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20화 텅 빈 꽃밭

Author: 연의 수정
박진성의 눈이 가늘어지며 날카로운 기운이 번졌다.

‘내가 별장을 떠난 지 며칠 됐다고 벌써 비밀이 생긴 거야?’

“민여진!”

그의 목소리가 낮고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셋을 셀 테니까 내 인내심을 더 이상 시험하지 마.”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셋, 둘...”

“망고!”

“뭐?”

민여진은 그제야 자신이 반사적으로 강아지의 이름을 불렀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박스를 열었다.

안에서 작은 강아지가 낑낑거리며 머리를 내밀더니, 냄새를 맡고 그녀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이 아이야.”

박진성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너... 이딴 걸 왜 데리고 온 거야?”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

민여진은 아무 말 없이 박스를 품에 안았다.

그러자 박진성이 냉소했다.

“이제 여길 네 집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네 주제에 감히 애완동물까지 키울 생각을 해?”

그 말은 뼈를 깎는 듯 아팠지만 그녀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조용히 말했다.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죽었대. 아직 너무 어려서 혼자 두면 살아남지 못할 거야. 조금만 크면 보내줄게... 그러면 안 될까?”

박진성은 단호하게 거절하려 했지만, 엄마가 죽었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미세한 동요를 보였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강아지는 작은 몸을 민여진의 손에 비비며 의지했다. 그 모습이 묘하게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똑같군. 불쌍하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처지. 그래도 저 강아지는 눈치라도 보는데, 민여진은...’

박진성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마침 서원이 다가와 정원에 세워진 그의 차를 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표님...”

박진성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하게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강아지가 별장에서 지내는 것을 묵인했다는 뜻이었다.

민여진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깜빡였다가, 이내 감격에 벅차 코끝을 훌쩍였다.

서원과 함께 강아지에게 우유를 먹이며 한참을 바라보다가, 녀석이 만족스럽게 잠들자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121화 돌아온 문채연

    ‘무언가 사라진 거 같은데?’박진성은 한동안 정원을 바라봤다.정확히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엄습했다. 무의식적으로 손끝을 움켜쥐었지만, 그 감각조차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대표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서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박진성은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가자”...민여진은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상자로 달려갔다.망고는 아직 잠들어 있었고, 그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작은 몸이 꿈틀거리더니 그녀의 손을 느끼고는 바짝 달라붙어 손가락을 핥았다. 그러고는 앙앙거리며 작게 울었다.그녀는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넌 정말 귀엽구나.”“민여진 씨, 식사는 하셨어요?”교대 근무를 나온 서원이 그녀가 박스 속 망고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먼저 이 아이부터 먹여야죠.”그녀는 부드럽게 망고의 털을 쓰다듬으며 강아지가 배불리 우유를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식사를 마친 망고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가 햇볕을 쬐게 했다. 마침 문 앞에 앉아 있던 순간, 정원 쪽에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익숙한 차였다.민여진의 손이 순간 굳어졌다.차가 멈추자, 박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조심히 내려, 다치지 마.”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감싸는 듯한 어조였다.이어서 들려온 것은 문채연의 가벼운 웃음이었다.“진성 씨, 나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몇 걸음 걷는다고 넘어지겠어요?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에요?”“그래도 걱정되잖아.”대화 속 친밀한 기류가 흘러넘쳤다.민여진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망고를 품에 안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문채연의 목소리가 먼저 그녀를 붙잡았다.“여진 씨...”그녀는 살짝 주저하더니 이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이에요.”민여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그 순간, 품 안의 망고가 갑자기 낮게 으르렁거리며 낯선 적대감을 드러냈다.“왈왈!”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122화 문채연의 요리 솜씨

