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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5화

Author: 숲속의사슴
계약식이 끝난 뒤에도 시유는 쉴 틈 없이 일에 매달렸다.

온 신경이 일에 집중돼 있었다.

설계도 글쓰기와 비슷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요소를 정교하게 맞춰 나가야 하는 작업이라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 됐다.

다행히 집안일은 임애교가 든든하게 맡아 주고 있었다.

덕분에 시유도 마음 놓고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시유는 영우가 자신을 믿어 준 만큼 확실한 결과로 보답하고 싶었다.

저녁이 되자 사무실에는 차가운 조명만 남아 있었다.

직원들도 대부분 퇴근한 뒤였지만 시유는 여전히 설계안에 빠져 있었다.

그때 영우가 긴 손가락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시유 씨, 좀 쉬어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영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녁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가는 김에 아기용품 매장도 좀 둘러보고요.”

시유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설계안에서 막 시선을 뗀 탓에 아직 초점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네? 갑자기요?”

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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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236화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푹 빠졌어요. 요즘은 이 차가 제 최고의 남자친구예요.”“매일 일 끝나고 운전석에 푹 기대 앉으면 차가 몸을 감싸 주는 느낌이 들잖아요. 그 안정감에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가 싹 풀려요.”‘남자친구’라는 말에 영우의 눈가에 웃음이 짙어졌다.“남자친구는 제대로 골랐네요.”“사실 차 고르는 거나 남자 고르는 거나 비슷해요. 겉으로 아무리 멋져 보여도 막상 몰아 보면 안 맞을 수 있고, 겉보기엔 무난해도 내 운전 습관과 안 맞을 수 있죠.”“겉모습과 성능을 다 갖추고 취향까지 정확히 맞는 건 정말 흔치 않으니까요.”영우가 고개를 돌려 시유를 깊이 바라봤다.“축하해요. 오래된 차와 작별하고 정말 마음에 드는 새 차를 만났잖아요.”“앞으로 시유 씨가 가는 길도 이 차처럼 막힘없이 잘 풀릴 거예요. 더는 힘든 일도 없을 거고요.”절묘한 칭찬에 은근한 비유까지 더해지자 시유의 기분도 한껏 좋아졌다.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쇼핑몰에 도착했다.두 사람은 안내를 따라 3층에 새로 오픈한 음식점으로 향했다.시유가 말렸지만 영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게의 대표 메뉴를 전부 주문했다.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자 시유의 식욕이 확 살아났다.금세 먹보 본능을 발휘해 이것저것 맛보며 신나게 식사를 즐겼다.기분 좋게 저녁을 먹은 두 사람은 유아용품 매장으로 향했다.시유는 한동안 빛나에게 직접 물건을 사 주지 못했다.매장에 들어서자 조그마한 옷과 신발, 갖가지 아기용품에 금세 정신이 팔려 하나씩 집어 들고 살펴보기 시작했다.영우는 시유의 뒤를 따라 걸었다.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매장 안에서 남자아이를 떠올리게 하는 파란색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영우는 애써 생각을 떨쳐 내고 멀지 않은 곳에 놓인 작은 성을 가리켰다.“공주님은 성에 살아야죠. 빛나한테 작은 성 하나 선물할게요. 두 달쯤 지나서 좀 더 크면 안에서 기어 다니면서 놀기 딱 좋겠네요.”시유가 영우가 가리킨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235화

