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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임신했으면 낳아

작가: 연의 수정
박진성이 결정권자라면 그에게 진심으로 부탁하면 될 일이지만 민여진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임신 여부도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자신이 마치 도구가 돼버린 것 같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깬 박진성은 잠들기 전보다 더 아파진 머리와 전혀 내리지 않는 열어 몸이 더 무거워진 것만 같았다.

머리가 깨지는 고통에 힘겹게 눈을 떠보니 비어있는 옆자리에 심장이 내려앉았던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소파에 앉아있는 민여진을 발견하고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소파에 멍하니 앉아 창밖을 주시하고 있는 그녀를 보니 작고 왜소한 체구가 한눈에 들어와 민여진이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에 마음이 약해진 박진성은 수술실에서 갓 나온 사람한테 자신이 너무 충동적으로 굴었다는 걸 인지하고는 협탁에 놓인 자신의 외투를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

“안 추워? 나랑 같이 자기 싫으면 담요라고 덮지 그랬어?”

만져보니 더 얼음장 같은 손에 박진성의 미간이 자동으로 찌푸려졌고 머리도 더 아파왔다.

그런데 그때, 민여진이 놓으려던 박진성의 손을 갑자기 꽉 잡아 왔다.

“서원 씨한테 피임약 사달라고 하면 안 돼?”

잠시 느려졌던 심장박동이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고 가슴에 잠시 자리했던 따스함과 설렘, 기쁨이라는 감정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차디찬 실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높은 곳까지 날아올랐다가 한순간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박진성은 화를 참으며 물었다.

“이 말 하려고 아까부터 여기 앉아서 나 깨기만을 기다린 거야?”

박진성의 손가락 하나를 잡고 고개를 들어 올린 민여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원 씨한테 말 한마디만 해줘. 제발 부탁이야. 조금만 더 늦으면 진짜 안 된단 말이야.”

“잘됐네 그럼.”