    “네.”문채연은 우아한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여진 씨... 제 건강 문제로 당분간 별장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불편을 끼치게 될 것 같네요.”그녀의 말투는 사려 깊은 척했지만, 그 속에 깔린 의도는 너무나 뻔했다.‘거짓말도 참 능숙하네.’그녀가 얼마나 가식적인지 뻔히 보였지만, 박진성은 그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민여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하지만 문채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같이 식사해요. 여진 씨, 제가 직접 요리했어요.”“괜찮아요.”정중하게 거절하려던 순간, 박진성의 시선이 곧장 날아왔다.‘거절하지 마.’그것은 분명한 경고였다.민여진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식사 준비가 끝난 후, 문채연은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들 사이에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여진 씨 입맛을 잘 몰라서 그냥 무난한 맛으로 만들었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입맛에 안 맞으면 말해 주세요.”민여진이 조용히 숟가락을 들려던 찰나, 박진성이 차갑게 말했다.“네가 뭔데 입맛을 따져? 남김없이 다 먹어.”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진성 씨, 여진 씨가 혹시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그럴 리가. 이건 네가 정성껏 만든 음식이잖아.”민여진은 허탈하게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음식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는 순간 “윽—!”강렬한 매운맛과 쓴맛이 혀를 찌르는 듯했다.너무도 이질적이고, 너무도 불쾌한 맛.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뱉어내려 했지만, 끝내 삼켜야 한다는 걸 깨닫고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이건...”문채연은 눈가를 붉히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여진 씨, 제 요리가 그렇게 형편없나요?”민여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직접 드셔보세요.”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박진성이 거칠게 젓가락을 내던졌다.“민여진, 네 연기도 정도껏 해! 내가 먹어봤는데, 맛있기만 하더구먼.”그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날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123화 내가 말했으면 믿었을까?

    망고가 언제 상자에서 빠져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망고는 민여진의 손끝에 코를 비비며 낑낑거리더니 이내 그녀의 손가락을 핥았다.목이 부어 제대로 말도 할 수 없던 민여진은 그저 망고를 꼭 안고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이 지독한 나날은 언제쯤 끝이 날까?'문득, 개 팔자가 부러워졌다. 망고는 이렇게 낑낑거리기만 해도 누군가 안아주고 다독여주는데, 정작 자신은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힘들어도 누구도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몸을 간신히 가다듬고 욕실을 나서려는 순간,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반응할 틈도 없이 차가운 벽에 등이 밀착됐다. 차디찬 벽면이 닿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연기도 이제 그만하지?”박진성의 얼굴에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짙은 분노가 깔린 목소리가 날카롭게 날아들었다.“오늘은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경고했던 거, 그냥 흘려들었어? 채연이가 해준 음식 좀 먹었다고 야단법석을 떨어? 대체 누구한테 보여주려는 건데?”‘오두방정? 아, 이제는 아픈 것도 없어. 마음이 아파져 올 틈도 없을 만큼 너무 익숙한 일이니까.’민여진은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누구를 불쾌하게 하려던 게 아니야.”쉰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고 입술까지 부어올라 있었다.박진성이 순간적으로 동요했지만,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아까 욕실에서 꽤 열심이더라?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 아니야? 목까지 그렇게 망쳐놓고 또 무슨 핑계를 대려고? 채연이를 걸고넘어질 생각이야?”‘걸고넘어진다고?'민여진의 가슴이 저릿하게 조여들었다. 하지만 그 감각조차도 둔해져 버렸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으니까.“그럴 리 없어.”그녀는 적당한 핑계를 찾아 중얼거렸다.“알레르기야.”“알레르기?”“가지 알레르기.”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거짓말을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박진성은 한 번도 자신을 신경 써준 적이 없었으니까.예상대로 박진성은 반박하지 않았다. 다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124화 손가락만 까딱하면

    물 두어 모금을 삼키고 있는데, 등 뒤에서 느긋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문채연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일부러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여진 씨, 괜찮아요?”민여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충분히 마신 뒤, 잔을 내려놓고 벽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러자 문채연이 뒤에서 목소리를 높였다.“여진 씨, 나 좀 무시하지 말아요. 진성 씨가 없다고 해서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 기분 나쁘게 하면 진성 씨한테 다 말할 거예요.”그 뻔뻔한 협박에 민여진은 손을 꽉 움켜쥐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문채연이 단 한마디만 해도, 박진성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테니까.깊이 숨을 들이마신 민여진은 계단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문채연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죠?”“그런 거 없는데요?”문채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다가오며 말했다.“그냥 어제 그 음식, 입맛에 맞았는지 궁금해서요. 맛있었어요?”어제 입에 넣기만 해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던 그 음식이 떠오르자, 민여진의 위가 울렁였다.그녀는 억지로 속을 다스리며 힘겹게 입을 뗐다.“수고했어요. 채연 씨, 요리하느라 바빴을 텐데, 나까지 신경 써 줘서 감사해요.”“수고랄 것까지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요.”문채연의 미소는 한층 깊어졌다. 그러면서도 눈빛에는 서늘한 살기가 스쳤다.“근데 말이에요... 여진 씨, 고자질까지 할 정도로 간이 컸더라고요? 설마 진성 씨 곁에 있다고 해서 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 건 아니죠? 너무 순진한 거 아니에요?”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내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여진 씨 같은 건 금방이라도 쓸어낼 수 있다는 거, 몰랐어요?”그 순간 민여진의 머릿속에 박진성이 자기 손을 짓밟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리고 그날 밤, 버닝 나이트에서 당했던 굴욕까지...숨이 턱 막혔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눈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요? 그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125화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싶긴 해