    계약식이 끝난 뒤에도 시유는 쉴 틈 없이 일에 매달렸다.온 신경이 일에 집중돼 있었다.설계도 글쓰기와 비슷했다.머릿속에서 수많은 요소를 정교하게 맞춰 나가야 하는 작업이라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 됐다.다행히 집안일은 임애교가 든든하게 맡아 주고 있었다.덕분에 시유도 마음 놓고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시유는 영우가 자신을 믿어 준 만큼 확실한 결과로 보답하고 싶었다.저녁이 되자 사무실에는 차가운 조명만 남아 있었다.직원들도 대부분 퇴근한 뒤였지만 시유는 여전히 설계안에 빠져 있었다.그때 영우가 긴 손가락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시유 씨, 좀 쉬어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영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저녁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가는 김에 아기용품 매장도 좀 둘러보고요.”시유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설계안에서 막 시선을 뗀 탓에 아직 초점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네? 갑자기요?”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기억하는 게 맞으면 빛나랑 리오가 같은 날 태어났죠? 날짜 계산해 보니까 다음 주가 벌써 백일이더라고요.”그 말을 듣는 순간 시유는 영우의 눈에 잠깐 스쳐 간 아픔을 놓치지 않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제야 중요한 날짜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시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정말 정신없나 봐요. 일에 빠져서 이렇게 중요한 날도 잊고 있었네... 영우 씨가 기억해 줘서 다행이에요.”시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아기용품 매장에 가자는 건... 리오 선물 사려고요?”‘리오’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영우의 손가락이 살짝 굽혀졌다.영우는 눈을 내리깔았다.긴 속눈썹이 눈빛을 가렸다.잠시 뒤 고개를 저으며 옅게 웃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이제 그건 새나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영우는 다시 시유를 바라봤다.눈빛은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어딘가 조심스러웠다.“빛나 선물 같이 고르려고요. 그리고 시유 씨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234화

    시유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앞으로 저와 부강그룹은 각자의 길을 갈 겁니다.”“라움디자인은 라움디자인이고, 부강그룹은 부강그룹입니다. 서로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라움디자인과 협업을 논의하실 때 부강그룹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데 꼭 손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말 한마디도 칼이 되어 상대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를 수 있었다.시유는 방금 영우에게 배운 방법을 그대로 써먹었다.다시 술잔을 채운 뒤 여준 앞으로 걸어갔다. 입가에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부 대표님, 저도 한잔 올릴게요. 예전에 저를 그렇게 하찮게 봐 주신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전에는 부강그룹에서 디자이너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어요.”“그런데 이제 알겠네요. 밖으로 나와 보니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넓더라고요. 갈 수 있는 곳도, 할 수 있는 일도 많았고요.”시유가 잔을 들어 올렸다.“저를 자유롭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여준의 얼굴은 돌처럼 굳었다.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자신에게 쏠렸다.입을 열어 뭐라도 해명하고 싶었지만 목이 막힌 듯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시유와 여준의 이혼 소동은 이미 H시 전체에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그런데 그 시유가 업계에서 유명한 바람 디자이너였다는 사실까지 알려지자 사람들은 놀라움과 감탄에 더해 자연스럽게 시유에게 공감하기 시작했다.특히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더 그랬다.얼마나 시달리고 상처받았으면 출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자가 이혼을 결심했겠느냐는 생각이었다.사람들은 금세 시유 주변으로 모여들었다.겉으로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지만 중간중간 여준을 겨냥한 말들이 섞여 있었다.여준은 그 자리에 서 있을수록 얼굴을 들기 힘들었다.예전의 위세와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마치 쫓겨난 개처럼 초라한 신세가 된 기분이었다.누구 하나 욕을 한 것도 아니었다.다들 점잖고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233화

