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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이제는 말이 아니라 결말만이 남았구나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9 12:51:22

새벽이 오기 전, 궁 안은 이상하리만치 정돈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법도 없었고, 종이나 북이 울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숨을 죽이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고요함이었다.

이런 고요한 밤은 언제나 가장 큰 일이 벌어지기 직전의 밤이었다.

이수의 처소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질문도, 확인도 없었다.

대신 문이 열리는 소리가 지나치게 단정하고 사무적이었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소리 같았다.

내관이 먼저 들어섰고, 그 뒤로 무관 둘이 조용히 섰다.

그들의 손은 칼에 닿아 있지 않았지만,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긴장된 손이었다.

"빈마마."

내관의 음성에는 이제 더 이상 어떤 감정의 여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명령을 전달하는 도구의 목소리였다.

"대비마마의 분부가 내려오셨습니다."

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일어나야 할 순간은 지나가버렸고, 지금은 받아들여야 할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말하라."

"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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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230. "괜찮아요"라는 대답에 스민 이수의 숨겨진 침묵

    도진은 이수가 평소보다 말을 적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화가 끝난 뒤에야 알아차렸다.말수가 줄었다기보다는,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이 달라져 있었다.예전보다 조금 더 길었고, 그 사이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 듯한 공기가 있었다.“오늘은… 좀 피곤해 보이네요.”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이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괜찮아요. 요즘 일정이 조금 겹쳐서.”괜찮다는 말은 늘 그렇듯대답이 아니라 마침표처럼 들렸다. 도진은 더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 것이 배려일 때가 있다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저녁이 내려앉은 거리,유리창에 반사된 불빛들이 천천히 발밑으로 흘러갔다.“집까지 바래다줄게요.”“아니에요. 여기서 갈게요.”이수의 대답은 빠르지 않았지만 망설임도 없었다.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반 걸음 뒤에 섰다.그 순간, 그의 심장이 아주 미세하게 어긋났다.아픔은 아니었다.익숙한 통증도 아니었다.대신, 공기가 바뀌는 감각.도진은 고개를 들었다.거리는 여전히 평온했고,사람들은 제각각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느꼈다.지금, 이 풍경 안에 이질적인 시선이 하나 섞여 있다는 것.그 시선은 노골적이지 않았다.따라오지도 않았고, 부딪히지도 않았다.그저 너무 정확하게,이수의 동선을 알고 있다는 느낌.도진은 멈췄다.이수는 몇 걸음 더 걷다가 그를 돌아봤다.“왜 그래요?”“아니요.”그는 짧게 답했다.그리고 시선을 돌려 반대편 유리창을 바라봤다.거울처럼 비친 자신의 얼굴.그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오래전 감각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지켜야 할 대상이 생겼을 때의 감각.도진은 그 감각을 설명할 수 없었다.그저 몸이 먼저 반응했다.“이수 씨.”그가 불렀다.“오늘은 제가 여기까지만 갈게요.”이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아까는 집까지”“오늘은 여기까지만.”그의 말투는

  • 천년의 기억   229.닿지 말아야 할 선

    현은 같은 문장을 세 번째로 읽고 있었다.이미 외워버린 문장이었고,그럼에도 다시 읽는 이유는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그 문장은 이수의 소설 속에 있었다.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은 조용히 화면을 껐다.모니터가 꺼지자 방 안의 조명이 한층 더 차갑게 느껴졌다.“지킨다…”그는 낮게 웃었다.웃음이라기엔 숨에 가까운 소리였다.지킨다는 말은 언제나 선택받은 자의 언어였다.그리고 그 선택권을 현은 한 번도 남에게 준 적이 없었다.탁자 위에 놓인 자료철을 집어 들었다.이수의 일정. 출판사 미팅.사인회 이후의 인터뷰 요청들.그리고 그 사이,의도적으로 끼워 넣은 한 줄.도진 - 비공식 동행 추정현의 손끝이 멈췄다.“추정.”그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확실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사람을 더 미치게 만든다.그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내일 일정 하나 비워둬.”잠시 침묵.“예, 대표님. 혹시 이유를 여쭤봐도”“묻지마.”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그러나 그 부드러움에는 대화를 끝내는 힘이 있었다.전화를 끊은 뒤 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창가로 가지 않았다.오늘은 도시를 내려다보고 싶지 않았다.대신 거울 앞에 섰다.말끔한 정장. 흐트러짐 없는 머리.누가 봐도 안정적인 얼굴.현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상하지 않나.”대답은 없었다.그러나 그는 말을 이었다.“나는 그녀를 처음 본 날부터 불편했어.”그 불편함은 사랑도, 증오도 아니었다.그보다는 ‘내 것이 아닌 무언가를 이미 가진 사람’을 마주했을 때의 감각에 가까웠다.현은 기억해냈다.백화점의 소음. 사인회장의 빛.그리고, 도진이 쓰러지던 순간.그 장면에서 이수는 단 한 번도 현을 보지 않았다.그 사실이 현의 마음을 가장 깊이 긁었다.그는 천천히 웃음을 지웠다.“확인해야겠지.”누가 먼저 그 선을 넘었는지.아니면, 이미 선이 없어진 건지.다음 날, 현은 이수를 찾았다.공식적인

  • 천년의 기억   4. 운명의 첫 그림자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 천년의 기억   3. 천 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

  • 천년의 기억   2. 천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 천년의 기억   1. 비가 내리기 시작한 오후, 그가 울었다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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