    “알았어. 걱정하지 마. 집에서 조용히 있을게.”민여진은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응.”이제 끝난 줄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문채연이 입을 열었다.“진성 씨, 여진 씨 혼자 집에 있으면 너무 무료하겠죠? 우리가 뮤지컬을 보러 가는 동안, 서원 씨한테 여진 씨를 데리고 나가서 겨울옷이라도 사게 하면 어떨까요? 겨울도 다가오는데,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잖아요.”민여진이 고개를 들었다. 문채연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박진성이 혐오스러운 눈길을 던졌다.“들었어? 너한테 그렇게까지 당하고도 채연이는 널 걱정해 준다. 네가 병이라도 나면 안 된다면서.”민여진은 비웃고 싶어졌다.누가 누구를 걱정해? 가식이라면 나도 할 수 있어. 박진성, 네 눈에는 문채연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 안 보이냐고.“같은 여자로서 말이에요.”문채연이 애써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여자가 여자를 힘들게 해선 안 되잖아요. 저는 여진 씨가 착한 사람이라고 믿어요.”박진성이 조소를 흘렸다.“넌 너무 착해서 문제야. 세상에는 원래부터 악랄한 인간들이 있어. 그런 사람은 아무리 설득해도 변하지 않아.”그의 말에는 분명한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문채연은 다정한 듯 그의 팔을 감싸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됐어요.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여진 씨도 겨울옷을 좀 사러 나갔다 오는 게 좋겠어요. 서원 씨가 함께 가면 괜찮겠죠?”“그래.”박진성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차가운 시선을 민여진에게 던졌다.“채연이가 그렇게까지 배려해 줬으니까 나도 허락해. 하지만 옷만 사고 바로 집으로 돌아와. 만약 서원 입에서 엉뚱한 데 갔다 왔다는 소리라도 나오면...”끝까지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그 의미는 너무도 분명했다.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순종하는 모습이었지만, 속으로는 우스웠다.내가 지금 이 꼴인데, 대체 누구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는 걸까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126화 지켜내지 못했어

    “돌아가요. 망고 혼자 집에 있으면 불안해할 거예요.”민여진의 눈에 희미한 애정이 스쳤다.서원은 근처 반려동물 가게에 들러 사료를 샀고 민여진은 만져본 순간부터 손에서 놓지 못하던 작은 애견 옷을 구매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민여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층으로 달려갔다.“망고야, 망고!”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방문을 열었지만, 평소 같았으면 가장 먼저 달려와 반기던 작은 녀석이 이번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민여진의 미소가 점차 희미해졌다.그녀는 문을 활짝 열고 주위를 둘러보며 불렀다.“망고야? 망고?”이상한 기색을 느낀 서원이 따라 올라왔다.“여진 씨, 무슨 일이에요?”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얘졌다.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흔들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망고가 대답을 안 해요. 서원 씨, 혹시 침대 밑이나 어디 숨어 있는지 좀 봐줄 수 있어요?”서원도 방 안을 샅샅이 살폈지만, 망고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여진 씨, 집을 나서기 전에 방문은 닫혀 있었나요?”민여진은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분명했다. 박진성이 그녀를 강제로 내려보낼 때, 문을 열어볼 틈조차 없었다. 이후에는 서원과 함께 외출했으니, 이층에는 단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다.“혹시... 여진 씨가 나올 때 망고가 몰래 따라 나왔던 건 아닐까요?”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는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덧붙였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문이 잠겨 있었으니까 설령 나왔다고 해도 마당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밖으로 나가진 않았을 테니까요.”“나가지 않았을 거야...”그 말을 듣자, 민여진은 간신히 숨을 고를 수 있었다.“마당에서 찾아봐요.”서원이 먼저 앞장서 내려갔고 민여진도 급히 뒤따랐다.서원이 앞마당을 살피는 동안, 그녀는 담장을 따라 뒷마당으로 향했다.그런데 몇 걸음 채 가지도 못한 순간 희미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순간적으로 발이 멈춰 섰다. 아직 짙게 퍼지지는 않았지만, 그 냄새는 분명했다.‘희미하지만 역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127화 엄마가 될 자격

