주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자기야, 왜 그래?”잘 나가다가 갑자기 왜 깨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는데 찬물을 끼얹는 거나 마찬가지라 허종혁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가끔은 허종혁도 안소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딱 그랬다.‘한창 좋았는데 뭐야? 기분 잡치게.’안소현이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종혁 씨 지금 다른 데 신경이 팔렸잖아요.”“나랑 키스하면서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해요?”안소현이 정곡을 찌르자 허종혁은 눈빛이 흔들렸다.‘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거잖아.’허종혁은 가끔 여자가 너무 무서웠다. 앞으로 함께 생활한다면 작은 생각도 아주 쉽게 들켜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됐어. 자기야. 내가 잘못했어. 화내지 마.”허종혁의 기분은 마음먹기 나름이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안소현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안소현이 콧방귀를 뀌었다.“우리가 만난 시간만 해도 얼만데 설마 아직도 종혁 씨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내 뒤에서 이상한 짓거리하지 마요. 그러다 들키는 날에는 끝장이에요.”허종혁은 안소현의 말에 놀라 멈칫했다. 순간 별장에 이연서를 숨겨둔 게 맞는 선택인지 주저하게 되었다. 안소현도 있는데 따로 한 명을 더 둔다는 건 너무 바람둥이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이러다 들키면 어떡하지?’게다가 안소현이 이렇게 연달아 경고한다는 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는 의미였다.허종혁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으로써는 일단 상황을 봐가면서 그때그때 대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안소현이 이연서의 존재를 영원히 모르는 것이었다. 아니면 정말 모든 게 끝이다.허종혁은 절대 걱정하는 일이
허종혁은 전화라는 단어를 들은 뒤로 표정이 좋지 않았고 행동도 부자연스러웠다. 저번에 잘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안소현이 기억하고 있다가 지금 다시 꺼낸 것이다.허종혁의 눈빛이 요동쳤다.“자기야, 이 일은 저번에 설명했던 것 같은데?”“다시 물어본다 해도 전에 했던 말 그대로야. 다른 건 없어.”안소현은 그 눈빛을 놓치지 않고 전부 읽어냈다. 요즘 윤해준과 힘겨루기하며 사람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허종혁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뭔가를 숨기고 있는게 분명했지만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묻는다 해도 본인의 의지가 이런데 절대 말해줄 리가 없었다. 캐물을수록 오히려 상황만 이상해질 것 같았다.허종혁이 거짓말한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 안소현은 내키지 않았지만 허종혁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더 물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성격이 어떤지 뻔히 알면서 더 물어보는 건 재미가 없었다.게다가 안소현은 원래도 독립적인 여자였다.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데 굳이 허종혁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안소현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종혁 씨. 나는 종혁 씨 믿어요. 더는 설명할 필요 없어요.”“그래도 하나...”안소현이 일부러 뜸을 들이며 허종혁 앞으로 다가가 섰다. 가느다란 손이 남자의 가슴에 닿는 순간 허종혁은 무언가에 홀린 듯 마음이 간질간질했다.허종혁이 안소현의 손을 잡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데 안소현이 손을 거두며 기회를 주지 않았다. 벙찐 허종혁이 억울한 표정으로 안소현을 바라봤다.“왜 그래. 자기야. 왜 피해.”안소현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밖에서 뭘 하고 다니든 상관없어요. 들키지만 않으면 돼요. 아니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깜짝 놀란 허종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일단 고개라도 끄덕였다.“그래. 알았어. 명심할게.”“그래도 자기야.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내 인생에 여자는 너 하나뿐이야.”허종혁은 충성이라도
“너무 마음 쓰지 마. 무슨 일 있으면 내가 제일 먼저 알려 줄게.”“네, 엄마.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 다혜 일은 저도 정말 걱정돼요.”안소현은 울먹이며 말했다. 안소현의 목소리를 들은 김미진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고르다 그저 별 의미 없는 위로 한마디만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끊긴 화면을 내려다보던 안소현은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 모습을 본 허종혁이 성큼 다가와 물었다.“어떻게 됐어? 이사님이 네 말을 믿어 준 거야, 아니면 안 믿으시는 거야?”그는 조금 떨어져 있어 가끔 안소현 목소리만 들었을 뿐 김미진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안소현의 노련한 연기로 보아 성공했을 것 같기도 했다.안소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연히 성공이죠. 우리 엄마는 겉으론 다혜를 안 챙기는 척해도 사실은 엄청 신경 써요. 그걸 몇 년이 지나도록 다혜는 못 알아차리고 매번 엄마랑 부딪히니 참 바보 같아요.”“역시 네가 한 수 위네.”허종혁이 진심으로 감탄했다.안소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그러니까 상황을 좀 심각하게만 만들어 놓으면 큰 문제는 없어요. 나머지는 엄마가 알아서 하실 거고 우리가 더 애쓸 필요는 없어요.”허종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소현의 허리를 휙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몸이 바짝 맞닿았다.안소현은 웃으며 살짝 밀쳤다.“뭐 하는 거예요, 여긴 병원 입구예요.”허종혁은 개의치 않았다. “그게 뭐 어때서. 이 병원 자금 대부분이 우리 가문에서 투자한 거야. 뭐가 걱정인데? 게다가 넌 내 여자친구고 우리 곧 결혼할 사이잖아. 뭘 더 조심해? 내가 뭘 신경 써야 하는 건데?”결혼이라는 말에 안소현은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속으론 달갑지 않았지만 들뜬 허종혁의 표정을 보고 괜히 김빠지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불만은 마음에만 묻어 두면 되는 것이고 그 정도 분별은 있었다.게다가 지금의 허종혁은 그녀에게 아직 쓸모가 있었다. 당장 내칠 이유도 없고 그렇게