민여진의 손을 뿌리친 박진성은 어두운 얼굴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피임약 몸에도 안 좋잖아. 임신 안 되면 마는 거지만 임신 된다면 그냥 낳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이를 낳으라는 저 말이 박진성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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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가운 표정을 지은 최희진이 막 경비를 부르려던 그때, 진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이번 일은 민여진 씨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요? 아무리 박 대표님 와이프라고 해도 이렇게 마음대로 남의 집안일에 개입하시는 건 아니지 않나요? 어떤 의문점이 있든, 저희가 알아서 잘 처리할 겁니다.”“박 대표 와이프? 박진성 말하는 거야?”“어쩐지 진 대표님을 상대로 겁 없이 군다, 했어. 박 대표님 와이프라면 그럴 수도 있지.”박진성의 아내라는 말에 최희진은 다시 옅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여유롭게 소매의 주름을 툭툭 털던 박진성이 무심한 말투로 민여진을 혼내듯 말했다.“여진아, 그만.”혼냈다고 표현했지만 박진성의 말투는 오히려 민여진을 달래고 있는 것 같았다.만약 진시호의 생각처럼 박진성이 민여진을 진심으로 아끼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 민여진을 내쫓아 버렸을 것이다. 이처럼 가벼운 한마디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민여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소란 일으키려는고 이러는 거 아냐. 다른 사람 일이라면 몰라도 시우 씨는 조금 전 날 불구덩이 속에서 구해주신 분이셔. 그래서 이렇게 모함당하고 있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어서 그래.”“그래?”박진성이 고개를 들었다.“진시우가 네 은인이라고?”“응.”민여진이 진시호를 쳐다보며 말했다.“진 대표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진시호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시우가 여진 씨를 도와주긴 했죠. 하지만 두 분은 오늘 처음 본 사이잖아요. 시우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시우가 모함당한 거라고 확신하시는 거죠?”민여진이 웃으며 대답했다.“그거야 당연히 사진이 가짜인 게 너무 티가 나니까요.”그 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여자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당신이 누구 와이프든 난 신경 안 써요. 당신이 뭔데 사진을 가짜라고 하는 거예요? 못 믿겠으면 사진이 가짜인지 아닌지 한 번 검증해 봐요. 합성한 거 아니고, 진짜 사진이 맞다니까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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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우의 말에 심장을 부여잡은 진태훈이 입을 열었다.“너, 너 이 자식! 지금 내 말을 거스르겠다는 거니? 네 멋대로 굴 거면 당장 우리 집안에서 나가! 우리 집안엔 너 같은 자식은 필요 없으니까.”진시우가 대답했다.“저 여자분과 전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책임지는 일도, 결혼하는 일도 없을 거예요.”진시호가 실소를 터뜨렸다.“시우야, 증거가 이렇게 버젓이 눈앞에 있잖아. 이제 와서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소용없어. 남자가 본인이 한 일에 책임은 져야지. 남들이 우리 집안을 얼마나 웃겠어.”진시호를 빤히 쳐다보던 진시우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다른 사람들은 그렇다고 쳐도, 형도 모른다고 발뺌할 거예요? 어쩌다 저런 사진이 찍혔는지 형은 알잖아요. 형이 부른 자리였고 형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설마 제가 형이 보는 앞에서 저 여자와 그런 짓을 하기라도 했다는 거예요?”진시호가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시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어. 네 편을 들어달라는 거지? 하지만 내가 지금 여기서 네 편을 들면, 저 여성분께는 너무 불공평해.“우리가 저 사진 속 공간에 함께 있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어. 저분이 언제 왔는지, 또 너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니.”“어릴 때부터 엄마도 없이 자라면서 형인 내 말도 듣지 않았지만 이젠 어른이 되었으니 책임감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최희진이 차가운 말투로 말을 보탰다.“아직도 모른 척할 생각이니?”‘엄마도 없이 자라면서...’남이라고 할 수 있는 민여진이 듣기에도 거북한 한마디였다.진태훈이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됐어, 그만해. 이 일을 얼마나 더 시끄럽게 만들 생각이야. 적당히 해. 그리고 아가씨도 걱정하지 마요. 우리 집안에서 어떻게든 아가씨 책임질 테니까.”“아버지...”“그만!”진태훈이 진시우에게 언성을 높였다.“조용히 해.”진시호가 웃는 얼굴로 자리에 있던 손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소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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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성이 미간을 찌푸렸다.“화장 고쳤네.”민여진이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화장이 번져서 수정 좀 했어.”“너 가방도 안 가져갔잖아.”박진성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화장품은 어디서 난 거야.”“빌렸어.”“누구한테.”어쩐지 느껴지는 이상한 낌새에 박진성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민여진을 추궁했다. 손을 뻗은 박진성이 엄지로 민여진의 왼쪽 얼굴을 문질렀다.그 순간, 찌릿한 통증에 민여진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흠칫, 손을 뗀 박진성이 화가 난 말투로 물었다.“너 다쳤어?”“응.”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다는 걸 느낀 민여진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다쳤는데 왜 나한테 얘기를 안 해?”박진성이 화를 감추지 못했다.“누가 그랬어? 누가 한 짓이냐고.”온몸으로 뿜어내는 한기에 멈칫하던 민여진이 생각했다.‘이건 그냥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화나 난 것뿐이야.’와이프가 파티장에서 얼굴을 다쳤으니 화가 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체면이 깎기는 건 박진성이기 때문이었다.고개를 숙인 민여진이 대답했다.“그런 거 아냐. 내가 실수로 부딪혀서 다친 거야. 걷다가 모서리에 부딪혔어.”“거짓말.”단호한 박진성의 말에 민여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바로 그때, 파티장에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드디어 시작이네.’파티장 한가운데는 심나연과 진시호가 손을 잡고 케이크를 자르고 있었고 진시우와 그의 또 다른 형은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그때, 어디선가 여자 한 명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파티장으로 뛰어들었다.“시우 씨,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날 이렇게 무시하는 거야? 나와 결혼할 거라고 했잖아. 난 그 말만 믿고 시우 씨에게 모든 걸 줬어. 이젠 임신까지 했는데 왜 내 연락처도 지우고 다른 곳으로 도망까지 간 거냐고.”“책임지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그래서 우리 아이도 버릴 거야?”여자의 말에 파티장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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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여진은 멈칫했지만 진시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오늘 처음 뵀어요.”진시호가 장난 섞인 말투로 말했다.“처음 보는 분을 왜 이렇게까지 감싸주는 거야? 여자친구처럼 감싸던데, 너 설마 여진 씨 좋아해?”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심나연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며 진시우를 빤히 쳐다보았다.진시우가 태연하게 인정했다.“여진 씨가 제 스타일이긴 하죠. 하지만 그보다 전 이 대표님 같은 분을 혐오하거든요. 술김이라는 핑계로, 신분을 이용해 그런 짓을 하는 건 그저 짐승에 불과하잖아요.”진시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민여진은 공기 중의 피 튀기는 불꽃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무거운 침묵이 흐르던 그때, 이호현이 반성문을 가지고 돌아왔다. 반성문을 받은 하빈이 이호현을 돌려보냈다.심나연이 입을 열었다.“시호 씨, 도련님. 잠깐 나가 계세요. 민여진 씨 얼굴에 상처가 있어서 가려드려야 해요.”진시우와 진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심나연이 가방을 뒤적여 컨실러를 꺼내 조심스레 민여진의 얼굴에 화장을 덧댔다.이호현이 때린 따귀에 민여진은 아직도 얼굴이 얼얼했다. 심나연이 얼굴을 만지자 따끔거리는 통증에 민여진이 숨을 들이켰다.그에 바짝 긴장한 심나연이 물었다.“아프죠? 죄송해요. 더 살살 할게요.”“괜찮아요.”민여진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어차피 아무 짓도 못 했어요.”멍하니 민여진을 쳐다보던 심나연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시우가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 봤어요. 항상 차분하고 이성적이던 사람이었어요. 폭력은 고사하고 욕도 못 했었는데... 하지만 이 대표님 얼굴을 보니... 제가 아는 시우가 아닌 것 같아요.”말할수록 생기를 잃어가는 심나연의 눈을 보며 민여진이 물었다.“나연 씨. 무슨 생각 하세요?”민여진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심나연이 피곤함에 찌든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녜요...”심나연이 말을 하지 않으니 민여진도 더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 역시 심나연의 말에 동의했다.오늘 진시우의 모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583화 여진 씨와 아는 사이야