    “왜 나갔지? 왜 굳이 밖으로 나갔어... 내가 계속 별장에 있었으면... 그랬다면...”민여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가 죽어야 해.”그녀의 속삭임에 서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망고를 데려온 건 난데,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여진 씨, 그렇게 말하지 마요! 이건 여진 씨 잘못이 아니에요!”하지만 민여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땅을 짚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를 서원이 막아섰다.“여진 씨, 가지 마요. 제발... 더러워요. 만지지 마세요.”‘더럽다고?’민여진은 서원이 있는 쪽으로 노려봤다.‘더러운 건 나야. 망고가 다른 주인을 만났다면 지금쯤 장난감을 물고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겠지. 그런데 나 같은 인간을 만나서...’“더럽지 않아요... 망고는 절대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고요.”그녀는 손을 뻗어 땅을 더듬었다.그리고 마침내 차가운 털이 손끝에 닿았다.민여진은 흐느끼며 망고를 품에 안았다.“망고...”서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여진 씨...”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망고, 내가 나가기 전에 너한테 인사도 못 했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한테 줄 장난감도 샀는데... 예쁜 옷도 샀어. 언젠가 내 눈이 다시 보이면 네가 입은 모습 직접 보고 싶어... 그러면 안 될까?”박진성은 급히 뮤지컬 공연장을 빠져나왔다.전화 한 통을 받고 도착한 별장의 정원에서 그는 피가 얼어붙는 듯한 광경을 마주했다.붉은 핏자국이 얼룩진 마당, 그 한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민여진과 그녀의 품에 안긴, 사지가 처참히 절단된 작은 개의 사체가 보였다.박진성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그는 개를 싫어했지만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망고가 아니라... 피로 물든 채, 텅 빈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는 민여진의 얼굴이었다.마치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듯한, 살아있는 유령 같은 표정이었다.그 모습에 박진성은 숨이 턱 막혔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128화 원죄

    박진성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서원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박 대표님... 여진 씨가 지금 너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자극하면 안 됩니다.”하지만 박진성의 얼굴은 이미 어둡게 굳어 있었다.해가 점점 저물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대로 죽은 개를 품고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설마 밤새도록 저러고 있을 셈인가?’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민여진, 손 놔.”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박진성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내가 사람을 불러서 제대로 장례 치르게 할 거야. 너까지 이러고 있으면 저 개는 죽어서도 편히 가지 못해.”그러나 민여진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더욱더 망고를 품에 끌어안았다.놓을 수 없었다. 한때, 아이를 잃었을 때조차 마지막으로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그때처럼, 이번에도... 망고만큼은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지켜줘야 해. 이렇게 추운 날, 차가운 땅바닥에 내버려둘 수 없어... 망고가 너무 외로워할 거야...’“민여진!”박진성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혀졌다.점점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 아래, 그녀의 몸에 밴 피 냄새가 더 강하게 퍼지고 있었다.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손 놓으라고 했어! 안 들려?”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안 놔? 그럼 방현수를 부를 수밖에 없겠군.”그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그녀는 이를 악물었다.‘또 협박이야...’“어서 놓으라고!”박진성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명령했다.서원이 상황이 더 악화하기 전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여진 씨, 놔주세요. 제가 망고를 잘 보내줄게요.”“망고...”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민여진은 기이하게 웃고 싶어졌다.‘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건... 오직 행복하고 평온하길 바랐기 때문인데. 결국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았네.’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손을 풀고, 망고를 품에서 내려놓았다.그러고는

Latest chapter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366화 전 여자 친구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365화 그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364화 임재윤이 화를 내다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363화 누가 알려줬어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362화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다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361화 약혼 취소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360화 그는 단 걸 싫어해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359화 CCTV 확인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358화 너를 좋아하니까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