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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경의 기척이 머무는 곳

Penulis: 데이지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8-11 07:22:09

짧고 단정한 대답. 군더더기는 없었다.

현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 거리는 이제 공식적인 거리보다 조금 가까웠다.

“경의 그 충성,”

현이 낮게 말했다.

“어디까지 믿어도 되겠는가.”

그 질문은 사실상 시험이었다.

도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하께서 허락하시는 데까지이옵니다.”

현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웃음이 스쳤다.

웃음이라기엔 너무 짧고, 너무 날카로웠다.

“허락이라…”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도진을 보았다.

“도진.”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호칭 없이 불렸다.

“나는,”

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경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 말은 믿음처럼 들렸으나, 실상은 경고였다.

“그러나,”

그는 말을 이었다.

“내 눈앞에서 빈을 둘러싼 일들이 너무 잦아지고 있다.”

도진의 심장이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한 번 뛰었다.

“궁은,”

현이 계속 말했다.

“말보다 기척을 먼저 읽는 곳이다.”

그는 도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경의 기척이 어디에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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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151. 빈의 처소와 거리를 두라

    밤은 다시 궁을 덮었다.낮 동안 숨죽여 있던 기척들이해가 기울자마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수는 창가에 서 있었다.닫아 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이제 숨기려 하지 않았다.다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뿐이었다.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말이 되었다.지켜보고 있다.그리고 아직은 기다린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수의 마음은 오히려 고요해졌다.불안은 모를 때 가장 크게 자라지만, 알고 나면 형태를 가진다.형태를 가진 두려움은 대비할 수 있다.상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마마, 오늘 밤은…평소보다 인원이 많사옵니다.”“알고 있다.”이수는 창밖을 보며 답했다.“그만큼 누군가 서두르고 있다는 뜻이겠지.”상궁은 더 묻지 않았다.이수의 목소리에는 이미 판단이 끝났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그 시각, 도진은 군영 안에서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다.검날을 닦는 손길은 늘 그렇듯 정확했고, 숨결마저 일정했다.그러나 오늘은 그의 시선이 유난히 자주 멈췄다.검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지금의 나는,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지켜야 할 대상이 하나가 아니다.’빈을 지켜야 했고, 궁의 질서를 지켜야 했으며,무엇보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스스로 지켜야 했다.그 선은 검보다도 날카로웠다.“도진 나으리.”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즉시 몸을 돌렸다.근위 하나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저하께서 잠시 들르라 하십니다.”도진은 한순간 숨을 고르는 듯 보였으나 곧 고개를 숙였다.“지금 가겠다고 전하시오.”그는 검을 제자리에 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발걸음은 무거웠으나 망설임은 없었다.피할 수 없는 만남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현은 침전 안에서 홀로 서 있었다.등불은 하나뿐이었고, 그 불빛이 그의 얼굴 절반만을 비추고 있었다.“도진.”그는 호칭 없이 이름을 불렀다.그것만으로도 이 만남이 공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요 며칠,”현이 낮게

  • 천년의 기억   150. 낮은 목소리들의 방향

    문은 반쯤 닫힌 채로 하루를 버텼다.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빛과 소리가 함께 스며들었다.그 틈은 작았으나, 궁에서는 작은 틈이 가장 오래 남는 법이었다.이수는 그 틈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등 뒤에서 오가는 기척을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사람들의 발걸음은 이제 숨기려 하지 않았다.대신 방향만을 숨겼다.상궁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낮게 말했다.“마마, 오늘은… 말들이 많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대답에는 놀람도, 경계도 없었다.이미 예상하고 있던 흐름이었다.“말이 많다는 것은,”이수가 천천히 말했다.“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뜻이다.”상궁은 그 말을 이해했다.결론이 나면, 말은 사라진다.남는 것은 명과 결과뿐이다.그 시각, 도진은 궁의 외곽을 따라 천천히 순찰을 돌고 있었다.명목은 경계였으나, 그의 시선은 늘 담장 너머가 아니라 담장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바람이 옷자락을 스쳤다.그 바람 속에는 낯선 냄새가 섞여 있었다.피의 냄새는 아니었으나, 사람이 마음을 굳힐 때 나는 차가운 냄새에 가까웠다.도진은 걸음을 멈췄다.그리고 잠시 귀를 기울였다.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으나,그 사이의 간격이 묘하게 일정했다.‘준비하고 있다.’그는 그렇게 느꼈다.누군가가, 아직 드러내지 않은 손을 정리하고 있다는 감각.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눈을 낮추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현은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들이고 있었다.말은 길지 않았고, 표정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러나 그의 질문은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그날 밤의 기척은 정확히 언제였는가.”“도진 경은 그 전에도 그 근처에 있었느냐.”“빈의 처소에 드나드는 자의 수는 평소와 비교해 어떻게 달라졌는가.”질문은 사실을 묻는 것처럼 보였으나,그 사실들이 모일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현은 혼자 남았을 때 잠시 눈을 감았다.머릿속에서 여러 장면이 겹쳐졌다.이수가 문