    “넘어가요?”그 말을 들은 민여진은 가슴이 찌릿하게 화가 치밀었다.만약 진시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진시호는 간단한 한마디로 이 모든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진 대표님, 이건 불공평한 거 아닌가요? 이게 만약 간단한 사과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면 경찰이 왜 필요하겠어요?”인상을 찌푸린 진시호가 입을 열었다.“그럼 민여진 씨 말씀은... 이대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건가요?”“네. 전 신고할 겁니다.”멈칫하던 이호현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이 X가! 어지간히 해.”진시호 역시 민여진의 말에 불쾌함을 드러냈다.“민여진 씨, 일어나지 않은 일은 두 눈 딱 감고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해요. 오늘 이 파티는 나연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주최한 거예요. 오늘 같은 날, 민여진 씨가 파티장에서 이런 일로 주객을 전도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면 서로에게 좋을 게 없을 것 같은데요.”진시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이쯤에서 그만두시죠.”그 말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히는 진시호의 모습에 화를 내던 민여진도 점차 냉정을 되찾았다.결국 진시호가 이토록 민여진을 무시하는 건 그녀가 박진성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진시우마저도 나서지 못하는 이 상황에 민여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만약 진시호에게 미운털이 박힌다면 오늘 이 일을 수습하기 어려워지는 쪽은 오히려 민여진이었다.‘하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수는 없어.’주먹을 꽉 움켜쥔 민여진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그...”“형.”하지만 진시우가 갑자기 민여진의 말을 자르며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번 일은 이렇게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요.”“그래? 그럼 넌 어떻게 처리하고 싶은데?”진시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냉기 서린 충고를 건넸다.“시우야. 잊지 마. 네가 이 대표님을 폭행한 건 아직 시작도 안 했어.”진시우가 말했다.“진씨 가문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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