    그 말이 떨어지자 떠들썩하던 식사 자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정적이 내려앉았다.시유의 표정도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술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손가락 마디까지 하얗게 질렸다.영우 역시 술잔을 가볍게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고개를 들어 여준을 바라보는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여준은 시유의 잔에 남아 있던 술을 단숨에 마셨다.그리고 다시 잔을 채운 뒤 놀란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제 아내의 실력을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받은 영광은 전부 시유가 받아 마땅한 겁니다. 제가 대신 한잔 올리겠습니다.”여준은 다시 술잔을 비웠다.술기운이 오르자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어색함도 사라졌다.대신 강한 과시욕이 치밀어 올랐다.여준은 팔을 뻗어 사람들 앞에서 시유의 어깨를 감싸 억지로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얼굴에는 자랑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제 아내가 오늘 이런 성과를 이루다니 저도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시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긴 속눈썹 아래로 혐오감이 스쳤고, 손톱은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예전에도 이런 술자리가 있었다.당시 여준은 자신은 술을 아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시유를 내세워 대신 술을 받게 했다.그러면서 사회생활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말했다.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는 자신을 귀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들고 있었다.시유에게는 그 모습이 우습고도 지독하게 모순적으로 느껴졌다.몇 초간 정적이 이어진 뒤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곧 겉으로는 공손하지만 속뜻은 날카로운 말들이 이어졌다.“부 대표님, 바람 디자이너가 사모님이셨습니까? 제가 알기로 사모님은 부강그룹의 평범한 직원이었던 것 같은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 보네요.”“저도 예전에 바람 디자이너를 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부 대표님께서는 회사에서 크게 눈에 띄지 않는 디자이너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요.”“그러고 보니 저도 기억나네요. 부 대표님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모님을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232화

    여준은 눈앞의 익숙한 얼굴들을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단상으로 올라가 자랑스럽게 외치고 싶었다.시유가 자신의 아내라고.하지만 이상하게도 막상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시유가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자신이 나서는 바람에 시유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를 망쳤다고 생각할까 봐 겁이 났다.이제 시유는 더 이상 자신만의 시유가 아니었다.업계 전체가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눈부신 샛별이었다.반면 영우는 라움디자인의 파트너로서 아무 거리낌 없이 시유의 옆에 당당히 서 있었다.시유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자랑스러움과 다정함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영우가 마이크를 들었다.“저희 라움디자인의 설계를 높이 평가해 주시고 장기적인 협력을 결정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영우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막힘없이 이어졌다.“오늘 계약식은 시작일 뿐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기업과 장기적인 협력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또한 새로운 감각과 실력을 가진 디자이너분들이 저희와 함께해 주시는 것도 언제든 환영합니다.”영우는 천천히 행사장을 둘러봤다.이어지는 목소리에는 단단한 힘이 실려 있었다.“라움디자인을 설립한 출발점에는 아주 단순한 믿음이 있었습니다.”“자본이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지나치게 억누르는 틀에서 벗어나, 다시 건축의 중심에 창의적인 발상을 놓자는 것입니다.”“저희는 건축 그 자체에 대한 고민과 혁신에 온전히 집중하는, 최대한 순수한 설계 사무소를 만들고자 합니다.”“저는 훌륭한 건축의 진정한 영혼과 중심에는 언제나 디자이너의 독창적인 구상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자본의 힘과 실제 시공 과정은 디자이너가 품은 그 독창적인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영우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이어 갔다.“앞으로도 바람 디자이너와 같은 인재를 발굴해 온 방향을 이어가겠습니다.”“새로운 시각을 가진 사람, 기존의 틀을 깨는 사람, 자신의 이상을 위해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231화