  • 천년의 기억   149. 저하께서 감당하실 만큼만

    문이 열린 채로 하루가 흘렀다.열린 문은 바람을 들였고, 바람은 소문을 데려왔다.아무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지만, 궁은 늘 낮은 목소리로도 충분했다.이수는 처소의 안쪽에 앉아 있었다.문을 향해 앉지 않았다.열린 문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의식하는 순간, 그것은 방패가 아니라 사람의 시선을 부르는 표식이 되기 때문이다.상궁이 차를 올려두며 말했다.“마마, 오늘은 발걸음이 잦습니다.”이수는 찻잔을 들었다.김이 오르지 않는 온도였다.마시기엔 미지근했지만, 손에 쥐기엔 적당했다.“잦다는 것은,”이수가 조용히 말했다.“이미 사람들이 마음을 정했다는 뜻이다.”상궁은 그 말의 의미를 더 묻지 않았다.궁에서 ‘마음’은 곧 방향이었고, 방향은 곧 힘이었다.이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쓴맛이 입 안에 오래 남았다.그 쓴맛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시각, 도진은 군영의 훈련터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훈련은 끝났고, 사람들은 흩어졌다.그는 끝까지 남았다.남아 있는 것이 지금의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선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무관 하나가 다가왔다.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굳이 낮출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도진 나으리”그는 짧게 불렀다.“오늘은 궁 쪽의 소리가 이사하옵니다.”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이 뜻하는 바를 굳이 풀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빈의 처소 쪽도”무관이 말을 잇다 멈췄다.도진은 그 멈춤을 바라보았다.말보다 더 많은 것을 그 멈춤이 전하고 있었다.“그만하자.”도진이 먼저 말했다.“지금은 말이 오갈수록 날이 서는 때다.”무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도진은 다시 궁을 바라보았다.담장 너머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맑은 날일수록 그는 더 불안해졌다.현은 조회가 끝난 뒤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사람들이 물러난 자리에 그는 혼자 남았다.말끔하게 정리된 공간은 그의 마음과 달리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문을 열어 두

  • 천년의 기억   148. 흔들리지 않는 얼굴

    처소로 돌아오는 길은 대비전으로 향하던 길보다 조금 더 길게 느껴졌다.같은 복도, 같은 돌바닥이었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른 무게가 발끝에 실렸다.말하지 않은 것들이 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이수는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문을 여는 손길이 이전과 다를 것임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궁에서 문을 연다는 것은 늘 선택의 흔적을 남긴다.닫힌 채로 두면 의심이 자라고, 열면 책임이 들어온다.그녀는 문을 열었다. 안은 조용했다.정리된 자리, 낮게 남은 불빛,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공기.그러나 이수는 알았다.아무 일도 없는 방이 가장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상궁이 다가와 옷자락을 정리하며 낮게 말했다.“마마, 대비마마께서 오래 붙잡으셨습니까.”“길지는 않았다.”이수는 담담히 답했다.“그러나 가볍지도 않았다.”상궁은 더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 것이 이 궁에서 살아남는 오래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이수는 자리에 앉지 않고 창가로 향했다.낮의 빛이 이제 막 궁의 기와 위로 번지고 있었다.빛은 분명 따뜻했지만, 그 따뜻함이오늘 하루를 지켜주지는 못하리라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그 시각, 도진은 군영의 훈련터에 서 있었다.아침의 공기가 몸을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그는 검을 쥐지 않았다.대신 빈손으로 호흡을 고르며 몸의 균형을 되찾고 있었다.부상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몸 안쪽에서는 여전히 어제의 충격이 남아 있었다.그러나 더 큰 흔적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 남아 있었다.‘오늘은, 움직이지 말라.’그 말이 현의 명인지, 이수의 눈빛인지 도진 스스로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는 훈련터 한쪽에서 궁 쪽을 바라보았다.담장 너머로 보이는 것은 하늘뿐이었으나,그 너머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현은 아침 조회를 앞두고 서책을 펼쳐 들고 있었으나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의 생각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대비전. 이수의 태도. 그리고 도진.그는