“다혜가 내내 깨어나지 못하니 언니인 저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어요.”“응, 그 마음은 나도 알아.”김미진은 안소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두 자매 사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가까워졌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일단 안소현의 말을 들어 주는 편이 낫다는 걸 김미진은 알고 있었다. 어쨌든 상황의 자초지종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었고 안소현을 달래는 것도 중요했다.김미진의 반응을 확인한 안소현은 일부러 난처한 듯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엄마가 정말 못 믿으시겠다면 주치의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 와서 직접 말씀드리게 할 수도 있어요. 그분은 다혜 주치의예요. 제가 한 말은 미덥지 않으셔도 의사 선생님 말씀은 믿어 주셔야죠. 제가 동생 건강을 가지고 장난칠 리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잖아요.”김미진은 한숨을 내쉬며 왠지 모르게 짜증이 치밀었다.“됐어, 소현아. 내가 널 못 믿어서 그러겠어?”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그래도 내 딸인데, 괜히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거지... 네가 이해해 줘.”안소현은 속으로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순순히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그럼요, 엄마. 제가 남은 몰라도 엄마 마음은 잘 알죠.”안소현은 수화기 너머에서 얌전하게 웃으며 말했다.“엄마한테 이런 말씀 드리는 것도 다 동생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매부라는 사람은 저한테 유독 불만이 큰가 봐요. 그 사람 앞에선 제 말이 전혀 힘이 없어서 정말 어쩔 도리가 없네요.”이 말을 듣자 김미진은 표정이 굳었고 속으로는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안소현은 안다혜의 언니인데 윤해준이 그렇게 안소현을 대한다는 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였다. 김미진의 마음속에 윤해준을 향한 불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좋아,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김미진은 단호하게 말했다.“다혜는 내 딸이고 안씨 가문 사람이야. 윤해준이 멋대로 결정할 자격은 없어. 의사가 그렇게 심각하다고 했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 나도 가만 있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니 김미진은 점점 더 자책감이 들었다.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든 데에는 결국 자기도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안소현도 뭐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엄마, 저도 해준 씨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요. 저 혼자였고 그쪽 사람들은 전부 해준 씨 편이라 저는 해 볼 도리가 없었어요. 게다가 예전에 엄마가 그랬잖아요. 별일 아닌데 제가 괜히 호들갑 떠는 거라고요.”이 말을 들은 김미진은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그야말로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 꼴이었다.처음엔 별거 아니라고 여겼던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을 몰랐다,그런데 예전에 이 집사가 다녀와 보고했을 때도 이렇게 심각하다는 말은 없었다.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그 전만 해도 안다혜는 건강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번 일은 정말 모든 게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린 느낌이었다.겪는 일마다 버겁고 힘들기만 했다.“미안해. 그땐 상황을 제대로 파악 못 한 내 잘못이야.”이 말에 안소현은 허종혁을 힐끗 보며 얼굴에 희미한 승리의 미소를 띠었다.김미진에게서 이런 사과를 듣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자존심 하나로 버텨 온 사람인데 이런 건 처음이었다.안소현 본인도 신기할 정도였다. 원래는 떠보려 던진 말이었는데, 진짜로 고개를 숙일 줄 몰랐다.“엄마,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안소현은 일부러 난처한 듯 목소리를 낮췄다.“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지금 해준 씨가 다혜를 데리고 나가 버려서 저도 정말 다혜 상태가 걱정돼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언니잖아요. 눈뜨고 동생 몸 상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죠.”허종혁은 그 연기를 보며 아연실색했다.안소현은 김미진과 얘기할 때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애초에 안소현은 안다혜를 좋아하지 않았다.이 점은 허종혁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안소현이 어떤 사람인지도 그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가식적인 사람인데 안다혜에게 잘해 주기를 기대하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