    라움디자인과 세 곳의 대형 부동산 개발사가 진행하는 계약식은 강 위에 떠 있는 호화 유람선에서 열렸다.햇빛을 받은 강물이 반짝였고, 수면 위로 양쪽 강변의 화려한 도심 풍경이 비쳐 들었다.오전 9시 30분.아직 행사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업계 주요 인사들과 언론사 기자들이 속속 도착했다.사람들은 모여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라움디자인은 업계에서 워낙 조용히 움직이는 곳이지만 설계안도 빨리 나오고 실력도 뛰어나잖아요. 최근 몇 년 사이 업계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특히 ‘바람’이라는 디자이너 작품은 정말 남다르더라고요. 오늘 계약하는 세 회사도 그 사람 설계안 하나 보고 바로 장기 계약을 결정했다던데, 우리 회사에도 앞으로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네요.”“그러게요. 바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오늘 처음 공개된다고 하니 정말 기대돼요.”“저도 그 사람 설계안 몇 개 봤는데 구상이 정말 기발해요. 늘 새로운 걸 보여주면서도 완성도가 높고요. 오늘 직접 볼 수 있다니 정말 운이 좋네요.”그때 누군가 사람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높였다.“저기 봐요!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리지 않아요? 둘 중 누가 바람일까요? 난 왠지 저 단발머리 여자분 같은데.”...사람들 바깥쪽에 짙은 회색 정장을 입고 서 있던 여준의 미간이 순간 꿈틀했다.훤칠한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서 있던 그는 곧장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마침 시유와 영우가 서류철을 든 채 웃으며 나란히 단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시유는 깔끔하게 재단된 흰색 정장을 입고 단상 한가운데 섰다.탄탄하게 각이 잡힌 소재가 곧은 몸선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허리의 가느다란 벨트는 한 줌에 잡힐 듯 잘록한 허리선을 선명하게 드러냈다.생기 어린 눈매와 별처럼 밝은 눈동자, 오뚝한 콧날과 선명한 입술선, 칼로 그은 듯 날렵한 턱선까지.어딘가 쉽게 꺾이지 않을 듯한 당찬 기운이 느껴졌다.그 옆에는 검은색 수제 정장을 입은 영우가 서 있었다.부드럽게 흘러내리는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7화

    여준은 난장판이 된 거실을 바라보다가, 힘이 빠진 사람처럼 소파에 주저앉았다.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지만, 답답하게 막힌 가슴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이모님, 제가 아내한테 그렇게 못했습니까? 시유가 이렇게까지 화낼 일입니까?”유민자는 바닥에 흩어진 파편을 쓸어 담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이 사모님께 못하신 건 아니에요. 두 분 결혼하고 5년 동안 큰소리 한 번 오가는 걸 못 봤으니까요.”“다만 여자가 아이를 낳고 나면 마음이 많이 흔들릴 수 있어요. 산후 우울감도 올 수 있고요. 이럴 때일수록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6화

    마리는 시유가 더 상처받을까 봐, 여준이 메시지조차 확인하지 않았다는 말은 끝내 꺼내지 않았다.시유가 퇴원하는 날까지도 여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퇴원 후, 시유와 마리는 젖먹이 빛나와 장순영을 데리고 시유가 반년 전 ‘태양파크’ 아파트단지에 사 둔 집으로 들어갔다.마리의 집은 바로 맞은편이었다. 서로 마주 보는 앞집에 살자는 건 대학 시절부터 두 사람이 농담처럼, 하지만 진심으로 꿈꿔 왔던 일이었다.그래서 반년 전 마리의 맞은편 집이 매물로 나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시유는 망설임 없이 그 집을 계약했다.집에는 기본 가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5화

    “환자분은 출산 후 체력 소모가 심한 상태입니다. 이전에 대량 출혈로 응급 처치까지 받으셨고요.”“이런 상태에서는 저혈당으로 쓰러지기 쉽습니다. 영양 보충 꼭 잘 하셔야 하고,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리는 일도 피하셔야 합니다.”검사가 끝난 뒤에도 시유는 병실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의사는 병실 안에서 마리에게 시유의 상태를 차분히 설명했다.장순영이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사모님은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 하셨어요. 첫 보름은 젖몸살이 너무 심해서 음식도 마음대로 못 드셨고, 그 다음엔 아기가 소화를 잘 못 시켜서 밤마

  •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제4화

    유민자가 허둥지둥 방에서 뛰쳐나오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지진이에요? 지금 지진 난 거예요?”장순영은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를 안고 있다가, 요란한 소리에 놀라 맨발로 가방부터 움켜쥐고 현관 쪽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심지어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었다.유민자와 장순영이 거실로 뛰어들었을 때, 두 사람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늘 차분하고 이성적이던 시유가 미친 사람처럼, 한때 그토록 아끼던 장식품들을 하나씩 바닥에 내던지고 있었다.유민자는 다급히 시유에게 달려가 말렸다.“사모님, 그만하세요! 제발 그만하세요! 무슨 일이든 차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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