  • 천년의 기억   147. 너무 많은 문이 열렸다

    대비전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반듯했으나,그 반듯함이 오늘은 오히려 위태로워 보였다.사람이 오가며 닳아야 할 길이 지나치게 말끔하다는 것은 누군가 미리 정리해 두었다는 뜻이기도 했다.이수는 그 사실을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생각하는 순간, 발걸음이 느려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지금 필요한 것은 머뭇거림이 아니라 지나침이었다.대비전의 문 앞에서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지 않았다.숨을 고른다는 행위조차 여기서는 하나의 신호가 될 수 있었다.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들고 문을 넘었다.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사람이 많지 않았고, 말소리도 없었다.그 고요는 이미 많은 말이 오간 뒤의 고요였다.대비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표정은 평온했으나, 그 평온함은 아무 일도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오히려 모든 일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람의 얼굴에 가까웠다.“왔느냐.”대비의 음성은 낮고 고른 결이었다.“예, 대비마마.”이수는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몸은 낮췄으나 눈은 피하지 않았다.“어젯밤이 길었을 터인데.”대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잠은 이루었느냐.”“잠들지 못했사옵니다.”이수는 솔직하게 답했다.이곳에서는 솔직함이 가장 안전한 경우도 있었다.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반응은 그 대답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궁이 소란스러우면 잠드는 법을 잊게 되는 법이지.”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묻겠다.”대비의 시선이 이수에게 곧게 닿았다.“어젯밤, 세자가 네 처소에 들렀다 들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부정하지 않았다.“예, 대비마마.”“그리고,”대비는 말을 이었다.“그 자리에 도진도 있었다고 하더구나.”이수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그러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도진 경은 처소에 접근한 기척을 확인하러 잠시 들렀을 뿐이옵니다.”그 대답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다르게 말할 이유도 없었다.대비는 한동안 이수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에는 책망도, 분

  • 천년의 기억   146. 비어 있는 대답들

    밤이 완전히 물러났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었다.새벽의 빛은 오고 있었으나, 그 빛은 위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칼날에 가까웠다.이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방 안은 고요했으나, 그 고요는 잠을 부르지 않았다.오히려 생각을 불러왔다.어제의 말들, 어제의 눈빛들,그리고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들.그녀는 손을 내려다보았다.손끝이 더 이상 떨리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이건 두려움이 가라앉았다는 뜻이 아니었다.두려움을 넘는 단계로 이미 들어섰다는 신호였다.상궁이 다시 들어와 조심스레 다가섰다.“마마.”그녀는 낮게 말했다.“해가 들기 전, 대비전에서 사람을 보내올 듯합니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그 소식이 놀랍지 않았다.이 밤이 이렇게 지나갈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오거든…”이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어떤 말이 가장 덜 위험한지 빠르게 가늠했다.“…기다리라 하여라. 내가 직접 나가겠다.”상궁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마마께서 직접”“그래야 한다.”이수의 말은 단정했다.“이제는 누군가의 말로 대신 전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상궁은 더 묻지 않았다.궁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람일수록 이런 순간에 말을 아낀다.이수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한 번 정돈되었다.그녀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지금 필요한 것은 얼굴이 아니라 태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시각, 도진은 군영의 문 앞에 서 있었다.아침의 공기가 폐 속으로 깊게 스며들었다.몸은 여전히 무거웠으나,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다.그는 궁 쪽을 바라보았다.높은 담장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지금도 많은 것들이 움직이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본능처럼 느꼈다.‘오늘은…’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그러나 그 바람에는 이미 자신조차 기대하지 않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군영 안쪽에서 동료 무관 하나가 다가왔다.눈빛이 평소와 달랐다.“도진 나으리.”그가 낮게 불렀

  • 천년의 기억   10. 이름을 가둔 가슴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 천년의 기억   9. 금지된 이름의 파문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 천년의 기억   8. 어둠이 새긴 흔적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 천년의 기억   7. 밤이 삼킨 경계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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